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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사(宗事)자료

성재 허전(性齋 許傳)선생의 고성방문

작성자허현|작성시간12.05.11|조회수74 목록 댓글 5

 

1864년 3월 김해부사로 부임한 허전(許傳 1797~1886 性齋)선생은 당시 68세로서 유학진흥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는데 부임하던 해에 지역의 유생들을 모아 향교에서 향음주례(鄕飮酒禮)를 시행하고 김해향교 유생들에게 회유문을 내려 옛 법도를 회복하는데 힘쓰도록 했다.

1866년 2월에는 신산서원(新山書院)의 원장이 되어 남명선생이 학문을 수양했던 산해정을 찾아 문도들과 강학했다. 또 4월에는 한가한 틈을 타서 경상도내 여러 사당과 서원을 방문했는데 이르는곳 마다 50~60명의 문도들이 모이는등 성황을 이루었다. 5월에는 70여명의 문도들과 함께 함안의 합강정(合江亭)을 유람했다.

경상도내 선비들과 백성들은 성재의 유임을 바랐건만,임기를 채우자 (김해부사 재임 1864.3 - 1866.7) 곧바로 부호군(副護軍)에 임명되어 한양으로 갔고 병조·형조·이조의 참판(參判)을 거쳐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형조 판서·동지성균관사(同知成均館事)·지경연사(知經筵事)·제학(提學)을 역임,이조 판서에 이르렀고 90세에 별세했다.

公은 김해를 떠난후 1878년 대호군의 직책으로 가락국 수로왕릉에 전호(殿號)를 내리고 능관(陵官)을 둘것을 상소했고 조정에서 이를 받아들여 침전(寢殿)을 개축하여 숭선전(崇善殿)이라 사액하고 능참봉(陵參奉)을 두어 김씨,허씨들이 번갈아 맡게했다.

한편,성재선생은 1864년 김해부사 부임후 방조인 미수선생을 모신 의령의 미연서원을 방문하고 당시 15살이던 소와(허찬)를 격려하였다. 그 해 동짓달에 고성(송정)일가를 방문하여 남긴 시(詩)가 현재 송양재의 주련(柱聯)에 새겨져 있다. 

성재의 고성방문시 인재를 봐 두었다가 후일 성호공(許馹)을 김해의 능관으로 추천한것으로 보인다. 성호공의 아드님인 허용(許瑢 1851~1894 曉峰),당질인 허진(許瑨 1847~1913 恒齋)선조 두 분등은 성재의 문하(門下)였다.

성재선생이 한양으로 돌아간후 김해의 전호(殿號)와 숭선전 참봉제도가 시행됐지만 그 이전인 1866년 3월 성호공(당시 58세)은 納陵齋郞(納陵參奉)이라는 수로왕릉을 수호관리하는 직에 도임하였다. 

허일(許馹 1809~1878 醒壺)선조는 시조 25世로서 아버지는 휘榲이다. 성호공은 어려서부터 책읽기를 좋아하였으며 글을 배우면 대의(大義)를 이해하였다. 장성하자 사서(四書)와 심경(心經),근사록(近思錄),예경(禮經)등의 책을 가지고 오로지 연구하여 생각을 다하였으며 부지런히 실천하였다.

성재공의 제자 노상직(盧相稷)선생은 그의 문집 《小訥先生文集》 〈性齋先生年譜〉편에서 丙寅(1866)년 성재가 영남일대의 여러 祠院들을 방문,강론한 것으로 되어 있다.

 

丙寅 先生七十歲 元朝書示掾廳我有一段公心神可質也爾無半點私意天誰欺乎作文申 諭一邑士庶人略曰誠願我士庶人專心正道一意本業毋惰四肢毋失天時毋遺地利毋侮老成毋弱孤獨毋摴蒱賭博毋好勇鬪狠毋爭訟非理毋酗于酒毋黷于貨一違於此家之悖子國之亂民豈不爲名敎之大憝常憲之罔赦也哉二月與諸生講學于山海亭時先生爲新山院長亭在院傍南冥先生藏修之所也 四月遍謁道內諸祠院所到必與諸生講學從遊者輒五六十人從子運亦從之◑過慶州訪李定軒鍾祥星州訪鄭進庵墧俱與之講論遊合江亭有龍華同舟錄亭在咸安龍華山下趙澗松任道所築寒岡旅軒兩先生舟遊之所也上降璽書褒諭賜表裏一襲璽書略曰自爾莅府士有得師之譽今見考課民切願借之誠蜀郡之文翁穎川之寇恂爾惟其人三政對策知有所蘊蓄百里爲治亦可以展布覈治邪學之徒府有柳寶鑑者浸染邪術以至見捉不肯自服惟願就死升天堂先生乃以彝倫之常聖賢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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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허현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2.05.21 위 글은 필자가 조사한 중간결과 이므로 현재의 관련기록과 다를수 있읍니다. 완전한 조사후 update 예정입니다.
    인명자료 일부는 신종우 인명사전(황하문화원 www.shinjongwoo.co.kr) 참조
  • 작성자허창무 | 작성시간 12.05.11 여기에 올린 근거자료를 밝혀 주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일반적으로 성재공이 김해도호부사로 재임시 송정을 방문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서울에 근무할 때 문상차 송정에 오셨다면 이는 정확히 밝혀야 하기 때문이다. 김해 <가락국숭선전지>에 성호공(허일)의 이름을 본적이 있다. 납능참봉으로 봉직한 연대를 파악하기가 그렇게 어렵지 않을 것 같다.
  • 작성자허현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5.11.20 숭선전 참봉제도가 시행된 해는 1878년이지만 성호공은 그 이전 성재공이 김해부사로 있던 1866년에 納陵齋郞 (納陵참봉)이라는 수로왕릉을 수호관리하는 직에 계셨음.
  • 작성자허창무 | 작성시간 12.05.14 <경상우도 성재 허전의 학단을 중심으로>(경상대 남명학연구소, 2011.4.29) 강동욱의 <성재 허전의 강우지역 문인 고찰>이라는 연구논문 22-23쪽 상단에 허성락대부가 성재선생의 연보를 메모해 둔 기록이 있어 여기에 추기하니 고정 참고하시게. 문과급제 : 1835(39세), 김해부사 재임기간 : 1864.3-1867.7(3년4개월), 공여당 개강 : 1865, 산해정에서 강학 : 1866.2, 부호군으로 임명받고 서울 임지로 떠남 : 1867.7, 형조판서 : 1873, *醒壺(許馹) 별세: 1878, 이조판서 : 1881, 홍문관예문관제학, 1884, 생졸 : 1787-1886, 냉천급문록(성재문인록):(산청 이택당, 1941)에는 <514명외에도 실리지 못한 사람도 다수 있다>고 기술하고 있다.
  • 답댓글 작성자허현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4.10.21 년도들이 상이한 부분은 재확인(가령,성호공은 파보에 의하면 1878년 별세)합니다만,성재문인록에 기록된 양천허씨는 29명이고 고성문중 선조는 위에 적시한대로 두분(허응의 취정재지 발문에 의하면 30명의 문생들이 누락됐는데 여기에 우리집안 三人포함하면 다섯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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