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30-40대에 소속회사의 해외업무,그리고 나중 내가 운영하는 business관계로 해외출장이 잦았다. 업무와 관련하여 해외에 나가는것이 처음엔 기대감과 설레임으로 그 기회를 은근히 바랐던때도 있었다. 그러나 외국에 나가는 일 자체는 막중한 미션이 따르게 되고 소정의 성과가 있어야 한다. 더우기 자신의 사업이 아닌 회사의 월급쟁이라면 그것은 조직의 요구이고 모든 이의 기대이며 나 자신에게는 부담이다. 외국에 나가서 사흘정도 지나면 현지음식이 아무리 좋아도 원기가 빠지는 경험을 했다.
예전에 유럽행 항공기가 앵크리지를 경유, 18시간 전후의 비행끝에 유럽의 공항에 내리면 거의 녹초가 되었다. 시차를 극복하고 현지에서의 일을 수행하는것이 쉬운일이 아니였다. 그리하여 긴 출장을 마치고 김포공항에 도착하면 맨 먼저 찿는곳이 2층에 있던 한식당이였다. 육개장을 한그릇 먹고나면 몸에 땀이 비오듯하고 점차 원기를 찿는듯 했다. 身土는 不二하다.
25년전 추석을 일주일쯤 앞둔 때에 봄베이에 본부를 둔 인도 국영석유회사를 방문하여 해결해야할 일이 생겨서 나는 다른일들을 재쳐두고 출장길에 올랐다. 관광이거나 소위 "갑"의 입장에서 해외업무를 보는 경우도 있지만 어떤 목적을 가지고 간다는것은 심리적으로도 부담이다. 나는 사전에 국제전화로 책임자에게 방문목적을 밝힌 후 반시간 meeting을 갖기로 약속했다.
이 사람한테 우리 제품의 시장공급실적,인지도,기술요구 만족등을 설명하고 구두승락이 되어야 후속되는 일들이 진행될수 있는것이다. 이런 성격의 business meeting은 일종의 파워게임(power game) 이나 두뇌싸움이다. 어떻게 마음을 움직여(move) 미국이나 독일의 기존 제품 대신에 생소한 Made-in-Korea제품을 선택하게 할것이냐,혹은 최소한 소극적 동의(no objection)를 받느냐가 중요한 일이였다.
옷가방등을 챙기는것은 집의 아내 일이고,방문시의 협의자료,선물,항공편,현지 일정예약등은 내가 직접 챙겨야할 사항이다. 그런데 인도입국 비자를 서울의 대사관에 신청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일단,봄베이로 들어가는 비행기가 싱가폴을 경유하므로 싱가폴주재 인도대사관에서 비자를 받고 들어가기로 하고,싱가폴 이후의 도착지 항공권은 'open"으로 예약하고 출발하였다. 자정에 싱가폴에 도착, 호텔에 check-in하여 눈을 잠시 붙인후 나는 아침 일찍 인도대사관을 갈 참이였다. 아뿔사,인도의 공휴일로 대사관도 휴무에 들어갔다고 한다. 일정에 문제가 생겼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Ravana라는 큰 물체를 바다에 빠뜨리는 가네샤 차투르티 축제가 10일정도 열리는데 그 중 이틀은 공휴일로서 모든 관공서가 쉬는것이다.
봄베이 방문후 영국으로 가서 맥더머트라는 엔지니어링회사에 있는 한국엔지니어들도 만나야하는등 모든 일정이 차질나게 되었다. 만날 일도 없는데 당시 거래중이던 싱가폴 거래회사에 전화하여 잠시 만나자하고 방문하였다. 나의 관심은 인도비자 문제뿐이였다. 그런데,어떤 사람의 이야기가 visa없이 landing permit(임시입국허가) 로 들어갈수 있다는것이였다. 그렇지,사람사는 세상에 안되는 일이 어디 있겠나. 임시입국은 72시간을 초과할수 없고,인도도착하면 출발 항공권을 제시하고 입국신고시 여권을 보관하고 임시허가증을 발급한다고 했다. SQ(싱가폴항공)의 봄베이행,그리고 봄베이에서 런던행 스케쥴도 확정하고 출발했다.
봄베이 공항 도착후 시내로 들어가는 택시를 타려 약 100m를 걸어가는데 헐벗은 아이들 30여명이 손바닥을 하늘높이 들어 돈을 달라며 몰려오고 있었다. 나 역시 인정에 약한 사람이지만 예전에 들은바가 있어서 동행한 K에게 나즈막하게 말하길 절대로 표정을 바꾸거나 관심을 갖거나 그 중 한 아이한테라도 돈을 주지말라 했다. 그렇게하면 우리 둘은 저 아이들 30명에게 옷자락이 잡혀 깔려 죽게된다고 말했다. 우리는 무사히 택시를 잡았다.
나에겐 외국출장시 호텔의 급(級)을 정하는 원칙이 있었다. 중요한 업무이거나 혹은 상대방이 어느 호텔에 묶고 있느냐 인사할때 답할수 있는 격(格)이 맞는곳을 잡아야 한다. 이번엔 좋은 호텔을 잡았다. 호텔주위는 30층이상 되는 높은 아파트들이 많았는데 우리의 대중화된 개념이 아닌 고급주택인 셈이였다. 호텔 수영장은 물이 넘치고 있는데도 주변일대 민가들의 상,하수도 사정은 너무나 열악했다. 까마귀 떼가 몰려 날아다니는데 내 머리위에 똥이라도 묻을까 조심스러웠다. 박물관,공동빨래터,간디기념관들을 둘러보았다. Gateway of India는 1911년 영국왕의 도착을 기념하기위해 세운것인데 우리가 영어를 처음 배울때 영어책 표지 그림이 이것이였다. 밤에는 라바나를 바다에 빠뜨리는 축제를 구경갔다. 간디기념관을 보고 내가 생각하기를 인도가 영국 신민지가 된후 완전히 근대화 될때까지 영국에 대해 비폭력으로 저항한 간디와 같은 인물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인도는 어디쯤 있을까.
뒷날은 국영석유회사 간부를 만나는 날이였지만 한국에서는 추석날이였다. 나는 2시간반 시차를 생각해서 아침일찍 부산집에 모여있는 동생들 한테 전화하니 벌써 차례는 모셨다고 했다. 모 종합상사 부장과 아침식사를 하면서 인도현지 실정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그는 현지에 5명의 하인을 두고 있었는데 아이 영어공부 교사,시장보고 요리하는 사람,청소부,운전사등 이였다. 인도의 비즈네스 상대는 대체로 보수적(conservative)이며 영국적인 사고를 갖고 있는점을 유념해야 한다. 인도가 오랜기간 동안 영국의 경제,문화지배하에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업무성향은 역시 English-style이다.
오후 2시경 국영석유회사 간부 사무실에 도착하였다. 준비해간 한국의 전통혼례장면의 목각품을 위시한 선물,그리고 한국에서 부터 준비한 기술자료들을 전달하면서 나는 정해진 짧은 시간동안 기술역량,관련분야경험,능력등을 신뢰를 갖도록 설명하였다. 그리고는 잊지않고 개인적 관심사,가족에 대한 이야기,후일 한국에 오면 꼭 만나고 싶다는 이야기를 남기며 헤어졌다.
이같은 meeting은 긴 의사결정(decision-making)과정의 일부이고 우리 제품을 수출하는 여러 노력중의 하나에 불과한것이였다. 마치,부산에서 서울로 가는 중간 가는곳마다 세워서 검문하거나 조건을 만족해야 그곳을 통과할수 있는것과 같은 과정이다. 그리고 그 후 인도 발주사 문제는 아무개가 잘 풀어서 성사가 되었다는 말을 들을수 있었다.
그날 저녘 다음날 출발할 짐을 대충 챙겨두고 저녁시간에 호텔에서 제법 떨어진 Marine Drive 해변가를 걸으면서 한국에도 떠있을 보름달을 올려보고 잠시나마 여유로운 시간을 가졌다. 봄베이를 떠나는 날,무겁던 업무관련 자료는 어제 회의시 전달했으니 여장도 가볍고 마음도 가벼웠다. 출입국관리소에서 여권을 돌려받고 런던행 비행기를 탔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