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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수필

시간의 마술

작성자고영종|작성시간26.06.20|조회수24 목록 댓글 0

시간의 마술

고영종

  택시를 탔더니 운전기사 머리가 반백이다. 나이가 들어도 건강하게 일하는 모습이 좋아 보여 연세를 여쭈었더니 8학년 1반이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요즘은 젊을 때보다 시간이 빨리 가요. 칠십 대 때는 시속 70km로 달리더니만, 요즘은 80㎞로 내뺍니다.”

  일정하게 흐르는 시간도 나이에 따라 다르게 느껴지는가 보다. 구체적인 수치로 예를 드니 현실감이 들었다. 시간의 흐름은 절대적일까. 상대적일까. 상대성이론에 따르면 시간과 공간이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처럼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관찰자의 상대적인 위치와 속도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즐거운 순간은 빠르게 지나간다고 느끼고, 지루한 시간은 느리게 흘러간다고 느끼듯, 우리의 시간 개념은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동료 선생님 한 분이 세월이 가는 것을 비유해서 한 말이 떠올랐다. 나와 연갑내기인 그가 정년 퇴임을 앞두고 있을 때이다. “젊었을 때는 인생길을 걸어서 가는 것 같더니, 나이가 들면서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이제는 자동차를 타고 가는 것 같아요.” 언덕을 천천히 걸어서 올라갔다가 이제는 자동차를 타고 내리막을 달리는 느낌이 드는 것을 보면 공감이 되는 말이었다.

  그분은 무슨 비밀이나 털어놓을 듯이 말을 이어 나갔다. “80㎞로 달려 가는 세월을 따라갈 수가 없어서 40㎞ 정도로 늦춰 살고 있어요.” 무슨 말씀이냐고 물었더니 “흐르는 세월을 한탄만 하지 말고 가끔은 멈춰서 되돌아보며 살아 보세요. 나도 사십 대라 생각하고 부지런히 재미있게 살다 보니 인생이 두 배로 늘어나는 느낌이 들거든요.”라며 호탕하게 껄껄 웃었다. 젊었을 때 하지 못한 일들을 찾아서 지금이라도 열심히 하면 후회 없는 인생이 된다는 뜻이었다.

  순간, 귀가 번쩍했다. 세월의 빠르기를 한탄할 게 아니라 몇 배로 더 가치 있게 열심히 살면, 인생의 길이도 늘어난다는 발상이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셨어요.”

  “어느 날 신호등 앞에서 문득 깨달았어요.”

  인생도 마찬가지여서 목적지에 빨리 가려고 하면 사고를 내기 십상이다. 세월의 속도보다 더 늦춰서 사는 지혜가 필요할 것이다. 주어진 시간 속에서 몇 배로 열심히 살다 보면 인생의 종착역에 가서는 남들 보다 더 긴 인생을 살아온 셈이 될까. 기사님은 핸들을 잡고 가다가 신호등 앞에서 터득했고, 나는 그분의 이야기를 듣고 알아차렸으니, 나야말로 오늘 귀인을 만난 것이다.

  피뢰침을 발명한 미국의 과학자 프랭클린이 청년 시절 서점에서 일할 때 한 손님이 2달러짜리 책을 고른 다음, 값을 내려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프랭클린은 값을 할인해 주기는커녕 오히려 2달러 50센트를 내야 한다고 했다. “값을 깎아 달라고 했는데, 왜 값을 더 올리느냐?”라고 손님이 흥정하려 하자, “이제는 3달러를 주셔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손님은 화가 나서 “아니, 갈수록 올라가는 책값도 있습니까?”라고 따졌고, 이에 프랭클린은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렇습니다. 손님 때문에 시간을 낭비하였으니, 그 시간 값을 내셔야 합니다. 돈보다 시간이 귀하기 때문에 시간을 끌수록 책값을 더 받아야 합니다.” 모두에게 공정하게 주어지는 시간도 상황에 따라 상대적인 가치가 부여될 수 있다는 상상력이 흥미롭다. 요즘 세상 같으면 판매원의 태도를 문제 삼아 온라인에 불만 후기를 올리거나 벌점 테러를 가해서 서점이 문을 닫았을 지경이 되었을 것이다.

  “젊은 양반, 한 번 사는 인생 직선으로 가면 짧지만, 구불구불 가면 더 길어지는 법이라오. 운전하며 빠르게 달릴 때는 보이지 않던 멋있는 풍경과 사람 사는 모습들이, 신호등 앞에서 멈춰 서거나 굽이진 골목길을 천천히 달릴 때는 눈에 들어옵디다.”

  내 나이도 육십 중반이라 인생의 후반전을 살고 있는데 나를 젊은 양반이라고 부른다. 그분은 육십 대도 젊은이로 느끼나 보다. 어렵고 힘든 일이 닥치면 멈추기도 하고 구불구불 돌아가도 우리 인생은 어차피 택시처럼 목적지에 도착한다고 했다.

  건강을 잃으면 모두 잃게 되니 건강도 잘 돌보면서 함께 가야 한다는 말을 덧붙인다. 건강을 위해 매일 오름이나 수목원을 산책하고, 자전거 대회에도 나가 상도 받았다고 하셨다. 매년 명절 때가 되면 후배 기사들과 김치를 담가 양로원에 기부도 하고, 엊그제는 장애 아동 돕기 행사에 도우미로 참여했다고 자랑한다. “그렇게 살다 보니 질주하던 세월이 주춤거리면서, 요새는 빨리 가지 말라고 서두르는 내 정강이를 걷어차더라고.” 라며 사람 좋게 웃었다. 현자賢者의 명언을 들은 것 같았다. 자신의 일생을 길지만 짧으며, 충분하지만 모자란 여행이라고 한 어느 시인의 말이 생각나는 순간이다.

  목적지에 내리면서 인생을 몇 배로 늘려 살겠다고 다짐했다. 좋은 말을 듣게 되어 고마운 마음에, 거스름은 놔두시라며 택시 요금을 드렸는데, 한 푼의 돈도 소중히 여기라며 실랑이 끝에 거슬러 주셨다. 말로만 아니라 행동으로도 본받고 싶은 삶을 사는 분이 틀림없다.

  세월은 일정한 속도로 흘러가지만, 인생의 길이는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깨달음으로 뿌듯함이 밀려오는 오후다.(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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