註: 가정 이곡(李穀 1298~1351)의 《죽부인전》은 가전체(假傳體) 작품으로 대나무를 의인화(擬人化)하였다. 가전체는 동식물,사물 따위를 의인화하여 그 일대기를 전기(傳記) 형식으로 서술한 것이다.
부인의 성은 죽(竹)이요, 이름은 빙(憑)이니, 위빈(渭濱) 사람 운(篔)의 딸이다. 족계(族系)가 창랑(蒼筤)씨에서 났는데, 그 조상이 음률을 알아 황제(皇帝)가 뽑아서 악(樂)을 맡아보게 하였으니, 우(虞)나라의 소(簫.악기이름)가 역시 그의 후손이다. 창랑(蒼筤)이 곤륜산 남쪽으로부터 진방(震方.동방)에 옮겨와 복희씨 때에 위(韋.죽간을 맬때 쓴 가죽끈)씨와 더불어 문적(文籍)을 주장하여 크게 공이 있어 자손이 대대로 다 사관(史官)의 업을 지켜 왔다. 진(秦) 나라가 포학한 때에 이사(李斯)의 계교를 써 책을 불사르고 선비를 묻어 죽이매, 창랑의 후손이 점점 한미하였고, 한대(漢代)에 이르러 채륜(蔡倫.종이를 처음 만들어 보급한 사람)의 문객 저생(楮生.종이를 의인화함)이란 자가 자못 글을 배워 붓을 가지고 때로 죽씨와 더불어 놀았으나, 그 사람됨이 경박하며 참언(讒言.길흉화복에 대하여 예견하는 말)을 좋아하여 죽씨의 강직함을 보고 슬그머니 좀먹어 헐어 드디어 소임을 빼앗았다.
주(周)나라에는 간(竿.낚싯대)이 있었으니, 또한 죽씨의 후손이다. 태공망(太公望.강태공)과 더불어 위빈(渭濱)에 낚시질할 때, 태공이 갈퀴[鉤]를 만드니, 간(竿)이 말하되, “내가 들으니 큰 낚시는 갈퀴가 없다 하나이다. 낚시의 크고 작음이 곡(曲)ㆍ직(直)에 있사오니, 곧은 것은 가히 나라를 낚을 것이요, 굽은 것은 고기를 얻음에 불과한 것입니다.” 하였다. 태공이 그 말을 좇아 뒤에 과연 문왕(文王)의 스승이 되어 제(齊) 나라에 봉함을 받았고, 간(竿)의 어짐을 천거하여 위빈으로써 식읍을 삼게 하니, 이것이 죽씨 위빈의 유래이다. 지금도 자손이 아직 많으니, 임(箖)ㆍ어(箊)ㆍ군(䇹)ㆍ정(筳)이 그것이요, 양주(楊洲)로 옮겨간 자는 조(條.세죽)ㆍ탕(簜.대죽)라 일컫고, 호중(胡中)으로 들어간 자는 봉(篷.편죽)이라 일컫는다.
죽씨는 대개 문(文)ㆍ무(武) 두 줄기가 있어, 대대로 변(籩)ㆍ궤(簋), 생(笙)ㆍ우(竽)와 같은 예악의 소용으로부터, 활쓰고 고기잡는 작은 용도에 이르기까지 전적에 실려 있어, 마디마디 볼 수 있다. 오직 감(䇞)은 성질이 지극히 둔하여 속이 막혀 배우지 못하고 죽었으며, 운(篔)에 이르러 숨어 벼슬하지 않았다. 한 아우가 있었으니 이름은 당(簹)으로 형과 이름을 가지런히 하여 가운데를 비우고 저를 곧게 하였는데, 왕자유(王子猷.왕휘지)와 친하게 지냈다. 자유가 말하되, “하루도 이 군(君) 없이는 살 수 없다.” 하였으므로, 호를 차군(此君.대나무를 칭함)이라 하였다. 대저 자유는 벗 취하기를 단정한 사람으로 할 터인즉, 그 위인을 알 만하다.
당(簹)이 익모(益母.약초이름)의 딸과 결혼하여 한 딸을 낳으니, 부인이 바로 그이다. 처녀 때에 정숙한 자태가 있어 이웃에 사는 의남(宜男.풀이름)이란 자가 음사(滔詞)를 지어 떠보니, 부인이 노하여 말하되, “남녀가 비록 다르나 그 절개는 하나인데, 한 번 사람에게 꺾인 바 되면 어찌 다시 세상에 서리요.” 하매 의생(宜生)이 부끄러워 달아났으니, 어찌 소 끄는 무리가 엿볼 바이랴. 이미 자라나자 송대부(松大夫)가 예로써 청혼하니, 부모가 말하되, “송공(松公)은 군자이다. 그 평소의 조행이 우리 집과 서로 짝이 된다.” 하고 드디어 아내로 보내었다.
부인의 성질이 날로 더욱 굳고 두터워 혹 일에 당하여 분별할 때에는 민첩하고 빠름이 마치 칼날로 쪼갬 같으며, 비록 매선(梅仙.매화)의 서신이 있음과 이씨(李氏.桃李)의 무언의 기대에도 한 번도 일찍 돌아보지 않았거니, 하물며 귤로(橘老.감귤)와 행자(杏子.살구)이랴. 혹 안개 낀 아침과 달밝은 저녁을 만나 바람을 읊고 비를 휘파람할 제는 그 말쑥한 태도를 형용하기 어려워 호사자들이 슬그머니 그 얼굴을 그려 전하여 보배로 삼으니, 문여가(文與可.문동)와 소자첨(蘇子瞻.소식) 같은 이가 더욱 그것을 좋아하였다.
송공(松公.황석)이 부인보다 나이 18세가 위인데, 늦게 신선(神仙)을 배워 곡성산(穀城山)에 노닐다가 돌로 화하여 돌아오지 않았다. 부인이 홀로 살며 이따금 위풍(衛風)을 노래하매 그 마음이 스스로 흔들흔들 하여 지탱할 수 없었다. 그러나 성질이 술마시기를 좋아하여, 역사에, 그 해는 잊었는데 5월 13일에 청분산(靑盆山)으로 집을 옮겨, 취하여 고갈(枯渴)의 병을 얻어 드디어 고치지 못하였다. 병을 얻은 뒤로부터 사람을 의지하여 살았고, 만절(晩節)이 더욱 굳어 향리에서 일컬어졌다. 삼국[三邦]절도사 유균(惟箘.전죽)이 부인과 동성(同姓)이라, 행장(行狀)으로써 위에 아뢰니, 절부(節婦)의 직함을 주었다.
사씨(史氏.史官)는 말한다. 죽씨의 조상이 크게 상고의 세상에 공을 세웠고, 그 묘예(苗裔.후손)들이 다 재능이 있고 절개가 있어 세상에 일컬음이 되었으니, 부인의 어짐이 마땅하다. 아, 이미 군자를 짝하고 남의 의지함이 되고도 마침내 후사가 없었으니, 천도(天道)가 무지하다는 탄식의 말이 어찌 헛 말이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