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고장의 저명한 유림 한 분이 70년여 년전 동몽(童蒙)때를 회고하며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송정의 면와 선생한테 배웠던 이야기를 했다. 면와(俛窩.鍊)선조의 유고집과 그 번역본은 세상에 나왔다.
한편,수원 백씨 구룡재 문중의 기록에 의하면 구룡(九龍) 백봉래(白鳳來)는 허간(許侃)선생의 제자였다. 구룡은 11세에 이미 사서삼경을 비롯한 칠서(七書)를 독파하고, 평생 향리에서 학문에 정진하며 많은 제자들을 배출한 학자였는데 이런 이름난 유학자가 젊은 시절 학문의 기틀을 잡고 사사했던 스승이 우리 집안의 송정(松亭.侃)공이였다는 점은, 당시 송정공이 지니셨던 학문적 깊이와 덕망이 높았음을 짐작케 한다. 그러나 송정공의 학행(學行)에 대한 기록이나 유문(遺文)이 현재까지 밝혀진 것이 없어서 크게 아쉽다. 후손 신암(新庵.格)께서 찬한 <송정처사묘갈명>중 일부(신암문집 625쪽)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덕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훌륭한 말을 남기기 마련이니, 부군의 명망과 덕성으로 보아 마땅히 저술이 있어 후대의 모범이 되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집안에 화재를 만나 재가 되어 버려 남은 것이 하나도 없게 되었고, 우리 후손에게 문헌과 고증이 부족한 슬픔을 안겨주었으니 이를 어찌 말로 다 표현하겠는가! 오직 증명할 수 있는 한 두 가지 조항이 있을 뿐이다. 이어 나가자면 읍지(邑誌)에 이르기를, "공은 유학자로서의 품행이 있었고, 은거하면서 의로운 일을 행하였으며, 후학들을 권장하고 이끌었다. 구룡 백봉래와 같은 일대의 영재들이 모여들었고 많은 이들이 그의 문하에서 배출되었다."라고 하였다. 가승(家乘)에 편찬된 바를 보면, 단지 공의 천성이 고결하고 높아서 남이 알아주기를 구하지 않았고, 마침내 거류산 아래 송정리로 물러나 살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문하에 들어온 여러 제자들과 더불어 경전의 의리를 강론하고 토론하며, 여유롭고 한가하게 스스로 만족하며 지냈다. 이로 인해 송정을 대대로 이어갈 터전으로 삼았고 고향의 선비들이 그를 일컬어 '송정처사'라 칭했다.
<원문> 有德者必有言則以府君之名德宜其有著作爲後典型而家經鬱攸燼失無遺爲我杞宋之悲謂之何哉惟其有所徵者一二款繼之則邑誌有曰公有儒行隱居行義誘進後學一時英才如九龍白鳳來者多出其門家乘所編只載公天性高亢不求人知遂遜居于巨流山下松亭里與及門諸子講論經義 優遊自適因以松亭爲蒐裘地故鄕人士稱之曰松亭處士.
인생은 짧고 문장은 영원한 것이다 우리 사회는 진화되어 옛 농경시대에서 오늘날 AI 정보화시대로 들어섰고 한자문화에서 한글전용시대로 이행되었다. 종족의 미래 번창을 위하여 옛 문명(文名)을 찿아 후대에 전하려는 노력이야말로 의미있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