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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수필

벚꽃이 지던 자리에서

작성자고영종|작성시간26.06.11|조회수25 목록 댓글 0

벚꽃이 지던 자리에서

  고영종

  지난 주말 절정을 이루었던 벚꽃이 내년 봄을 기약하며 서둘러 꽃잎을 떨구고 있다. 벚꽃 구경을 가자는 아내의 성화에 못 이기는 척 외출복으로 갈아입었다. 모처럼 꽃단장을 한 아내와 함께 나서는 길에 마음도 덩달아 들떴다. 꽃축제가 열리는 녹산로를 달린다. 길 양옆으로 연분홍 벚꽃과 노란 유채꽃이 어우러져 상춘객을 맞이하고 있다.

  잠시 차에서 내려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바람 따라 흩날리던 꽃잎들이 작은 화면 안에 고스란히 머물러 있었다. 그 순간, 문득 한 아이가 떠올랐다. 흩날리는 벚꽃처럼 여리고 맑던 소녀, H였다.

 

  H야. 어느새 교정에 벚꽃이 지고 있구나. 너의 슬프고 딱한 소식을 접한 것은 유난히도 추웠던 이월 어느 날이었다. 몹시 초췌한 중년 남자가 학교를 방문해 나를 찾아왔었다. 딸아이가 우리 학교로 배정되었는데 지금 병원에 입원 중이어서 입학식에 참석하지 못할 수도 있다고 하더구나. 임파구성 백혈병 이랬다.

  입학식 날 혹시나 하며 너를 기다렸다. 얼굴이라도 꼭 한번 보고 싶더구나. 그런데 그날 나에게 찾아온 것은 환한 네 모습이 아니었다. 백혈병과 처절하게 싸우며 Y대 부속병원에 입원 중이라는 소식이었어. 네 얼굴을 본 적이 없어 병마와 싸우고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보았단다. 야위었겠지만 눈은 초롱초롱하고 갸름한 예쁜 얼굴이겠지. 안타까운 마음에 당장 달려가서, 옆에서 기도하며 병이 완쾌되어 가는 걸 지켜보고 싶더구나. 그러나 다른 학생들도 가르쳐야 하기에 어쩔 수 없이 마음을 접어둘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삼월이 가고 벚꽃이 눈부신 자태를 자랑하던 사월 초순 어느 날이었다. 네가 엄마랑 같이 내 앞에 나타났었지. 항암 치료 때문에 머리카락이 모두 빠져 버려 큰 모자를 눌러쓰고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모습을 보는 순간, 참기 어려운 고통을 당하면서도 꿋꿋이 견뎌온 모습이 아른거려 눈물이 핑 돌더구나.

  일 년 동안 학업을 유예하고 치료에 전념하여 완쾌되면 내년에 재입학 하겠다고 했었지. 교문을 나서는 너의 뒷모습을 보면서 아무런 힘도 되어 주지 못해 안타까웠다.

  H야! 힘을 내렴. 소중한 딸을 잃지 않기 위해 병원비를 마련하느라, 밤잠 못 자며 여기저기 뛰어다니는 부모님께 희망을 드리자. 반 친구들도 네 사정을 잘 알게 되어 정성을 모으기 시작했다. 모금한 돈이 며칠 입원비에도 못 미치지만, 네가 낫기를 바라는 마음들이 모인 것이다. 학교 학생회에서도 모금 운동에 참여했고, 청소년적십자에서도 정기적으로 수혈해야 하는 사정을 알고 헌혈 증서 모으기 운동에 나서고 있다.

  네 소식이 알려지면서 지역사회에서도 도움의 손길이 학교로 전달되고 있다. 큰 시련을 겪고 있는 네게 우리가 사는 세상이 삭막하고 냉정하지 않다는걸, 아직은 가슴이 따뜻한 사람이 많다는 걸 보여 준 것이라 생각한다. 그 선한 영향력으로 네가 꼭 완쾌되리라 믿는다.

  교실 창밖에 흩날리는 꽃잎을 보며 네 생각을 하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른다. 네게 꼭 필요한 한 방울의 피보다 부질없겠지만, 네가 완쾌되길 바라는 마음이 흘러나오는 것이다. 내년 봄엔 단단한 목피를 뚫고 새순을 내는 벚나무의 생명력처럼, 건강을 회복하고 환하게 웃으며 교문을 들어서는 걸 보고 싶다. H야, 내년 교정에 벚꽃이 필 때쯤엔 친구들과 함께 운동장을 힘껏 달려보자. 끝까지 힘을 내렴.

 

  H에게 편지를 쓰고 난 다음 해, 나는 다른 학교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함께 근무했던 교사를 통해 H의 소식을 들었다. 백혈병이 완전히 낫지는 않았지만 정기적으로 외래 진료를 받으며 학교에 다니고 있다고 했다. 그 소식만으로도 마음이 놓였다.

  무성하던 잎은 때가 되면 낙엽이 되어 하나둘 떠나가고, 앙상한 가지는 혹독한 추위를 견디며 겨울을 버텨낸다. 봄이 오면 벚나무는 어김없이 새순을 틔운다. 그 새순은 이내 꽃망울을 맺고 연분홍 꽃으로 피어난다. 해마다 되풀이되는 이 풍경을 바라보고 있으면, 자연은 스스로 사라짐과 피어남을 반복하며 제 자리를 지켜 간다는 생각이 든다. 지는 꽃은 끝이 아니라 다음 봄을 위한 숨 고르기이고, 겨울은 생명을 멈추는 시간이 아니라 다시 피어나기 위한 준비의 시간인 것이다.

  우리의 삶도 그러하지 않을까. 매년 어김없이 돌아와 새순을 돋우고 꽃을 피워 내는 봄처럼, H에게도 그런 회복의 봄날이 찾아왔기를 바란다.

  짠한 생각을 떨쳐내려 주위를 둘러보니, 봄나들이객들은 낙화하는 꽃비를 맞으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다. 나는 한 발짝 떨어져 서서 흩날리는 꽃잎을 바라본다. H는 지금 어디에서 어떤 봄을 지나고 있을까. 나는 한참 동안 그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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