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의 선비 서비(西扉) 최우순(崔宇淳 1832~1911)선생은 을사조약이 체결되어 민영환, 황현, 조병세 등 우국인사들이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을 듣고 시를 지어 통곡 하였다. 이후 나라가 망하자 왜놈의 나라가 있는 동쪽을 다시는 보지 않겠다는 뜻으로 호를 서비(西扉)라 하고 글을 지어 마음 속 울분을 토로했으며 80세에 일제의 은사금을 거부하고 자결하였다. 김택영이 쓴 서비의 소전(小傳)과 유필영이 쓴 서비의 행장(行狀) 원문은 다음과 같다.
崔宇淳傳 - 김택영/韶濩堂文集定本卷十
崔宇淳者字舜九。家固城。好讀書喜施予。韓讓帝隆煕四年。日本滅韓。宇淳痛甚。指其舍東門罵曰。咄讐在彼東。則命家人撤門移于西。遂自號曰西扉。當是時。日本大發金。多施于韓之遺臣民。以爲撫綏計。名曰恩賜金。一日巡士持金來曰。皇帝命之賜矣。君敢不拜。宇淳曰。老夫幸自不窶。願施他窶者。不之受。旣而巡士復以金至。宇淳辭之如前。如是者至六七。巡士怒呵曰。吾今執若去。時日已暮矣。宇淳曰。賤年已老。不可以夜行。公可與吾同宿。明日偕行。巡士許之。至夜。宇淳召其子。侍寢於側。夜深。密探所藏毒藥呑之。比明。其子覺而視之則已死矣。乃號哭。巡士大驚而走。及斂。家人於其懷中。得其所自誓殉國詩數篇。宇淳時年八十矣。
최우순은 자가 순구(舜九)로, 고성(固城)에 살았으며, 글 읽기를 좋아하고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하였다. 대한제국 양제(讓帝, 純宗) 융희(隆煕) 4년(1910)에 일본이 우리나라를 멸망시켰다. 우순은 몹시 비통해 하면서 자기 집 동쪽 문을 가리키며 욕하기를 “에이! 원수가 저 동쪽에 있다.”라고 하고는, 가인(家人)들에게 명하여 서쪽으로 문을 뜯어 옮기게 한 뒤, 드디어 서비(西扉)라고 자호하였다. 그때 일본은 대대적으로 돈을 풀어 대한제국의 유신민(遺臣民)들에게 많이 베풀며 무마하는 계책으로 삼고는, 은사금(恩賜金)이라고 하였다. 하루는 순사가 돈을 가지고 와서 말하기를 “황제가 하사하라고 명하셨는데, 그대는 어찌 감히 절하고 받지 않는 것인가?”라고 하였다. 우순이 말하기를 “노부는 다행히 가난하지 않으니, 바라건대 다른 가난한 사람들에게 베풀어주시오.”라고 하고는 받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순사가 다시 돈을 가지고 오자, 우순은 지난번과 같이 사양하였다. 그렇게 하기를 예닐곱 번, 순사가 화가 나서 꾸짖기를 “내가 오늘은 너를 붙잡아가겠다.”라고 하였다. 이때 날이 이미 저물었는데, 우순이 말하기를 “나는 이미 늙어서 밤길을 갈 수가 없소. 공은 오늘 나와 같이 잠을 자고, 내일 함께 갑시다.”라고 하니, 순사가 허락하였다. 밤이 되자 우순은 자기 아들을 불러 곁에서 시침(侍寢)하도록 하고는, 밤이 깊어지자 몰래 숨겨두었던 독약을 찾아서 먹었다. 날이 밝아 와서 우순의 아들이 깨어나 살펴보니 이미 죽은 뒤라, 호곡(號哭)을 하자 순사는 크게 놀라서 달아나고 말았다. 염습을 할 때 가인들이 그 품속에서 순국(殉國)을 스스로 맹세한 시 몇 편을 찾아내었다. 우순은 그때 80세였다. 병진년(1916). 번역: 부산대학교 점필재연구소
西扉先生行狀 - 西扉文集卷之四/남명학고문헌시스템
公諱宇淳字舜九姓崔氏貫全州侍中文成公諱阿其上祖也其後有諱水智官應敎諱均壬辰亂倡義錄勳贈太宰諡義敏公十世以上也高祖諱光彦僉樞曾祖諱祥集號百忍齋祖諱必鴻號耳亭考諱百鎭號聾菴世以文行稱妣靑松沈氏有漢女公以成孝三十二年壬辰生于固城鶴山里第自幼志氣不凡始上學質魯而志勤耳亭公甚奇愛之延師以敎公恪意聽受不數年文理日就稍長就學于南斗宋公彙純宋公每以忠厚寬重坏墣已成稱之庚申丁內憂公以嚴親之故勉自節抑而慽容動人筮宅有沮禁者勢强而數夥人皆爲公憂公曰古人有許葬於寢階者吾當以至誠動之遂席地泣懇竟歸順安厝觀者謂非孝感不能致也以親命治擧業嘗赴禮圍有人指示捷徑公曰發身寧可枉道乎見躓而歸不復應擧自是杜門却掃專意讀書丙寅洋擾朝野戒恐公曰士不可不知兵遂取孫吳書讀之人或笑之然預講待用意有在也己巳丁外憂哀毁如禮又遭王母喪葬後有作挐者公遜辭不校其人感服曰公長者吾不敢復也時宮役有徵納統制帥厚 斂管下民情大騷帥適聞公名請見累返始見帥從容語曰吾欲私公公曰偏則私普則公獨蒙私惠吾所不願惟公一視之帥歎曰君子言也遂減諸斂三分之二焉甲午東匪大熾外兵入國明年有宮闈之變繼下剃髮之令公感憤有詩曰先王舊法盡文身孰謂吾東國有人天日昭昭臨白髮終今誓死魯連濱於是列郡倡義擧公作義檄以寓忠憤本郡亦設幕府衆論推公主幕公與李公鎭默講定機宜公得疾舁歸未幾京兵猝至各陣遂潰李公被執跟捕共事者或請公暫避公曰鳥竄苟活非吾志也安坐待之隊將崔變私語人曰吾聞崔公君子人也吾不敢得罪於長者勿問而去公不以倖免爲幸惟以己志未伸爲恥胸裏輪囷未嘗忘也求見外國人所記各國形勢及東西地誌等書乃曰目見當有心會遠涉鯨波老不能也周覽域內亦可因近而揣遠遂與一二同志東至釜港南至龍埠又轉向馬山館屢旬而返長技之不同制敵之殊方者蓋有所揣摩也乙巳以後日日皆悲激之日也聞殉義諸人之事詩以哭之又聞義儒將齎疏有詩曰楚胥功成七日哭蘇秦說合六雄親如今二事無人辦可柰盈朝賣國臣因自號西扉不欲向東之義也爲文而自敍託意於伯 夷之登西而終之以陶令文山又製詩若詞有霜膽偏悲彼蒼胡忍一生不變百死那忘及柔兆年間三士某里山中一老等句公之心事其盡於是矣庚戌聞李承宣晩燾絶粒以終黃進士玹仰藥死蹶然稱快曰正氣不餒贊歎之極實有同歸之志也京東志士權丙夏候謁而問曰先生何以處世公歔欷良久曰任我自便無他困侵可自靖而待盡如有不幸在其時所處之如何耳公年已大耋而氣力尙强每日晨起盥洗對案必誦感興詩敬齋箴戴記數篇或負手庭曲佇望北辰人或賀其康健則公輒不樂白老而不死羞見公輩耳辛亥春間彼人以所謂恩賜金者强使受帖公以不可受之義作書嚴却彼人連日來喝遣兵脅欲將去時方黑夜公厲聲曰士可殺不可辱待明何晩耶彼兵暫退公卽嘔逆氣促時已仰藥而侍側者未之知也亟進解毒之物公曰爾無姑息愛也鷄鳴正席恬然而終三月十九日也雷雨驟至大風凄寒烈士之終天神或者感之也葬左耳山長春洞向未原遠近士友先期會者數百人配盆城許氏配德無違二男正模煥模一女適尹炳祚正模男寅洛承洛明洛女適鄭攝基李鮦奎煥模男憲洛冕洛尹女適河琪鎭寅洛男載文餘皆幼公姿稟端 重性度溫厚剛而有容和而不流交資互用蓋所用力而未或偏也不必嚴於繩檢而威儀與與未嘗高自標榜而矩度自成不屈之勇難奪之操又確乎其不拔矣日可見在親側極愉婉事雖微細不稟不行王母夫人晩而失明每食須人公擧案執匙饌物多少鹹淡必適宜夫人甚安之居喪哀慕動人奉祭誠意顒若先期齊宿刲爓必親雖在衰年不許替行子弟或以哭久過哀致損氣力請止公曰哀心自生不能止也先世誌狀文稿聯編糚帖留作家傳累數十世行治規範昭然追先之誠凡事多類此也治家有法敎子弟使之專意儒學切禁外物干接睦于諸族有無與共公租私用量宜頒俵諸弟諸姪不知貧之之爲苦也周窮好施天性然也屢經飢饉兼以厲疫闐門告窮者多是經病者而不爲驅遣隨請隨副俾免塡壑間又大侵所收不足以應所需則稱貸出糴糜粥以救飢雖家有禁忌而醜穢不祥之物許入庭階乙丙荐荒墟落將空公遂斥賣莊土以濟百口遂致家儲蕩析麤衣惡食人所不堪處之泰然若素貧而慣習者論者謂先貧後富用力自守段木不能過也雅好賓客意舊尋訪相屬風流詼暢人或擬之孔北海遠地詩朋至有數年留止資給以送者丙戌暴 疾客有舁疾而叩門者公輒受置療救至不救則躬斂肂俾之歸葬皆人所難而非可以勉强也善於恕人里尹有託公稅牽牛以去者公若無聞後乃慙謝則反引過而遣之頑民有竊畜而屠者公招致曉諭給田使耕勿令再誤其人卒化爲良善誠善所孚人自感化也讀書先求大旨篤信儒先定論而不曾創新立奇論四七分合極言渾淪分開各有所主不可偏主之意又有主敬賦太極心性情詩皆拈出前輩要訓以資觀省性好山水訪伽倻紅流之勝窮安陰三洞之奇陟頭流絶頂舟下蟾江遡先賢遺躅又一葦浮海再躡錦山爲恢胸助奇之資非是景物役也至若憂國傷時之意不以草莽而或忘也天文地誌兵陣韜略亦嘗講究涉躐如有用我者蓋將擧而措之耳沁都有警嘗論捍禦預備之策曰民堡最便朝議旣許若以便宜設施燧墩軍伍皆得增修禦賊不難矣人或笑其大言無當而公深慮遠識自有心算而非出於一時謾說也及外侮日甚國勢漸蹙則慷慨憂憤腔血常沸欲死之志雖是素定未得可死之地隱忍含羞過了幾年而每聞義士之死發之言而奇壯之贊歎之形諸詩而羨慕之激烈之公之心內積了多一死字矣授金一事恇怯失措者滔滔也雖 有遣兵之督而不至露刃之危雖有來喝之暴而亦無加綬之辱從容以待緩辭以却不甚害義公幾年求死之志適與此事而邂逅遂乃奮然而罵毅然而決浩然而歸沛然而無疑前日之苟寄爲恥者今可以無恥矣平昔之以死爲樂者今而得樂矣自非義理充積持養有素安能以八耋衰惙之氣發直前之勇而取義於須臾之頃哉於乎偉矣公爲文祇取辭達不曾務奇組纂詩亦如之然憤切於忠邪痛深於存亡則自然發之文者沈毅而瀏亮悲切而懇惻此其所以臨事不貳而成就大節者耶不佞於公年不甚相懸可以資益之日亦久矣路夐交窄未及識荊今於各天之後奉玩遺蹟實有乖逢之恨而忍恥偸生者尤不耐泚顙也胤子正模責以善狀縱不堪慕義之篤安得不重致意也玆比事屬辭而細節多略之世之立言者當采擇焉完山柳必永謹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