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봉 이수광이 1597년(선조30)에 명(明)나라 황실의 화재 소실(燒失)을 위문하는 진위사(陳慰使)로 연경(燕京)에 갔을 때 옥하관(玉河館)에서 50여 일 동안 머물면서 안남국(安南國)의 사신 풍극관(馮克寬)과 함께 유숙하였다. 이때 서로 창화(唱和)한 시와 필담으로 문답(問答)한 내용 등을 기록한 책이 《안남국사신창화문답록(安南國使臣唱和問答錄)》이다.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왜적에게 포로로 잡힌 조완벽(趙完璧)이 일본 상선을 따라 안남에 세 차례 드나들었다가 1607년 조선으로 돌아옴에 따라 안남 사람들이 지봉의 시문을 칭송하고 그곳의 유생들이 전사(傳寫)하여 애송하고 있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졌는데, 사행이 끝난 이후에 당시 풍극관과 창화한 지봉의 시문이 안남에서 유행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안남국’은 오늘날의 베트남을 가리키는데, 안남이란 명칭은 중국이 당(唐)나라 때에 여기에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를 설치한 데서 비롯되었다.
● 안남국사신창화문답록 지(識) - 이수광/지봉집8권
내가 만력(萬曆) 경인년(1590, 선조23)에 서장관(書狀官)으로 차출(差出)되어 경사(京師 연경)에 가서 황제의 성절(聖節)을 경하할 적에 안남국(安南國) 사신을 만났는데, 각기 다른 객관에서 머무른데다 서로 통교(通交)하지 못하도록 금지한 탓에, 단지 조회(朝會) 때에만 한두 번 얼굴을 봤을 뿐이었다. 사신의 임무를 마치고 조정으로 돌아옴에 미쳐, 문견(聞見)한 사건(事件)에 대해 대략 기록하여 보고하였는데, 상께서 나를 승정원(承政院)으로 불러 안남국 사신의 의복(衣服) 제도와 그 나라의 풍속이 어떠한지 하문하시고, 혹시라도 창화(唱和)하여 지은 글이 있다면 아울러 써서 아뢰라고 하셨다. 이에 안남국 사신과 서로 문답하거나 창화하지 못하여 성상의 하문에 우러러 대답할 말이 없음을 더욱 한스럽게 여겼다.
정유년(1597, 선조30) 겨울에 이르러, 진위사(進慰使)로 재차 경사에 갔을 때 또 안남국 사신과 서로 만났는데, 마침 동지(冬至)를 하례(賀禮)하기 위해 외국에서 온 사신들이 매우 많아 객관마다 가득 찬 덕분에, 다행히도 안남국 사신과 한 객관에서 함께 묵으며 50여 일을 지내게 되었다. 그리하여 안남국 사신과 친숙하게 대할 수 있었으며, 아주 자세하게 문답할 수 있었다. 그리고 시를 수창(酬唱)한 것은 당시 나라가 왜란(倭亂)을 겪고 있어 딴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으니, 감히 붓을 잡고 시구를 지어 과시하고자 해서가 아니라 단지 안남국 사신의 문체(文體)가 어떠한지 보려고 해서일 뿐이었다.
가만히 생각건대, 우리나라는 중국과 멀리 떨어져 있고, 또 중국은 안남국과 매우 멀리 떨어져 있으니, 그 거리를 계산해 보면, 두 나라의 사이가 1만 리 남짓이 될 뿐만이 아니다. 더욱이 안남국에서 조공(朝貢)을 바치러 오는 것도 일정하지 않아서 몇 년에 한 번씩 중국에 오기 때문에 우리나라 사신이 안남국 사신을 거의 만날 수 없다. 더구나 안남국 사신과 같은 객관에서 머물면서 시를 주고받을 수 있는 경우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그렇다면 내가 안남국 사신을 두 차례나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어찌 거기에 운수가 작용한 것이 아니겠는가. 이러한 창화집도 전고에 없었던 것이다. 글이 비록 몹시 비루하기는 하지만 이러한 일만은 혹여 전할 만하기에, 우선 이 창화집을 보존하여 박아(博雅)한 군자가 행여 여기에서 취함이 있기를 기대하며 이수광이 쓰다.
● 안남국사신창화문답록 후(後) - 이수광/지봉집8권
안남국은 북경(北京)과의 거리가 1만 3천 리로, 그 나라에서 출발하여 양광(兩廣.광동과 광서)을 경유해서 남경(南京)에 이르고, 남경에서 출발하여 북경에 이른다. 안남의 국왕(國王)은 성(姓)이 본디 막씨(莫氏)로, 중국 조정에서 막씨가 자주 반역했다는 이유로 왕호(王號)를 혁파하고 도통사(都統使)로 임명하였는데, 지금에 이르러 여씨(黎氏)에 의해 멸망당하였다. 안남 사신은 바로 여씨를 왕으로 책봉(冊封)해주기를 청하러 중국에 사신 온 자로, 작년 7월에 본국을 떠나서 금년 8월에야 비로소 북경에 도착하였고, 옥하관(玉河館)에 유숙한 기간도 또 5개월이나 되었다.
사신의 성은 풍씨(馮氏)이며, 이름은 극관(克寬)이며, 자호(自號)는 의재(毅齋)로, 나이가 70세가 넘었다. 용모가 매우 괴상하여 치아를 검게 물들이고 머리를 풀어 늘어뜨렸으며, 소매의 통이 넓은 장의(長衣)를 입었으며, 승건(僧巾) 모양과 비슷하게 전폭(全幅)의 치포(緇布)를 써서 머리를 쌌는데, 그 반 정도를 뒤로 어깨 너머까지 늘어뜨렸다. 그 사람이 비록 늙었지만 정력(精力)은 아직 강건하여 항상 끊임없이 독서하고 책을 베꼈다. 그가 조회하러 대궐에 나아갈 때를 만나면 한결같이 명나라 조정의 복식(服飾)에 따라 머리를 묶고 건모(巾帽)를 착용하였는데, 그의 안색을 보면 이마를 찌푸리며 견디지 못하는 기색이 역력하였고, 객관으로 돌아오고 나서는 곧바로 건모를 벗어버렸다.
사신의 일행은 모두 스물세 명으로, 전부 머리를 풀어 늘어뜨렸다. 귀인(貴人)은 치아를 검게 물들이고, 하인(下人)은 짧은 옷에 맨발로 다녀서 비록 겨울철이라도 맨다리를 드러낸 채 바지와 버선을 착용하지 않았는데, 대개 그 나라의 풍속이 그러한 것이었다. 침소는 반드시 침상 위에서 자고 온돌은 하지 않았다. 음식은 대략 중국인과 비슷한데 정결하지 않았다. 복장은 대부분 능견(綾絹)으로 만들었는데 무늬 없는 비단에 솜을 넣은 옷이었다. 용모는 대부분 눈이 움푹 들어가고 신장이 작아서 혹 원숭이의 생김새와 비슷하였다. 성품은 매우 온순하였다. 문자를 대략 알고, 검술을 익히기를 좋아하였는데, 그 검법이 《기효신서(紀效新書)》와 달라서 우리 군관(軍官)들로 하여금 배우게 하려고 하였으나, 그들이 비밀로 하고 가르쳐주지 않았다. 언어(言語)는 왜국(倭國)의 언어와 유사하고 합구성(合口聲)을 사용하였는데, 그중에 한어(漢語)를 아는 자가 겨우 한 명이라서 한어 통역관을 통해서나 문자를 가지고 서로 소통하였다. 그 나라의 시속 글씨는 자획(字畫)이 매우 이상하여 거의 알아볼 수 없었다.
처음에 사신의 문체(文體)가 어떠한지 살펴보고 싶어 시험 삼아 칠언시(七言詩)를 지어서 보냈는데, 사신이 곧바로 화답하였으므로 이로 인하여 여러 번 시를 주고받았다. 사신이 매양 나와 다른 사람들이 지은 시를 볼 때마다 무릎을 치며 감탄하면서 칭찬하기를, “문장이 매우 탁월하니, 앞으로 반드시 대수필(大手筆)이라 불릴 것입니다.” 하였으니, 대개 타국 사람이 지은 글에 대해 이렇게 지나치게 장려하였다.
사신이 또 청하기를, “나에게 《만수경하시집(萬壽慶賀詩集)》이 있는데, 감히 사공(使公)께서 서문을 써주어 대수필의 은택을 입을 수 있도록 해주기 바랍니다.” 하고는, 매우 간절하게 요구하였는데, 내가 누차 사양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아 마침내 서문을 지어주었다. 사신이 내 서문을 받고 이르기를, “사공의 시서(詩序)를 기쁘게 보노라니, 사조(詞藻)가 찬란하게 빛납니다.” 하였는데, 너무나 과분한 칭찬에 스스로 부끄러워하면서도 매우 감사하게 여겼다. 이어 사신이 전대에 싸가지고 온 안남 토산물인 백선향(白線香) 100매(枚)와 지향(脂香) 1기(器)를 나누어 보내주었다. 또 말하기를, “귀국의 붓과 먹이 천하의 절품(絶品)이라 들었는데, 얻기를 바랍니다.” 하여, 마침내 붓과 먹 몇 개를 사신에게 주었다.
백선향은 극히 가늘고 길어서 마치 한 가닥 실과 같고 향이 매우 진하였다. 지향은 푹 고은 것이 기름 같은데 몸에 바르면 하루 종일 향내가 줄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