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향집 뒤 언덕은 온통 대나무 밭입니다. 봄의 복사꽃, 여름 날 감꽃 채송화 접시꽃 맨드라미 해당화, 가을에는 국화꽃이 마당 안팎을 장식하지만 대나무는 사철 푸르름으로 집과 가족을 감싸주는 울타리입니다.
한여름 뒷문을 열고 대청마루에 누우면 대밭을 지난 녹색 바람이 상쾌함을 더해 줍니다. 살그락 살그락 댓잎 스치는 소리에 복더위를 식히며 즐기는 낮잠은 꿀맛입니다. 우물 속에 담가 놓아 시원해진 수박이라도 잘라 먹으면 그 보다 더한 호강이 없습니다.
대나무는 우리 가족의 생활의 일부였습니다. 평생 근검절약하며 살아오신 아버지는 가을에 쪄서 엮은 대빗자루로 하루도 빠짐없이 아침저녁 앞 뒤뜰을 쓸었습니다. 그 일은 어린 우리 남매들도 예외일 수가 없었습니다. 도회 친척들이 가끔 오면 이렇게 깔끔한 시골집은 없다고 칭찬을 늘어놓아 흐뭇해지기도 했습니다.
누님이 가르쳐 주신대로 큰 댓잎만 골라 머리와 꼬리 부분을 접어 만든 쪽배를 물에 띄워 놓고 입으로 후후 불어대거나 동무들과 대나무 말을 타던 기억도 지워지지 않습니다. 자주는 아니지만 긴 대나무를 꺾어 마을 앞 낙동강에서 낚시를 즐기고, 물가의 말조개를 캐거나 모래톱에서 자라를 잡던 일은 한 폭 그림 같은 추억입니다.
자식들이 장성해 서울 생활을 접고 노부모를 모시려고 방 한 칸을 늘려 이사 온 곳이 공교롭게도 경기도 용인의 죽전(竹田) 지구입니다. 그런데 지명은 대밭인데도 대나무라고는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고향집의 작은 대나무를 뿌리째 화분에 옮겨 와 몇 년을 길러 왔으나 이식이 잘 안 되는 성질 때문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이런 연고를 아는 친구가 연전 나에게 竹田이라는 호(號)를 하나 지어 주었습니다. 대나무와의 연을 면면히 이어 왔으니, 대나무처럼 굳고 곧게 살라는 의미까지 덧붙여 주었습니다. 가끔 오는 건망증상 조차 피할 수 없는 주제에 과분하다 싶었지만 고맙게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호는 이름 대신 누구나 부를 수 있고, 가장 널리 불리는 칭호입니다. 주로 정자 별장 주거 출생지 등과 연결 지어 짓는 경우가 많고, 별호(別號) 택호(宅號) 법명(法名)도 광의의 호에 포함된다고 합니다. 호를 사용하는 것이 보편화 되면서 퇴계(退溪-李滉) 율곡(栗谷-李珥)처럼 호가 더 널리 알려진 이도 있습니다.
아무튼 그 바람에 호교(號交)하는 친구들이 대나무에 얽힌 이야기나 자료를 많이 보내주어 대나무에 관한 관심과 식견이 좀 늘었습니다. 거기다 대나무에는 좋은 점이 더 많아 현대인이 필요로 하는 화병(火病)진정 혈액순환 숙취해소 기능까지 있다니 여간 다행스럽지 않습니다.
대나무는 고엽제를 뿌려도 살아남을 정도로 생명력이 강합니다. 산중턱에 군락을 이뤄 자라는 산죽(山竹) 주변에는 다른 식물이 자라지 못합니다. 좀처럼 피지 않지만 대나무 꽃은 3년에 걸쳐 피며, 이 때 영양분을 모두 소모하여 말라 죽는다고 합니다.
이 때문에 대나무는 강직 절개 정절의 상징으로 통합니다. 죽림칠현(竹林七賢)의 일화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대나무의 고고함과 청아함은 물(水) 바위(石) 소나무(松) 달(月)과 함께 선비들의 친구였으며, 매화(梅) 난초(蘭) 국화(菊)과 함께 사군자이 반열에 오르기까지 했습니다.
시문을 즐기는 묵객들에게는 대로 만든 붓과 죽필통 피리 낙죽(烙竹)들이 애장품이 되었습니다. 대발을 드리우고 합죽선을 흔들거나, 죽침(竹枕)을 베고 죽부인을 껴안은 채 낮잠을 즐기며, 대나무 토시를 받쳐 입고 죽장(竹杖)을 휘저으며 외출하는 것은 남정네들의 풍류와 멋이었습니다.
내실에는 참빗 귀이개 젓가락 뜨개질바늘 바구니 등이 필수품이었고, 사다리 울타리 바지랑대 같은 집기도 대나무 소산입니다. 요즘 우리 주변에도 구두주걱 효자손 자동차시트 돗자리 방석 등 대나무 제품이 널려있고, 죽순 죽염 대통밥처럼 웰빙 식품들도 쉽게 접할 수 있습니다.
약용으로도 대나무의 효능은 탁월하다고 합니다. 동의보감에 대나무 새순을 그늘에 말려 만든 석죽차(石竹茶)는 화병을 다스리며, 대나무 기름인 죽력(竹瀝)은 가슴의 열을 내리고 중풍 산후열 천식 경기를 치료한다고 하니 신통한 일입니다.
본초강목에 의하면 대나무 속껍질을 재료로 하여 만든 죽여(竹茹)는 숙취두통을 없애주고 딸꾹질과 구토 증세를 멈추게 하며, 위궤양 만성간염 무좀 질염 치료에도 좋다고 합니다. 오죽(烏竹)은 불면증을 치료하고 술독을 풀어 주며 갈증을 해소시키는 작용을 한다고 합니다.
지난 가을 중국의 명산 황산(黃山)엘 갔더니 온통 안개로 뒤덮혀 절경은 구경도 못하고 산 밑자락 곳곳에 조성해 놓은 대나무 숲만 보고 왔습니다. 가이드 말로는 소나무 재선충을 방지하기 위한 인공 조림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나라도 한번 연구 검토할 사항이 아닌가 합니다. 아마도 대나무가 쇠로 만든 망치나 톱보다 더 유용한 것 같습니다. (2008년 12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