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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서당(以會書堂)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해제(解題) - 신호열

작성자허현|작성시간20.05.27|조회수613 목록 댓글 0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는 양천(陽川) 허균(許筠 1569~1618)의 시문집(詩文集)이다.

허균은 자를 단보(端甫), 호를 교산(蛟山)이라 했는데, 성소(惺所) 또한 그의 별칭이다. 초당(草堂) 엽(曄)의 세째 아들로 태어나, 악록(岳麓) 성(筬)ㆍ하곡(荷谷) 봉(篈)은 백중(伯仲)이요, 난설헌(蘭雪軒)은 그의 자씨(姊氏)였으니, 실로 규운(奎運)이 허씨 일문에 췌집(萃集)되었던 것이다. 특히 그는 총명이 절윤(絶潤)하고 문장이 환발(煥發)하여 일세를 용동(聳動)케 했다.

그는 선조(宣祖) 27년(1594)에 등제(登第)하여 사로(仕路)에 첫걸음을 내딛었고, 동(同) 30년(1597)에는 정시(庭試)에 장원의 영광을 차지한 바 있었다. 그 후 광해군(光海君) 10년(1618)에 모반(謀反)의 혐의로 서시(西市)에서 처형되었는데, 이때 나이 50이었다.

그의 생애는 참으로 감람 험희(坎壈險巇)하였다. 출사(出仕)한 이래 비방과 모함이 꼬리를 물어 곤돈낙척(困頓落拓)하여 십수 년을 낭료(郞僚)의 신세로 부침(浮沈)하다가 급기야 말년에 대북파(大北派)와 접근하면서 취진(驟進)하여 형조 판서(刑曹判書)ㆍ우참찬(右參贊)의 지위에 이르게 되었으며, 그의 존재는 마침내 권신(權臣) 이이첨(李爾瞻)으로 하여금 좌시(坐視)할 수 없게 하였다. 결국 정치 권력의 와중(渦中)에서 그는 최후를 마친 것이다.

이 문집이 세상에 남아 있게 된 것만도 그 자신의 비운(悲運)에 견주어 보면 다행스러운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가 구금당하기 직전에 여서(女婿.사위)인 이사성(李士星.동고 이준경의 손자)의 집으로 모든 책들을 미리 보내두게 하였던 것이다. 당시 사세가 자신에게 불리함을 알았고, 또 일단 구금되면 도저히 화를 피할 수 없을 것으로 판단한 나머지 이와 같이 조처한 것이다.

그의 문집은 진작 그가 자수(自手)로 알뜰히 편차(編次)해 두었던 것이다. 우리나라에 사신으로 왔던 명(明) 나라 주지번(朱之蕃)이 그의 시문(詩文)을 읽어 보고 감탄하여 전집(全集)을 보여달라고 청한 바 있었다 한다. 그는 광해군(光海君) 5년(1613)에 문집 1부(部)를 중국으로 보냈는데 그가 죽기 5년 전의 일로서 중국에 문집을 보낸 것은 주지번의 요구에 응한 것이다. 그는 주지번에게 문집을 보내면서, “해내(海內) 대방가(大方家)의 일언(一言)을 빌려 책머리를 장식하고 싶다.”고 부탁한 바 있다. 그래서 당대 중국의 일류 문사(文士)인 이정기(李廷機)가 서문(序文)을 짓게 되었는데, 지금 권수(卷首)에 실려 있는 것이 바로 그 글이다.

“그의 문(文)은 우여 완량(紆餘婉亮)하여 왕감주(王弇州)의 만경(晩景)과 비슷하고, 시(詩)는 창달 섬려(鬯達贍麗)하여 변화천(邊華泉)의 청치(淸致)가 있다.”  이는 이정기가 쓴 서문에 나타난 허균의 시문에 대한 주지번(朱之蕃)의 평어(評語)이다.

그 후 수백 년의 세월이 흐르도록 끝내 이 문집은 인행(印行)될 수 없는 처지에 놓였었다. 역명(逆名)의 신원을 벗지 못한 그의 처지로서는 오히려 당연한 귀결이라 할 수 있다. 간신히 외손가(外孫家)에 비장(祕藏)한 것만이 유전(流傳)하게 되었는데 그것마저도 현재 전하는 책과 맞추어 보면 그전대로의 전질(全帙)은 아닌 듯하다.

임상원(任相元)의 교거쇄편(郊居瑣篇)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나는 이사성(李士星)의 아들로부터 허균의 문집을 빌려 보았다. 집(集)은 무릇 15권인데 그 중 2책은 모두 변려(騈儷)로서 남이 빌려가 잃어버리고 말았다.”

이사성의 아들이란 교산(蛟山)의 외손 이필진(李必進)인데 《성소부부고》에 발문을 붙여 자기 외조부를 변명한 사람이다. 임상원이 이 이필진에게 직접 빌려 보았을 때 이미 변려(騈儷)의 권(卷)은 망실되었다는 것이다. 과연 지금 전하는 문집을 보면 두 책 분량의 변려문은 전혀 나타난 바 없다. 그리고 이필진의 발문에 보이는 갑진명주고(甲辰溟州藁)ㆍ서관행록(西關行錄)ㆍ계축남유초(癸丑南遊草)ㆍ을병조천록(乙丙朝天錄) 또한 현존 문집에는 보이지 않는다. 이처럼 다소의 일실(逸失)은 있었지만 그런대로 유고(遺稿)의 대부분은 살아남았다.

이정기(李廷機)의 서문에서는 이 책을 《부부고 사부(覆瓿藁四部)》라 칭하고 있다. 원래 서명이 이러했다고 생각된다. 사부(四部)란 본문이 시부(詩部)ㆍ부부(賦部)ㆍ문부(文部)ㆍ설부(說部)로 나뉘어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이 사부고(四部藁)가 모두 26권으로 편차되어 있으며《한정록(閒情錄)》은 부록으로 붙어 있다.

부(附) 한정록(閒情錄)은 고금(古今)의 군적(群籍)에서 박채(博採)하여 은둔(隱遁)ㆍ고일(高逸)ㆍ한적(閒適)ㆍ퇴휴(退休)ㆍ유흥(游興)ㆍ아치(雅致)ㆍ숭검(崇儉)ㆍ임탄(任誕)ㆍ광회(曠懷)ㆍ유사(幽事)ㆍ명훈(名訓)ㆍ정업(靜業)ㆍ현상(玄賞)ㆍ청공(淸供)ㆍ섭생(攝生)ㆍ치농(治農)의 16문으로 나누어 엮은 것이다. 대개 사대부(士大夫)의 한정(閒情)에 속하는 내용이지만, 치농(治農)의 부문(部門)은 농사ㆍ원포(園圃)ㆍ양잠ㆍ가축 등 실용(實用)에 관계된다. 그가 수차례 중국에 사행(使行)으로 갔을 때 서책을 광범하게 수집해 와서 그것을 기초로 엮은 것인바, 특히 갑인년(1614)ㆍ을묘년(1615) 두 차례 북경(北京)에 갔을 때 가재(家財)를 던져 서적을 거의 4천여 권이나 구득(求得)해 와서 이 책을 엮는 데 도움이 컸다고 한다.

근자에 《성소부부고》의 필사본이 영인으로 간행된 바 있었다. 물환성이(物換星移)한 오늘날 교산(蛟山)의 문학과 사상에 대한 학계 및 일반의 관심이 매우 고조되어 있다. 이에 부응하여 ‘민족문화추진회’에서는 다시 이것을 국역(國譯) 출판키로 하였다. 그래서 필자가 이의 국역을 맡음과 아울러 위와 같은《성소부부고》의 경로를 약술(略述)하여 해제에 갈음하는 바이다.

번역의 대본은 국립도서관본으로 하고, 그 밖에 규장각본(奎章閣本)ㆍ홍문관본(弘文館本)ㆍ연세대학본(延世大學本)ㆍ박종화본(朴鍾和本) 등을 참고로 하였다. 출전: 한국고전번역원 한국문집총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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