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암 박지원은 1737년(영조13) 음력 2월 5일 서울의 양반가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반남(潘南)이고, 자는 중미(仲美)이다. 연암의 가문은 선조조(宣祖朝)의 공신인 박동량(朴東亮)과 그의 아들로서 선조의 부마가 된 박미(朴瀰)를 위시하여 세신귀척(世臣貴戚)을 허다히 배출한 명문거족이었다. 연암의 조부 박필균(朴弼均)은 경기도 관찰사와 호조 참판을 거쳐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를 지냈으며, 시호(諡號)는 장간(章簡)이다. 부친 박사유(朴師愈)는 평생 포의(布衣)로 지내면서 부모 밑에서 조용한 일생을 보냈다. 따라서 연암의 정신적 성장에는 집안의 기둥이던 조부가 부친보다 더 강한 영향을 끼쳤던 듯하다.
연암은 16세 때 전주 이씨 이보천(李輔天)의 딸과 혼인하였다. 장인 이보천은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의 학통을 계승한 산림처사(山林處士)로 명망이 높았다. 이보천의 아우인 이양천(李亮天)은 시문에 뛰어났으며, 홍문관 교리를 지냈다. 결혼 후 연암은 이러한 장인 형제의 자상한 지도를 받으면서 본격적으로 학업에 정진하였다.
20세 무렵부터 연암은 여느 양반가 자제와 마찬가지로 과거 준비에 몰두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는 혼탁한 벼슬길에 과연 나서야 할 것인지 몹시 번민했다고 한다. 그의 초기작을 대표하는 방경각외전(放璚閣外傳)은 이러한 심각한 정신적 갈등 상황에서 창작된 것으로서, 여기에 수록된 ‘마장전(馬駔傳)’ ‘양반전’ 등은 당시 양반사회의 타락상을 통렬하게 풍자한 작품들이다. 또한 연암은 1765년 가을 금강산을 유람하고 장편 한시 ‘총석정에서 해돋이를 구경하다[叢石亭觀日出]’를 지었다.
장래의 거취 문제로 오랫동안 번민하던 연암은 1771년경 마침내 과거를 폐하고 재야의 선비로 살아가기로 결심했다. 그 이후 연암은 서울 전의감동(典醫監洞)에 은거하며 벗 홍대용(洪大容) 및 문하생 이덕무(李德懋)ㆍ박제가(朴齊家)ㆍ유득공(柳得恭)ㆍ이서구(李書九) 등과 교유하는 가운데 자신의 사상과 문학을 심화해 나갔다. 이 시절에 그는 ‘법고창신(法古創新)’ 즉 ‘옛것을 본받되 새롭게 창조하자’는 말로 집약되는 특유의 문학론을 확립하고, 파격적이고 참신한 소품(小品) 산문들을 많이 지었다. 뿐만 아니라 홍대용을 필두로 잇달아 연행(燕行)을 다녀온 박제가 등과 함께, 조선의 낙후된 현실을 개혁코자 청 나라의 발전상을 연구하였다.
1778년경 연암은 왕위 교체기의 불안한 정국과 어려운 가정 형편 등으로 인해 개성(開城) 근처인 황해도 금천군(金川郡) 연암협(燕巖峽)으로 은둔했다. 이곳에서 그의 고명을 듣고 찾아온 개성의 선비들을 지도하는 한편, 국내외의 농서(農書)들을 두루 구해 읽고 초록(抄錄)해 두었다. 후일 연암은 이때 초록해둔 것을 바탕으로 《과농소초(課農小抄)》를 저술하게 된다.
1780년(정조4) 삼종형(三從兄) 박명원(朴明源)이 청 나라 건륭제(乾隆帝)의 칠순을 축하하는 특별 사행(使行)의 정사(正使)로 임명되자, 연암은 그의 수행원으로서 숙원이던 연행(燕行)을 다녀왔다. 북경(北京)까지 갔다가 되돌아오는 것이 관례였는데, 이번 사행은 사상 처음으로 황제의 별궁이 있던 만리장성 너머 열하(熱河)까지 다녀올 수 있었다. 당시의 견문을 도도한 문장으로 표현한 것이 바로 《열하일기》로, 이 책은 커다란 반향을 일으키면서 연암의 작가적 명성을 한껏 드높여 주었다.
1786년 연암은 음직(蔭職)으로 선공감 감역이 되었다. 집안 생계를 책임져야 했기에 나이 쉰 살에 비로소 벼슬길에 나선 것이다. 그 후 평시서 주부, 의금부 도사, 제릉 영(齊陵令), 한성부 판관을 거쳐, 1792년부터 1796년까지 경상도 안의(安義)의 현감으로 재직했다. 이 안의 현감 시절에 연암은 선정(善政)에 힘쓰는 한편으로, 왕성한 창작력을 발휘하여 주옥같은 작품들을 지었다.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을 비판한 「홍범우익서(洪範羽翼序)」, 과부의 순절(殉節) 풍속을 문제삼은 「열녀 함양 박씨전 병서(幷序)」, 장편 한시 「해인사」 등의 걸작들은 모두 이 시기의 소산이다. 그런데 이 시절에 그는 뜻밖에 《열하일기》로 인해 곤경을 겪기도 했다. 《열하일기》의 문체가 정통 고문(古文)에서 벗어난 점을 질책하면서 속죄하는 글을 지어 바치라는 정조의 어명이 내려왔을 뿐만 아니라, 여기에 편승하여 《열하일기》가 오랑캐인 청 나라의 연호(年號)를 쓴 글이라는 비방 여론이 일어났던 것이다.
임기가 만료되어 서울로 돌아온 연암은 제용감 주부, 의금부 도사, 의릉 영(懿陵令)을 거쳐, 1797년부터 1800년까지 충청도 면천(沔川)의 군수로 재직했다. 면천 군수 시절에 그는 어명으로 「서이방익사(書李邦翼事)」를 지어 바쳤다. 이 글은 제주도 사람 이방익이 해상 표류 끝에 중국 각지를 전전하다 극적으로 귀환한 사건을 서술한 것으로서, 정조의 칭찬을 받았다고 한다. 또한 연암은 농업 장려를 위해 널리 농서를 구한다는 윤음(綸音)을 받들어 《과농소초》를 진상하였다. 《과농소초》에 대해 정조는 좋은 경륜 문자(經綸文字)를 얻었다고 칭찬하면서 장차 연암에게 농서대전(農書大全)의 편찬을 맡겨야겠다고까지 했으며, 규장각의 문신들 사이에서도 칭송이 자자했다고 한다.
정조가 승하한 직후인 1800년 음력 8월 연암은 강원도 양양 부사(襄陽府使)로 승진했다. 그러나 궁속(宮屬)과 결탁하여 횡포를 부리던 중들을 징치(懲治)하는 문제로 상관인 관찰사와 불화한 끝에 이듬해 봄 노병(老病)을 핑계 대고 사직했다. 1805년(순조 5) 음력 10월 29일 연암은 서울 북촌 재동(齋洞) 자택에서 영면하였다.
연암의 저작으로 널리 알려진 것은 《열하일기》와 《과농소초》이다. 이 책들에서 벽돌과 수레 등 청 나라의 발달된 문물을 적극 수용할 것을 주장하고 선진적인 중국의 농사법과 농기구를 소개했고, 이로 말미암아 연암은 오늘날 조선 후기 북학파(北學派)를 대표하는 실학자로 간주되고 있다. 한편 김택영(金澤榮)의 《여한십가문초(麗韓十家文鈔)》에서는 연암을 중국의 당송팔가(唐宋八家)에 비견되는 우리나라의 대표적 고문가(古文家)의 한 사람으로 꼽았다. 그런데 연암은 고문의 전통을 충실히 계승하면서도, 규범에 얽매이지 않고 소설식 문체와 조선 고유의 속어ㆍ속담ㆍ지명 등을 구사하여 ‘기기(奇氣)’와 ‘기변(奇變)’이 넘치고 민족문학적 개성이 뚜렷한 산문들을 남겼다.
「방경각외전」 중의 「양반전」, 《열하일기》 중의 「호질(虎叱)」과 「허생전」, 그리고 안의 현감 시절 작품인 「열녀 함양 박씨전 병서」 등은 오늘날 한문소설로 간주되고 있으며, 이로 인해 연암은 조선후기 소설사에서 가장 뛰어난 작가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또한 그는 비록 과작(寡作)이기는 하지만, 「총석정에서 해돋이를 구경하다」 「해인사」 등과 같이 빼어난 한시도 남겼다. 따라서 연암은 탁월한 자연 묘사를 성취한 시인으로서도 재인식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법고창신(法古創新)’을 핵심으로 한 연암의 문학론은, 시대착오적인 모방을 일삼던 당시의 문풍(文風)을 비판하고 당대 조선의 현실을 참되게 그릴 것을 역설한 점에서 근대 민족문학론과 리얼리즘문학론의 선구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출전: 김명호(金明昊) 교수의 <연암집(燕巖集)해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