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축년(1541) 가을 7월 무자일(戊子日)에 내가 풍기(豊基)에 도착하였는데, 이 해에 큰 가뭄이 들었고 임인년(1542)에도 큰 기근이 들었다. 이 해에 백운동(白雲洞)에 회헌(晦軒.안향)선생 사당을 세우고, 이듬해 계묘년(1543)에 향교(鄕校)를 고을 북쪽으로 옮겼으며, 또 사당 앞에 따로 서원(書院)을 세웠다. 이에 어떤 이가 말하기를,
“심하도다. 그대의 세상물정 어두움이여. 향교를 옮긴 것은 그렇다 해도 문성공(안향)의 사당과 서원을 세우는 일은 그만둘 수 없었는가? 문성공은 이미 국학(國學)에 종사(從祀)되어 고을마다 사당이 있는데 어찌하여 굳이 사당을 세우며, 이미 학교가 있는데 어찌 꼭 따로 서원을 세울 필요가 있는가? 흉년을 당하였으니 그럴 시기가 아니며, 낮은 지위에 있으니 사람들이 믿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나라에 일찍이 없었던 사당과 서원을 자신으로부터 시작하려고 하니 너무 지나치지 않은가?” 하였다. 이에 내가 답하기를,
“글쎄. 내가 보건대 주자(朱子)가 남강(南康)을 다스린 1년 사이에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중수(重修)하였고, 또한 선성(先聖)과 선사(先師)의 사당과 다섯 분 선생의 사당, 그리고 세 분 선생의 사당을 세웠고, 또한 유둔전(劉屯田)을 위하여 장절정(壯節亭)을 지었다. 그 당시엔 금(金)나라가 중국을 함락하여 천하가 피비린내로 가득하였고, 남강지방은 계속된 큰 흉년으로 벼슬을 팔아 곡식으로 바꿔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였다. 그 당시 위태로움과 곤궁함이 그토록 심하였는데도 그가 세운 서원과 사당이 한둘이 아니었던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늘이 뭇 백성들을 낳음에 사람이 사람다운 이유는 바로 교육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에게 교육이 없었다면, 아비는 아비답지 못하고 자식은 자식답지 못하고 지아비는 지아비답지 못하고 지어미는 지어미답지 못하고 어른은 어른답지 못하고 어린이는 어린이답지 못하게 되어, 삼강(三綱)과 구법(九法. 洪範九疇)이 없어져서 인류가 멸망한 지 이미 오래 되었을 것이다.
교육이란 반드시 현인을 높이는 것에서 비롯되므로 사당을 세워 덕있는 이를 숭상하고 서원을 세워 학문을 돈독히 하는 것이니, 실로 교육은 난리를 막고 기근을 구제하는 것보다 급한 것이다. 그 말에 보면 ‘세속으로 말하면 긴요함이 없는 듯하나 지금 실정으로 보면 인심과 정사의 체모에 관계되는 바가 가볍지 않다. 오늘날 흉년을 구제하는 정사는 바로 이 교육과 더불어 서로 표리가 되는 것이다.’ 하였다.
아, 회옹(晦翁.주자)이 어찌 나를 속이겠는가. 죽계(竹溪)는 바로 문성공의 궐리(闕里.고향)이다. 교육을 세우려고 한다면 반드시 문성공을 높이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내가 보잘것없는 몸으로 태평한 세상을 만나 외람되게 이 고을 군수가 되었으니 고을을 위하여 그 책임을 다하지 않을 수 없다. 이에 마음과 힘을 다하여 사당과 서원을 설립하고 토지를 마련하고 경전을 소장하기를 한결같이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의 고사에 따라 하고서, 후일에 훌륭한 인물을 기다리게 되었다. 따라서 시기도 돌아볼 겨를이 없었고 사람들의 믿음 또한 아랑곳하지 않았다.
옛날 사사분(司士賁)이 평상 위에서 시신을 염하기를 청하자, 자유(子游)는 이를 허락하였으나 현자(縣子)는 이 말을 듣고 꾸짖기를 ‘지나치다. 숙씨(叔氏.자유)가 남에게 마음대로 예를 허락함이여.’라고 하였으니, 자유가 예문에 근거하지 않고 독단으로 말한 것은 비난을 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내가 한 일은 모두 회옹을 본받은 것이다. 지혜로운 이는 반드시 살피고 어진 이는 반드시 이해할 것이니, 무슨 지나침이 있겠는가?”
하였다. 그가 또 말하기를,
“주자의 어짊은 맹자에 앞서고 공적은 공자와 짝할 만하여 분명 평범한 사람이 미칠 수 없는 신묘한 교화의 힘이 있었지만, 주자가 남강을 떠난 지 10년이 채 못 되어 장절정의 문과 담장과 정자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고, 그 후임 증치허(曾致虛)가 다시 개축하여 옛 제도를 넓혔으니, 주자 또한 부족한 바가 있었던 것이다. 이로써 미루어 본다면 그대가 아무리 노력하여 사당과 서원을 세우더라도 10년간의 보존을 기대할 수 없고, 또한 증치허와 같은 후임이 없다면 오늘날의 조소와 멸시뿐 아니라 후일에 비난을 받을 것이다. 성현을 배움에 있어서는 그 마음을 본받아야 하니, 만일 그와 같이 어질지 못하면서 한갓 그 행적을 답습한다면 또한 어리석은 일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나는 이에 답하기를,
“그렇지 않다. 그 마음을 스승으로 삼으면 반드시 그 행적을 따라야 하는 것이니, 그 행적을 어떻게 피하겠는가? 성현의 행적을 피하고 따르지 않는다면 장차 향원(鄕愿.시골 사람으로서 덕이 있다는 칭송을 받으나 행실은 그렇지 못한 사람)의 행적을 따르게 될 것이니, 어리석음을 면하려다 오히려 향원에 빠질까 두렵다.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에 기재된 사당은 1천 2백여 개소이고 서원은 3백여 개소이다. 또 기록되지 않은 곳은 얼마나 될 것인가? 오늘날 모든 산봉우리마다 사찰이 있어 금빛 불상을 받들고 있는데도 이는 이상하게 여기지 않고, 오직 이 고을에 하나의 사당과 하나의 서원이 있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이것이 바로 주자가 여산(廬山)의 서원을 보고 크게 탄식한 것이다. 이를 건립함은 나에게 있으나 이를 보존함은 저들에게 있다. 내가 한 일은 실로 내가 책임지겠지만 저들이 할 일을 어떻게 걱정하겠는가. 주자 같이 큰 현인을 만나 오래도록 전해짐도 천명이고, 증치허 같은 이를 만나지 못하여 오래 전해지지 못함도 천명이니, 그 천명을 어찌 하겠는가.”
하였다. 그가 또 말하기를,
“주자는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중수할 때 반드시 조정에 아뢴 후에 하였는데, 그대가 백운동서원을 세우면서 조정에 아뢰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기에, 답하기를,
“백록동서원은 선대 제왕의 명으로 설립되었기 때문에 아뢴 것이나, 기타 서원은 아뢴 적이 없었다.”
하였다. 그가 또 다시 말하기를,
“문성공이 섬학전(贍學錢)을 설치하고 노비를 바쳤으니 그 근실한 점은 인정한다. 그러나 그의 학문에 대하여 듣고 싶다.”
하기에, 답하기를,
“고려의 사관(史官)이 도학을 알지 못하였기에 그의 공은 말할 수 있었으나 그의 학문을 천명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나는 늘 《고려사(高麗史)》를 읽다가 〈문성공전(文成公傳)〉에 이르러 탄복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공이 삼별초(三別抄) 적중에서 탈출한 일, 요사스런 무당을 매질한 일, 원나라 황제에게 규방(閨房)의 일에 대하여 변론한 일, 학교 진흥에 진력한 일, 자신의 몸을 엄격하게 다스리는 일, 인재를 알아본 안목 등은 그 높은 경지를 따져볼 때 큰 현인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오직 그는 장중하고 자상하였으며 일을 꾀함에 유능하고 과단성이 있었다. 그리고 공자를 논함에 있어서도 ‘신하는 임금에게 충성하고 자식은 부모에게 효도하며 아우는 형에게 공손하는 것이 모두 누구의 가르침인가?’라고 하여 해와 별처럼 밝게 천명하여 만고에 전하였고, 무인(武人)을 감복시켜 섬학전을 내게 하였으니, 또한 사문(斯文)에 기여한 공이 크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공(안향)은 또한 노년에 이르러 항상 주자의 영정을 걸어 놓고 사모하며 ‘회헌(晦軒)’이라 자호(自號)하였는데, 주자를 사모함은 곧 공자를 사모함이다. 공의 어짊과 용기는 죽음에 이르도록 조금도 해이함이 없었고, 지향할 바의 바름을 말한 것은 삼한(三韓)의 풍속을 일신하여 익재(益齋.이제현)ㆍ포은(圃隱.정몽주)과 같은 분이 그 영향을 입었다. 본조에 이르러 삼대처럼 예악의 교화가 융성하였고 이후 340여 년 동안 천리(天理)가 다시 밝고 문풍이 크게 진흥되었으니, 이것이 누구의 힘인가?
공은 실로 우리나라 도학(道學)의 조종이다. 비록 설홍유(薛弘儒.설총)ㆍ최문창(崔文昌.최치원)과 같은 훌륭한 유학자도 그와 흡사하다고 말할 수 없는데, 그 나머지야 어떻게 더 말하겠는가.
아, 공의 사적이 이러한데도 문묘(文廟)에 종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고려사(高麗史)》에서는 ‘안모(安某)가 섬학전을 마련한 공으로 문묘에 종사되었다.’라고 하였으니, 사관의 식견이 비루함이 이와 같다. 공의 시에 ‘곳곳마다 향불 피워 부처에게 빌고 / 집집마다 피리 소리 신을 섬기네 / 유독 두어 칸 공자 사당엔 / 봄풀만 가득하고 찾는 이 없어라 [香燈處處皆祈佛 簫管家家盡事神 獨有數間夫子廟 滿庭春草寂無人]’라고 읊었으니, 사교(邪敎)를 배척하고 정도를 걱정한 뜻이 지극하다.
또한 공의 본전(本傳)에서 ‘문장이 맑고 굳세어 볼 만하다.’라고 하였으니, 그의 저서가 틀림없이 많았을 터인데 후세에 전하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공이 숨기고서 내놓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점필재(佔畢齋.김종직)는 그의 청초한 시풍을 사모하여 《청구풍아(靑丘風雅).김종직이 신라~조선 초기까지의 한시를 선집한 책》에 한 구절의 시를 실었는데, 그 시에 ‘아침 비에 싱그러운 들 위로 비둘기 한 마리 날고 / 봄바람에 꽃이 만발한 성을 필마로 돌아드네 [一鳩曉雨草連野 匹馬春風花滿城]’ 하였다. 이 시의 기상은 마치 천지의 조화와 같으니 열네 글자를 깊이 음미해 보면 공의 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공의 학문이 비록 주자에는 미치지 못하나 마음은 주자의 마음이기에, 나는 안회헌(안향)의 마음을 보려고 하면 마땅히 주자의 글을 보고 회옹(주자)의 얼굴을 보려고 하면 마땅히 회헌의 영정을 보라고 말할 것이다. 드디어 《죽계지(竹溪志)》 몇 편을 편찬하면서 국사에 실린 행록(行錄)을 책머리에 엮었고, 기타 존현록(尊賢錄)ㆍ학전록(學田錄)ㆍ장서록(藏書錄)ㆍ잡록(雜錄) 등은 반드시 주자가 지은 것을 편 머리에 드러내어 주자를 경모한 공의 뜻을 나타내려고 하였다. 그의 학설은 모두가 중니ㆍ안자ㆍ증자ㆍ자사ㆍ맹자ㆍ두 정자의 학문의 요지인 위기지학(爲己之學)으로서 후세의 위인지학(爲人之學)과는 그 의리(義理)ㆍ내외(內外)ㆍ정조(精粗)ㆍ본말(本末)에 있어서 하늘과 땅 차이이다.
이 책을 읽는 이가 참으로 공경을 위주로 하여 근본을 세우고, 먼저 공의 본전을 읽으면서 공이 주자를 사모한 것이 무슨 마음이고 주자가 공에게 사모하는 마음을 갖게 한 것이 어떤 도였는가를 반드시 찾아서, 공이 주자를 존경했던 도리로 공을 존경하여 천만 번 마음을 씻은 뒤에 주자의 모든 저서를 숙독한다면, 하늘이 나에게 부여한 바가 반드시 눈앞에 뚜렷하게 나타날 것이다. 그 나타난 바로 인하여 그 전체를 궁구한다면 자신에게 돌이켜 지성을 유지함도 나의 일이고 힘써 자신을 미루어 남에게 미치게 하는 것도 나의 일이 될 것이다. 그 즐거움이 장차 저도 모르게 춤을 추게 되고 그만두려 해도 그만둘 수 없을 것이니, 어느 겨를에 외물(外物)을 생각하겠는가. 안연(顔淵)ㆍ중궁(仲弓) 두 사람이 ‘행하도록 하겠습니다.’라고 한 말의 뜻이 또한 여기에 있었던 것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내 실로 어리석어 성인의 도를 듣지 못하고 이미 늙었으니 이제 와서 뉘우친들 어찌 미치겠는가. 그러나 또한 마음에 새겨서 사모해야 할 바이기에, 우선 글로 써서 서원에 와서 공부하려는 동지ㆍ후학들에게 경건히 고하는 바이다.
갑진년(1544) 겨울 10월 갑술일에, 상주(尙州) 주세붕(周世鵬)이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