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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서당(以會書堂)

별호의 유래[別號由來] - 장유/계곡만필2권

작성자허현|작성시간20.12.24|조회수251 목록 댓글 0

 

옛사람은 질박함을 숭상하였으므로, 칭호 역시 매우 간단하고 소박하기만 하였다. 그리하여 어렸을 때에는 이름을 부르고, 관례(冠禮)를 치르고 나면 자(字)를 불렀으며, 나이 50이 되면 백(伯), 중(仲)으로 불렀으니, 이것이 바로 주(周) 나라의 제도였다. 그리고 그 뒤로는 점차 수식(修飾)하는 경향을 띠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주(周) 나라가 쇠하고 나서도 가령 귀곡자(鬼谷子)라든가 동원공(東園公),녹리 선생(甪里先生),하상공(河上公)과 같은 종류는 그저 당시 사람들이 그들을 지칭하는 칭호였을 뿐 꼭 그들의 자호(自號)였다고는 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도홍경(陶弘景)이 스스로 화양은거(華陽隱居)라고 일컬으면서 서찰을 보낼 때에 성명을 쓰지 않았는데, 후대 사람들이 이름이나 자(字) 대신에 별호(別號)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대체로 여기에서 비롯된다고 하겠다.

당(唐) 나라 사람들은 항렬(行列)을 중히 여겼기 때문에 아무리 관직이 높다 하더라도 반드시 제 몇째라고 아울러 칭하곤 하였다. 그리고 예컨대 태백(太白.이백)의 청련(靑蓮)이나 자미(子美.두보)의 두릉(杜陵) 같은 것도 시어(詩語) 속에서나 우연히 거론한 것일 뿐, 그들이 늘상 자칭(自稱)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왕무공(王無功)의 동고자(東皐子)나 육노망(陸魯望)의 천수자(天隨子)와 같은 종류는 도은거(陶隱居.도홍경)의 경우와 자못 흡사하다고 하겠다.

그러다가 송대(宋代)에 들어 오면서 비로소 사람들이 별호(別號)를 많이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남도(南渡)한 뒤로는 호(號)를 가지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그리하여 근대에 이르러서는 무변(武弁.무과출신의 벼슬아치)과 상인들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는 비천한 종복(從僕)들까지도 모두 호를 가지게 되었으니, 그 외람되고 잡스러운 현상이 극에 달했다고 하겠다.

왕원미(王元美.왕세정)와 그 동배(同輩)의 제공(諸公)들은 어느 일이나 옛것을 숭상하곤 하였다. 그래서 각자 호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서찰을 보내거나 시를 지을 때에는 으레 자(字)를 부르면서 호는 사용하지 않았으니, 자못 고아(古雅)한 느낌이 든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여전히 호를 사용하곤 하였다.

우리 동방의 경우도 누구 할 것 없이 별호를 아무렇게나 쓰는 것이 근래에 더욱 심해졌으므로, 내가 무척이나 염증을 느낀 나머지 원미(元美) 등 여러 사람들의 본을 떠 보려고 했던 적도 있었지만, 세상의 관례에 이끌려 아직도 인순고식(因循姑息.낡은 습관이나 폐단을 벗어나지 못하고 당장의 편안함에 취함)적으로 따라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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