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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서당(以會書堂)

관포(灌圃) 어득강(魚得江 1470~1550)

작성자허현|작성시간15.03.01|조회수308 목록 댓글 0

 

관포(灌圃.魚得江)은 본관이 함종(咸從), 자호(自號)는 혼돈산인(渾沌山人)이다. 사마시에 합격하고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곡강군수(曲江郡守) 등 외직을 거쳐 장령,헌납,교리,대사간,밀양부사(密陽府使)가 되었다.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으며, 상호군을 사직한 뒤에는 고성군 대가면 갈천입구 혼돈산 아래에서 노년을 보냈고 현재 갈천서원에 제향되고 있다. 

그는 산수를 사랑하는 성벽으로 시명(詩名)이 있었으며, 특히 해학(諧謔)을 잘 하였다. 저서로 《동주집(東洲集)》과 《관포시집(灌圃詩集)》이 있다. 율시(律詩)에 뛰어났으며, 절구(絶句)는 두보(杜甫)의 시풍이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山陰十二詠, 雙溪八詠, 東州道院十六絶, 泛槎亭(범사정), 灌圃堂八詠, 冥鴻亭(진주 명홍정) 상량문등이 있다.

《해동잡록》,《연려실기술》등에 실린 관포와 관련된 기록은 다음과 같다.

 

어득강(魚得江) - 해동잡록 3권 

● 본관은 함종(咸從)이요, 자는 자유(子游)이며, 호는 관포(灌圃) 혹은 혼돈산인(渾沌山人)이라고 한다. 연산조(燕山朝)에 급제하였다. 성품은 참되고 솔직하며 마음이 편하여 욕심을 내지 않으며 또한 농담을 잘 하였다. 중종(中宗) 때 대사간이 되어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끝내 관직에 복귀하지 않았다. 저서로는 《동주집(東洲集)》이 있다. 일찍이 곡강군수(曲江郡守)가 되었을 때 시를 지어 친구가 엿을 보낸 호의에 감사하기를,

견성(甄城.완산)의 풍토는 엿 만들기에 알맞은 건가 / 甄城風土好飴糖

대광주리로 해마다 상방에 진상 하도다 / 貢篚年年進上房

도리어 괴이함은 동주에는 이러한 것이 없어서 / 還惟東州無此物

3년 만에 비로소 고인에 힘입어 맛보았도다 / 三年始賴故人嘗

하였다. 완산 사람은 엿을 잘 만들고 다른 군 사람은 그에 미치지 못하였기 때문에 해마다 공납하였다. 이에 세상에서는 완산 엿이라고 칭송하였다

● 부친상을 당하여 여막 옆에 방 하나를 만들어서 현판을 ‘우애(寓愛)’라 붙이고 명절이나 기일에 제사드리는 장소로 하였다. 김모재(金慕齋.김안국)가 두 절구의 시를 지어 그것을 기록하였다.

● 어자유(魚子游)는 남과 말을 하면서 농지거리를 섞어 하였다. 어떤 사람이 전하기를, “정모(鄭某)란 이가 문학을 배명 받고 갔다.” 하니, 곧 응답하기를, “내가 일찍이 문학을 했는데 어찌 정(鄭)이 했다고 하는가?” 하였다. 좌우의 사람들이 괴이하게 여겨 물으니 어자유는 말하기를, “문학에는 자유(子游) 자하(子夏)이거늘.” 하자, 듣는 사람이 모두 포복절도하였다.

● 자유(子游)의 성품은 진실하고 솔직하여 위의가 없으며 거처함이 담박하였으나 선학(禪學)은 하지 않았다.

● 곡강 수령(曲江守令)으로 있을 때 친구가 먹을 구함에 인하여 지은 시에,

습관은 해가 가도 괴로이 고치지 못하고 / 習氣年來苦未痊

또한 동해가에서 어연을 만들게 하는구나 / 又於東海制魚烟

1년에 3번씩 고래의 배를 가르나 / 一年三度刳鯨腹

붓대를 휘두르매 도리어 돈 가치만 못함을 부끄러워 하도다 / 揮筆還慚不直錢

하였다. 고래 기름을 태운 연기를 취하여 먹을 만들었기 때문에 먹을 어연이라 하였다.

● 왕위(王褘)의 문체를 본받아서 기물에 명(銘) 20수를 지었는데, 관ㆍ띠ㆍ실ㆍ베개ㆍ이불ㆍ포장ㆍ옷상자ㆍ횃대ㆍ솥ㆍ거울ㆍ빗ㆍ자ㆍ도장ㆍ술잔ㆍ거문고ㆍ함ㆍ긴 걸상ㆍ칼ㆍ병풍을 들었다.

꽃 밖에 채색 그네줄 달빛에 움직이고 / 花外綵繩搖月影

버들가에 붉은 소매자락 봄바람과 다투네 / 柳邊紅袖競春風

 

어득강(魚得江)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9권

● 어득강은, 자는 자유(子游)이며, 호는 관포(灌圃) 또는 혼돈산인(渾沌山人)이요, 본관은 함종(咸從)이다. 임자년에 진사가 되고 연산조 병진년에 문과에 뽑혀 벼슬이 대사간에 이르렀다. 우스개 소리를 잘하고 문장에 능하였다. 저술로는 《동주집(東洲集)》이 있다.

● 어득강은 영남 진주에 살았는데, 문학과 아담한 운치가 있었다. 과거에 오른 후로 여러 번 외직을 청하고, 성품이 담백하여 물러가기를 좋아하였다. 벼슬하는 데 뜻이 없어서 조정에서 좋은 벼슬로 불러도 모두 나가지 않았다. 조그만 집을 산수 사이에 지었는데 가족들과 함께 거처하지 않고, 아이 종 하나만을 데리고 대략 조석으로 밥을 지어 먹었으니, 담담하기가 중의 살림살이와 같았으며 남과 말할 적에 우스개 소리를 섞어 썼다.어느날 사람들과 더불어 마주 앉아 있는데, 사람이 와서 전하기를, “도사(都事) 정만중(鄭萬重)이 갈려서 문학(文學. 여기서는 벼슬이름)이 되어갔다.” 하니, 어득강이 문득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문학이 되었는데 어찌 정씨가 한다 하는가.” 하였다. 좌우에 있는 사람들이 괴이하게 여겨 물으니 어득강이 말하기를, “《논어》에 ‘문학은 자유(子游)와 자하(子夏)이다.’ 하지 않았는가.” 하여, 듣는 자들이 허리를 잡고 웃었다.

● 성품이 진실하고 솔직하며 겉 모양을 꾸미지 않고, 담백하게 거처하는 것이 승방보다 심했다. 중종조에 대사간이 되었다가, 벼슬을 버리고 시골로 돌아가 끝까지 나오지 않았다.

 

회재 동지에게 받들어 올리다 [奉呈晦齋道契] - 어득강/회재집(晦齋集)3권

내 일찍이 아름다운 자옥산을 보았는데 / 曾看紫玉山中好

공(이언적)이 서당 지은 곳이 이 산의 시내였소 / 公作書堂爲此溪

오늘 산의 정령(精靈)이 도리어 놀라는 건 / 今日英靈却驚怪

일찍이 해계서를 보지 못한 때문이리 / 生曾不見駭鷄犀

 

혼돈산이 노년 시절 보내도록 받아 주니 / 混沌溪山容我老

청춘에 정착해서 머리 모두 세었어라 / 靑年住此白烏頭

가난 귀신 내게 씐 걸 사람들이 다 알건만 / 世人皆識吾貧鬼

만 가마니 안개 노을 누리는 게 부끄럽네 / 萬斛煙霞富可羞 

 

註: 자옥산은 회재(이언적)가 은거했던 경주(현재 옥산서원의 뒷산),혼돈산은 관포가 은거했던 경남 고성에 있는 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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