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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서당(以會書堂)

순자(荀子) 학지위위(學之爲僞)의 논리와 예악론(禮樂論)<중국의 윤리사상>,78-93쪽

작성자허창무|작성시간12.07.14|조회수883 목록 댓글 0

  순자는 맹자와 더물어 공자의 유가사상을 계승한 대표적인 학자로 공인되고 있으나 그들의 학설은 완전히 상반된 입장에서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그것은 그들의 사상적 기초인 인성론(人性論)에 대한 견해가 같지 않기 때문이다. 맹자는 성선설(性善說)의 입장을 취하였고, 순자는 선악설(性惡說)의 입장을 취하였다. 부연하자면 맹자는 성(性)을 착한(善)한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사단확충론(四端擴充論) 주장하게 되었고, 순자는 성(性)을 악(惡)한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예악론(禮樂論)을 역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맹자의 성선설과 대비하여 순자 성악설을 살펴볼 필요가 있고, 또한 기독교의 원죄론(原罪論)과 대비하여 순자의 성악설의 타당성 여부를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순자가 말하고 있는 성악(性惡)은 단지 정욕(情慾)의 일면 만을 두고 한 말이다. 그러나 정욕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심(心)의 작용이 얼마나 중요한 것이가를 다음에서 확인할 수 있다. "성(性)의 호오(好惡), 희노(喜怒), 애락(哀樂)을 일컬어 정(情)이라 하고, 이러한 정(情)이 본래의 모습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부득이 선택(選擇)이라는 단계를 거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데, 이 단계를 <여>(慮)라고 한다. 이 <여>(慮)의 단계를 거쳐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것을 <위>(僞)라고 한다.(性之好惡喜怒哀樂, 謂之情, 情然而必爲之擇, 謂之慮. 心慮而能爲之動, 謂之僞.) 이 선택의 단계에서 마음은 사상의 주체로써 그 역할을 하는 존재로 순자는 인식하고 있다. 

  마음이 사상의 주체(主體)라면 그 무엇을 하고 싶다는 <가욕성>(可欲性)도 자제시킬 수 있게 된다. 욕구(欲求)에 대한 이러한 절제(節制)야 말로 윤리적인 인간으로서 자리매김을 할 수 있는 근거로성의 심(心)을 해석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천성에는 비록 욕구가 있지만 마음이 있어서 그것을 절제할 수 있다....따라서 욕구가 지나치다고 판단되면 다소 부족한 선에서 동작을 멈추게 하는 것을 <心之止>(마음의 멈춤)이라 한다. 이와 같이 마음이 이(理)에 따라 작동할 수 있다면, 욕구가 비록 지나치나 어떻게 남에게 피해가 되겠는가? 욕구를 조절하는 행위는 오로지 마음의 시킴에 달려 있는 것이다. 마음이 이(理)에서 벗어나면 욕구가 비록 적을지라도 혼란한 경지에 이르지 않는다고 보장할 수 있겠는가? 따라서 치란(治亂)은 마음이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고, 정(情)의 욕구(欲求)를 어떻게 조절하느냐에 달려 있다."<荀子>(正名篇)

  위에서 제시한 일단의 내용을 요약하면, 인간이 욕구를 버릴 필요까지는 없지만 그 욕구를 잘 유도할 필요는 있는 것이며, 욕구를 적게할 필요까지는 없지만 그 욕구를 절제할 필요는 있는 것으로 설명한 것이다. 마음에 대한 순자의 견해를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그것은 이(理)에 따라 판단할 수 있는 마음(心)이 육체의 주재자(主宰者)로서 사상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그런데 마음에는 <虛一而靜>(허일이정)의 세 가지의 특성, 즉 마음을 비워야 한다는 허심(虛心), 정신을 한군데 집중해야 한다는 전일(專一), 여러가지 잡다한 생각에서 벗어나서 조용히 정적인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는 정심(靜心)이 있는 데, 이것들에 대한 수양공부(修養工夫)를 할 때만이 사상의 주체로써 마음이 제 기능을 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순자는 사회적 병리현상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엇부터 먼저 시작해야 할 것인가 하는 고민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생각에 제일 먼저 제기된 것은 그들을 짓누르고 있는 악(惡)이 아닐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악이 온통 세상의 전부일 것 같은 혼란의 시대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맹자와 순자의 사유 세계에서는 공통적으로 사악한 세상을 어떻게 바로 잡을 수 있을까 하는 실천적 문제에 몰입하였지, 악이 무엇인가 하는 이론적 형이상학의 물음은 제기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어떻게 사악한 세상의 악을 제거할 수 있는가 하는 실천적 물음은, 악이 어디에서 오는가 하는 발생론적 물음과 직결된다. 왜냐하면 사회의 악을 제거하고, 인간을 구제하기 위하여 그 악의 연원을 알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에, 그들의 도덕적 사색은 악에 대한 발생론적 사고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순자의 성악설은 맹자의 성선설과는 첨예한 대립을 보이고 있지만, 시대적 사회악을 치유하겠다는 실천론에서는 동원이수도(同源而殊道)일 뿐이며, <生>(생)으로써 인성을 설명하고 있는 점은 고자(告子)의 인성관과 유사성을 띠고 있는 것 같으나 <僞>(위)를 제시한 점은 고자에서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다. 즉 순자는 생지위성(生之爲性)과 학지위위(學之爲僞)로 성악설의 이로적 기초로 삼았다.

  생지위성(生之爲性)은 잠깐 접어두고 여기서는 하지위위(學之爲僞)에 국한하여 살펴보겠다. 맹자 성선론의 주장에 대하여 순자는 격렬한 논박과 아울러 그 논리의 부당성을 제시하고 있다. 맹자는 배우는 것은 그 성이 선하기 때문이라고 말하였으나 그렇지 않다. 성이란 하늘이 내려주는 것이기 때문에 배울 수도 없고, 노력해서 이룰 수도 없다. 그러나 예의는 성인이 만들어 낸 것이기 때문에 사람이 배우면 행할 수 있고, 노력하면 이우어질 수 있는 것이다. 배워서도 행할 수 없고 노력해도 이루질 수 없는 것인데, 사람이 지니고 있을 것을 <性>이라 하며, 배워서 행할 수 있고, 노력해서 이룰 수 있는 것이 사람에게 있는 데, 이를 <僞>(위)라 한다."<순자>(성악편) 이것으로 <性>과 <僞>를 구분하면서, "사람의 성은 악하다. 그렇지만 그것이 선하게 되는 것은 이위(人爲)적 행위에 의한 것으규정하였다. 그렇다면 순자가 말하는 <僞>는 인위적인 행위로서 '그짓위'자의 의미와는 다름을 알 수 있다. 현대적 학술용어로 바꾼다면 사회화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荀子>(性惡篇)에서 일관되게 주장하고 있는 그의 논지대로 인성(人性)이 악(惡)한 것이라면, 소위 <禮儀>(예의)는 어떻게 하여 생겨났을까? 순자는 작위(作爲)로 예의의 탄생을 설명하고 있다. 즉 "예의라는 것은 성인의 작위에서 생겨나는 것이지, 사람의 성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면서 옹기장이가 찰흙을 이겨서 도자기를 만드는 것과 목수가 나무를 다듬어 그릇을 만드는 것이 모두 그들의 작위적인 솜씨에 의한 것과 마찬가지로, 성인도 생각을 축적하고 작위적인 행위를 계속하여 예의를 윤리적으로 체계화한  것이며 법제를 정치적으로 제정한 것으로 파악하였다. 따라서 그는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성인은 성을 교화시켜 작위를 일으켜 예의를 만들며, 예의를 만들어 법도를 제정한 것이다." 순자가 이처럼 <僞>를 내세워 성악의 논리를 제시하고 있지만, 인간이 예의와 법도를 따를 수 있다고 한 점으로 보아 그도 암암리에 인성이 본래 선한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역으로 인전한 셈이 된다. 

  순자가 비록 생지위성(生之爲性)으로 성악론을 제창하였으나 <僞>라는 작위적인 행위의 축적, 즉 학지위위(學之爲僞)를 통하여 사회적 공동선을 추구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그의 윤리설은 예악론(禮樂論)이 중심축에 놓일 수 밖에 없다. 인성은 본래 악(惡)한 것이나 그 중에 선(善)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작위적(作爲的)인 것에 불과한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도덕은 인위적인 축적으로 만이 성악적인 부분을 제거하여 성선적인 방향으로 유도할 수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순자는 도덕(道德)의 표준(標準)으로 예악론(禮樂론)을 실천에 옯길 것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예악(禮樂)의 개념에 바탕한 순자의 교화론(敎化論)은 동방사회에서 수기(修己)의 개인적인 수양으로부터 치인(治人)의 사회적 덕목에 이르기까지 모든 실천윤리에서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결론적으로 순자의 학설을 맹자와 비교함으로써 그의 입장이 어디에 초점을 두고 있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따라서 그의 학설중에서 맹자와 대치되는 부분에 초점을 맞추어 다음과 같이 정리하여 독자들의 편의를 제공하고자 한다.

첫째, 人性論이 다르다는 점이다.

맹자는 성선설을, 순자는 성악설을 주장하였다. 전자는 애타심(愛他心)을, 후자는 이기심(利己心)을 인성의 근거로 삼았는데, 둘 다 인성의 한 측면만을 보고 그 선과 악을 정해 버린 데 불과하다. 성선설을 주장한 맹자는 악의 기원을 물욕(物欲)에 돌렸고, 성악설을 주장한 순자는 선이 이루어지는 것은 성인의 작위(作爲)로 말미암은 것이라 하였는데, 맹자의 인성론보다는 순자의 인성론이 논리성을 띠고 있음이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천년동안 중국이나 한국에서는 성선설(性善說)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어 왔다.

둘째, 道德論이 다르다는 점이다.

맹자는 인간성을 선으로 파악하였기 때문에, 사단(四端)을 확충(擴充)하는 것을 도덕의 실천적 과제로 파악하였다. 이와는 달리 순자는 인간성을 악한 것으로 인식하였기 때문에 인위적인 학지위위(學之爲僞)의 교정을 윤리의 요체로 인식하였다. 따라서 맹자가 인의예지(仁義禮智)의 주관적 도덕을 중시한 데 반하여, 순자는 예악(禮樂)과 형정(刑政)의 객관적 도덕을 주창하였다. 왜냐하면 맹자는 예(禮)를 내면적인 것이라고 해석하면서 인간의 본성에 기초하였다면, 순자는 예를 외면적인 것으로 해석하면서 본성의 교정은 옛 성인의 작위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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