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리를 논하자면 중화(中華)를 존숭하고 이적(夷狄)을 배척하며, 정치를 논하자면 왕도(王道)를 존중하고 패도(霸道)를 천시해야 한다. 이는 책을 펴서 글을 읽는 자들이면 누구나 하는 말이며, 꼭 노인들의 전유물만은 아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천하 형세로 보면, 옛날 중국 사람들이 오랑캐로 취급하여 끼워 주지 않던 나라들이 도리어 방자하게 대항해 오고 있다. 그들은 대항해 올 뿐만 아니라 강포하고 기만하며 속박하고 강제하면서 점점 중국을 압도하여 그보다 앞서고 있다. 그러다 보니 이제 천하에는 오랑캐가 없어져 버렸다. 아아, 천하에 중화와 이적의 구분이 없어졌는데, 어찌 왕도와 패도가 있겠는가. 서양의 나라들을 옛날 서융(徐戎)이나 형만(荊蠻) 같은 오랑캐와 비교해 보면, 이들은 이적이라 할것도 없고 도깨비일 따름이다. 또 저들의 기만책과 부국강병책을 옛날 제환공(齊桓公)이나 진문공(晉文公)의 통제 방식(춘추시대에 무력으로 패권을 잡았지만 그들이 천하의 제후국들을 통제하던 방식은 그래도 인의를 명분으로 하는 존주대의(尊周大義)였음)과 비교해 보면 그것은 패도라 할 것도 없고 다만 강도짓일 뿐이다. 따라서 소위 옛것을 배웠다는 자들이 볼 때에는, 허유(許由)처럼 귀를 씻고 노중련(魯仲連)처럼 바다에 몸을 던지기에도 겨를이 없을 정도이다. 더더구나 그들과 함께 마주 앉아 도의를 논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나라는 그대로 망하게 둘 수 없고 백성은 이대로 죽게 할 수 없다. 오직 분발하고 전력을 다하여 힘껏 그들과 대적하여 약육강식(弱肉强食)은 면하게 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천하를 향해 “우리도 사람이다.”라고 외칠 수 있으리라. 그렇게 되려면 방법은 무엇일까? 저들의 부강함을 본받아야 한다. 그리고 부강해지려면 저들의 학문을 배워야 한다. 이것이 근래에 신학교(新學校)가 세워진다는 소리가 곳곳에서 들리는 이유이다.
혹자는 “저들의 학문도 학문으로 인정하면서 이교(異敎)에 빠져든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한다. 이에 대해 나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련다. “그것은 결코 그렇지 않다. 우리나라는 유학(儒學)을 독실하게 믿어서 500년 동안 거기에 물들고 젖어 왔다. 비록 아녀자나 어린애들도 공맹(孔孟)의 도 이외에는 다른 도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이 도를 빼앗고는 다른 데로 가라고 하면, 아무리 상을 주어도 권면할 수 없을 것이며 아무리 벌을 가해도 몰아갈 수 없을 것이니, 그 점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
여러 기술과 기예의 경우, 중국에서도 모두 신성(神聖)한 이들의 생각에서 나와 전수되고 다듬어지면서 지혜와 기술이 나날이 진보되어 왔다. 오늘날에 사용되는 물품을 창제될 당시의 그것과 비교해 보면 염제(炎帝) 신농씨(神農氏)나 황제(黃帝) 헌원씨(軒轅氏)는 물론, 수(垂)나 장(斨) 같은 장인들(舜임금 때의 신하들)도 모두 손을 놓고 도망갈 정도가 되었다. 그렇다면 저 서양 제국들이 비록 국경을 닫고 자기 것을 지키면서 우리에게 주지 않으려 해도, 우리는 당연히 저들의 기술과 기물을 본받고 받아들여 우리의 어설픈 기술에서 크게 한번 벗어남으로써, 옛날 성인들의 이용후생(利用厚生)의 본의에 부합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더구나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경쟁하기를 바라는 경우에야 말해 무엇 하랴.
묻는 자가 또 이렇게 말한다. “학교는 성인(聖人)의 도를 밝히려는 목적에서 만든 것이다. 그대 말대로 하면 도가 장차 어떻게 밝아지겠는가?” 그러면 나는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천하에 도라는 것은 만고(萬古)가 하루와 같으니, 걸주(桀紂) 같은 폭군도 이를 줄어들게 할 수 없고 요순(堯舜) 같은 성군도 이를 풍성하게 할 수 없다. 그것은 육경(六經)에 실려 있고 모든 일에 깃들어 있다. 그것은 평탄한 9차선 도로와도 같아서 다니지 않는 경우가 있더라도 본연의 밝은 상태는 그대로이다. 비유하면 거울이 본래 밝은 것과 같다. 사람이 거기에 모습을 비추지 않는다 해서 그게 어찌 밝지 않은 적이 있는가.
또 내가 들으니, 지금 저 신학교들도 한문으로 된 전통 학문을 중시하여 경학(經學) 선생을 두고 그 과목을 맨 먼저 개설하고는 오히려 전일하게 하지 못할까 걱정한다고 한다. 그러니 글을 보고 뜻을 강론할 때, 가르치는 자가 배나 더 노력하고 배우는 자가 배나 더 성찰하여 하루에 열흘의 공부를 해 나간다면, 지난날 마을의 서숙(書塾)이나 군(郡)의 향교(鄕校)처럼 범범하게 형식적으로 행하던 방식과 비교할 때, 얻는 것이 확연히 다를 것이다. 무릇 하늘은 변하지 않고 도(道)역시 변하지 않는 법이다. 그대가 저 위에 푸르디푸른 하늘이 새로운 모습으로 항상 창대한 것을 본다면 우리의 도가 혹여 변할까 의심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전주(全州)에 양영학교라는 곳이 있는데, 그곳에서 교무(校務)를 주관하는 사람이 우리 고향의 고현중(高玄中)이 풍모가 있다는 말을 듣고는, 여러 번 설득한 끝에 경학 선생으로 모셔 갔다. 그러자 고현중이 “여기도 학교인데 기문(記文)이 없어서는 안 된다.”라고 하면서 나에게 편지를 보내 글을 써 주기를 부탁하였다. 나는 이미 늙어 문밖출입을 않은 채 못다 읽은 책이나 보는 신세지만, 현중과는 서로 왕래하며 더러는 여러 날 쉬지 않고 담론을 나누곤 하였다. 그러나 그것들은 모두 쓸데없는 학문일 뿐이다. 어찌 잘 모르면서 짐짓 아는 체하며 오늘날의 학교를 논할 수 있겠는가. 아아, 오늘날 의논하는 자들은 다들 학교가 많지 않은 것을 걱정하곤 한다. 하지만 학교가 날로 많아지면 고현중 같은 사람들이 다들 경학 선생으로 선발되어 가게 될 텐데, 그리되면 나같이 영락(零落)한 사람은 앞으로 누구와 함께 담론을 나눌 것인가. 이 점이 걱정일 뿐이다. (끝)
註: 양영학교는 전주(全州)에 설립된 신학교이다. 그 설립은 당시 사설 신학교의 설립 연대로 보아 빨라도 1905년 이후일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이 기문(記文)에 대해 연구자들은 매천의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적인 입장이 잘 드러나 있는 글로 보았는데, 자문자답 형식으로 독자에게 시대적 화두에 호기심을 집중하게 하였으며 서양에서 받아들여야 할 대상을 ‘기(器)’로 국한하여 동도서기론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 글에서 매천은 주체적, 국민주의적인 개혁, 개방의 길을 모색했으며 지식인으로서의 자각과 함께 근대성을 읽을 수 있다. - 고전번역원 역문및 각주를 전재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