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스 베버의 종교윤리와 동아시아의 현대화 - 유교 윤리는 자본주의의 걸림돌인가?
金楨桂(창원대학교 명예교수)
Ⅰ. 서 언
막스 베버(Max weber)는 종교와 자본주의에 대한 가설을 통하여 유교 윤리는 자본주의에 걸림돌이 된다는 추론을 제시하였다. 베버의 기본 논점은 20세기 서구 사회과학계에서는 동아시아(유교권)의 현대화 또는 동아시아 자본주의 불발생의 원인을 분석하는 하나의 기본적인 틀이 되었으며, 어떤 의미에서 그의 이론은 1970년대 이전까지 서구의 중국 및 동아시아 유교 국가 연구에 대한 정론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베버는 현대 자본주의를 일으킨 촉발 메커니즘을 종교문화에서 찾으려 했다. 그는 서구의 프로테스탄트윤리가 바로 그 촉발 메커니즘이라고 주장했다. 유교가 주도적 위치를 점하고 있는 동아시아 지역은 그런 촉발 메커니즘이 없기 때문에 자본주의가 출현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유교문화가 현대사회와는 양립할 수 없다는 함의가 깔려 있다. 따라서 현대화를 위해서는 유교 윤리를 거부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함을 시사하고 있다. 베버의 이러한 가설이 증거를 결하고 있는 ‘이념형’에 불과하고, 중국문화와 유교를 깊이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주장은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5,4운동과 공산화 이후 수십년간 중국본토에서의 유교에 대한 폄하와 쇠퇴는 그의 견해를 입증해 준 듯하다. 그 결과 Wright 부부와, Levenson 같은 서구학자들은 유교의 미래에 대해 비관하면서 유교의 운명이 다 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른바 ‘신(新)베버학파’를 형성하였다.
반면, 그와 반대되는 견해도 있다. “5,4운동 이래 유교를 폄하한 비판은 근본적으로 결함이 있는 것으로 잘못된 것이다. 베버의 이론도 새로운 각도에서 재검토되어야 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수십 년간 동아시아 여러 나라의 급속한 경제성장과 현대화는, 유교가 자본주의 성장을 방해하였다기보다는 촉진하였음을 보여 준다. 어떤 사람은 동아시아 경제를 일컬어 ‘유교 자본주의’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들은 유교 문화를 우월하고 활기에 찬 것으로 찬미하여 인간성을 재건하고 건전한 사회를 건설하는 데 있어서 규범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유교가 현대화와 상치되기는커녕, 현대화 성취 이후의 후기 산업기에 서구사회가 맞닥뜨린 갈등과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물론 서구문화의 좋은 요소를 흡수할 필요는 있겠지만, 동아시아문화를 재건하는 데 있어서 고수해야 할 것은 바로 유교 윤리라는 것이다. 그들은 유교의 미래에 대해 낙관적이다. 그리고 또 다른 제3의 견해는 위 두 견해가 모두 일면적 편향성을 갖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즉 그들은 동아시아의 현실에 대한 반성을 결하고 있어서 현대 동아시아에 있어 유교의 역할을 정확히 규정하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이상의 견해를 보면, 전자의 하나는 베버의 주장을 따르고 옹호하는 것이고, 후자의 두 견해는 베버이론의 비판과 유교 윤리의 재검토를 주장하는 것이다.
본장에서는 베버의 이론-유교사상이 자본주의 발전에 장애가 된다는 추론-에 대한 추종자들의 관점과 그것에 대한 비판자들의 주장-유교윤리가 동아시아 현대화의 촉발기제라는 관점-에 대해 논평해 보고, 유교 윤리의 세계화에 대해 논의해 보고자 한다.
여기서 우리가 먼저, 관심을 기울일 가치가 있는 것은 왜 베버는 유교 윤리가 자본주의 발전에 걸림돌이 된다고 단언했는가? 이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베버의 자본주의 흥기에 관한 이론을 먼저 이해하고, 다음 베버는 왜 유교 사상이 자본주의 발전에 걸림돌이 된다고 추론하였는가를 설명해야 되리라 본다.
Ⅱ. 베버의 현대 자본주의 발전의 전제
베버는 ‘현대화’를 단적으로 ‘합리화의 과정’이라고 보고, 현대 자본주의 정신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였다. 현대 자본주의 정신은 ‘천직(天職)의 관념으로서 체계적 합리적으로 정당한 이윤을 추구하는 정신적 태도’라다.
베버가 일생을 바쳐 심혈을 기울인 연구의 초점은 바로 이러한 현대 자본주의가 어째서 유독 현대 서구 문명 속에서 흥기하게 되었는가 하는 현대 자본주의 정신의 원인을 찾는데 맞추어 졌다. 이 한 문제를 탐색하기 위하여 베버는 그의 거작 『경제와 사회』(Economy and Society)에서 한 쌍의 대비(對比)되는 관념을 제시하고, 그것을 통하여 서구문화의 특질을 도출해 낸다.
베버는 근세 이후 수많은 서구국가의 정치‧경제‧문화 등 여러 영역에 걸친 발전과정은 ‘합리성’을 바탕으로 현대화 되었다고 보고, 근세 유럽문화가 현현해 낸 ‘합리주의’는 일종의 독특한 ‘형식 합리성’(formal rationality)이며, 이는 세계의 다른 문화에서 강조하는 ‘실질 합리성’(substantive rationality)과 확연히 구분된다고 했다. 형식 합리성은 어떤 일을 할 때 수단과 절차의 계산 가능성(calculability of means and procedures)을 강조하고, 가치 중립적인 사실(value-natural fact)을 중시한다. 반대로 실질 합리성은 어떤 하나의 명백한 정의에 근거하여 판정된 목표 또는 결과의 가치(value of ends or results)를 가리키는 것이다. 말하자면 전자는 수단과 과정을 중시하는 도구적 가치로, 어떤 사람이라도 같은 방법과 과정을 통하여 스스로의 목표를 추구할 수 있다. 후자는 목표와 결과를 중시하는 것으로, 목표를 달성하는 방법 또는 과정은 명확히 설명하지 않는다.
베버는 시장에 있어서의 교환행위는 ‘모든 합리적인 사회적 행위의 기본 유형’이며, 동시에 자본주의 경제 질서의 기초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교환과정에 있어서 개인이 자기가 얻고자 하는 재화를 고려하는 준거는 자기가 추구하는 최대의 이익을 면밀히 계산하는 것이며, ‘신성의 금기‧특수집단의 특권‧형제 존장에 대한 대접’은 일체 고려의 대상에서 제외된다.즉 ‘객관적인 합리성’을 근거로 한 계산을 통하여 ‘주관적인 합리성’의 실질적인 이익을 추구한다. 이러한 이중의 합리적인 교환행위를 베버는 ‘형식 합리적 경제행위’라고 보았다. 반대로 교환의 목적이 이와는 달리, 어떤 특수집단의 목표를 달성하고자 당해 집단의 이익에 만족하고 그 집단의 가치를 옹호하는 것을 ‘실질 합리적인 경제행위’라고 했다.
베버는 이처럼 ‘자본주의 경제 질서의 기초’가 되는 사회적 행위, 즉 형식적 합리주의는 16세기 문예부흥 이후 유럽 문명의 여러 영역 - 과학, 정치, 종교, 예술 등 - 에서 출현하였다고 보았는데, 그중에서 자본주의 발전에 가장 큰 동인이 된 것은 과학기술, 법률과 사법, 행정조직에서의 합리주의라고 하였다.
과학과 기술 : 문예부흥 이후 실험과 수학 등 분야에서 합리주의를 기초로 한 자연과학이 발흥하였고, 과학자들은 물리‧화학‧천문‧지리 등 자연과학 연구에 찬란한 업적을 이루었다. 과학지식의 보급으로 인간의 세계관이 종교적 또는 신비적인 것으로 부터 과학적인 유형으로 바뀌었고, 자연계의 여러 가지 사물을 통찰하는 데 있어 과학적 방법에 의한 ‘因果 메카니즘’으로 보게 하였다. 그 결과 사람들이 점차 미몽의 세계에서 눈을 뜨게 하였을 뿐 아니라, 고도의 정확한 과기지식을 이용하여 생산업무에 종사할 수 있게 한 것이다.
법률과 司法 : 동양 또는 전통사회에서 ‘실질적 법률’(substantive law)은 성현(聖賢)이나 군주가 제정한 것인데, 그 특징은 종교적인 계율과 세속적인 법규가 확연하게 구분되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윤리적 책임과 법률적 책임, 도덕적 규범과 법률적 규범이 뒤엉켜 형식상의 경계가 분명하지 않았다. 법관이 재판할 때도 법률에 근거하기가 어려우며, 가끔 도덕‧성지(聖旨)‧신의 교시 또는 정리(情理)에 근거하여야 했다. 이러한 법체계하에서 일반 국민이 법적 결과를 예측한다는 것은 매우 어렵다. 베버는 이러한 법률체계를 ‘비합리적’인 법률체계라고 했다.
반면, 문예부흥 이후 유럽에서는 ‘법률 형식주의’(legal formalism)가 흥기했다. 유럽 각국의 법질서는 종교‧윤리와 세속적 도덕률로부터 점차 분화되어 나온 것으로 논리적으로 명백하고 이론과 형식에 있어 체계화된 합리적인 내용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법률의 제정은 반드시 엄격한 절차를 거쳐야 했고, 법령의 제정과정은 반드시 헌장의 요구에 부합되어야 했을 뿐만 아니라, 국민 개개인이 법률의 개정을 분명히 알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러므로 “이러한 합리적인 법체계 하에서는 개인 또는 단체는 자신의 행위의 법적 결과에 대해 예측 가능성이 제고되고, 따라서 그들은 상대적으로 큰 자유를 가진다.”
행정조직 : 행정조직에서 ‘형식 합리주의’의 흥기는 바로 행정조직의 과학화와 계층화를 함의한다. 문예부흥 이후 유럽에 있어 행정조직의 과학화와 계층화는 정부 기구 뿐만 아니라, 군대‧정당‧교회‧대학‧이익집단‧기업조직 등 기타 조직에서도 나타났다. 행정조직의 과학화와 계층화 이후 그 조직구조와 기능의 구분을 확연히 했고, 조직 내 각 기구의 관할범위‧권한 그리고 각 직위의 직책을 모두 공식적인 법규로 명백히 규정했다. 과학화‧계층화된 조직의 운영에 있어 더욱 중요한 것은 그 구성원은 ‘공식적 몰인격적 정신’으로 업무를 처리하고, 또 같은 성격의 일에 대해서는 모두 동등한 방법으로 공평하게 처리하며, 사적 감정은 말할 것도 없고, 정실이나 권력 또는 상사의 부당한 압력과는 무관하게 처리한다. 이러한 공식적 몰인격성은 계층화되고 과학화된 행정조직을 하나의 합리적인 기계처럼 움직이게 하며, 행정의 정확‧신속‧명백‧통일성 및 엄격한 통제 등의 성격을 현현한다.
이상과 같이 과학‧기술, 법률‧사법, 행정조직 등 여러 영역에 걸친 합리화는 고도의 예측 가능한 환경을 조성한다. 이러한 환경에서 기업가는 각종의 과기지식을 이용하여 생산활동을 하고, 각종 방법으로 시장의 수요와 변화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들은 스스로 그들이 보호받을 수 있는 법규 내용을 알고, 스스로의 행위에 대한 결과도 이해한다. 따라서 그들은 자기의 투자와 수익을 정확하게 환산할 수 있고, 스스로 최대의 이익을 얻기 위해 진력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베버는 형식(도구) 합리성의 발흥이 현대 산업자본주의의 발전에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Ⅲ. 프로테스탄트(신교)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그런데, 베버의 과제는 문예부흥 이후 “어째서 서구 문명의 각개 영역에서 약속이나 한 듯이 다 함께 보편적 의의와 타당성을 가진 ‘합리주의 문화 현상’이 발흥하게 되었는가?”에 초점이 모아진다. 바꾸어 말하면, 어떤 원인에 의하여 서구 문명에서만 근세 이후 현대화‧합리화된 이러한 특이한 문화 현상이 출현하였는가를 밝히려는 것이 베버의 생명을 연소시킨 핵심문제였다고 볼 수 있다. 이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것이 유명한 『프로테스탄트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란 논문이다.여기서 그는 프로테스탄트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의 합치점(정신적 친화성, a spiritual affinity)을 분석하게 된다.즉 특정한 종교적 관념들이 경제 정신의 발전 또는 경제체제의 윤리적 성격(ethos)에 미친 영향을 규명하려는 시도로, 위 논문의 경우에는 현대적 경제생활의 정신과 금욕적 프로테스탄티즘의 합리적 윤리와의 관계를 규명하려는 것이다.
먼저 베버는 16세기 이후 유럽의 여러 프로테스탄트 지역-네델란드‧영국‧게르만 등-의 퀘이커교도(Quakers)와 침례교도(Baptists) 관할구는 상업과 경제활동이 모두 현저히 발전한 반면, 이들 국가의 천주교 신봉지역은 그와 같지 않다는 사실과 직업과 교육의 통계를 근거로 기업가‧자본가‧고급의 숙련노동자‧특히 기술적 상업적 훈련을 받은 현대기업의 요원들은 가톨릭교도들이나 루터교도들 보다는 압도적으로 칼빈주의(Calvinism) 교육을 받은 프로테스탄트였다는 사실에 대한 증거를 제시한다. 요컨대, 베버는 프로테스탄트가 지배층으로서든 피지배층으로서든, 다수로서든 경제적 합리주의를 향한 특수한 성향을 보였던 것이고, 가톨릭은 어느 경우든 간에 이 같은 성향을 보인 것을 찾아볼 수 없다는데 주의를 기울였다. 따라서 행동상의 차이를 낳는 원인은 대체로 종파가 그때그때 처하는 외적인 역사적‧정치적 상황에서가 아니라 지속적인 내적 특성에서 찾아져야만 한다는 것이다.
전통 기독교 신학의 관점에 보면 종교와 부(富)의 축적은 불상용(不相容)의 관계에 있었다. 중고세기 경건한 교도가 바라는 것은 ‘내세’(來世)이지, ‘현세’(現世)가 아니었으며, 그들은 당연히 천국에서의 영생과 속죄(救贖)를 추구하는 것이었지, 현실 세계에서의 부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었다. 보수적인 천주교는 이러한 전통을 계승하였다. 그러나 프로테스탄트인은 종교의 경건성을 보지하면서 속세의 부를 추구하였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 베버는 이에 대한 회답을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기독교의 교의(敎義)를 세밀히 분석해야 한다고 인식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종교개혁운동은 루터의 교회의 부패와 『면죄부』 판매에 대한 불만으로 유발되었으며, 종교개혁운동에 있어서 루터와 칼빈이 이끄는 교파가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그러나 루터는 비록 전통교회를 공격하고, 성경을 열심히 읽는 것이 바로 구원의 진정한 접근이라고 주장하면서, 교회를 통하여 속죄의 도(道)를 찾는 것은 반대하였지만, 루터가 관심을 가진 것은 여전히 사후 영혼의 속죄이지, 속세의 개조는 아니었다. 베버는 그래서 루터 교파는 자본주의의 흥기에 결코 크게 공헌한 바가 없다고 인식했다. 반대로 베버는 칼빈교파의 중심관념은 비록 사후에 천국에 진입하는 것이긴 하지만, 그것은 교회를 공격하기 위해서 제기된 예정설(predeterminism)로, 이는 개인의 노동 활동에 기여하고 속세를 개조하는 효과를 거두었다고 보았다. 따라서 베버는 이러한 예정설과 특수한 경제 윤리(경제적 합리성)간에는 상관성이 있다고 보았다.
‘예정설’이란 우주의 질서는 신이 결정하였고, 인간 역시 신이 창조한 피조물로 인간의 운명은 이미 신이 결정하였기 때문에 인간의 의지와 노력으로는 신의 최초의 결정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이다. 예정설의 논리적 결론은 운명주의로 비록 그것과 인간의 주체성은 표면상 모순적이긴 하지만, 베버의 결론은 그와 반대적 성격이었다. 개인의 운명은 이미 신에 의해 예정된 것이기 때문에 그는 신 앞에서는 절대적으로 고독하다. 그는 반드시 혼자서 고독하게 신이 그에게 내린 운명과 만나야 하고, 어떤 사람도 교회도 그를 구원할 수는 없다. 구원을 바라는 칼빈교도는 절대고독의 상태에서 심리적으로 비할 때 없이 크나큰 불안에 봉착한다. 한편으로 그는 자신이 신의 선민(選民)임을 희망하면서, 한편으로 또 신의 의중을 헤아릴 수 없다. 그때 그는 진실한 신앙을 통해 위안을 얻는다. 진실한 교도 개개인은 모두 자신이 바로 신의 선민임을 확신하여야 하고, 모든 회의를 모두 마귀의 유혹으로 보고 하나같이 버려야 한다. 왜냐하면, 자기 확신의 결여는 곧 불충분한 신앙의 결과이고, 따라서 신의 은총이 불충분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자기 확신에 도달하기 위해서 개인은 반드시 신의 소명(calling)에 따라 멈추지 않고 열심히 일(노동)하여야 한다. 이러한 노동만이 종교적 회의를 씻어 버리고 구원의 확실성을 보장받는 것이다. 일하기를 원치 않고, 편안하기를 좋아하는 것은 도덕적이 아닐 뿐만 아니라, 자연에 반하는 것이다. 생명은 아주 짧고 또 아주 귀중한 것이기 때문에개인은 반드시 자신의 시간을 선용하고, 열심히 일하며, 신에게 성심을 다함으로써 이 땅에 천국을 건설하여 신의 영광을 드높여야 한다. 더욱 분명히 말해서 개인은 반드시 스스로 현실 세계에서의 성취를 통해 그가 신의 신성한 의지로 선택된 도구임(選民)을 증명하여 신이 그에 대한 ‘은총’을 내리도록 하여야 한다. 이처럼 오직 신의 부름을 받는 것이 바로 신의 선택을 받는 것이며, 그것만이 운명주의에 대항할 수 있고 운명주의의 논리적 결과를 없애 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프로테스탄트는 근로와 절약을 강조하고, 신의 부름에 따라 일하는 것은 신성한 것이라고 강조한다. 열심히 일하는 것은 신이 정한 생활방식으로 개인은 이에 따라 스스로 신의 선민임을 증명한다. 天職에 최선을 다하여 부를 얻는 것은 신이 그 선민에 대해 은총을 내리는 것이므로 개인은 그것을 거절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부를 소유한 것은 신을 위하여 재산을 관리해 주는 것에 불과하며, 개인이 절대로 그것을 가지고 육체적 즐거움에 빠질 수는 없다. 일하여 재산을 모으는 것은 신을 위한 것이지, 육욕과 죄악을 저지르기 위한 것은 아니다. 돈을 가진 뒤에 반드시 욕망을 자제하고 열심히 노력하며, 고도의 자율적인 생활 속에 안일함과 즐거움에 유혹되지 않아야 영혼이 추락하는 위험으로부터 구조된다. 이러한 신앙에서 바로 베버가 말하는 ‘현세 금욕주의’(worldly asceticism)가 생성되는데, 그것은 현세의 정당한 경제활동을 긍정하고, 개인이 근검절약하는 생활과 직업규율을 엄수할 것을 요구하며, 사치하고 타락하는 행위를 해서는 아니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세 금욕주의는 내세의 속죄를 구하는 가톨릭의 ‘내세 금욕주의’와 확연히 구분된다. 전자는 세속을 개조하는 일종의 동기를 마련하지만, 후자는 속세를 개조할 역량을 일굴 수 없다.
이상과 같은예정설에 따른 인간의 절대고독을 근면한 노동, 금욕과 자제를 통해 현실 개조로 연계되는 프로테스탄트의 윤리가 바로 르네상스 시기 유럽 문명의 각 부문 속에 합리주의를 발흥케 한 주요 정신적 요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프로테스탄트의 교의가 조성한 인간의 ‘동기구조’와 ‘자본주의의 정신’ 간, 더 엄밀히 말해 칼빈주의 신앙의 특정 요소들과 현대 자본주의 경제윤리 간에 일종의 선택적 친화성(wahlverwandschaft, affinity)이 있다는 것이며, 이러한 친화성의 내재적 통합(inner intergration)은 자본주의 발전에 아주 중요하다는 주장이다.그러나 베버는 프로테스탄트윤리가 자본주의 흥기의 정신적 기동력이지, 결코 프로테스탄트윤리가 자본주의 생성의 유일한 요인은 아니라고 하였다. 즉 현대 자본주의의 흥기는 과학‧정치‧법률‧경제와 종교 등 여러 영역의 ‘합리화’가 결집되어 이루어진 결과이며, 프로테스탄트윤리는 그 중의 한 조건이라는 것이다.
Ⅳ. 베버가 본 유교 윤리와 자본주의
베버가 쓴 『중국의 종교』의 중심 주제는 중국은 어째서 자본주의가 발생하지 않는가에 대한 문제였다. 『중국의 종교』는 3부로 구성되어 있다. 제1부는 전제군주제하 중국의 사회조직과 구조를 논의한 것이고, 제2, 3부는 각각 유교와 도교 사상을 언급한 것이다.
1) 중국의 사회 구조와 현대 자본주의
중국의 사회 구조를 기술함에 있어 베버는 ‘이념형 연구방법’(ideal type approach)을 채택하였다. 그는 시간적 한계를 넘어 여러 시대의 자료를 인용하여 전제 군주제 하의 중국사회의 ‘이념형’을 기술하였다. 이러한 접근방법은 적지 않게 비평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베버가 중국 사회를 분석한 주요 목적은 그 사회에 내재해 있는 실질적 합리주의와 형식적 합리주의를 판단하고자 한 것이며, 1911년 청조(淸朝)가 멸망되기 전 중국 사회구조는 크게 보아 안정을 유지하였다고 보았기 때문에 '이념형의 연구방법'은 결코 명백한 결함이 있는 것은 아니다.
『중국의 종교』에서 베버는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구체적 요소-중국의 화폐제도, 도시와 동업조합, 수리건설과 천지신명(天神地祇) 관념, 황권과 신권의 황제에 집중, 봉건제도, 통일적 관료국가, 중앙정부와 지방관리, 친족조직, 농촌자치와 법률제도, 그리고 사회계층 특히 문관계층 등-를 선택하여 중국사회의 구조를 분석하고, 그것이 자본주의 발전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가를 기술하고 있다. 이를 몇 가지 범주로 묶어 요약해 보면 아래와 같다.
화폐제도 : 화폐제도는 자본주의 운영의 선결 조건이다. 중국은 역사의 발전에 따라 금은 등 희귀금속의 사용 또한 점차 증가하였다. 그러한 추세는 비록 화폐경제의 확립과 국가재정의 통제에 유리한 조건을 마련해 주었다. 하지만, 중국은 지역성이 아주 강하기 때문에 시종 효과적인 화폐제도를 확립하지 못하여 자본주의를 발전시키는 기초를 마련하지 못했다고 베버는 보았다.
도시와 동업조직 : 화폐와 마찬가지로 도시는 서구자본주의 발전의 전략적 요소다. 중국의 도시는 서구와 마찬가지로 대부분 왕후(王侯)‧관리의 거주 보루로 형성되어 점차 공예생산과 상업 및 무역 중심으로 발전되었다. 도시의 주요 재원 역시 조세와 상업 및 무역으로부터 조달되었다. 그러나 서구의 도시와 근본적으로 다른 하나는 중국의 도시는 결코 법적으로 독립된 자치 구역이 아니고, 여러 개의 시골(鄕村) 구역이 결합하여 형성된 것이다. 즉 서구와 비교하여 동양의 도시는 정치적 자치가 결여되어 있다. 동양의 도시는 고대 서구사회의 ‘폴리스’적 성격도 갖고 있지 않으며, 서구 중세도시와 같은 도시법(stadtrecht)도 갖고 있지 않았다. 따라서 도시 그 자체가 도시의 정치적 이익을 보장할 수 있는 어떠한 헌장도, 정치적 자주성도, 스스로를 방위할 수 있는 군대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서구의 도시와는 달리 각 개 도시가 자주적인 정치 실체의 신분으로 결맹(서약단체적 결합)하여 상호 간의 이익을 증진시켜 나가지 못했다.
베버는 중국의 도시가 독립 자주적인 성격을 갖추지 못한 주요 원인을 다음 두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첫째, 중국인이 지나치게 친족단체의 중요성을 강조하였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이 도시로 이주해 온 이후에도 여전히 제사를 모시기 위해 정기적으로 귀향하여야 했고, 그들의 관심은 자기 친족의 이익에 있었지, 지역사회의 공동이익에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즉 도시는 농촌 친족조직의 연장으로 도‧농간에는 거미줄과 같은 친족 관계가 형성되어 친족단체의 얽매임 속에 있었다. 둘째, 서구의 도시는 스스로 무장하고 훈련하여 자기의 군대를 편성할 수 있는 방위능력을 가진 인간의 결합에 의해 형성되었다. 그러나 중국의 도시는 수리·관개를 통해 형성되었다. 수리·관개는 막대한 재력과 물력이 동원되어야 했기 때문에, 지방이 단독으로 건설할 수 없었다. 따라서 자연히 중앙정부의 행정에 의해 추진되어야 했고, 이의 강행을 위해서는 황제가 그의 수중에 병마(兵馬)의 전권을 독점하여 행사하였다. 그 결과 중국의 도시는 현대 자본주의 발전의 주요 요건인 독립된 경제단위를 형성할 수도 정치적으로 독립 자주적인 단체를 구성할 수도 황제에 대항할 수도 없게 되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도시 내의 상공업자들이 동업조직을 조직하여 그 구성원들에 대해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였으나, 가족의 이익을 모든 것에 우선하는 전제하에 있었기 때문에 정치 권력의 결핍은 물론 정치적으로 어떠한 역할도 하지 못했다. 나아가 동업조직 내에서 친족 간의 상호 경쟁으로 인해 그들의 단결은 물론, 도시 단위의 경제공동체의 형성과 이를 기초로 한 자주적인 시민계층의 형성은 매우 어려웠다. 이들은 모두 중국의 현대 자본주의 발전에 걸림돌이 되었다고 베버는 지적하였다.
가산제 국가‧관료제와 과거제도 : 기원전 3세기부터 중국은 이미 중앙집권적 전제군주국가와 방대한 행정체계를 구축하였다. 이 방대한 행정체계를 통하여 중앙정부는 세금을 징수하여 대규모의 수리사업을 추진하고, 효과적으로 군대도 통제하여 변방의 침입을 방어할 수 있었다. 세상이 혼란한 전시에는 중국의 농촌 역시 지방적인 무장조직(團練) 또는 자위대를 조직하였으나, 평화시가 되면 이러한 조직은 바로 해산되었다. 여기서 베버가 심취한 문제는 고대 그리스와 서양의 많은 지역에서는 씨족단체와 씨족단체 간 또는 부락과 부락간에 군사적 혹은 정치적 연맹을 결성하였으나, 중국에서는 어째서 이와 유사한 현상이 출현하지 않았고, 또 지방적인 세력들이 왜 단결하여 황권과 서로 겨루지 않았는가이다. 그 이유를 베버는 다음의 두 가지로 요약하고 있다. 중국인의 전통적인 ‘가천하’(家天下) 관념, 및 중국의 과거제와 문관제도가 바로 그 원인이라고 보고 있다. 즉 이 두 가지 원인이 중국에서 황권을 강화하고 절대군주제를 확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는 것이다.
첫째, 중국은 자고로 농업국이었다. 따라서 각종 중요 생활자원의 생산 대부분은 토지에 의존했으며, 토지는 또 선조로부터 대대로 전승되어 왔다. 그러므로 중국인은 선조를 신격화 하였고, 또 그로 인해 조상숭배의 습속이 뿌리내려졌다. 상(商)대와 주(周)대 이전에 천자는 본래 무력으로서 각 부락의 족장을 정복하고, 천하를 얻은 후 그 영토를 종실의 자제들에게 나누어(分封) 주어 봉건영주(封建采邑)로 삼았다. 그래서 종실의 후예는 조상숭배라는 심리적 기초위에 황제를 신격화하고 황제는 초자연적 비범한 능력의 소유자로 인식되었다. 통치자 역시 따라서 일종의 카리스마를 기초로 한 권위를 얻게 된다. 중국인은 이러한 권위는 지위 승계의 방식으로 남성 승계인에게 전승되는 것으로 믿었으며, 그것은 결과적으로 곧 왕위 세습의 ‘가천하’(家天下) 제도로 발전되어, 통치자는 국가를 사유 재산화(家産化) 하여 대대로 그 자손에게 물려(세습화) 주었다. 이러한 배경하에 유교의 소위 ‘효로써 부모를 섬기고, 충으로써 임금을 섬긴다’(以孝事父, 以忠事君)는 학설은 더욱 중국인의 의식구조를 군왕을 지지하는 ‘가천하’(家天下)의 행태로 기울게 하였다. 베버는 이를 바로 가산국가(家産國家, Patrimonialstaat)라고 명명하였다.
둘째, 중국의 역대 황제는 여러 방법을 동원하여 이러한 가산제 정권을 공고히 하였는데, 베버는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이 과거제와 문관제도의 채택이라고 보았다. 과거제는 유가 학설을 널리 확산하는데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과거시험의 내용은 바로 전문적 지식이 아닌 유가 경전에 따라 작문을 하는 전인적인 교양인(君子不器)을 선발하는 것이었다. 과거시험은 향시(鄕試)‧성시(省試)와 전시(殿試) 등 3급으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전시(국가고시)를 통과할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현대 관료제로 본다면 향시와 성시는 지방 고시에 해당하고, 전시는 국가고시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전시를 통과해야 만이 비로소 황제로부터 성급(省級) 독무(督撫)에 임명될 수 있었다. 각 관리는 자기 고향에 임명될 수 없고(相避制), 감찰어사가 그 행적을 감독하고 충정(忠貞) 정도를 평가하여 3년 임기 후에는 다른 지역으로 이동시켰다.
한편 각 지방에는 유력한 씨족집단(향신) 등의 유력자가 있어, 이들이 그 지방의 이해관계와 밀접히 얽혀 있었다. 독무는 중앙정부에 지방시험(省試‧鄕試) 합격자 중에서 지방관리 임명을 제청할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지방관리에 임명되고자 하는 자는 반드시 독무에게 뇌물을 바쳐 제청의 기회를 얻어야 했다. 독무 역시 상급 관원에게 뇌물을 바쳐야 만이 더 좋은 출세의 길이 열린다. 독무에게 뇌물을 바치는 자는 다름 아닌 지방의 토호 향신들인데, 독무로 임명된 관리가 제대로 활동을 하려면 지방의 토호(씨족의 원로 및 지방의 유지)로 부터의 저항을 고려하여야 했기 때문에 부득이 그들과 타협하지 않으면 아니 되었다.
독무의 또 하나 주요 직무는 중앙정부가 지방에 할당한 세금을 징수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것으로 관리들에게는 봉록을 주어야 했다. 뒤에는 화폐로 그 봉록이 대체되었다. 정부는 공식상으로는 관리에게 봉록을 지급하고 있었지만, 그 액수는 극히 미미하였다. 관리는 그것만으로 생활할 수 없었음은 물론, 직무상 지출해야 할 지방 행정경비는 책정된 예산을 초과하였다. 따라서 관리는 실제로 소요되는 자기의 생활비와 지방 행정경비를 백성들로 부터 수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렴주구가 이곳에서 나타난 것이다. 국가의 세수입을 탈취 또는 은닉하여 사복을 채우고 자제들의 과거를 위해 축재를 하는 것이다. 축재를 해야 그들의 가족이 관리로서의 특권을 지속하고 그것을 재생산해 나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관리의 축재와 지방관의 수탈은 민부(民富)의 축적을 불가능케 하였다.
이상의 맥락에서 볼 때 중국의 관리는 현대적 관료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현대적 관료는 전문적 기능을 갖고 제각기 권한의 원칙에 따라 법규대로 사무를 처리하는 것이다. 따라서 현대적 의미의 관리는 오직 전문인‧사무인이 되어야 하며 몰주관적(沒主觀的), 즉물적(卽物的)으로 사무를 처리해야 한다. 그런데 중국의 관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전문적 기능이 아니고 교양의 시험이었으며,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반적, 인격적으로 자기를 완성하는 것(君子不器)을 목표로 하였기 때문에 전문적 교육 및 전문적 기능의 발전을 저해하였다. 이처럼 중국의 관리는 전문적 지식을 갖추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고전 지식에 능한 선비들이라, 자연히 실무에 어두울 수밖에 없었으며, 규칙적인 행정업무를 잘 처리하지 못하였다. 여기에다 외지에서 임명되어 오기 때문에 현지의 풍토나 민정에 어두울 수밖에 없다. 따라서 지방 사정에 밝은 지방 하급관리의 도움에 의존해서 정무를 펼 수밖에 없었는데, 하급관리들은 또한 지방의 각 씨족세력의 영향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과, 정부조직의 운영은 결코 형식적인(제도화된) 법률에 의거하는 것이 아니고, 거꾸로 윤리적인 색채가 농후하였으며, 또한 관리의 축재와 지방관의 수탈은 민간자본의 축적을 불가능하게 하였다. 따라서 베버는 이상에서 지적한 이들은 모두 현대 자본주의 경제발전을 저해하는 요소로 작용하였다고 보았다.
종족(宗族) 조직 : 조상숭배는 유교 문화의 하나의 큰 특색이다. 종족조직은 조상을 함께 제사 지내는 가정을 기초로 형성된 조직이다. 중국의 전통농업사회에서 가정은 경제활동의 단위일 뿐만 아니라, 교육, 결혼, 의료, 간호, 노약자 보호, 상제례(喪祭禮) 등 여러 가지 기능을 하였다. 같은 종족에 속하는 가정은 공동의 토지를 소유하며, 종족 내의 공동사무는 종문 회의에서 결정한다. 종문 회의는 각 가정을 대표하는 기혼 남성으로 구성된다. 미혼 남성은 종문 회의에서 겨우 방청권만 있을 뿐이다. 여성은 재산을 상속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회의에 참여할 권한이 없다. 종문회의 이사회는 족내 각파의 장로로 구성되며, 그들은 각 가정에 분담된 회비를 거두고, 재산을 관리하며, 활동계획을 결정한다. 그중 가장 중요한 업무는 조상의 제사를 모시고, 족내 우수한 인재를 발굴, 교육시켜 과거에 응시하도록 하여 가문의 공명(功名)을 얻도록 하는 것이다. 때로는 관직의 매수도 주선해 주었다.
유교 사상은 개인에게 조상에 대한 제례를 십분 중시하도록 했고, 개인 역시 종족 조직으로 부터 실질적인 이익을 얻을 수 있었으며, 동일 지역의 종족은 또 자치조직으로 결합하여 상호 협조하고 지방의 공동사무-교량 보수, 도로 건설, 학교 건립, 치안 유지, 외부로부터 방위 등-를 관리하였다. 결과, 농촌은 ‘관리(官吏)가 없는 자치구’를 형성하였다. 이러한 ‘소우주(小宇宙)’인 촌락은 자족적이며 전통주의적이어서 어떠한 혁신 또는 세제상의 개혁도 거부하였다. 또 종족주의의 단체성은 개인주의 발전을 저해하였고, 가족식(家屬式) 공업은 대규모 독립된 자본주의 공업의 발전에 걸림돌이 되었다. 베버는 여기에 동양사회의 정체성(停滯性)의 근원이 있다고 보았다.
형식적인 법률의 부재 : 이상과 같은 과거제도와 문관제도 하에 중국인의 가장 전형적인 적응 방식은 씨족 내에 우수한 자제를 길러 열심히 공부시켜 과거에 합격, 관직을 얻어 특권을 누리는 문벌이 되는 길이지, 각 씨족이 단결하여 황제에 대항, 시민의 권리를 쟁취하는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중국 역사상 비록 일찍부터 당률(唐律)‧송률(宋律)‧명률(明律) 등 법률이 존재했지만, 그 내용은 모두 개인이 법률에 저촉했을 때 어떤 처벌을 받아야 하는가 등의 형법이었다. 이는 서구의 경우와는 다르다. 서구의 법률 대부분은 로마법에 근원을 두었는데, 로마법의 내용은 민법과 형법을 포괄, 전자는 시민이 당연히 가져야 할 권리를 보장한 것이고, 후자는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데 있어서 지켜야 할 규범을 규정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전통 중국에서는 ‘시민권리’의 개념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비록 법률이 있다 해도 그 속에서 유교 윤리의 색채가 농후했다. 베버가 중국의 전통사회를 규율하는 것은 ‘실질적 윤리’지, ‘형식적 법률’이 아니라고 판정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중국사회의 모든 조직 내에서 이처럼 ‘실질적인 예법’(윤리)은 자본주의 경제발전에 명백한 역기능을 하였다. 현대 자본주의는 반드시 합리주의에 기초한 형식적 법률의 존재를 필수 요건으로 하는데, 가산제 국가인 중국에서는 이것이 존재할 수 없었다.
종교조직 : 베버는 이상과 같은 사회조직 이외, 중국 사회는 서구와 같은 강하고 유력한 교회 단체가 없다는 데 관심을 기울였다. 중국에서 황제는 가산제 국가의 전통에 따라 최고 통치자일 뿐 아니라, 최고의 지위에 있는 대사제(大祭司)였다. 하늘과 땅과 황조의 선조들에게 제사를 올림으로써 기후가 순조로우며 국태민안(風調雨順‧國泰民安)함을 기원하는 것은 국가의 대전(大典)인 동시에 황제만이 독점한 권력으로, 그 중요성으로 말하자면, 일반 민간인이 천지신명이나 그 조상에게 제사 지내는 것과는 비견할 수 없는 것이다. 황제로부터 유생 출신의 문관과 대신에 이르기까지 모두 종교를 일종의 통치 도구로 하고, 그들은 민간이 각종 천지신명을 숭배하는 것을 허용함으로써 승려의 정치 및 사회적 지위를 가능한 한 폄하하였다. 결과, 속세의 통치자가 최고의 제사권을 장악하여 정치와 종교는 합치되었으며, 전체국가는 황제의 권위하에 통일되었다. 어사대부(御史大夫)가 가끔 상징적으로 진언하는 것 이외, 어떠한 세력도 황권에 대해 견제와 균형을 유지할 수 없었다. 고대 유태교에서는 제사장은 내세의 속죄론에 근거하여 독립된 윤리를 발전시켜 정치세력에 대항할 수 있었으며, 중세 유럽에서도 통치자와 민중은 공동의 신앙을 가지고있었기 때문에 교회도 종교에 근거하여 속세 통치자의 권한을 제약할 수 있었다. 이러한 현상은 전제 군주제하 중국에서는 역사상 한 번도 없었다. 그 결과 속세의 통치자가 중국사회의 모든 것(皇權과 神權)을 주재하는 실질적인 권력자가 되고, 따라서 “사람은 모두 평등하다”는 형식적인 법률체계 역시 발전하지 못하였다. 이처럼 형식적인 법률체계의 미발전은 경제발전을 방해하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였다.
이상에서 베버가 제시한 중국 사회구조에 대한 분석은 당시 서구 학문의 수준에서 볼 때 그 통찰력은 정말 대단한 것이었다고 보겠다. 베버는 이 연구에서 어째서 중국에서는 자본주의가 출현하지 못하는가에 대한 원인을 분석함은 물론, 더욱 세심히 주의를 기울인 것은 중국은 19세기 말에 이미 자본주의 태동에 유리한 몇 가지 사회 구조적 조건이 구비되어있었다는 지적이다. 청(淸)대 초기(1644-1911) 중국은 상당 기간 태평성대를 누릴 수 있는 시기였으며, 치수가 잘 되어 홍수범람의 상황도 이미 줄어들었으며, 농업기술의 개량은 중국 인구의 증가를 가져왔다. 15세기 말엽 6천만 인구에서 18세기 초 1억 2천만으로 증가하였다. 기타 개인재산의 증식, 인민의 거주이전의 자유, 직업선택의 자유, 토지의 자유 매매 보장 등 모든 요인이 자본주의 발전에 유리한 조건이었다. 뿐만 아니라 중국인의 영리 충동은 세인이 주지하는 바이며, 중국사회의 모든 계급에 편재해 있는 부에 대한 적극적인 평가는 세계의 어느 나라에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적극적이다. 이러한 세속적 현세에 대한 적극적인 태도, 세속주의와 공리주의적 중국인의 생활윤리는 일종의 합리주의와 결부된 것이다. 이러한 중국인의 정신적 특성과 또 상술한 바와 같은 외면적으로 대단히 유리하게 보이는 경제적 제 현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대적 합리적인 자본주의에의 발아가 없었다. 이유는 이들 자본주의에 유리한 요소가 필경 전술한 종족제도 및 가산국가의 구조가 조성한 장애를 극복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들 구조적인 장애는 또 중국인의 유교 윤리에서 배양된 일종의 ‘특수심리상태’이다. 이러한 특수 심리상태를 베버는 중국 에토스(Chinese ethos)라 했다.
2) 중국 에토스와 현대 자본주의
베버는 중국 에토스는 자본주의 발전에 걸림돌이 된다고 보았다. 그러면 베버가 본 중국 에토스의 특징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유교 사상에서 연원된 것이하 하였다.
베버는 『중국의 종교』의 결론 부분에서 유교 윤리가 다음과 같은 프로테스탄트 윤리와의 차이점(<표 > 참조) 때문에 자본주의 발전에 장애가 된다고 하였다. 그의 분석을 보자.
무술(巫術)과 전통에 대한 태도 : 프로테스탄트는 이단(異端)과 사설(邪說)은 인간이 신을 믿는 것을 방해할 것이라고 보고, 모든 무술과 미신을 배척, 오직 사람들이 하느님의 계율만 받들 것을 요구했다. 베버는 이러한 태도는 전체 ‘세계의 비마법화’(非魔法化, disenchantment of the world)와 과학의 흥기를 가져왔다고 보았다.
한편, 중국은 지배자 종교로서의 유교와 민중 종교로서의 도교가 양립되는 종교의 이중구조 사회다. 상층계급에 속하는 관료계층은 귀신의 괴력을 믿지 않았으나, 일반민중은 미신에 지배되어 영혼 및 귀신의 존재를 믿었다. 따라서 유교는 ‘천인합일’(天人合一)의 경계를 추구하고 또 음양오행설을 포용하였으며, 이로 인해 민중 종교는 풍수‧점술‧중의(中醫) 등 미신과 굳게 연계되어 ‘무술이 지배하는 세상’(magic garden)을 이루었다. 그 결과 이러한 사회에서 모든 자연과학은 물론 현대적 성격을 띤 과학과 합리적 경제는 발전할 수 없었다고 베버는 보았다.
<표 > 유교와 프로테스탄트 윤리의 특징 비교
종 교 비교항목 | 프로테스탄트 | 유 교 |
‧무술과 전통에 대한 태도 ‧인간과 우주의 관계 ‧인간관계 ‧자아통제 ‧부(富)에 대한 인식 ‧지식관 ‧세계관 | 배척, 도외시 긴장, 불안(극복) 非情誼的, 沒人格性 신의 의지 신봉, 내심자발(內心自發) 현세 금욕주의 자연과학 중시 세계를 합리적으로 통제(정복) | 용인, 고수 조화(순응) 인정주의, 연고우선 성현이 되는 것, 외면적 축재 교양 독서 세계에 합리적으로 적응(운명주의) |
또한, 유교의 윤리는 전통을 존중하고 신성시하는데, 프로테스탄트의 윤리에 있어서는 ‘전통의 신성성’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 특징이다. 베버는 프로테스탄트의 이러한 정신적 풍토에서 ’마술(魔術)에서의 해방‘이 비로소 가능하게 되었다고 본다. ‘마술로부터의 해방’은 미신과 주술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벗어나 냉정히 사실을 사실대로 객관적으로 인식하는 정신적 태도를 의미하는 것이다. 반면 유교는 개인에게 우주의 질서에 순응할 것을 요구하고, 예의를 준수하고 전통적 의무를 실천함으로써 사회질서의 안정과 조화를 유지케 한다. 따라서 유교 사상은 중국인으로 하여금 습속에 안주하고 권위에 복종하는 태도를 벗어날 수 없도록 했다.
인간과 우주의 관계 : 프로테스탄트에 의하면 인간은 신의 피조물로써 신의 은총을 받지 않고 자력으로 구제받을 수 없으며, 어떠한 작은 선(善)도 행할 수 없다는 철저한 비관적 태도를 갖고 있다. 따라서 인간은 신의 선택을 완전히 신뢰하여야 하고, 신의 부름에 따라 열심히 일하여 스스로 신의 ‘선민’임을 증명하여야 하는데, 이러한 신념은 프로테스탄트의 마음에 우주(자연)에 대한 고도의 긴장(불안)감을 조성한다.
반면 유교에 있어서는 인간의 본성은 선이고 자기수양(교육이나 경전의 숙독 등)에 의하여 지선(至善)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고 보았다. ‘왕이 도를 지키지 아니하고, 예를 벗어나며 의를 범하는 것’(君王無道, 悖禮犯義)이 인간의 분쟁을 조성하는 주요 원인이기 때문에 유교는 인간에게 영원한 우주의 ‘도’(道)에 순응하고 생활 속에서 예의를 지키며 전통적 의무를 실천함으로써 사회질서의 안정과 ‘조화’-天‧地‧人의 합일, 物我‧天我‧人我 不分-를 유지하도록 요구하는데, 이는 개인으로 하여금 사회와 자연에 대한 불안(긴장)을 최대한으로 감소시켜 준다. 불안(긴장) 갈등이 없으면, 개인은 우주를 합리적으로 극복하고자 하는 정신을 배양할 수 없다. 이러한 정신을 배양할 수 없으면, 도덕적인 독립심을 키우지 못한다. 때문에 베버는 프로테스탄트에 있어서는 역설적으로 ‘속세를 개조하는’ 태도를 취하며, 유교에 있어서는 ‘현세에 순응하는’의 태도를 취한다고 보았다.
인간관계 : 프로테스탄트들은 전지전능한 신에게 봉사하는 것이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책무며, 기타 모든 인간관계, 즉 개인과 혈연지간의 관계는 이러한 책무를 완수하기 위한 부차적인 수단에 불과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유교는 인생의 가장 중요한 책무는 전통적인 부모에 효를 다 하고, 그와 친밀한 관계에 있는 사람들을 돌보는 일이라고 보고 있다. 유교의 경우 가정 내의 인간관계의 유지와 증진은 인생의 목표이지, 수단이 아니다. 따라서 개인과 가정외, 기타인과의 인간관계는 비교적 부차적이다. 예를 들어 맹자(孟子)는 묵자(墨子)가 ‘겸애’(兼愛)를 주장할 때 바로 그를 두고 ‘아비도 없고 임금도 없으면, 짐승이다’(無父無君, 是禽獸也)라고 비판했다.
이처럼 유교 윤리에 있어서 인간관계는 보편적인 인간관계는 없고, 다만 가족중심의 ‘관계’(부자관계, 혈연관계, 鄕黨관계 등)여하에 따라 달라지는 ‘특수 개별적 성격’을 갖고 있다. 이러한 특수 개별주의가 지배하는 곳에서는 합리적 객관화와 보편적인 성격을 가진 목적단체가 생성되지 못하며, 객관적 목적에 의하여 결합되는 회사경영형태도 형성되지 못한다. 회사경영도 순수히 개인적 친족적인 관계에 의하여 운영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프로테스탄트윤리에 있어서 인간관계는 인간을 신의 피조물로 보기 때문에 이러한 인간관계를 부정하고 모든 것을 합리적‧사무적으로 대하는 태도를 갖는다. 이처럼 모든 일을 합리적‧사무적으로 처리하는 태도에서 보편주의 사회윤리가 나타나는 것이며, 합리적 즉물화(卽物化) 및 몰인격화(沒人格化)의 정신이 나온다고 베버는 보았다. 프로테스탄트는 즉물을 통하여 사회 전체를 합리적으로 운영하고자 하기 때문에 변혁적 적극적 성격을 갖게 되는 데 비해, 유교윤리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자아통제 : 프로테스탄트의 윤리에 있어서는 오직 신의 자유로운 ‘은혜와 사랑’에 의하여 인간의 운명은 결정된다고 믿기 때문에 신의 뜻에 맞는 행위, 즉 신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행위에 의하여서만 ‘구제의 확증성’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신교도들은 구제의 확증성 얻기 위하여 신의 도구로서 자기 생활 및 사회생활을 조직적‧통일적 방법에 의하여 규율화‧합리화 하고자 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만이 신의 영광을 현세에 빛낼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그들의 생활은 끊임없는 긴장된 활동에 의하여 특수한 금욕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이처럼 신교도들은 신의 영광을 빛내기 위하여 현세의 생활을 금욕으로 합리화함으로써 자기 구제의 확증을 얻으려 하였기 때문에 자제와 자율적인 인격의 기초를 형성하게 된 것이라고 베버는 보았다.
유교에 있어서는 근본적으로 ‘원죄의 관념’이 없었다. 그들이 소위 말하는 ‘죄’는 전통적인 권위‧부모‧조상 및 상사에 대한 모독을 범하는 것과 풍속‧전통의식과 안정한 사회질서를 위반하는 것이다. 개인이 덕성을 수양하는 목적은 현세의 장수‧건강과 부, 그리고 사후 불후의 이름을 남기는 것 등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금욕‧고통‧종교적 명상과 은거 등은 유교가 경시하는 것이었다. 유교도에게 있어서 자연적 충동의 억제는 ‘외면적 존엄의 윤리’에 대한 강조로 귀결된다. 베버는 정중한 거동‧동작 그리고 체면, 즉 ‘面子’가 바로 중국 윤리가치의 중심을 외부적 유형으로 나타내는 것이라고 보고 있다. 따라서 이와 같이 유교 윤리는 외면적인 것에 치중하여 내면성이 결여 되어 있기 때문에 기존의 사회환경에 외면적으로 적응하는 생활 태도가 배양되어 ‘현세에 무조건 긍정하고 적응’하는 것이다. 그리고 유교의 윤리는 심미적인 성질을 갖고 있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소극적이며, 어떤 특정한 내용을 갖지 않는 ‘태도’자체가 존중된다.”고 했다.
부(富)에 대한 인식 : 프로테스탄트의 경우 부는 그가 반드시 조심하여 배척해야 할 일종의 유혹으로 그가 신의 부름에 따라 그 천직에 진력한 부산물인 동시에 금욕과정에서 무의식적으로 얻은 결과라고 보았다. 프로테스탄트에게 인생의 최종 목적은 내세의 구속(救贖)을 얻는 것이지, 부를 얻는 것이 아니었으며, 인간은 신을 대신해서 부를 관리할 따름이지, 스스로 부를 소유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설적으로 그것이 자본주의 정신의 형성에 기여하였고, 현대 자본주의를 형성케 하였다고 베버는 보았다.
반면 유교의 경우, 현세를 어디까지나 긍정하는 공리주의와 도덕적 인격완성의 보편적 방법으로서의 부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부는 개인의 존엄을 유지하는 기초며, 검약의 목적은 바로 돈을 모으는 것인데, 그것으로서 일상적인 관혼상례의 각종 행사에 쓰고 동시에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고자 했다. 이러한 태도는 거대한 인구밀도와 결합하여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검약적인 태도와, 한 푼의 거래에도 세세하게 이해득실을 계산하는 습성을 조성했다. 이러한 부에 대한 관심이 철저함에도 불구하고 중국에서는 현대적 자본주의는 발전하지 않고 ‘정치적 자본주의의 여러 유형’, ‘관직에 결부된 고리대금업’ 등만 발전했다고 베버는 분석하고 있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부에 대한 평가가 높았던 중국에서는 현대 자본주의-서구식의 합리적인 경영조직, 상업조직, 상법, 장부, 기술적 발명 등)가 흥기하지 못했으며, 반면 부의 추구를 맹렬히 공격하고 고리대를 철저히 배격한 서구에서는 역설적으로 자본주의 정신의 형성이 가능했겠는가? 그 이유를 베버는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프로테스탄트의 윤리에서는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속죄의 확증을 얻고자 자기 생활의 내면을 조직적으로 합리화한다. 이러한 합리주의에 의하여 도덕적 반성도 부기의 성격을 갖고 있어 프랭클린과 같은 사람도 그의 일상생활을 일종의 부기에 의하여 규율하였다. 이와 같이 초월적 신앙은 인간의 내면적 태도를 통제하였으나, 유교도에 있어서는 다만 외면적 거동이나 체면(面子)만을 통제하였을 뿐이다. 외면적 체면 유지에만 주의를 기울인 유교도에게 있어서는 상호간에 내면적인 신뢰나 신용이 없었다. 하지만 프로테스탄트에 있어서는 특히 경제적 신뢰에 있어서 무조건 확고한 종교적인 신뢰가 있다. 그리하여 누구에게도 타당한 ‘정직은 최선의 정책’이란 객관적인 행동기준이 나타난다. 이것이 자본주의적 거래에 불가결한 조건이 됨은 말할 나위도 없다. 유교도에게 있어서는 전술한 심미적인 정중한 거동이 문제되나, 신교도에 있어서는 간략하고 절대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사무적인 보고, 즉 ‘가부’(可否) 그것 이상의 것은 악이라고 보는 것이다.
지식관 : 프로테스탄트는 인생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내세의 속죄(救贖)를 구하는 것으로, 개인은 한갖 하느님의 일종의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았다. 반면, 중국의 유교윤리는 전인적인 인격의 완성을 지향하기 때문에 전문인이 되는 것을 거부한다. 베버는 ‘군자불기’(君子不器)라는 말을 ‘유교 윤리의 핵심적 명제’로 보았다.
프로테스탄트들은 성서를 제외하고는 모든 철학적‧문학적 교양을 공허한 시간의 낭비 또는 종교적으로 위험한 것이라고 보아 배척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실용적이며 자연과학적 지식, 특히 자연과학의 경험적 지식, 실용적인 허식 없는 명료성을 요구하는 지리학적 지식, 그리고 전문적 지식을 교육목적으로 하였다. 이러한 지식은 신의 창조의 영광과 섭리를 아는 유일한 길로서, 또 다른 면에 있어서 그것은 직업을 통하여 현세를 합리적으로 지배하고 신의 영광을 빛나게 할 책임을 수행하는 수단이었다.
반면 유교도에 있어서는 전인적인 인격완성을 인생의 목적으로 독서인적인 교양인을 이상으로 하였다. ‘군자불기’라 하여 인간 자신은 바로 수단(도구)이 아닌 목적 그 자체로 보았다. 개인의 가장 이상적인 인간상이 바로 군자인데, 군자의 가장 중요한 자질은 덕(德)이 높은데 있다. 따라서 과거시험에서도 ‘유교 경전’의 작문을 핵심으로 하였고, 어떠한 전문적인 훈련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그것으로써 이윤을 추구하는 수단으로 삼지 않았다.
세계관 : 베버는 유교 윤리와 기독교윤리는 모두 합리주의라고 말하고, 그러나 이 두 가지 합리주의는 완전히 다른 정신 정향을 갖는다고 했다. 유교의 합리주의는 세계에 합리적으로 적응할 것을 강조한 데 비해, 기독교의 합리주의는 세계를 합리적으로 통제할 것을 강조한 것이라고 했다. 따라서 전자는 자연과학이 발전할 수 없었는데 반해, 후자는 자연과학의 지식체계가 발전하여 현대 유럽의 산업자본주의 발흥의 기초가 되었다고 했다. 결과적으로 유교 윤리는 사회 경제 질서의 변혁을 추동하여 자본주의를 발전시킬 수 있는 동인이 결여되었다고 보았다.
Ⅴ. 베버 이론에 대한 평가
1) 베버 이론에 대한 추종
베버이론에 대한 추종자-소위 신(新)유학파들은 유교윤리는 중국의 현대화에 장애가 된다는 주장에 동조하는 견해이다. 미국의 역사학자 John King Wright 부부를 비롯한 John King Fairbank, Joseph R. Levenson, 그리고 중국 정치문화연구의 저명한 학자 Lusian W. Pye와 Richard H. Solomon, 그리고 Lloyd E. Esman 등이 대표적인 학자다.
동치중흥(同治中興)의 연구로 저명한 미국 역사학자인 Wright 부인은 청말 동치기(同治期)는 여건상 중국이 현대화하기에 가장 좋은 기회였다고 말할 수 있겠으나, 동치중흥은 실패하였다고 보았다. 그 주요 원인을 다음과 같이 보았다. 당시 ‘양무자강운동’(洋務自强運動)을 일으킨 사대부들은 아편전쟁과 영‧불연합군의 침입에 계속 패한 후, 그들은 비록 ‘오랑캐의 장기를 배워서 오랑캐를 제압할 것’(師夷人之長技以制夷)을 주장하였지만, ‘자국중심주의’(我國中心主義) 심리가 완강하여 양무자강의 내용은 고작 동문관(同文館), 강남제조국(江南製造局)이나 소규모 조선공장 등과 같은 것을 건설하고, 그리고 유학생을 해외에 파견하는 것 정도였다. 이는 결국 유교의 변혁에 대한 저항 심리에서 나온 것으로 보았다. ‘유교가 요구하는 안정의 특성과 현대화의 조건이 정면으로 대립하여 충돌하였기’ 때문에 비록 현대화에 가장 유리한 조건에 있었으나, 유교 사회는 현대국가로 변화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녀의 남편인 Wright는 중국의 역대 유교 사상에 영향받은 명신(名臣)들을 관찰한 후 다음과 같은 13가지 ‘유교인의 인성적 특징’을 요약하고 있다. ① 권위에 순종, ② 예의 규범에 순종, ③ 역사 존중, ④ 학문을 좋아하는(好學) 전통, ⑤ 전범(典範)의 존중, ⑥ 특수(전문) 기능보다 도덕적 수양 중시, ⑦ 국가 및 사회의 평화적 개혁 선호, ⑧ 조심근신‧중용의 道 선호, ⑨ 경쟁을 좋아하지 않음, ⑩ 위대한 임무에 대한 사명감을 가짐, ⑪ 곤경 속에서도 자존심 유지, ⑫ 도덕 및 문화에 있어 이단의 배척, ⑬ 사람을 대함에 작은 것에도 세심히 주의를 기울인다는 것이다. 그는 “중국이 늙은 폐허 위에 새로운 사회 건설에 노력을 기울일 당시에도, 유교적 태도와 행위 모델은 황당하고 시의에 맞지 않아, 중국의 현대화에 장애가 되었다고 보았다.
이상 Wright 부부의 관점, 특히 그녀의 논점에 동조한 학자가 적지 않다. 그 중 Fairbank, Levenson, Schwartz 등은 그들 자신의 연구에서 직접 중국 현대화의 실패 원인을 전통(유교)문화의 정체성(停滯性)에서 찾고 있다. 그러나 이들이 그녀의 논점을 받아들인 배후에는 오직 유교 사상만을 비판한 것은 아닌 듯하다. 왜냐하면, 그들이 보기에는 유교 사상이 기왕 중국의 현대화에 걸림돌이 되었다고 할 때, 만약 중국의 현대화가 성공하려고 한다면 또 다른 하나의 사상이 없이는 불가능하며, 또 다른 사상은 바로 중국의 현대 지식인들이 반드시 서구문화에서 찾아야 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중국의 현대화를 위해 마르크스주의가 바람직한 것으로 보았다. 왜냐하면, 마르크스주의는 전통사상과 우상숭배를 부정하였기 때문이다.
시카고대학 교수였던 Levenson은 『유교 중국과 그 현대적 운명』이라는 저서에서 그는 철학사상‧관료제도‧정치문화‧사회심리와 이상적인 인격 등의 차원에서 명, 청 이후 공산당의 중국 통치 기간까지의 지식인의 유교 사상에 대한 태도를 분석하고 있다. 그는 이 책에서 청말 이후부터 서구화를 주장한 지식인의 심리에는 일종의 양면적인 곤경에 처해 있었다고 보았는데, 즉 그들은 이지적으로는 서구문화의 가치를 받아들이고 있었으나, 감정적으로는 오히려 서구에 저항하는 심리상태였으며, 그들은 감정상 중국의 역사문화에 빠져 있었으나, 이지적으로는 옛 전통을 지양하려 했다는 것이다. 청일전쟁 후 ‘신변법’(新變法)의 옹호를 주장한 주요 인물 중의 한 사람인 장지동(張之洞)이 그의 저서 『근학편』(勤學篇)에서 제기한 ‘중체서용’(中學爲體, 西學爲用)론은 이러한 심리를 가장 잘 반영한 것이라고 Levenson은 보았다. 張之洞은 “세상의 모든 일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영구불변한 ‘도’(道)이고 다른 하나는 시의에 따라 변하는 ’법‘이라고 보고, 法이라는 것은 변화에 따라야 하는 것이기에 반드시 같을 필요는 없지만, 道라는 것은 본(本)을 세우는 것이므로 하나가 아닐 수 없다”(法者所以適變也, 不必盡同: 道者所以立本也, 不可不一)고 보았다. 여기서 도는 바로 전통의 ‘삼강사유’(三綱四維), ‘윤기(倫紀)‧성도(聖道)‧심술(心術)’로 영원히 변할 수 없는 ‘중학’(中學)이며, 법은 곧 ‘공예‧기기‧법제’로 수시로 변화 가능한 ‘서학’(西學)이다. 따라서 소위 ‘중체서용’의 기본 함의는 바로 한편으로 유교의 전통문화를 옹호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서구에 대한 학습으로 ‘부국강병’할 수 있는 과기, 공예 및 자연과학을 흡수하자는 것이다.
Levenson은 서구문화의 충격 하에서 중국 지식인들의 전통문화에 대한 정감을 떨칠 수 없었던 이러한 여러 예를 제시하고 있다.예를 들자면, 강유위(康有爲)가 청말 광서(光緖) 때 ‘변법유신’(變法維新) 을 제창했는데, 그는 『대동서』(大同書)에서 이상 국가 건설을 희망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공자의 ‘대동’학설을 개양(開揚)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대동학설’로서 수천 년간 전해 온 중국 종법 봉건사회의 기초인 ‘가족제도’를 부정하는 식의 개혁 즉, 그의 개혁은 겨우 ‘옛것을 바탕으로 제도를 개혁하는 것’(托古改制)에 머물렀다.채원배(蔡元培) 역시 베이징대학 총장 시절 ‘유럽문화’를 대표하는 ‘과학과 미술’을 진흥하는데 진력하였지만, 그의 유럽문화에 대한 태도는 ‘서구화를 수입할 뿐만 아니라 반드시 서구화하는 가운데 그것(중국 전통문화)을 더욱 진일보시킬 것’(非徙輸入歐化, 而必於歐化之中爲更進之發明)을 견지하였고, 중국 전통문화에 대해서는 ‘국수(고유한 역사, 문화)를 보존할 뿐만 아니라, 반드시 과학적인 방법으로써 국수의 진면목을 드높일 것’(非徙保存國粹, 而必以科學方法, 揭國粹之眞相)을 주장하였다.
중화민국 초기 일반 백성들 역시 전통문화에 대한 정감에 젖어 있었기 때문에 군벌 정객들은 공맹(孔孟) 학설을 제창하여 자신의 기득권을 옹호하려 한 것이나, 1915년 원세개(袁世凱)가 황제의 복귀를 꾀함에 있어 ‘공자를 받들고 경전을 공부할 것’(尊孔讀經)을 주장하고 유교를 국교로 추존하려 한 경우가 그 예다. 오우
황제제도 복구(洪憲帝制) 실패 후, 각 성(省)의 군벌은 자기세력 확대를 위해 제국주의자와 결탁함으로써 반대파에 대항했으며, 1919년 5‧4운동이 폭발하자 지식인들이 우국충정의 격동 하에 공자의 상점(孔家店)을 타도하고 유교 전통을 반대하는 흐름을 형성하였다. 많은 서구 사조에 깊은 영향을 받은 엘리트들, 자유주의를 주장한 호적(胡適), 사회주의의 진독수(陳獨秀)와 이대교(李大釗), 무정부주의의 오치후(吳稚暉), 그리고 노신(魯迅), 오우(吳虞) 등과 같은 지식인들 모두 유교를 공격하는 진영에 가담하였다. 그들은 유교 사상을 ‘사람 잡아먹는 예교(禮敎)’라고 통렬히 비난하였고 심지어는 ‘근사하게 만든 고서들을 모두 똥통에 쳐넣어 버리라는 말’까지도 서슴지 않았다. 그들의 공격하에 중국인의 나쁜 근성, 즉 전족(纏足)‧축첩‧아편흡연‧우매‧이기주의‧오만 등등과 같은 국민성을 모두 죄악시했으며, 유교의 가치체계는 전제정체가 자신의 이익을 옹호하고 민중이 봉건적 의식행태를 받아들이도록 강요하는 것으로 치부하였다. 나라를 구하고 국가를 현대화시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수천 년 이래의 봉건 예교의 속박을 탈피하고, 종법 사회의 유형‧무형적인 정신적 멍에를 타파해야 한다.”고 외쳤다.
이처럼 중국은 5‧4운동 후 지식인들의 유교에 대한 맹렬한 공격으로 중국 사회를 유지해 온 가치체계는 붕괴상태에 빠지고, 이 틈을 타 공산주의가 들어왔으며, 1940년대에 이르러서는 공산당이 위세를 떨치게 된다. Levenson은 1949년 공산당이 정권을 수립하자 바로 유교 사상은 사망했다고 선언하였다. 그는 유교 사상과 봉건 종법 사회는 불가분의 관계라고 보고, 중국은 봉건 사회로 부터 이미 공산사회로 진화되었음은 물론 마르크스주의는 당연히 유교 사상을 대신했기에 유교 사상은 더욱 박물관으로 들어가는 운명을 피하기 어렵다고 했다. 그는 공산주의와 과학은 피차 상용(相容)하므로 한 사람이 ‘우홍우전’(又紅又專)할 수 있고, 공산주의자라면 또 과학적 지식을 구비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군자불기’(君子不器)의 전통을 요구하는 유교는 유교 사상과 과학을 물과 불처럼 상용할 수 없게 한다고 했다. “중국이 과학을 보유하고 이용하기를 바란다면 반드시 먼저 유교 사상을 붙잡아 가두어, 그것이 횡행할 수 없도록 해야 한다. 과학을 보급하는 곳에는 공자를 유리 궤짝 속에 잠가 두어야 한다. …공산당원은 반드시 공자를 매장하여 재단으로 보내야 한다. 공자는 이미 역사적인 명사로 변했으며, 다시 옛 도덕을 옹호하는 열기는 일어날 수 없으며, 그들은 이미 철저히 와해되었다.”고 본 그는 유교의 미래를 비관하면서 유교의 운명은 다 했다고 주장했다.
Pye, Solomon 그리고 Esman 등도 이상과 같은 관점에서 중국의 전통사상과 현대화의 관계를 분석하고 있다. 그들은 중국전통은 지나치게 집단을 중시(국가가 아닌 가족을 지칭)하고 권위에 복종함으로 독립 자주적인 인격을 배양할 수 없다고 보았다. 즉 중국 전통문화의 ‘동기 모델’은 ‘의뢰적’이지, ‘자주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중국의 전통문화는 서구와 같은 다이나믹한 점이 없으며, 중국문화가 주는 감각은 비교적 소극적이고 비적극적‧비주동적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전통에서 배양되는 인성은 농업사회의 생활에 어울리는 것이지, 현대 민주사회에의 요구에는 적응할 수 없다고 그들은 보고 있다. 따라서 중국의 현대화는 전통문화의 극복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주장들이라 하겠다.
타이완의 일부 학자들도 이러한 관점에 동의하고 있다. 즉 대만대학의 문숭일(文崇一) 교수는「가치 정향에서 본 중국 국민성」(從價値取向談中國國民性)」이라는 논문에서 중국인의 가치 정향은 전통과 권위 지향적이며, 중농(重農)과 공명(功名)의 중시, 화(和)와 의(義)를 중시하는 도덕 정향이라 했다. 만약 모든 사람이 권위적이고 복종적인 환경에서 오래 생활한다면, 전체사회는 바로 생기를 잃고 사회는 창의적인 퍼스네리티를 배양할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이러한 특징과 E. E. Hagen의 이론(On the Theory of Social Change)은 의도적이 아닌데도 합치하는 점이 있다. 헤이건의 이론은 한 사회의 창의적인 퍼스네리티의 배양 가능성 여부가 한 국가의 경제발전 가능성 여부를 결정한다는 논지다. 바꾸어 말하면, 보수적인 사회에서 창의적인 퍼스네리티를 배양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며, 창의력이 없는 사회는 발전하기 어려우며, 경제발전 역시 논할 수 없다는 것이다. 헤이건의 이 이론은 1960년대와 1970년대 초기에 적잖은 학자들에 의해 중국이 현대화되지 못하는 원인을 규명하는데 원용되었다.
2) 베버 이론에 대한 수정과 비판
1970년대 중엽 이후 상술한 이러한 베버의 이론과 그 추종자들의 관점에 대해 많은 학자들이 회의를 느끼고, 따라서 그에 대한 수정과 비판을 가하고 있다. 비판의 초점은 학자들의 전문분야에 따라 여러 가지 시각에서 논급되어 지고 있지만, 특히 국·대만·홍콩·싱가포르 내지 일본 등 동아시아지역의 경제 기적에 초점을 맞춘 학자들은 “유교사상이 동아시아의 경제발전과정에 일익을 담당하였다”고 주장, 베버의 이론에 수정을 요구하거나 비판을 가하고 있다.
H. Kahn, Morishima, L. P. Jones와 사공일, 홍콩 중원(中文)대학의 김요기(金耀基) 교수, 타이완대학의 황광국(黃光國) 교수 등이 그 예이며, Peter Berger 역시 유교 윤리와 동아시아의 경제발전에 평가의 초점을 맞추고 있다. 특히 투웨이밍(杜維明), Wm de Bary, Roderick MacFarquhar, Ezra Vogel 등의 학자와 싱가포르의 이광요(李光耀) 전 수상과 같은 정치인들은 유교적 가치가 경제발전에 기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보다 질서 있고 조화롭고 안정된 사회를 가능케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수에즈운하 이동에서 가장 서구적이라고 불리는 이광요의 경우 여기서 진일보하여 서구식 자유민주주의를 정면으로 비판함과 동시에 '아시아적 가치'(asian values)의 우월성을 역설하기 시작하였다.
적극적인 측면에서 Kahn은 베버와 반대로 유교윤리로서 동아시아 경제기적의 신화를 해석하고 있다. 그는 동아시아사회는 모두 ‘후기 유교 문화’(post-Confucian culture)권에 속한다고 보았다. 한국·일본·대만·홍콩과 싱가포르의 국민들이잘 단합하여 경제적인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주요 원인은 그들 대부분이 유교 사상의 교육을 받은 공통의 문화적 특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의 이러한 견해는 이미 학계에 광범한 관심을 불어 일으켜, 적어도 유교 윤리가 경제발전에 도움이 된다는 하나의 합리적인 가설이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Kahn은 동아시아 경제발전에 유리한 작용을 한 유교문화의 특징으로서 다음 네 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① 가정 내의 사회화 과정, 특히 자제·교육·기예(技藝) 학습, 그리고 엄숙한 태도로 일과 가정과 의무에 임하는 것을 강조한다.
② 개인이 합의한 바의 집단에 협조한다.
③ 계층을 중시하고 그것을 당연시 한다.
④ 인간관계의 상호 보완성 존중. 이 점과 ③의 관념이 결합하여 개인이 조직 속에서 지각하는 공평감을 증가 시킬 수 있다.
물론 유교 문화의 특징은 국가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다. 예를 들면, 위의 ②에서 지적한 ‘집단’의 관념도 중국에서는 가정, 일본에서는 작업집단을 일컫는다. 그러나 비록 이처럼 유교 사상의 구체적 내용이 학자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긴 하나, 그들 대다수는 유교 윤리가 동아시아 국가의 경제발전에 도움을 주고 있다고 본다. 즉 베버의 “유교 윤리는 현대 자본주의 발전에 걸림돌이 된다”는 주장과는 상치되는 이론이다. 예컨대, M. Morishima는 유교 사상의 지식 중시 경향은 일본이 덕천막부(德川幕府) 시대 서구의 과학지식을 흡수하는 데 유리하게 작용하였다고 주장했다. L. P. Jones와 한국의 사공일은 유교 전통은 한국의 높은 기업가 정신을 구성하는 중요 인소라고 보았다.
또 많은 학자들은 유교전통이 화교가 동아시아 경제를 장악할 수 있는 중요 요인이라고 보고 있다. S. M. Alatas는 말레이시아 화교에 대한 연구에서 중국인(화교)이 상업적으로 성공한 것은 베버의 소위 “유교는 경제발전에 유해(有害)하다”는 논단(論斷)을 발 못 붙이게 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말했다. “부와 영예와 건강에 대한 강렬한 동기, 가정과 조상에 대한 경건심, 이것들은 추호도 의심할 여지 없는 결정적인 문화적 요인으로 일종의 생기에 찬 경제행위를 펼수 있는 힘이다.” 이처럼 Alatas는 유교 윤리가 말레이시아 경제발전에 적극적인 순기능을 하였음을 긍정하긴 했지만, ‘문화적 해석’ 방법을 택한 것은 결코 아니다. 그는 화교가 말레이시아에서 경제적인 성공을 한 것은 그 정치·사회적 인소로 부터 해답을 찾아야 한다고 했다. 그는 중국인이 말레이시아에서는 경제적 성공을 거둘 수 있었으나. 왜 전통 중국에서는 이것이 불가능했는가를 자문하면서 그것은 사회의 역사와 조건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즉 영국이 말레이시아에서 강조한 자유무역·법치·질서 잡힌 행정체계가 경제발전에 필요한 안전과 안전의 조건을 제공했기 때문이었다고 주장했다.
S. Andreski 역시 크게는 이와 같은 견해에 동의하였다. 즉 그는 유교 학설은 기본적으로 실제적·합리적이라 말할 수 있는데, 이는 베버가 말한 자본주의 ‘불발생’의 원인과는 다르다고 했다. 그는 유교가 자본주의에 대단한 걸림돌이 되기는 하지만, 그것은 유교의 경제윤리에 기인한다기보다는 오히려 유교가 관료 정치구조를 강화하였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MacFarquhar는 그래서 후기유교의 함의를 제기, 20세기 말기 ‘후기 유교시대’에 있어서 유교의 이데올로기는 동아시인의 ‘내재적 준거(準據)’가 되어 이 지역의 경제발전을 가속화시켰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하나의 중요한 '후기 유교 가설'(post-Confucian hypothesis), 즉 “서구의 개인주의가 산업화의 초기 발전에 적합하였다면, 유교의 ‘집단주의’는 아마 대량산업화의 시대에 더욱 적합할 것이다.”라는 가설을 제시하였다.
그 후 P. Berger는 ‘두 가지 유형의 현대화’ 개념을 제시한다. 그는 오늘날 세계는 이미 두 가지 유형의 현대화가 출현했다고 보고, 서구식의 현대화 외에 동아시아사회에 역시 이미 새로운 특수한 성격을 가진 현대화 현상이 나타났다고 하였다. 그는 베버와 마찬가지로 문화적 접근방법을 통해 현대화의 동인을 분석, 서구현대화의 근원은 기독교윤리이고, 동아시아 현대화의 동인은 유교 윤리라고 했다. 따라서 그는 서구현대화의 근원이 기독교윤리라고 본 점에서는 베버의 명제에 동의하였으나, 동아시아 현대화의 뿌리는 유교 윤리라고 함으로써 “유교 윤리는 경제발전에 걸림돌이 된다.”는 베버의 가설에 정면으로 도전하였다.
그러는 한편 그는 어째서 전통 중국에서는 자본주의가 나타나지 않았는데, 현대 동아시아에서는 현대화의 새로운 국면이 출현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여 베버를 변호하는 입장에서 유교의 성격변화를 설명하고 있다. 즉 그는 베버가 제시한 유교윤리-사대부와 유리(儒吏, 유교 관리)의 유가 사상으로 강렬한 현실주의지만, 지나치게 보수성향을 띠어 합리성을 촉발할 수 없음-는 전통 중화제국의 국가 통치이념이었지, 일반 백성의 일상적인 윤리인 유교 사상과는 거리가 먼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일반 백성의 일상생활에서의 노동윤리, 즉 ‘통속적인 유교 사상’(vulgar Confucianism)을 오늘날 동아시아 현대화의 동인이 된 다른 일종의 유교 사상이라고 보고, 유교 사상을 ‘反현대화’의 역할을 한다고 본 베버의 견해는 틀림이 없으나, 단 베버는 유교가 제국의 보수주의로부터 해방되어 일반 백성의 일종의 노동윤리가 되어 현대화에 순기능을 하리라는 것은 예견하지 못했다고 변호한다.
‘통속화된 유교사상’이란 일반 백성이 근면하게 열심히 일하는 신념과 가치를 유발하는-주로 심화된 계층의식, 개인은 가정을 위하여 열심히 일하고 저축하며, 그리고 기율을 지키고 근검절약하는-규범인데, Berger는 이러한 신념과 가치가 동아시 문화의 공통적인 구성 인소라 보았다. 그는 또 이러한 ‘통속적인 유교 사상’이 고도생산의 노동윤리가 되어 ‘유교의 연대 규범’(norms of solidarity)으로 전통적인 제도(가정, 계층화된 제국)로 부터 현대적인 제도(회사, 공장 등)로 바뀌었다고 주장했다.
이상과 같은 ‘후기 유교 가설’과 ‘두 가지 유형의 현대화론’은 많은 학자들에게 베버의 유교 윤리관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였다.
이 밖에도 동아시아 경제성장 기적의 원인을 유교 문화에서 찾는 학자가 많다. 하버드대학 경영대학의 조지 롯지(George Lodge) 교수와 『일본은 제일이다』라는 유명한 책을 쓴 하버드대학의 에즈라 보겔(Ezra Vogel) 교수는 최근 『이데올로기와 국가의 경쟁력』이라는 저서에서 앞으로 세계의 경제전쟁은 서양의 개인주의와 동아시아의 공동체주의 간의 경쟁이 될 것이라고 하였다. 그들에 따르면 개인주의의 대표적인 국가는 미국과 영국이고 공동체주의의 대표적인 국가는 한국, 중국, 일본이라고 하였다. 그런데동아시아의 공동체주의는 유교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했다. 하버드대학의 세계적인 동양철학의 권위자인 투웨이밍 교수 역시 동아시아의 놀라운 경제발전은 신유교 윤리 때문이라고 하고, 전통적인 유교 윤리에 기독교윤리가 합쳐진 것을 신유교 윤리라고 하였다. 그러면 신유교 윤리는 어떤 특징이 있는가? 투웨이밍, 에드윈 라이샤워, 에즈라 보겔 교수 등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특성이 있다.
첫째, 서양의 개인주의는 인간을 모두 모래알과 같이 서로 떨어진 고립된 존재로 생각한다. 그러나 신유교 윤리는 인간이 그런 것이 아니라 각종 인간관계의 중심으로서의 존재임을 강조한다. 따라서 각종 인간관계로 구성되는 각종 조직 체내에서의 인화와 화합을 중시한다. 그러므로 서양인들과는 달리 동아시아인들은 개인의 권리보다는 가정, 기업체, 국가 등 조직체에 대한 의무를 중시한다. 기독교를 교회 종교라고 한다면 유교는 가정종교라고 할 정도로 가정을 중시한다. 동아시아인들은 가정이나 가족을 떠나서는 사회생활을 할 수 없을 정도로 가정을 중시한다. 동아시아에서의 가정은 소비, 소득 및 복지의 기본단위가 된다. 서양의 복지는 국가복지 또는 사회복지가 주가 되나 동아시아의 경우에는 가족복지가 더 중시된다. 동아시아인들은 노후의 복지를 자식에게 의존해야 한다고 생각하므로 남아선호사상이 특히 강하다. 그러나 반면 동아시아인들은 가부장적 성향이 강하므로 각종 조직체의 장이 되면 구성원들을 가족처럼 다스리려는 성향이 높다. 동아시아인들은 나라도 나라의 집, 즉 국가(國家)라고 한다. 뛰어나게 성공한 사람도 대가(大家)라고 하듯이 ‘가’(家)자를 특히 중시한다. 가정을 바탕으로 하는 강한 공동체 의식이 동아시아인의 기본 이데올로기인 것이다.
둘째, 유교 경전인 『논어』(論語)는 첫 줄부터 “배우고 배운 것을 때때로 익히는 것은 또한 즐거움이 아닌가.”(學而時習之不亦說呼)라고 하듯이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리고 신유교 윤리는 인간의 자기 향상과 수신을 강조한다. 유교에서는 나무는 불과 몇 년 안에 다 자랄 수 있으나 인간은 평생 자기 자신을 가꾸고 끼워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동아시아에서는 경제성장에 필요한 인적 자원형성이 잘된다. 따라서 한국과 일본에서는 우수한 근로자, 기업가, 관리가 많이 나올 소지가 크다. 따라서 경제성장에 필요한 유능한 기업가, 근로자와 정부 관료를 거의 모두 자급자족할 수 있었다. 동아시아에서의 법은 주로 공공질서의 유지를 위한 것이며, 인간의 사회생활은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 등 유교 규범에 의존하는 경향이 심하다. 동아시아인들은 심지어 법정에서조차 법보다는 인정을 중시하려는 경향이 있다. 서양의 개인주의 사회는 법률사회이므로 모든 것이 공식적인 법률과 계약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동아시아에서는 개인 간의 문제를 법률보다는 비공식적 인간관계나 유교규범에 의하여 해결하려고 하는 경우가 많다.
셋째, 서양의 개인주의 국가에서는 정부는 정부이고 국민은 국민인 것처럼 서로 대등한 관계에 있다. 그리고 작은 정부이다. 그러나 유교문화권에서는 다르다. 우선 정부는 국민에게 모범을 보이고 국민을 선도하며 교육하고, 국가의 경제발전에서 리더십을 발휘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국민도 정부가 국민의 복지에 대해서도 책임을 져야 한다고 믿는다. 따라서 동아시아에서는 정부의 역할이 과대해지고 경제운영도 정부 주도가 될 소지가 크다. 정부 중심사상 때문에 동아시아에서는 젊은이들이 직업선택에서도 관직을 선호하는 성향이 크다. 유능한 젊은이들이 정부 관리가 되므로 동아시아의 정부 관리 수준도 상대적으로 높게 된다. 그러나 기업이나 국민에 대한 각종 규제와 간섭도 많아지게 되는 단점도 있다. 미국에서는 학교를 졸업하는 우수한 젊은이들은 정부보다는 민간 기업을 선호한다. 그리고 서양인들은 시장제도의 ‘보이지 않는 손’의 기능을 중시하는 데 반하여 동아시아인들은 정부의 ‘보이는 손’의 리더십을 강조한다.
넷째, 유교는 현세종교이다. 그러므로 유교 사상에 젖은 사람들은 전세와 내세를 별로 중시하지 않고 현세에서 생의 의의를 찾고 실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실용주의 사상이 강하고 현세에서의 행복이나 물질적 부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와 같은 특징이 있는 동아시아의 유교 윤리는 서양의 개인주의적 자본주의 보다는 인간을 덜 개인주의적이고, 덜 이기주의적이고, 덜 법률적이고, 덜 공식적이고, 덜 계약적이 되도록 한다.
이상과 같이 1970년대 중엽 이후 여러 서구 유학자들이 ‘프로테스탄트윤리론 유추’(the Weberian Protestant ethic analogies)에서 뽑아낸 ‘후기 유교 가설’의 요체는 다음과 같이 간추릴 수 있다.
① 동아시아의 일본, 한국, 대만, 홍콩 및 싱가포르(그리고 최근에는 중국대륙) 같은 나라들이 지난 한 세대 전후하여 고도 경제성장을 이룩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문화의 전통적 요소가 기여조건으로 작용하였다.
② 이 나라들은 유교가 지배적이었던 문화유산을 공통으로 간직하고 있다.
③ 이들이 공유하는 전통적 요소 가운데서 유교적인 가치 정향과 행동규범들이 국민의 정치경제적인 행위에 영향을 미쳐서 자본주의적 고도성장이 가능하도록 기여하였다.
④ 이는 마치 서양의 자본주의 전개 과정에서 프로테스탄트윤리가 작용했던 것과 흡사한 역학에 의하여 이루어졌으므로, 동아시아의 유교윤리는 서구의 프로테스탄트윤리와 ‘기능적 등가물’로 본다.
Ⅵ. 베버를 넘어서
이상의 두 견해는 모두 일면적인 편향성을 갖고 있다. 전자는 도구 합리성만 강조한 나머지 유교의 순기능(진면목)을 소홀히 한 것 같고, 후자는 동아시아의 현대화에서 유교적 문화유산이 마치 현대화의 모든 과정에서 적극적인 구실을 했을 뿐 아니라 앞으로의 발전에도 궁극적으로 유용한 지침이 된다는 식으로 견강부회(牽强附會)하려는 유혹이 없지 않다. 현대화를 기독교화 한 전자의 주장도 문제지만, 후자의 과장된 논지도 경계해야 할 필요가 있다.
1) 도구 합리성의 차원을 넘어서
베버는 서구 현대화의 바탕은 ‘합리화’ 라 하고, 동아시아문화가 서구에 비해 상대적으로 ‘합리성’이 결핍된 것으로 보았다. 베버가 말하는 ‘합리성이란 곧 ’도구(형식) 합리성(instrumental rationality)을 일컫는 것인데, 이 개념이 포괄하는 주요 내용은 바로 기술적 합리성과 경제적 합리성이다. 동아시아의 공업화 초기에 전개된 사유의 전형 역시 과학기술과 공업, 상업자본주의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도구 합리성’의 팽창에 따른 악영향은 날로 만연해 지고 있으며, 인간이 지닌 비판정신의 자원은 오히려 날로 줄어들고 있다. 즉 도구 합리성에서는 한편으로 합리적 유형의 과학·합리적 법률·행정체계 및 합리적인 자본주의 노동조직이 생겨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기본 정향상 도구 합리주의에 바탕을 두고, 공리주의의 강력한 지배를 받기 때문에 현대화에 따른 여러 가지 병폐를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 이러한 두 양상은 형식적 합리성과 실질적 비합리성, 혹은 도구적 합리성과 가치적 비합리성으로 표현할 수 있다. 현대 상업사회의 환경오염, 인간성 상실, 도덕적 타락 등은 모두 도구 합리성의 단편적 지배의 결과이다. 국가와 지역 간의 관계를 말하자면, 도구 합리성을 기본 정향으로 삼은 현대화는 결코 민족과 문화의 충돌을 자동적으로 해결할 수 없으며, 전쟁을 억제·소멸시킬 수는 더더욱 없다. 탈냉전시대에 ‘문명 간의 충돌’을 예견하고 있는 S. Huntington류의 민족과 지역 간의 긴장 관계는 우리에게 문화 합리성의 새로운 인식을 요구하고 있다.
동아시아 현대 사상사의 뚜렷한 특징 중의 하나는 자신들의 전통을 경시하거나 부정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전통사상에 대해 긍정적 입장을 취하는 것도 어디까지나 서양 현대성의 의미 범주하에서 그 긍정적 요소를 발굴해 낸 것이기 때문에, 결국 이처럼 문화상으로 전통문화 중 어떤 부분이 서구의 요소에 유사한가에 대한 주목은 자본주의의 성장과 도구 합리성의 발전을 돕는 결과를 낳았다. 그러나 일본과 한국을 비롯한 ‘네 마리 용’을 모범으로 삼은 동아시아는 그 경험상 아래와 같은 현상을 노정하였다. 즉, 동아시아 현대화는 스스로의 특색과 현대성을 띠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집단과 권위의 중시, 교육에 대한 배려와 관심, 현실적 문제에 대한 집착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런 것들은 모두 동아시아 전통유교 문화의 유산인데, 더욱 중요한 것은 미래를 대비함에 있어서 동아시아는 당연히 적극적으로 전통문화의 정신적 자원으로부터 그 실마리를 끄집어내고 그것을 현실에 적용시켜, 인류가 당면한 과제를 해결하고, 동아시아 국가 간의 더욱 긴밀한 협조 속에서 현대세계를 건설해야 하는데 있다.
동아시아의 전통적 가치가 현대사회에 주는 의미에 대한 토론과정 중, 학자들은 동아시아 사회 경제의 성공으로 부터 유래된, 공동으로 향유할 수 있는 가치 정향에 대해 주목해 왔다. 이것은 물론 동아시아 현대성의 일부분이기는 하나, 또한 이것은 여전히 경제기능의 좌표 안에서 가치문제를 다루고 있다. 우리는 도구 합리성의 차원을 넘어, 현재 인류가 처한 세계의 문제를 대함에 있어 미래의 동아시아 전체의 요구를 주시해야 할 필요성에 직면해 있다. 이것은 마치 Schwartz가 지적했듯이 사실상 유학의 가치는 동아시아 국가들이 뒤늦게 현대화를 이루는 데 있어서 장애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동아시아 현대화 과정 중에서 유교적 윤리의 관념 정향은 결코 그 핵심적 본질은 아니다. 그러므로 베버식의 현대화에 대한 도구적 이해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합리적(도구 상에 있어서 합리적일 뿐만 아니라 가치상에서도 합리적인)인 현대 동아시아 문화를 건립해야 하며, 반드시 유교 윤리의 핵심을 대표할 수 있는 문화실천, 사회 이상, 그리고 문화 정향 등의 보편적 가치에 주목해야 한다.
2) 유교의 보편성을 찾아서
지금까지 동아시아의 현대화와 유교와 관련해서 자주 언급의 대상이 되어 온 항목들은 주로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일반적인 현세지향, 특히 세상사에 대한 적극적 태도라든가 인간조건의 변용가능성과 완성가능성에 대한 믿음; 자아를 중심으로 점점 넓혀가는 인간관계와 상호 연관성의 흐름; 자기수양의 중요성; 지속적인 기율의 생활, 특히 근면과 검소의 강조; 호혜성의 형식으로 나타나는 의무의식; 개인중심성의 기피 또는 집단지향성; 민사적인 소송기피 현상; 권위의 존중과 동시에 권위의 책임 중시; 도덕적 공동체로서 정치질서의 인식; 정부와 정치지도자의 주도적 지위 필요성 인정; 사회적 화합과 안정의 기초로서 가족에 대한 관심의 중시; 교육의 우선적 중요성 강조 등이다.
이상 여러 항목 중에서 베버가 제시한 프로테스탄트윤리의 현세적 금욕주의적 이념형이 담고 있는 항목들은 현세지향과 기율(근면, 검소 등) 및 일종의 도덕주의 정도라 할 수 있고, 나머지는 비교적 동아시아에 독특한 인간관계중심주의, 권위주의, 집단주의(가족주의)로, 서구식 합리주의, 개인주의, 자유주의와 같은 자본주의 정신의 이념형과는 걸맞지 않는 요소들이다.
이렇게 보면, 베버 이론 및 신(新)베버 학파의 관점에 대한 수정 및 보완의 입장을 견지한 학자들은 일방적으로 베버식의 프로테스탄트윤리의 논리로 ‘후기 유교가설’(the post Confucian hypothesis)을 제시하고 과장하는 자세가 아닌가 생각된다. 따라서 지금 해야 할 일은 유교에서 긍정적인 요소들을 확인하고 그것을 새로운 빛 속에서 해석하고 살찌워 동아시아의 현대화 프로그램의 증진에 도움이 되게 하는 것, 즉 유교의 보편적 가치를 찾는 것이다. 실제로 유교는 성격상 양면적이어서 그 관점 가운데 상당수는 보편적 가치가 있다.
먼저, 유교가 품고있는 휴머니즘, 즉 ‘인’(仁)의 이론에서 표현된 백성에 대한 사려와 존중은 인간의 물질화 현상이 범람하고 있는 오늘날 특히나 가치가 있다. 『논어』에서 공자가 가장 빈번하게 언급하고 있는 仁의 개념은 유교의 요체다. 유교에서 仁의 개념을 너무 다양하게 해석하고 있기때문에 학자들 사이에서는 이 개념에 대한 논란 또한 다양하게 제기되고 있다. 우리로서는 공자가 이를 두고 특별히 언급한 것에 촛점을 맞추기보다 仁의 일반적 의미에 주목해야 하리라고 본다. “번지(樊遲)가 仁에 대해 물었다. 공자는 대답했다.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仁이다.”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것(愛護衆人)’, 이것이 유교가 仁에 내린 가장 정확한 정의인 바, 이것이 바로 인간관계를 규율하고 조율하는 지고의 원칙으로 받아 들여졌다. 이를 개개인의 행동에 적용할 때 사람은 “자기가 바라지 않는 바를 남에게 베풀지 말라.” “소위 인자(仁者)란 자기가 서고 싶은 자리에 다른 사람도 설 수 있게 하고, 자기가 뜻을 이루고자 하면 다른 사람도 뜻을 이루게 해 준다.”이처럼 공자에 의하면 仁은 다른 사람의 존재를 인정하며, ‘남을 사랑하는 것(仁者愛人)’으로 해석된다. 후대 한유(韓愈)는 그것을 ‘널리 사랑함(博愛)’으로 해석 했고, 朱子는 ‘사랑의 원리(愛之理)’로 仁을 말했다. 이러한 유교전통의 仁은 인류사회의 보편적 가치로서 현대사회에서의 인간관계를 규율하는 공통의 규범으로 자리 메김 될 수 있다. 맹자에 의하면, “仁이란 인간다운 것이다.” 이 말은 인간이 다른 인간을 사랑과 존경으로 대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것은 더욱 현대의 규범에 합치한다. 양수명(梁漱溟)은 이성으로서 仁의 사상을 밝히고자 했는데, 이 해석은 오늘날 더욱 그 의의를 갖는다. 양수명은 이성 과 이지(理智)를 구별하면서, 이성을 일종의 교환방식에 입각하여 서로 이해하고 서로 교통하는 심리상태, 즉 仁으로 여겼다. 따라서 현대성 내에서의 이성을 막스 베버류의 협소하게 도구적 이성으로 이해해서는 아니 되며, 반드시 그러한 ‘전통-현대’라는 대립적이고 도식적인 틀을 혁파하여 가치합리성을 수용해야 한다.
둘째, 한편으로는 개인, 또 한편으로는 집단, 사회, 국가 사이의 관계를 다루는 데 있어 유교는 개인을 출발점으로 삼으면서도 언제나 공동체의 이익을 우선으로 내세웠다. 개인은 가족과 사회, 국가 안에서만 그 가치를 온전히 획득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개인이 물질적 이익과 욕망을 추구할 권리가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유교는 그에 연관된 것을 억제하라고 가르치며 극단적 개인주의와 자기추구를 반대한다. 공자는 말했다. “부와 명예는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정당한 방법으로 얻지 못할 것이라면 붙들고 있어서는 안 된다.” 유교는 공정성을 이익의 추구보다 우위에 놓으며, 사회적 정의의 유지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유교가 선호하는 중용은, 현대적 의미로 해석한다면, 극단적 개인주의와 배금주의, 과도한 물질적 이익추구, 그리고 그밖에 현대화 과정에서 나타날 수 있는 바람직하지 않은 경향들을 억지하는 유용한 역할을 할 수 있다.
셋째, 유교는 ‘和’의 관념을 일깨운다. ‘和’는 유학 전통사상의 중요한 가치 중의 하나로 내용상 다음과 같이 다섯 차원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로 곧 인간과 자연의 조화다. 둘째는 국가 간의 화평이다. 셋째는 인간과 인간, 즉 사회관계의 화목이다. 넷째는 개인의 정신과 심리인데, 즉 어떤 정신적 견지에서의 평화를 말한다. 다섯째는 문화 또는 문명의 차원으로 문화 간의 이해와 협력을 뜻한다. 이러한 관계는 인류가 유사 이래 일관적으로 유지해 온 기본 관계일 뿐 아니라, 현대인이 직면한 생존환경과 생존질량의 주요한 도전이 여전히 이 관계 내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유교에 의하면 인간과 자연의 화해는 ‘天人合一’의 기초 위에서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강조하고 둘 사이의 적대를 반대한다. 인간은 자연의 질서를 따르고 그 일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중용』(中庸)은 이렇게 말한다. “만물은 서로를 다침이 없이 더불어 양육된다.” 자연은 바로 인간의 양육자이며, 모든 자연은 또한 인간의 동반자이다. 따라서 인간은 자연을 존중하고 살아있는 모든 생명을 돌보며, 그들을 동등하게 인정하고, 그들 나름의 최상을 이끌어낼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럴 때, “인간의 본성을 충분히 계발할 수 있고, 만물의 본성도 충분히 계발할 수 있다.” “그는 변형하고 양육하는 하늘과 땅의 과정을 도울 수 있다.” 그때, “그는 하늘과 땅과 더불어 통일체를 이루게 될 것이다.” 또 『예기』(禮記)는 “천지와 합하여 조화를 이루니 참 즐겁다”(大樂與天地同和), “화해에 이르므로 만물을 잃지 않았다”(和故萬物不失)고 했다. 유교의 이런 가르침은 현대에 요청되고 있는 환경보호와 일치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해 두어야겠다. 이는 현대화 과정에서 인간과 자연의 조화로운 관계를 형성하는 데 도움이 된다.
‘和’는 일종의 문화적 관념이기도 한데, 국가와 종족간의 화평을 말한다. ‘和’를 지도이념으로 삼고, “병기를 시험치 않고, 형벌을 사용치 않으니 백성들은 우환이 없다(兵革不試, 五刑不用, 百姓無患).”는 경지에 도달했으며, “문치의 덕으로서 멀리 있는 이를 불러들인다(修文來遠).”를 주장했다. “신의를 말하고 화목을 닦는다(講信修睦).” 인의를 숭상하고, 왕도를 귀중히 여겨 “전쟁 일삼기를 좋아하는 자는 극형을 받는다(善戰者服上刑).”라는 이상에 도달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유교의 ‘和’의 관념은 평화공존의 국가 간 교류원칙을 이끄는데 유리하며, 현 세계에 펼쳐진 신질서의 건립에도 적극적인 의미를 지닌다.
또 유교는 상하간의 ‘화해와 존중(和敬)’, 이웃 간의 ‘화해와 순종(和順)’, 가정의 ‘화합과 친목(和睦)’을 주장한다. 이러한 고전 유교의 인간관계의 원칙은 결코 일방적이고 단일한 행위가 아니라, 개인이 주체가 되고 상호 존중, 이해, 포용하는 차원을 말한다. ‘和’의 이러한 이상은 현대 산업사회에서 야기되고 있는 인간소외, 가정해체, 노인복지의 실종 등을 해소하는 보편적 틀을 제공한다.
‘和’의 네 번째 차원인 ‘개인 정신생활의 조화와 기쁨(致樂以治心)’은 현대사회의 개인들이 지니는 근심과 초조, 고독, 공허, 번민을 해결할 수 없는 정신적 아노미 상황에서, 유가의 낙천적 정신의 발양은 그 의의를 지닌다.
‘화’(和)’ 다섯 번째 의미는 서로 다른 문화에 대한 인정과 관용의 태도다. 유교에서 말하는 “和는 조화를 이루되 동일하지 않으며(和而不同), 조화로움 속에선 만물이 생겨나나, 동일함은 지속되지 않는다.”(和實生物, 同則不繼)와 같은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확 트이고 넓은 도량으로서 서로 다른 문화의 요소를 받아들이는 것이고, 다른 문화 간의 평화공존과 평화적 경쟁을 주장하는 것이며, 자 문화와 타 문화와의 이해와 서로 다른 문화적 관점에 대한 존중을 의미하는 것이다. 헌팅턴이 미래의 국제적 충돌은 민족국가간의 충돌에서 문명 간의 충돌로 전이될 것임을 예언하는 시점에 세계 인류의 화합을 위해 이러한 동아시아의 전통문화의 틀은 충분히 보편화 될 가치가 있다.
이상의 유교윤리는 역사적으로 가치가 있는, 그리고 오늘날 인류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유교의 몇몇 보편적인 요소들이다. 그런데 근 수 십년 이래로 서구 현대화의 영향을 받은 동아시아 사회는 도구 합리성의 발전을 가장 높은 곳에 올려놓았으며, 학자들이 중시한 것도 세속화된 유교 윤리가 동아시아 경제발전에 작용할 촉진기능과 유교의 실학사상에 나타난 경험적 경향에 국한되었으므로, 그들은 동아시아의 정신적 전통이 내포된 보편적 가치 관념을 배척하였다. 따라서 오로지 구체적이고 경험적인 조작규범만이 현대화에 상응할 수 있다고 인식하게 되었고, 보편적인 가치는 현대성과 무관하며 현대적으로 전향될 능력이 부족하다고 단정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것은 모두 ‘전통-현대’라는 대립 구도적 단순한 이분법적 사고에서 파생된 오류이다. 21세기의 새로운 가치의 틀을 지향하는 오늘날, 우리는 이러한 2분법적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 더 높은 차원에 서서 현대 동아시아 사회의 문화적인 문제를 새롭게 인식해 나가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