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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서당(以會書堂)

1657년 금강산 유람기 [遊楓嶽記] - 홍여하/목재집6권

작성자허현|작성시간24.10.08|조회수96 목록 댓글 0

 
우리나라의 동해 가에 산이 있는데 봉우리가 1만 2천이며, 전체가 모두 흰 돌이고 한 줌의 흙도 없으며, 멀리서 바라보면 빛나는 하나의 큰 괴석(怪石)이기 때문에 이름을 개골(皆骨)이라 한다. 돌 사이에는 잡목이 자라지 못하고 오로지 단풍나무만이 가장 무성하기 때문에 또 풍악(楓嶽)이라고도 하니, 논하는 자들은 천하 명산(名山)의 제일로 칭한다.
석천거사(石川居士)가 정유년(1657 효종8) 8월에 영남을 출발하여 고산도(高山道.함경도의 역로)를 가서 회양부(淮陽府)로 나가 장차 풍악을 유람하려고 했지만, 9월 초하루 창도역(蒼道驛)에 이르러 병이 들고 말았다. 종자(從者)들이 청하기를, “부자(夫子.스승을 높임)께서는 자못 병이 들어 등산하기 어려우니, 다른 날을 기다림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했다. 거사는 빙그레 웃으며 말을 몰아 산으로 향했다. 10리쯤 가다 동쪽을 바라보니, 산의 윤곽이 어슴푸레 드러났다. 희미한 백색인데 멀리서는 분간할 수 없었다. 바라보는 자들은 구름, 또는 눈인 것 같다고 했다. 저물녘에 단발령(斷髮嶺.마이태자가 이곳에서 삭발했다) 아래에 다다랐다.
다음 날 새벽에 단발령을 오르니 세조(世祖)가 거둥했을 때 제사 지낸 자리가 있다. 유람하는 사람들은 이곳에서 먼저 산을 바라본 뒤에 길을 가는데, 마침 안개가 짙어 산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단발령을 내려와 판교(板橋) 앞을 지나 작은 고개에 올라서 바라보니, 구름이 걷히면서 산이 더욱 드러났다. 한참 앉아서 구름이 걷히기를 기다려, 비로소 백색이 모두 산이라는 것을 알았다.
10여 리를 가다 산 아래에 이르러 사방으로 천암만학(千巖萬壑)을 둘러보니 단풍잎이 한창이고 마치 노을이 타는 듯 붉어 자주 빛과 비취빛이 부슬부슬 소매에 물드는 듯 했다.
시냇물을 20리 거슬러 올라가 돌부리에 말을 매어 놓고 걸어서 장안사(長安寺)에 들어갔다. 뭇 봉우리들이 깎아지른 듯 서서 희미하게 검은 빛을 띤 것을 우러러 바라보고 거사가 놀라 말하길, “멀리서 보니 티 없이 깨끗하더니 가까이서 보니 이다지도 짙구나.”라고 했다.
어떤 승려가 곁에서 따르다가 대답하길, “돌의 성질은 비를 맞으면 깨끗해지고, 바람을 맞으면 닳고, 태양을 받으면 응결되기 때문에 높은 곳이 가장 흽니다. 낮은 곳에는 바람과 해가 통하지 않기 때문에 점점 변하여 비취색이 되는데, 산에 들어오면 높은 곳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라고 했다. 다른 승려가 말하기를, “아닙니다. 다른 산의 돌만 유독 높은 곳이 없겠습니까. 다른 산이 저절로 푸르고 이 산이 저절로 흰 것은 산의 성질이지 돌의 성질이 아닙니다.”라고 했다. 거사는 따지지 못했다.
늦은 아침에 남여(藍輿)를 구해 타고서 15리를 가서 작은 암자를 지나고, 또 몇 리를 가서 표훈사(表訓寺)에 도착했다. 정오에 정양사(正陽寺)에 들어가 천일대(天逸臺)에 올랐다. 대(臺)는 높지는 않았지만 내산(內山)의 남ㆍ북쪽 빈곳을 근거로 해 한 번 바라보면 산세를 다 헤아릴 수 있기 때문에 유람하는 이들마다 번번이 이 대에 올라 조망하고 내려온다. 이윽고 가을 구름이 음산하게 해를 가리자 지척을 분간하기 어려웠다. 거사가 말하기를, “아, 형산(衡山)의 구름도 한유(韓愈.한퇴지)를 위해 걷혔는데, 이 산의 구름만 유독 나를 위해 걷히지 않겠는가.”라고 했다.
돌아와 남루(南樓)에 누우니 승려가 나옹자(懶翁子)의 의발(衣鉢)과 옥주미(玉麈尾)를 꺼내 보여주었다. 이 산은 중국에 소문이 나서 대대로 진보(珍寶)로 시주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범등(梵燈)과 종탁(鍾鐸) 중에는 간간히 중국 왕가의 물건도 있었다.
거사가 피곤하여 잠을 취하려고 하자 종자(從者)들이 저녁에 날이 개였음을 알렸다. 급히 지팡이를 짚고 대(臺) 가에 나가니, 희미한 구름이 사방에서 말려 올라가고 뭇 봉우리에서 별빛이 흘러 나와 일출봉[日觀]ㆍ월출봉[月觀]ㆍ백운대(白雲臺)ㆍ혈망봉[穴望]ㆍ국망봉[國望]ㆍ대향로(大香爐)ㆍ소향로(小香爐)ㆍ금강대(金剛臺)가 모두 눈앞에 빽빽하게 나열했으며, 동북쪽의 중향성(衆香城) 한 면이 가장 아름다웠는데 주름치마처럼 바위를 쌓아 높고 험했으며 평탄하지 않아 기교하면서도 괴이함을 이루 다 형용할 수 없었다. 엄연(儼然)하게 마치 여러 신선들이 요대(瑤臺.옥으로 만든 집) 위에서 두 손을 공손하게 맞잡은 듯하고, 교연(矯然)하게 마치 백학(白鶴) 만 쌍이 허공에서 날갯짓하며 내려오듯 해 진실로 구역 안이 장관이었다.
이윽고 석양이 산에서 내려가고 가벼운 구름이 고개 마루에 장막을 쳐 돌 색은 하늘과 그림자를 서로 적시는 듯 했으며, 산은 가을 기운을 띠고 사나워지려고 했다. 바람이 천천히 불어 온 골짜기에 울리자 종자(從者)들이 서로 돌아보며 황홀하게 자신이 어떤 세계에 있는 줄도 알지 못했다.
돌아와 서헌(西軒)에 묵으니 병이 더욱 심해졌다. 늙은 승려가 말하기를 “공(公)은 밤에 나을 겁니다.”라고 했는데, 다음날 정말로 나았다. 삼장암(三藏菴)을 경유하여 하산했다. 동으로 3리쯤 가서 보니 동구(洞口) 문이 휑하고 물이 두 골짜기 사이에서 쏟아져 나와 하나의 급류를 이루어 굉연하게 울려 퍼지니 이른바 만폭동(萬瀑洞)이다. 오래 앉았노라니 모발이 송연하였다.
향로봉을 지나고 아래로 꺾어 동으로 보덕굴(寶德窟)을 경유하여 벽하담(碧霞潭)에 이르렀다. 맑은 샘이 넓고도 깊었고, 단풍과 계수나무가 그 위를 덮어 돌의 결이 더욱 매끄러워지기에 돌을 의지하여 샘물을 잔질하여 마셨다. 꺾어 북으로 가다 또 방향을 바꾸어 동으로 가니, 산은 더욱 그윽하고 물은 더욱 맑으며, 돌은 더욱 기이하고 장관이다.
마하연(摩訶衍)에 이르니 중향성(衆香城) 아래에 깎아지른 바위들이 두른 절벽이 있는데, 뜰에는 삼(杉)나무ㆍ회(檜)나무 수십 장(章)이 서 있다. 암자는 공허하게 사람이 없어 낙엽이 뜰에 가득하고, 쓸쓸하게 오로지 바람과 물소리만 들린다. 또 꺾어 동으로 가니, 길이 좁아지고 험하게 깎여 앞으로 나가기 매우 어려웠다.
장안사(長安寺)로부터 사람들은 울퉁불퉁한 돌 위를 30여 리 가야 했는데, 족적이 사토(沙土)에 찍히지 않을 정도여서 혹은 비탈로 말미암아 잔도(棧道)를 밟고 줄을 잡고 지나갈 수 있으며, 혹은 벼랑이 끊어져 길이 없기도 했다. 비로소 남여(籃輿)를 버리고 지팡이를 짚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지팡이를 짚을 수 없어 지팡이를 버리고 무릎으로 기어갔다. 엉금엉금 바닥을 기어 네다섯 걸음을 가서야 겨우 쉬었다.
발길을 남으로 돌려 고갯마루에 올라 우러러보니 비로봉(毘盧峰)이 우뚝 서서 하늘 밖에 꽂혀 있었는데, 두 겨드랑이에 날개가 나지 않으면 오를 수 없었다. 노니는 사람들과 시를 잘 짓는 승려들 중 혹 인연이 닿은 자가 있으면 번번이 풍우가 사납게 내려 곤경에 처해 되돌아오곤 했으니, 신선들이 왕래하는 땅은 불을 때서 밥을 먹는 속세의 인간들이 쉽게 닿을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몇 리를 가서 수령(水嶺)에 올라 잠시 쉬었었는데, 고갯마루 서쪽은 내산(內山)이라 칭하고, 동쪽은 외산(外山)이라 칭했다. 북으로 수백 걸음에 안문재(雁門岾)가 있다. 거사가 묻기를, “비로봉과 안문재와의 거리가 얼마인가?”라고 하니, 어떤 승려가 대답하기를 “20리입니다.”라고 했다.
거사가 한숨 쉬고 탄식하며 말하기를, “구경을 그만둘 것이로다. 이 산은 진실로 해외(海外)의 원교(圓嶠)와 방호(方壺)로 중국의 시인ㆍ도사(道士)들이 유람하기를 바랐지만 그럴 수 없었다. 나는 편협한 곳에서 태어났지만 다행스럽게 여기에 이르렀으니, 천고(千古)에서 한 가지 유쾌한 일이 아니랴.”라고 했다. 나는 새로 얻은 병으로 다리가 연해져 비록 비로봉을 건너 구정봉(九井峰)에 올라 비선대(飛仙臺)를 끼고 하늘을 바라볼 수는 없었지만, 가슴속이 드넓음은 지난날과 다르니, 오히려 무엇을 아쉬워하랴.
또 생각하건대 동한(東漢) 응소(應劭) 씨의 〈등태산기(登泰山記)〉에, “중관음봉(中觀音峰)과 평지는 20리 떨어져있다. 중관음봉에서 10리를 가면 천궐(天闕)에 이르고, 또 7~8리를 가면 천문(天門)에 이른다. 또 동쪽 가로 몇 리를 가서 석단(石壇)에 오르면, 그곳이 가장 높은 곳이다.”라고 하였다. 이 고개와 평지의 거리는 55리이며, 비로봉은 또 이곳과의 거리가 20리이니, 풍악산은 태산(泰山)보다 높다. 넓이와 둘레는 또 두 배가 되어 마치 청성산(靑城山)ㆍ천태산(天台山)과 같기에, 또한 신선이 사는 도산[仙都道山]으로 불리기도 한다.
하지만 결단코 이 산에게 격조(格調) 하나를 양보해야 할 것이며, 천하의 여러 산들 중 오로지 곤륜산(崑崙山)만이 이 산에 대적할 수 있다. 하늘이 넓고 큰 공중의 바깥에 두 산을 대등하게 나열하고, 해와 달로 문호(門戶)를 삼아 명산(名山)을 품평(品評)한 것은 진실로 우열을 따질 수 없을 것이다. 두공부(杜工部.두보)가 말하기를, “방장산(方丈山.지리산)은 삼한(三韓)의 밖에 위치하고, 곤륜산은 만국(萬國)의 서쪽에 솟아 있네.”라고 했으니, 참으로 명언이다.
고개를 내려와 외산(外山)으로 들어가니, 외산은 조금씩 겉과 속이 섞이기 때문에 단풍나무ㆍ회나무의 짙음이 내산보다 더하다. 봉우리가 붉은 수풀 비취 그늘 밖에서 몰래 만나기에 사람들로 하여금 정신을 펴고 기운을 화창하게 해 느긋하게 한가로움을 보내는 정취가 있게 한다. 저녁에 유점사(楡店寺)에 투숙했는데, 산중의 큰 절이다. 향을 사르고 삼경(三更) 알리니 종경(鐘磬) 소리가 밤새도록 귀에 남아 말똥말똥 잠들지 못했다.
다음날 구재(狗岾)을 넘어 백천교(百川橋)에 이르렀다. 말을 타면 장안사로부터 산의 북쪽을 따라 작은 길을 200여 리 더 가야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는 백천교 아래에 겨우 도착할 것이다. 다리를 건너 말을 타고 고성(高城) 해산정(海山亭) 닿으니, 밤 인정(人定.밤에 통금 종을 치고 사람이 자는 시각)이었다.  
 
註: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번역. 그림은 겸재(謙齋.정선)草 비홍교(飛紅橋) 한국국학진흥원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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