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 선생께서 기묘년(1519) 전부터 《소학》을 강론하였는데, 이때 이미 쇄소(灑掃)의 예절과 효제(孝悌)의 도리가 있다는 것을 알았으며, 선생께서 스스로 말씀하시기를 “조정암(趙靜菴.조광조) 덕택에 《소학》 책을 읽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라고 하셨다. 《논어》를 읽을 때는 뜻을 세워 무리 짓지 않고 스스로 부지런히 하여 엄격하게 과정을 세워 완전히 외우고 정밀히 생각하셨다. 옛것을 익히고 새것을 배워서 난숙(爛熟)함이 오래되니 자연히 마음이 이치와 더불어 깨달아지고 습관이 성품과 더불어 이루어져 비록 아직 말로 형용할 수 없어도 조금씩 앞을 향해 나아갔다. 〈태극도설(太極圖說)〉을 얻어서 읽고는 얼음이 녹듯이 해석되고 활연(豁然)히 의미가 관통되어 조화의 근원과 인물의 본체가 이미 마음속에 분명해졌다. 그러므로 18, 19세 남짓에 이미 ‘기수(沂水)의 즐거움’을 스스로 터득하셨다.
중년이 되어 《심경(心經)》과 《회암서(晦庵書)》를 읽으니, 학문이 더욱 밝아지고 도가 더욱 이루어져 도를 전할 책임이 당신에게 있게 되었다. 이윽고 “주자(朱子)가 나의 스승이다.”라고 하시고는, 주자의 말이 아니면 말하지 않고 주자의 행실이 아니면 행동하지 않으셨다. 동정(動靜)과 운위(云爲), 출처(出處)와 행장은 오직 회암(晦庵.주자)을 따랐으니, 회암은 볼 수 없어도 회암의 도는 여기에 있다고 여기셨다.
학문을 한 것으로 말하면, 거경(居敬)으로 그 근본을 세우고, 궁리(窮理)로 그 지식을 지극히 하였으며, 자기 몸에 돌이켜 실천하였는데, 거경(居敬)은 처음과 끝을 이룬 것이다. 하루 종일 엄숙한 모습으로 단정히 방안에 앉아 옛 책을 토론하면서 잠시도 그친 적이 없었다. 나의 일심(一心)과 일신(一身)에서부터 만사와 만물에 이르기까지 이치가 있지 않는 것이 없으니, 엄숙하고 장중하고 고요하고 한결같은 가운데 이 마음을 보존하고, 배우고 묻고 생각하고 따져 보는 즈음에 이치를 궁구하여, 그만둘 수 없는 소당연(所當然)과 바꿀 수 없는 소이연(所以然)을 볼 수 있었다. 보지 않고 듣지 않는 그 전에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것이 더욱 엄정하고 경건하였고, 은미하고 홀로 있을 적에 반성하고 살피는 것이 더욱 정밀하였다. 생각이 싹트기 전에도 지각(知覺)이 어둡지 아니하고, 사물을 접한 뒤에도 품위와 절도가 어긋나지 아니하였다. 사사로운 인욕(人欲)을 용납하지 않고 바른 천리(天理)를 온전하게 하여, 편견에 안주하지 않고 작은 것을 이루는 데 급급해하지 않았다. 이것이 회암의 학문인데 선생께서 이것으로 학문을 삼으셨다.
도를 삼은 것으로 말하면, 태극이 있어서 음양이 나누어지고, 음양이 있어서 오행(五行)이 갖추어졌다. 음양오행의 기운을 받아서 태어났으니 태극의 이치가 그 가운데 갖추어져 있지 않음이 없다. 하늘이 부여한 것은 명(命)이고, 사람이 받은 것은 성(性)이다. 사물에 감동되는 것은 정(情)이고, 성정을 통괄하는 것은 마음이다. 성에 근본하면 인의예지(仁義禮智)의 덕(德)이 되고, 정으로 발현하면 측은(惻隱)ㆍ수오(羞惡)ㆍ사양(辭讓)ㆍ시비(是非)의 단서가 된다. 신체(身體)에 나타나면 수족(手足)ㆍ형해(形骸)ㆍ이목(耳目)ㆍ구비(口鼻)의 용(用)이 되고. 사물에 드러나면 군신(君臣)ㆍ부자(父子)ㆍ부부(夫婦)ㆍ형제(兄弟)의 오상(五常)이 된다. 사람에게서 구하면 사람의 이치가 자기와 다른 것이 없고, 물(物)에서 참고하면 물의 이치가 사람과 다른 것이 없다. 고금에 관철되고 우주에 가득해서 한순간도 끊어짐이 없고 털끝만큼도 빈틈이 없다. 분석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정밀함을 다하여 어지럽지 않았고, 그런 뒤에 합하였으니 더할 수 없이 크게 하여 남음이 없었다. 이것이 회암의 도인데 선생께서 이것을 가지고 도를 삼으셨다.
그 마음에 얻은 것으로 말하면, 재주가 만물에 두루 미치었으나 스스로 높다고 여기지 않았고, 붓끝이 조화를 훔쳤으나 스스로 능하다고 여기지 않았다. 학문이 명성(明誠)을 다하였으나 스스로 족하다고 여기지 않았고, 식견이 성현에 이르렀으나 스스로 밝다고 여기지 않았다. 밝음이 모든 이치를 다하였으나 스스로 터득했다고 여기지 않았고, 행실이 법도에 맞았으나 스스로 이루었다고 여기지 않았다. 항상 겸손한 마음을 지키고 언제나 두려운 마음을 가졌으므로 그 마음이 숙연(肅然)하여 어지럽지 않고 훤히 밝아서 어둡지 않았다. 고요하여 이(理)의 본체(本體)가 보존되지 않음이 없었고 감응(感應)하여 이의 작용이 행하여지지 않음이 없었다. 온갖 변화에 대응하여도 그 즐기는 바는 변하지 않았고, 위험을 두루 겪어도 그 지키는 바는 바꾸지 않았다. 본말(本末)과 정조(精粗)는 혹시라도 잃는 것을 보지 못했고, 동정(動靜)과 표리(表裏)가 혹시라도 달라지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나타나고 드러나고 감동하고 변하는데[形著動變] 이르러서는 한쪽으로 지극히 하는 공(功)을 거의 다하였고, 밝고 통하고 공정하고 드넓어[明通公溥] 무욕의 지경에 이를 수 있었다. 선생께서는 오히려 〈경재잠(敬齋箴)〉과 〈백록동규(白鹿洞規)〉를 배우는 자가 일상생활의 규정이 될 말이라 여겼고, 경(敬)과 의(義)를 아울러 지키는 조목으로 여기셨다. 각각 하나의 그림으로 그려 좌우에 걸어두고 완상하며 즐거워하고 즐거워하며 음미하여 종신토록 싫어함이 없었으니, 대개 있으면서도 없는듯이 하고 실(實)하면서도 허(虛)한 듯이 하여, 언제나 부족해하며 만족하지 못하는 뜻이 있었고, 두려워하며 그치지 않았다.
몸으로 실천한 행실로 말하면, 손의 모양은 공손히 하였고, 발의 모양은 무겁게 하였고, 의관(衣冠)은 바르게 하였고, 모양과 행동은 엄숙하게 하였고, 말은 어눌하면서도 과단성이 있었고, 행동은 민첩하면서도 조심스러웠다. 바라보면 위엄스러워 만 길이나 우뚝 솟은 산과 같았고, 다가가서 보면 온화하여 따뜻한 봄바람이 이는 듯하였다. 가정에서의 생활은 새벽에 일어나 세수하고 의관을 갖추고는 책상을 대하고 묵묵히 앉아 삼가 마음을 잡고 이치를 궁구하기도 하였고, 혹은 필묵(筆墨)을 일삼으며 사물을 완상하고 뜻에 맞게 하였다. 음식은 아침저녁의 식사로 그쳤고, 뒷간은 반드시 새벽이나 저녁으로 다녔으며, 손님이 온 경우가 아니면 일찍이 때가 아닌 음식을 차리지 않았다.
비록 위급한 즈음에도 다급한 기색을 보이지 않으셨고, 늘 모시고 식사를 할 때에 말소리나 수저 소리를 듣지 못하였다. 종일 모시고 있어도 기대거나 경솔히 하시는 모습을 보지 못하였다. 기운이 없고 정신이 피로하면 안석(案席)에 기대어 편안히 쉬며 정신을 휴양(休養)하기도 하고, 누대에 올라가 시를 읊조리며 성정(性情)을 펼치기도 하셨다. 날이 저물어 침소에 들면 손발을 가지런히 하였고, 닭이 울면 일어나서 이불을 두르고 앉아 본원(本原)을 함양(涵養)하기도 하고, 유훈(遺訓)을 묵송(默誦)하기도 하셨다. 공부가 중단되는 것을 염려하여 모임의 초대에 나아가는 것을 즐겨하지 않았고, 일을 행하다가 착오를 일으킬까 두려워하여 조정의 부름에 응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셨다. 이런 때문에 법도와 규칙 속에서 순순히 따르며 혹시라도 어기는 것을 보이지 않으셨다.
가정에서 시행한 일에 대하여 말하면, 어버이를 섬김에는 효도를 다하였고, 형님을 섬김에는 공경을 다하였다. 집안에 이르러서는 정중하게 대하고 사랑으로 길렀으며, 또 노비들에게는 은혜로 보살피고 태장(笞杖)으로 가르쳤다. 안팎과 위아래의 의복과 음식이 각각 그 정리(情理)에 알맞았다. 자제가 조금 자라면 가르치고 타이르기를 각각 그들의 재질에 따라 하였다.
제사 때에는 사흘 낮을 재실에서 지내고 사흘 밤을 밖에서 지내며 공경을 지극히 하고 정성을 다하셨다. 비록 몸에 질병이 있어도 일찍이 몸소 제사를 모시지 않은 적이 없으며, 비록 이미 제사가 끝나 자리를 거두었더라도 신위(神位)를 등지고 앉지 않으셨다. 제사를 위해 술을 빚을 때에는 사실(私室)에서 하지 않고 반드시 정결한 곳을 가려서 하였으며, 제사를 위해 비축한 것이면 아무리 급한 곳에 쓰이더라도 감히 다르게 쓰지 않으셨다. 늘 설날이 되면 새벽에 나아가 사당에 절을 올리고, 계절마다 새로운 물건이 나오면 집에서 제사를 지내기도 하였으나, 제사의 예를 다 갖추지는 않았다.
손님이 드나들 때는 예에 따라 맞이하지 않음이 없어 각각 그 기쁨을 다하셨다. 친척에 대해서는 비록 소원하더라도 반드시 그 정성을 다하셨고, 향당(鄕黨)에 대해서는 아무리 비천한 자라도 반드시 공손하게 대하셨다. 길사(吉事)에 축하하고 흉사(凶事)에 조문할 때는 혹시라도 미진함이 있을까 두려워하셨고, 환난(患難)을 구제하고 궁곤(窮困)을 구휼할 때에는 형편에 따라 알맞게 하셨다. 공물로 바치는 물자나 관청에 부역하는 일에 대해서는 반드시 남들보다 먼저 하셨고 소홀히 한 적이 없으셨다. 자신의 생활에서는 음식은 적당하면 그치고 배부르기를 구하지 않으셨으며, 의복은 몸을 가리면 만족했고 일찍이 따뜻하기를 바라지 않으셨다. 남이 물품을 주면 사양하고 받는 도리를 살폈고, 받은 것이 많으면 반드시 이웃에 나누어 주셨다. 평소보다 지나친 반찬이 있으면 문득 그 경위를 물어서 받아들이거나 물렸으며, 비단옷은 부끄럽게 여겨 입지 않으셨다.
농상(農桑)과 같은 자질구레한 일도 때를 놓치는 일이 없도록 하셨고, 수입을 헤아려 지출하여 뜻밖의 일에 대비하셨다. 그럼에도 양식이 자주 떨어져 가끔 끼니를 잇지 못해 집안이 온통 썰렁하였다. 띠 풀로 비를 막기도 하고 소나무 그늘로 해를 가리기도 하며 사람이 견디기에 어려웠으나 여유롭게 대처하셨으니, 그 마음에 스스로 터득한 것은 단지 산수(山水)에서 읊조리며 돌아오는 즐거움뿐이었다. 사업에 이르러서는, 두 고을(단양 군수와 풍기 군수를 역임)에 베푼 은혜와 네 조정(중종, 인종, 명종, 선조)에 끼친 언론(言論)과 향약(鄕約)에 세운 조목과 사학(四學)에서 가르친 말씀과 여섯 조목의 소장(疏章.戊辰六條疏)과 〈성학십도(聖學十圖)〉는 큰 강령과 요체가 성대하게 구비되었고, 조목(條目)과 곡절(曲折)을 밝게 모두 거론하였다. 선생의 도(道)가 비록 당시에 크게 행하여지지는 못하였으나 또한 후세에 전하기에는 충분하니, 어찌 큰 다행이 아니겠는가.
선생께서 스스로 이르시기를 “옛사람이 ‘감히 스스로를 믿지 말고 그 스승을 믿어라.’라고 하였는데, 지금은 믿을 만한 스승이 없으니, 응당 성현의 말을 믿고 취해야 할 것이다. 성현은 결코 사람을 속이지 않는다.” 하셨다. 항상 독서로 과업(課業)을 삼아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고, 비록 모질게 춥거나 심하게 덥거나, 몸에 병이 있더라도 잠심(潛心)하여 완미하며 잠시도 그치지 않았다. 사람들이 흑 그만두라고 청하면, 곧 이르기를 “책을 보지 않으면 병이 문득 기승을 부리니, 하지 않으려 한들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 하셨다. 제자백가(諸子百家)와 시인(詩人) 및 사씨(史氏)에 이르기까지 두루 읽지 않은 것이 없고, 그 대의(大意)를 모아 장점은 취하고 단점은 버리셨다.
《가례(家禮)》에 대해서는 한결같이 주회암(朱晦庵)을 따르고 구경산(丘瓊山.구준)의 것은 취하지 않았으나, 쓸 만한 것이 있으면 또한 때로 채용하기도 하였다. 관례와 혼례가 오랫동안 폐한 것을 병폐로 여겨 고금의 마땅한 것을 참작하고 이를 간략하게 시행하여, 애례존양(愛禮存羊.예를 보호하기 위해 형식일 뿐이라도 옛 제도를 보존함)의 의리를 보이셨다. 종가의 제례 의식이 어긋난 것이 많은 것을 애석하게 여겼지만, 감히 자신의 뜻에 따라 마음대로 고칠 수 없었기에, 말씀하시기를 “부형(父兄)이 계시기 때문이다.” 하셨다.
악(樂)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옛날의 율척(律尺)이 이미 없어져 정음(正音)이 전하지 않아 주부자(朱夫子) 또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을 한탄하였다.” 하고는 일체 연주하지 않으셨다.
점서(占筮)에 대해 말씀하시기를 “지금은 시초(著草)가 나지 않아 점실(占室)을 세우기 어려우니, 경솔하고 망녕되게 신명(神明)과 교접할 수 없다.” 하였으며, 그 설(說)을 알고 그 방법을 궁구하였으나 일체 행하지는 않으셨다.
육경(六經)과 사서(四書)에 대해서는 깊이 터득하고 확고하게 지켰다. 그러나 세상의 인심(人心)이 무너지고 성학(聖學)이 황폐하여 다만 공리(功利)만 추구할 줄 알고 의리(義理)를 행할 줄 모르는 것을 병폐로 여겼다. 성현(聖賢)의 글을 벼슬을 획득하는 도구로 삼아 조그만 벼슬이라도 얻으면 필요 없는 것이라고 여겨 방치하여 잊어버리고, 만일 얻지 못하면 마치 기갈(飢渴)이라도 들린 듯이 오히려 따르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짧은 기간에 몇 편의 글을 외우리라 마음먹고 허겁지겁 쫓아가려고 하니, 학문(學問)하는 일에 비하면 천지처럼 차이가 날 뿐만이 아니다.
《심경(心經)》과 《회암서(晦庵書)》의 경우에는 정당(精當.정밀하고 합당함)하고 실제를 체득한 것으로 이보다 더한 것이 없었다. 그러므로 사람들을 가르칠 때에 반드시 《소학(小學)》을 우선하고, 다음으로 《대학》, 《심경》, 《논어》, 《맹자》, 《주서(朱書)》를 차례로 가르치고, 그 뒤에 여러 경전에 이르니, 이미 그 추향(趨向)이 발라지고 지기(志氣)가 확고하여 단지 마음이 습속(習俗)에 흔들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문의(文義) 사이에서도 여유롭게 풀어내었다.
《근사록》에 대해서는 “이는 모두 주돈이(周敦頤), 정자(程子). 장재(張載), 소옹(邵雍)의 어록으로, 《주역》의 설을 많이 인용하였으므로 먼저 사람들을 가르칠 수가 없는 것이다. 어찌 그 말이 간략하고 예스럽고 의리가 정밀하고 심오하여 처음 배우는 자들이 갑자기 발을 붙이기 어려운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하셨다.
《태극도설(太極圖說)》에 대해서는 “이는 내가 처음으로 이치를 터득하기 시작한 곳이다.”라고 하셨고, 〈경재잠(敬齋箴)〉에 대해서는 “ 내가 받아서 사용한 바탕으로 스스로 권면하고 남을 권면하는 차례가 이같은 것이다.”라 하셨다.
이르기를 “여러 경서(經書)의 석의(釋義)가 세속 선비들의 손에서 나와 견강부회(牽强附會)하여 경문(經文)의 뜻이 통하지 못하고 전문(傳文)이 분명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 오류(誤謬)를 이어받고 와전(訛傳)을 거듭해서 이로써 후학(後學)들을 속였다.” 하고는 드디어 여러 사람들의 설을 수집하여 사이사이에서 취하기도 하고 버리기도 하여 하나로 통일시켰다.
이르기를 “〈천명도설(天命圖說)〉은 추만 처사(秋巒處士.鄭之雲) 에게서 나왔는데, 그 구분과 조목 풀이가 간혹 소략(疏略)함을 면하지 못하였다.” 하시고는, 이에 서로 더불어 변론하고 질정(質正)하여 의심스럽고 분명하지 못한 것들을 바로잡아 올바르게 전하도록 하셨다.
이르기를 “《주자대전(朱子大全)》은 곧 선생의 평생의 문자(文字)로, 정밀하고 비근하고 크고 작은 것이 갖추어 실리지 않은 것이 없고, 바다처럼 깊고 강물처럼 넓어서 그 끝을 헤아릴 수가 없다.” 하고, 이에 그 편지에서 천명의 은미(隱微)함과 인심의 오묘(奥妙)함과, 덕에 들어가는 문과 출처(出處)의 도리에 관계되는 것들을 골라내어 분류하여 8책으로 만들고 《회암서절요(晦庵書節要)》라 이름하였다. 날마다 사람들과 함께 강론해 밝히고 토론하며, 만약 한 글자라도 잘못된 것이 있거나 한마디 말이라도 풀리지 않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발분망식(發憤忘食)하며 그 본래의 뜻을 찾아내었다. 그러므로 귀에 익숙하고 마음으로 터득하여 마치 자신의 말을 외우는 것과 같았다.
이르기를 “《역학계몽(易學啓蒙)》 한 책은 성현이 괘(卦)를 그리고 효(爻)를 명한 설로, 말의 뜻이 긴요하고 온갖 이치가 얽히고설켜 해설 가운데 해설이 더욱 많고, 각주(脚註) 가운데 또 각주가 있다. 처음 배우는 선비들은 진실로 그 상수(象數)의 분별, 천간(天干)과 지지(地支)의 풀이, 비복(飛伏)의 법칙, 승제(乘除)의 언어 등을 엿보아 헤아리기가 어려운데, 이는 유경(幽經)과 벽서(僻書)에 나온 것들을 모두 기록해서 그렇다.” 하고는, 별도로 한 권의 책을 만들어 《계몽전의(啓蒙傳疑)》라 하였다. 항상 학생들과 깊이 연구하여 그 기미(幾微)를 밝혔으며, 만일 한마디 말이라도 완전하지 않고 한 구절이라도 타당하지 않은 것이 있으면 반드시 첨삭하여 그 책을 온전하게 하였다. 이러므로 이치가 분명하고 말이 순조로워 알기 쉽고 보기가 쉬웠다.
주부자(朱夫子) 이후에 이르러 그 학문을 계승하고 그 종지(宗旨)를 전수 받은 자가 많지 않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얻은 것에 천심(淺深)이 있고 본 것에 소밀(疏密)이 있으므로 선생께서 이를 구분하여 별도로 6권을 만들고, 내외 편으로 나누어 《이학통록(理學通錄)》이라 하였다. 그 내편은 이것이 그 정종(正宗)을 잃지 않고 주자의 학문을 지킨 자들을 가리켜서 한 말이 아니겠는가? 그 외편(外篇)은 또 주자를 믿지 않고 육씨(陸氏.陸九淵)에게로 돌아간 자들을 가리킨 말이 아니겠는가.
임금의 마음이란 온갖 임무가 아우른 곳이고, 온갖 책무가 모이는 곳이니, 만일 경계하는 바가 없다면 온갖 욕망이 이를 공격할 것이다. 선생께서 이것을 깊이 걱정하여 이에 성현의 박문약례(博文約禮.글을 통하여 지식을 넓히고 예를 통해서 행동을 검속하는 것)의 방법과 계구근독(戒懼謹獨.계신공구와 신독을 가리킴)의 교훈을 취해서 하나의 병풍에다 열 개의 그림으로 그려 이로써 옛사람의 전의후승(前疑後丞.임금을 보필하는 신하)의 규칙에 대신하고, 성학(聖學)의 근본을 바로잡고 근원을 맑게 하는 경계로 삼고는 《성학십도(聖學十圖)》라고 이름하였다. 그리하여 일천 성인이 서로 전해 오던 비법과 임금이 마음을 보존하는 방법이 찬연(燦然)히 다시 세상에 밝혀지게 되었다.
우리 동방에 서원이 세워진 것은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에서 비롯되었다. 선생께서 풍기(豐基) 군수로 나갔을 때 창도(唱導)하였는데, 10년이 되지 않아 온 나라에 두루 퍼지게 되었다. 그 시설 규모와 편액(扁額)의 글씨는 대부분 선생의 손에서 나왔다.
벼슬 잃기를 걱정하는 폐단이 근세에 더욱 심하여 벼슬에서 물러나는 일이 무슨 일인지 모른다. 선생께서 홀로 소장(疏章)을 지어 올려 허락 받기를 기약하니, 한 때의 진신(搢紳)들 사이에 간혹 선생의 기풍이 있었다.
선생의 평소의 경계가 비록 일찍이 글을 짓는 일에 있지 않은 적이 없었으나, 만약 도학(道學)에 관계되고 세교(世敎)에 관련된 것이면 하는 수 없이 짓는 경우가 가끔 있었으니, 어찌 도술(道術)을 밝히고, 사람의 기강을 세우고,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고, 신하를 경계하고자 하는 데서 나온 것이 아니었겠는가. 사람들과 더불어 논변(論辨)할 때는 그 말이 상대방과 일치하지 않으면 혹시라도 자신의 소견에 미진함이 있는지를 돌이켜 보셨다. 자신의 선입견을 주장하지 않았고 상대방의 의견을 비루(鄙陋)하다고 여기지 않았으며, 경계를 두지 않고 남과 나를 구분하지 않았다. 마음을 비우고 찾아내어 풀어서 오래도록 체득하여 알았으며, 의리의 사이에서 징험하기도 하고 성현의 말씀에서 질정(質正)하기도 하셨다. 자신의 말이 과연 의리에 합당하고 상고할 게 있다면, 다시 함께 변설(辨說)하여 상대방의 의혹을 풀어주려고 하셨다. 만일 조금이라도 타당하지 않은 것이 있으면 즉시 자신의 주장을 버리고 상대방의 의견을 따랐으므로 감복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사람을 가르칠 때는 다만 그 사람의 정성이 어떠한가를 보았는데, 정성스러우면 기뻐하는 빛이 있었고 정성스럽지 못하면 안타까워하는 모습이 있었다. 묻고 답할 때는 그 당연한 것을 물으면 당연한 것을 대답하고 그렇게 된 까닭의 이치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으셨다. 그렇게 된 까닭에 대해 물으면 반드시 당연히 그렇게 된 법칙에서 시작해서 그렇게 된 까닭에 이르기까지 설명하여 주었으니, 가르치는 법이 이와 같았다. 이에 현우(賢愚)와 선악(善惡)을 모두 실정에 맞게 하니 현자(賢者)는 그 덕을 기뻐하고 악자(惡者)는 그 교화에 감복하였다. 소문을 들은 자는 진심으로 복종하고 덕망을 살핀 자는 마음으로 흠모하였으니, 그 풍속을 두터이 하고 인재를 이루게 한 것이 지극하다 하겠다.
아, 우리나라가 기자(箕子) 이후에 비록 이름난 선비와 운치 있는 문사(文士)들이 나오기는 하였으나, 고매한 하나의 선행에 지나지 않을 뿐이었다. 본조 이래로 문운(文運)이 크게 창성하였는데, 오직 우리 선생만이 진편(塵編)과 두간(蠹簡) 가운데서(古典을 이렇게 말함) 우뚝하게 일어나 성현이 서로 전한 오묘한 법에 합치되어, 주공(周公)과 공자(孔子),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의 도(道)가 천 년 세월 학문이 끊어진 뒤에 다시 밝게 하고, 해외의 질박하고 비루한 고을이 교화되어 추로(鄒魯)처럼 도의(道義) 있는 곳이 되게 하였다. 그러니 선생의 공이 결코 회옹(晦翁.주자)의 아래에 있지 않을 것이며, 백세토록 사문의 조종(祖宗)이 될 것이다.
아, 선생께서는 뜻을 구하는 것을 즐겼고 세상에서 벼슬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아 일곱 번을 나아가고 일곱 번을 물러났으나, 의리에 따르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러므로 처음에서부터 끝까지 조정에 있는 날이 아주 적었고 초야에 있는 날이 아주 많았다. 그러나 과거 성인의 학문을 계승하고 미래의 학자들에게 열어주었으며, 인륜을 밝히고 사림을 세웠으니, 그 공과 교화가 성대한데 어찌 그 출처(出處)로 손익을 따질 수 있겠는가.
융경 5년(1571) 6월 상현(上弦)에 문인 영양(永陽.영천) 이덕홍이 삼가 쓰다. -간재집6권/한국국학진흥원 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