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프집 윤슬
고영종
무수한 순간이라는 조각이 연속적으로 쌓여 시간이 된다. 내 모든 삶의 순간들은 내가 살아온 시간의 조각들이다. 오래된 습작 노트에서 ‘윤슬’이라는 자작 시를 꺼내 읽어보다가 지나온 내 삶의 조각 하나가 아스라이 떠올라 회상에 잠겨본다.
누군가/ 빛나는 보석이라 했다/ 또 누군가는/ 소소하게 스쳐 가는 짧은 시간이라고 했다/ 바다를 뛰노는 물고기 비늘이라고 노래한 이도 있다/ 달빛에 비친 물빛 그림자라는 샴푸 광고도 떠오른다/ 나에게는/ 소중한 만남이 이루어지는 반짝이는 순간이다
까마득히 오래전 일이다. 서귀포 지역에서 중등 교사로 재직할 때, 서귀포가 고향인 친구가 호프집을 곧 개업한다고 연락이 왔다. 가게 이름을 지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와 나는 고등학교 때부터 서로 부족한 공부를 도와주며 힘든 일이 생기면 속마음을 터놓고 위로를 주고받던 사이였다. 서로 의지할 수 있는 마음 든든한 존재였다.
이름 짓기가 그리 쉬운 일인가. 하지만 나와 절친한 그였기에 좋은 가게 이름을 지어 도와주고 싶었다. 우리말 이름을 원한다고 해서 국어사전을 펼쳐 놓고 좋은 단어를 찾는 데 집중했다. 성명학에 능통한 작명가도 아니면서 이상하게 마음이 끌려 며칠 동안 몰두했다. 다솜, 온새미로, 해거름, 달보드레 등 예쁜 우리말 단어 몇 개를 후보로 메모해 놓았다. 걱정스러운 것은 영업이 잘되면 문제가 없겠는데, 잘되지 않았을 때 이름 탓으로 원성을 살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다 어느 순간 갑자기 윤슬이란 우리말이 떠올랐다. 옳거니, 무릎을 쳤다. 내 습작시의 제목, 달빛이나 햇살에 비치어 반짝이는 잔물결이라는 뜻을 가진 매력적인 단어∙∙∙.
호프집 상호로 윤슬을 우선순위로 추천했다. 소중한 만남이 이루어지는 반짝이는 순간을 제공하는 장소라는 나름의 뜻을 담았다. 뜻풀이를 들은 그도 마음에 쏙 든다며 호프집 간판으로 <윤슬>을 세상에 알렸다.
가게는 열자마자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참 다행스러웠다. 가게 이름을 추천한 나도 덩달아 흐뭇했다. 구름 떼처럼 몰려드는 손님 덕에 큰 목돈을 모으더니 그는 더 큰 사업을 하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어느 날 호프집을 접고는 말릴 틈도 없이 제주시 번화가에 규모가 제법 큰 유흥 주점을 개업 한다며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나를 보자마자 주점에 어울리는 간판 이름을 지어 달라고 했다.
“지난번에 네가 호프집 이름을 지어줘서 잘 되었잖아.”
“그냥 윤슬로 하지.”
“유흥주점 간판으로는 좀 그래, 외국어로 된 멋진 간판을 달아보려고.”
그동안 장사도 잘되었으면서 내가 추천한 가게 이름을 바꾸고 싶어 했다. 섭섭한 마음에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한동안 침묵이 흐른 후 어색한 분위기를 깨고 말을 건넸다.
“너도 알다시피 나는 수학 교사잖아. 영어 간판 이름은 자신 없어. 특히 유흥 주점과 거리가 먼 나로서는 뭐라 할 말이 없네.”
며칠 후 <하룻밤의 스캔들>이라는 상호로 개업했다는 소식을 지인에게서 전해 들었다. 하지만, 유흥에 별 관심이 없기도 했고 그의 얼굴 보기도 서먹하여 그곳에 들른 적이 없었다. 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 일 년 만에 폐업했다는 안타까운 소식만 들려왔다.
그 일이 있고 난 후 연락이 뜸해지더니 소원한 사이가 되고 말았다. 어쩌다 마주치게 되면 어색하게 웃는 얼굴로 인사는 하고 지내지만, 가슴 한구석에 생채기처럼 남은 불편한 마음을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때 가게 이름을 지어줬으면 어땠을까. 돌아보면 후회스러운 내 삶의 한 조각이다. 그 친구와 소중한 관계가 맺어졌던 반짝이는 순간으로 돌아가고 싶지만 지나가 버린 시간을 되돌릴 방법이 없다.
사람의 욕구는 기회를 맞기도 하지만 위기를 부르기도 한다. 과한 욕심 부리지 말고 차근차근 사업을 확장해 나갔다면 어땠을까. 인생을 길게 보면 누구나 오르막과 내리막이 있는 법, ‘흥망성쇠와 부귀 빈천이 물레바퀴 돌 듯한다.’는 속담처럼 그도 다시 한번 일어섰으면 좋겠다.
이따금 그 친구가 보고 싶다. 호프집 상호가 자꾸 떠올라 친구에게 전화라도 걸어 봐야겠다. 만나서 소주 한잔하며 가슴속에 담아 두었던 회포를 풀어야겠다. 윤슬처럼 반짝이는 우정을 회복할 수만 있다면 더 바랄 것도 없다. 내 앞에 남아있는 시간은 사람과의 관계나 사물과의 관계에서 상대를 더욱 빛나게 하는 순간들로 채울 수 있다면 더없이 좋겠다.
요즘 들어, 스치는 한순간도 의미 있게 보내야지 하는 마음의 강박증이 생겨버렸다. 하지만 마음과 다르게 무의미한 시간이 자꾸 쌓여 간다. 되돌아보며 후회스럽다고 흘러온 시간의 한 조각을 떼어 내서 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윤슬의 의미를 다시 되새겨본다. 풀한포기, 지저귀는 새, 바람소리, 밤하늘의 별빛 등 무수한 만남들이 어찌 소중하지 않으랴. 매 순간의 만남을 소중히 여기면서 영롱하게 빛나는 삶을 살아가고 싶다.(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