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이회서당(以會書堂)

진주시 금산(琴山)·수곡(水谷) 탐방 - 許琮

작성자허현|작성시간23.02.15|조회수145 목록 댓글 0

 
2020.12.29 (火)  겨울치곤 비교적 따뜻한 날씨라, 나들이하기에는 별 불편이 없어 보인다.
09:00, 범냇골지하철역 인근 부산상공회의소 옆에서 고정(孤庭) 아우를 만나, 함께 승용차로 진주로 향했다. 한적(閑寂)할 정도로 고속도로가 정체(停滯) 없이 뻥 뚫렸다. 요즘, ‘코로나(covid)19’로 인한 2단계(수도권은 2.5단계) 방역 조치로 외출 또는 모임이 극도로 자제 또는 강제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마스크 착용은 말할 것도 없고, 손씻기, 사회적 거리두기(2m), 5인 이상 대면(對面) 모임 금지, 온라인 수업 등이 대표적이다. 주먹인사, 팔꿈치인사는 또 무엇이냐. 이렇게 답답한 일상을 언제 살아 보았나. {한국은 현재 확진자 6만여 명, 사망자 1천여 명. 폐쇄(閉鎖)의 나라 북한(?)을 제외한 전세계가 역병(疫病)으로 매우 심한 몸살을 앓고 있다[팬데믹(pandemic)]}. ‘우한(武漢) 폐렴’이라 일컬어지는 이 역병(疫病)은 인재(人災)라고 하는 것이 더 무서운 사실이다. 일상이 어그러지고 서민경제가 무너지고 있는 실정이다. 게다가 감기나 독감처럼 인류가 평생 안고 가야할 질병이라면 여간 고통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인간이 자초한 재앙(災殃)이 아닐까 한다.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3차 또는 4차 재난지원금이 이야기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바야흐로 백신(vaccine)이 개발되고 치료제가 곧 만들어진다고 하니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다. 하루속히 병마가 물러가고 일상이 회복되어, 옛날과 같이 서로 웃는 얼굴로 다시 만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11:00 무렵, 오늘의 일차 목적지 금산면 용아리 금호지(琴湖池)에 닿았다. 예로부터 금산(琴山→今山→金山→今山→琴山)으로 적었던 금산의 ‘금’은 ‘고(高)’를 뜻하는 고유어이다. 여기서의 높은 산은 월아산이다. 월아산은 ‘달아[月牙]’라고도 불려 왔는데, ‘달아’는 ‘고(高)’의 뜻을 가진 고유어이니 금산과 월아산은 한 줄기에서 비롯한 말임을 알 수 있겠다. 따라서 ‘금산’의 의미는 ‘높은 산 아래 자리한 마을’이다. 덤밑을 휘돌아 흐르는 남강을 바라보면서 길게 나있는 저수지 둑에는 아름드리 고목들이 울창해 금호지의 오랜 세월을 말해 주고 있었다. 금호지는 신라 시대에 형성된 자연 못이라고도 하는데, 넓이 20만 4937㎡, 평균수심 5.5m, 둘레 5km로 둘레길이 굴곡이 많아 전부를 한눈에 볼 수는 없다.
고성군 구만면 이회서당에서 출발한 죽헌(竹軒), 월은(月隱), 전은(田隱)이 금호지 주차장에 먼저 도착해 있어, 반갑게 상봉하였다. 일행은 금호지의 둑길을 천천히 걸으면서 저수지 주변의 절경을 구경하였다. 사람이 죽어 저승에 가면 염라대왕이 “금산 못을 둘러보았느냐?”고 묻는다고 한다. 이때 “안 둘러보았습니다.”고 하면 게으른 놈이라고 벌을 내린다고 한다. 그만큼 경치가 빼어나다. 평일인데도 다른 관광객들도 여럿 보였다. 아마, 집에만 박혀 있으려니 좀이 쑤시고 속이 답답하여 나들이로 온 것 같다. 이렇게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좋은 공기를 마시면서 하루를 즐긴다는 것은 참으로 의미 있는 일이다. 우리 일행의 여행은 소위 테마(Thema) 여행이니, 자연 속에서 옛 선인들의 발자취를 찾아 흠모(欽慕)하며 그 얼을 기려, 오늘을 반추(反芻)해 보는 역사기행이라 할 수 있다. 저수지를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너며 주변을 둘러보니, 이곳은 몰래 숨어 있는 승지(勝地)였다. 저수지에는 어린이들이 좋아할 만한 여러 모형물들이 물 위에 띄어져 있었다. 그러나 인공의 조형물은 자연과 어울리지 않아 ‘옥(玉)의 티’라고나 할까. 월아산(月牙山) 아래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이 마을은 저수지 둑을 따라 둘레길도 잘 다듬어져 있어 산책하기에 참 좋을 것 같다. 실제 삼삼오오(三三五五)가 아닌 삼삼사사(三三四四?)로 산책하는 사람들이 많다. 코로나19 때문에 ‘삼삼(三三)’은 되어도 ‘오오(五五)’는 안 된다. 희극인지 비극인지 잘 모르겠다. 호수에는 오리 몇 마리가 물 위에서 한가로이 놀고 있다. 90도로 누운 소나무가 물 위에 드리워져 그림자를 푸른 물속에 비추고 있기도 하다. 낙락장송(落落長松) 가지 사이로 보이는 물과 산과 수풀과 하늘은 가히 환상적이다. 이런 곳에 어찌 시인묵객(詩人墨客)이 없을쏘냐. 과연 둑길 중간쯤에 이르니 시비(詩碑)가 나타난다. 「학고(鶴皐) 정선교(鄭璿敎) 선생 우국(憂國)시비」이다. ‘학고’는 「월아산 삼학사」의 한 분이시다. 비음(碑陰)에 이르기를, <구한말에 월아산 아래 월아동과 용심동에 위정척사파(衛正斥邪波) 우국의 선비 세 벗이 살았다. 한일합병을 당하자 북방재배 하고 죄인이 되었다 하여 갓을 버리고 패랭이를 쓰며 창씨개명을 거부하고 글로써 망국을 한탄하였다. 세인들은 월아산 삼학사라 칭송하였다.{학고 정선교(1856~1931), 月岩 成煥鍾(1860~1937), 牙西 成煥均(1866~1944)}>라고 하였다. 이로써 이곳이 우국충정(憂國衷情)과 절의(節義)의 고장임도 알 수 있겠다. 또 우국시비 옆에는 「금아(琴牙) 하오주(河五柱) 음악비」도 서 있다. 이 비에는 이곳 금산 출신의 하오주 선생이 작사 작곡한 ‘어머니’라는 제목의 노랫말이 또렷이 새겨져 있다.
둑길을 되돌아오는 길에 고정(孤庭)이 자꾸 아쉬운 표정을 한다. 자기가 알기로는 이곳 금호지 부근에 퇴계(退溪) 선생이 다녀간 흔적이 있다는데 찾을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다른 비석은 여럿 있는데. 약간 실망하는 눈빛이다. 그러다가 갑자기 ‘저기 비석’ 하면서 희색이 만면하여 급히 길을 건너간다. 참 위대한 발견이다. 고정다운 예리함이 번득인 결과다. 아니나 다를까, 큰길 건너편에 「퇴계선생유적비」가 서 있었다. 그 뒤편에는 4칸의 금호정(金湖亭)이 세워져 있다. 비교적 근래에 유적비와 정자를 앉힌 것 같다. 유적비의 비음에는, 1533년 당시 32세의 퇴계가 63세의 곤양 군수 어득강을 만나러 가던 중 이곳에 있는 청곡사를 경유하게 되면서 감회를 읊은 시가 새겨져 있다. 청곡사는 퇴계의 두 형이 독서하던 곳이기도 하였다. 이때, 이곳에서 독서하던 셋째 형은 1년 전에 죽었고, 넷째 형은 조정에 벼슬을 하고 있어 만나기가 어려웠다. 그러한 심정을 「과청곡사(過靑谷寺)」시에서 읊고 있다.
金山道上晩逢雨(금산도상만봉우) : 금산길 지나다가 늦게야 비 만나니,
靑谷寺前寒瀉泉(청곡사전한사천) : 청곡사 앞 솟는 샘물 차기도 하네.
爲是雪泥鴻爪處(위시설니홍조처) : 세상 일 눈 위에 기러기 발자국 같아,
存亡離合一潸然(존망이합일산연) ; 옛 사람 간 곳 없어 또 한번 눈물짓네.
※潸然:눈물을 줄줄 흘리는 모양) (생사와 이합에 눈물이 한껏 흐르네)
설니홍조(雪泥鴻爪)라니! 퇴계의 이 시에서도 ‘인생의 자취가 덧없음’이 노래된 듯하다.
금호지 주차장에서 다시 출발, 5분여 뒤에 도착한 곳은 금산면 가방리에 있는 부사정(浮査亭:금산순환로279번길)이다. 부사정은, 1600년(선조33년) 부사(浮査) 성여신(成汝信:1546~1632)의 호를 따서 건립한 부사정사의 여러 건물 중 으뜸 건물로 솟을대문인 양직문(養直門)을 지나면 우뚝 서 있다. 양직문의 ‘직(直)’을 보니 논어옹야편의 「人之生也ㅣ直ᄒᆞ니 罔之生也ᄂᆞᆫ 幸而免이니라」가 떠오른다. 「사람이 사는 이치는 정직하니, 정직하지 않으면서 사는 것은 (죽음을) 요행히 면한 것이다」. 속이면 안 되는 것이다. 바르게 살아야 함을 강력하게 시사(示唆)해 주고 있는 것이다. 부사정은 정면4칸, 측면2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의 목조 기와집인데 주련(柱聯)이 여덟 개 걸려 있다. 부사정 오른쪽으로 양몽재(養蒙齋)와 지은사(知恩舍), 지학재(志學齋)와 반구정(伴鷗亭)이 각각 앞뒤로 배치되어 있는 특이한 구조다. 성여신은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문인인데, 진주의 임계서원과 창녕의 물계서원에도 제향되었으며 저서로 「부사집」이 있다. 부사가 지은 성성재잠(惺惺齋箴), 만오잠(晩寤箴), 학일잠(學一箴) 등은 읽고 새길 만하다고 하겠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그러고 보니 오후 1시. 다시 금호지로 내려와 식당을 찾았다. 이곳이 유원지라 식당은 여럿 있었다. 그 중 하나를 선택하여 들어가서 일행이 다섯이라고 하니, 안 된다고 거절한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다섯 명 이상은 같이 앉을 수 없기 때문이란다. 할 수 없이 다른 식당에 가서 두 명, 세 명 나누어 멀리 떨어져 앉아 식사하였다. 먼젓번 식당 주인이 융통성이 없는 것인지, 이 사회가 너무 경직되어 있는 것인지, 어쨌든 코로나19로 생긴 해프닝이 아닌지 모르겠다. 점심을 맛있게 먹었다.
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수곡면에 있는 덕곡서당(德谷書堂:사곡로90번길13-3)이다. 수곡면은, 진주시의 서쪽 끝에 있고 사천시, 하동군, 산청군과 맞닿아 있는데, 진양호 상수원 보호구역으로 상류지역에 해당하며 천혜의 맑고 푸른 덕천강이 흐르고 있다. 진양호를 가로질러 한참 가니 야트막한 산 아래, 동네와는 좀 떨어진 곳에 서당이 보인다. 대문인 숭의문(崇義門) 안으로 4칸의 서당 건물이 약간은 쓸쓸한 모습으로 서 있다. 한때는 많은 학동(學童)으로 붐볐을 터이지만. 죽헌 형은 대문 현판에 쓰여 있는 숭의문의 ‘의(義)’ 자(字)를 한번 깊이 음미해 보라고 한다. 남명의 경의지학(敬義之學)의 연원(淵源)을 생각게 한다. 대문이 굳게 닫혀 있어 옆문을 통해 서당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덕곡서당의 현판은 김구(金九) 선생이 직접 쓴 것으로, 그 이름 두 자가 선명하게 보인다. 1931년(2482年辛未3月28日庚午未時立柱4月初1日癸酉申時上樑)에 세워진 덕곡서당은, 회봉(晦峯) 하겸진(河謙鎭:1870~1946) 선생이 많은 문도를 모아 학문을 강론하던 곳으로 지명을 따서 이름 하였다. 근세 한국 최고의 학승 탄허(呑虛) 스님(全北井邑郡笠巖面 金鐸聲:1913~1983)이 21세 때인 1933년, 영남의 대유학자인 하회봉(河晦峯)에게 제자로 받아줄 것을 청하는 편지 「慶南晉州郡水谷面士谷里 河晦峰先生席下」는 유명하다. 탄허는 어려서 사서삼경과 노장사상을 섭렵한 후 1934년 오대산 상원사에서 한암 선사를 은사로 출가하여 일찌감치 학승으로 명성을 떨쳤으며 불경 번역사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다. 해방 후 함석헌과 양주동은 탄허로부터 장자 강의를 들었다고 전한다.
신암(新庵:1910~1991) 선생이 35세 때인 1944년 7월, 75세인 회봉에게 조부의 묘갈명을 요청하러 가게 되고, 회봉의 초당에서 하룻밤 묵게 된다. 이로부터 두 유학자는 친분을 맺고 의기투합(意氣投合)하게 된다. 이때 신암은 지리산을 두루 섭렵하였다고 한다. 덕산, 법계사, 천왕봉, 칠불암, 쌍계사, 화개, 악양루 등을 여행하면서 감회를 시로 남겼는데, 이 시로써 두 분이 더욱 친숙해진다. 회봉은 신암의 유람시와 감사시에 대해서 ‘신선의 휘파람소리를 듣는 듯하다’[似聞鸞鶴蘇門嘯(사문난학소문소):난학이 소문산에서 부는 휘파람소리를 듣는 듯하다]고 극찬, 화답하였다. 이렇듯 탄허와 신암의 학구열을 보면, 문득 ‘부급종사불원천리(負笈從師不遠千里)’라는 말이 생각난다. 주지하다시피 이 말은 ‘(책상자를 지고 스승을 따른다는 뜻으로) 먼곳에 있는 스승에게로 공부하러 감’을 이르는 말이다. 아버지 신암의 이런 내력을 잘 알고 있는 죽헌으로서는 덕곡서당 방문이 얼마나 감개무량하였겠는가. 죽헌 형은 서당 바로 옆에 있는 회봉 내외분의 묘소를 참배하면서, 손수 가지고 온 신암문집과 이회서당자료집을 정중히 바쳤다. 이 묘소는 상석 바로 뒤에, 등받이에 무궁화를 새긴 두툼한 돌의자가 놓여 있는 것이 특이하다. 신암은 「덕곡사우연원록(德谷師友淵源錄:회봉 문인록)」에도 수록되어 있다. 산골짜기라 바야흐로 산그늘이 내리려 한다.
오늘의 다음 여정으로 회봉 선생의 생가를 방문하기로 하였다. 승용차로 조금 가니, 그야말로 좌청룡 우백호의 지세를 지닌 아담하고도 깨끗한 마을이 나타난다. 쉼터인 정자, 운동기구가 잘 갖추어진 넓은 마당, 300여 평의 크고 네모진 연꽃밭이 아름드리 고목들과 어울려 멋진 풍광을 자랑하는 마을이다. 게다가 양정공(襄靖公) 하경복(河敬復:1377~1438) 선생의 옛 집터도 있어 충절의 고장답고, 부(富) 티가 절로 풍기는 마을이다. 마침 길가는 동네사람이 있어 안내하는 대로 찾아가니, 회봉 선생의 생가(사곡로156번길37)는 골목을 돌아 올라가서 약간 높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바깥채와 안채가 앞뒤로 나란히 앉았는데, 너른 대지에 4칸 겹집으로 꽤나 웅장한 한옥이다. 문짝은 모두 창살문에 유리창이다. 부속 건물도 보인다. 마당에는 자갈을 깔아 잡초가 나지 않도록 하였다. 생가 전체가 지은 지는 얼마 되지 않아 고색창연(古色蒼然)한 맛은 없다. 옛 선인들의 생가라 하면 조촐하고 아담한 초가삼간을 떠올리게 마련인데, 회봉의 생가는 너무 거창하게 잘 꾸며졌다는 생각이 든다. 마침 지나가던 동네 아낙네가 나에게 살짝 귀띔해 준다. 이 집 주인은 삼성 그룹과 사돈 간인데, 그 사돈이 거액을 들여 근래에 지어준 집이라고. 그러면 그렇지, 어찌 시골의 선비가 이렇게 대궐 같은 집을 지을 수 있겠는가. 죽헌은 조금 전에 회봉의 묘소에 바쳤던 문집과 자료집을 선생 생가의 서재에 두고 나왔는데, 막상 서재에는 회봉의 문집 등등이 비치되어 있지 않고 자잘한 안내서 몇 장 정도만 보였다. 다만 눈에 띈 것은 고(故) 하겸진 선생에게 수여한 「건국훈장애족장(1995년8월15일,대통령김영삼)」인 훈장증이다. 하루빨리 생가에도 선생의 크나큰 발자취가 전시되어 그 학문과 사상이 천추에 길이 빛나기를 기대하는 바이다. 생가에서 내려오는 길섶에 용틀임을 한, ‘보호수’로 지정된 큰 소나무가 우리에게 작별을 고한다. 소나무는 벌건 네 마리의 황룡(黃龍)이 똬리를 틀고 있는 모습이다. 하도 신기해서 요리조리 사진을 찍으면서 탄복하였다. 그러나 해가 뉘엿뉘엿하니 마냥 구경만 할 수 없었다.
이제 갈 길이 바쁘다. 곧장 진주로 향했다. 진주성 공북루(拱北樓) 주차장에 내리니, 미리 연락해 만나기로 했던 족제(族弟)인 봉암(鳳庵) 허성무(許聖武)가 우리를 반긴다. 우리 일행은 함께 진주성을 산책하면서, 429년 전의 임진왜란 당시의 진주성 전투를 그려 보았다. 고성 사람으로서 임진왜란 때 의병을 모아 싸움으로써 큰 공을 세웠던 제말(諸沫) 장군과 그의 조카 제홍록(諸弘祿)을 모신 쌍충각(雙忠閣), 지수문(指水門) 안의 논개를 모신 의기사(義妓祠), 그리고 촉석루 누각에 올라 현판들을 살펴보았다. 날이 차츰 어둑해지면서 비가 조금씩 내리기 시작한다. 걸음을 재촉하여 봉암이 안내하는 식당(낙원왕냉면왕갈비)으로 갔다. 부득이 세 명 씩 거리를 두고 앉아 불고기를 먹는데 맛이 참 좋았다. 맛은 좋은데 무엇이 문제냐. 사회적 거리두기, 이것이 하나의 풍토(風土)가 될까 두렵다. 안타까운 현실이다. 예로부터 진주는 인심이 좋고 농산물이 풍부해 살기 좋은 고장일 뿐만 아니라 풍광이 빼어나고 걸출한 인물이 많이 배출되는 문화·예술·교육의 도시이다. 나는 누구보다도 진주를 사랑한다. 에나가? 에나다. 하모! 진주 하면 서부 경남방언이 새삼 떠오른다. (끝)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