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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고사(古文故事)

범해록(泛海錄) - 허목(許穆)

작성자허현|작성시간13.04.04|조회수218 목록 댓글 2

 

註: 옛적 미수(허목)선생이 남쪽에 머무는 동안 1638년 남해(현재 남해시 창선과 금산) 일원을 유람하고 쓴 기행문 <범해록(泛海錄)>이 「기언별집 15권」에 남아 있다. 근래 창선도를 일주하며 찍은 사진들을 붙여 약 380년전 미수의 감상을 헤아려 본다.

 

(1638년 인조16) 9월 내가 해상(海上)을 유람하였다.

옛 삼천진(三千鎭,지금의 삼천포)에서 자고, 새벽 밀물을 이용해 바다로 들어가니, 바다 위에는 달이 두어 길이나 높이 떠 있었다. 바다 가운데에서 뱃사람이 서쪽을 가리키면서 노량(露梁)이라 했는데, 그 남안(南岸)에 충민사(忠愍祠. 이순신을 제향하기 위해 1633년 세워진 忠烈祠를 말함), 그 앞에 남해대전비(南海大戰碑)가 있으며, 또 북안(北岸)에는 만력(萬曆)연간에 세운 명(明)나라 장사(將士)들의 제명(題名,바위등에 이름을 새기는것)이 있는데, 수군도독(水軍都督) 진린(陳璘)이 이곳에 군사를 머무르게 한 적이 있었다 한다.

새벽에 창선도(昌善島)에 배를 대었는데, 이 때에 비로소 동이 트는 기운이 희끄무레하고, 동방에 한두 개 별이 점점 희미해졌는데 새벽이 되어 바라보니 다 고기잡이 불빛과, 소금 고는 연기였다. 섬에 두 연안이 있어 동쪽을 흥선(興善), 서쪽을 창선(昌善)이라 하는데, 산의 나무로는 소나무와 산초가 많으며, 태복시(太僕寺)에서 감목(監牧.목장을 관장하던 벼슬)을 두어 여기서 말을 길렀다(지금의 당항리 뒷산 금오산 정상일대를 말함). 섬 안의 땅은 기름져 곡식의 수확이 많았다. 밭두둑은 (말이 넘어오지 못하도록) 우리로 막아 곡식이 해를 입지 않도록 해 놓았다. 말 떼를 만나니, 절따말(騂.털빛이 온통 붉은 말)과 가라말(驪.털빛이 검은 말)과 아롱진 월따말(騮.털빛이 붉고 갈기가 검은 말)이 많았는데, 산속에 달아난 말가운데도 준마가 많다고들 하였다. 어떤이는 말하기를, “신마(神馬)가 왕왕 구름과 안개 사이에 때때로 보인다.”하였다.

저녁에 다시 배에 올라 남해(南海)의 제암(梯嵒)에서 묵었는데, 그 사람들이 배를 집으로 삼고, 바다에 들어가 굴을 잘 따며, 누더기를 입고 있어 아주 가난하니, 이것은 나충지(臝蟲誌)에 이른바 단만(蜒蠻.중국 남부지방의 부족)에 해당되는 미개인들로서 성질이 변덕스럽고 간사하고 능청스러웠다.

다음날 아침 비자당(榧子堂)을 찿았다. 서쪽으로 남해 고을에서 20리 거리이며, 해안의 산에 있는 나무는 모두 비자(榧子)이고, 그 산위에 신사(神祠)가 있는데, 옛날 늙은이들이 전하는 말로, “신라 때 어떤 왕자가 섬에 들어와서 죽어 신이 되었다.”한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바다 가운데서 제사 지내는 일이 많아 영향신사(迎享神詞)를 지었다. 보슬비가 내렸다.

금산(錦山)에 이르니 산 둘레에 석축(石築)이 있는데 오래되어서 그 쌓은 햇수를 알 수가 없었다. 옛날에 여기서 말을 길렀고, 그 옆에 곡포권관(曲浦權管)의 옛 진터가 있었다. 산 밑에서 귤을 감상하였다. 으스름 저녁에 비가 갰다.

산속에 들어 가니 소나무는 우거지고 물은 맑고 돌은 흰데, 그 사이에 석벽(石壁)이 있고 연못 물이 있다. 개울을 따라 깊이 들어가면, 길이 없고 돌다리를 지나 그늘진 벼랑을 좇아 돌길을 가면 꼭대기에 이른다. 바다의 9월 서리는 초목(草木)을 죽이지 못하고 나뭇잎도 시들게 하지 않았다.

산쪽대기에 연대(煙臺)가 있는데 그 아래에 ‘홍문을 지나 금산에 올랐다[由虹門上錦山]’는 여섯자를 돌에 새겼고, 또 ‘가정(嘉靖) 임진년(1532년)에 전 한림학사 주세붕 경유(周世鵬景遊, 경유는 字), 이응 한지(李鷹翰之, 한지는 字), 상주포 권관 김구성(金九成)이 같이 오르다.’라고 새겨져 있었다. 그 외의 돌은 깎이고 떨어져 읽어볼 수 없었다.

연대 북쪽 층계 돌 위가 평평해서 사다리로 올라갈 수 있는데, 맨 위에는 항상 안개와 놀이 끼어 있어 하석대(霞石臺)라 했다. 꼭대기의 서쪽에 옛 사당이 있는데, 남해(南海)의 사람들이 무축(巫祝)을 두어 성조신사(聖祖神師)를 섬기는 일을 맡게 했다.

검매(黔魅.섬 이름) 서쪽은 해안이 막히고 물이 흐리지만, 동쪽은 푸른 바다여서 연하(烟霞.섬 이름) 이외에는 탁기(濁氣)가 미치지 못한다. 그 밖에는 따뜻한 바다가 하늘과 더불어 끝이 없으나, 천극(天極)은 창창(蒼蒼)하고 수극(水極)은 검어서 이것으로 하늘과 바다를 판별해 주었다.

바다에는 섬이 많고, 간혹 연대(煙臺)와 수루(戍壘)가 있으며, 거제(巨濟), 한산(閑山), 사량(蛇梁), 적량(赤梁), 검매(黔魅), 나라(娜羅) 등이 있고, 그 밖은 외양(外洋)인데, 거기에 만이(蠻夷)가 묵는 연하(烟霞)와 욕지(蓐芝)가 있다.

동남으로는 일본(日本)이 바라다 보이고 서쪽은 탐라(耽羅.제주도)인데, 바다가 아득하여 항상 어두워 한 해에 두세 번 보이며, 보이면 큰비가 내린다. 그 남쪽은 해외 여러 오랑캐 지방으로 그 지방을 헤아려 보면 우민(羽民), 사화(沙華), 과와(瓜蛙), 유구(琉球.오끼나와), 마라노(麻羅奴)인데, 외이지(外夷誌)에는 ‘모두 바다 가운데 있어 천하의 동남쪽에 있다.’ 하였다. 감회를 읊은 시 두 수를 지었다. 

절정(絶頂.금산의 정상) 남쪽 석벽 아래 보리암[菩提佛宇]에서 쉬었다. 그 앞은 석벽인데, 그 석벽 위에 석부도(石浮圖)가 보인다. 그 아래는 교룡굴(蛟龍窟)이 석벽 사이에 있고, 또 그 옆에서 조금 내려가면 성음굴(聲音窟)이 있는데, 내가 그 안에 들어가서 돌북을 치자, 북소리가 골짜기에 가득 메아리쳤다. 같이 유람간 자의(子儀)는 광기(狂氣)를 좋아해서 돌 아래에서 춤을 추었다. 또 그 앞 석벽 아래에 돌 구멍을 뚫어서 곧장 바다쪽로 내려가게 한 것을 ‘무지개문[虹門]’이라 하였다.

보리(菩提) 아래 석봉(石峯) 사이를 산의 정기가 쌓인 곳이라 일컫는데, 세상에 전해 내려오기를, ‘태조(太祖 이성계)가 한미할 때에 무학대사(無學大師)를 따라 산신령에게 제사를 지냈다.’ 한다. 그래서 그곳을 가서 보고자 했으나, 자의(子儀)가 따르지 않았다.

신사(神祠) 남쪽 석봉(石峯) 중에서 가장 기이한 것을 사신암(捨身巖)이라 하고, 구정봉(九井峯)이라고도 하는데, 봉우리 위에 아홉 개의 우물이 있는데 짐승 발자국이나 새의 흔적은 없었다.

산은 바다 위에서 솟아나 괴상한 돌 기이한 바위가 많았다. 나의 남쪽지방 유람이 여기에 이르러 다 되었다. 산이 남해 가운데 있어, 서울과 1천여 리나 된다. 바다 가운데에는 벌레나 뱀이 많고 기운이 괴이하며 산에서는 인삼과 복령이 나온다.

밤에 성조사(聖祖祠)에서 잤다. 새벽에 일어나 별을 보는 사이에 동남쪽에 구름이 끼어 어둡더니, 조금 있자 바다가 어두워지고 크게 바람이 일었다.

아침에 구정(九井)을 좇아 내려오다가 그늘에서 쉬었는데, 승려 희극(煕克)이 나에게 철쭉 지팡이를 주기에, 고시(古詩) 한 수를 지어 답하였다. 비 내리는 아침에 산에서 내려왔다. 을묘일에 바다에서 나와 백천사(百泉寺.사천 백천동 소재)에서 묵었는데 함께 노닐던 사람은 숙정(叔挺),자의(子儀),운정(雲程.백서우), 소년생(少年生), 김남로(金南老)였다. 숙정은 바다를 나와 바다 별장으로 돌아갔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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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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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허창무 | 작성시간 13.04.04 이 기행문에 등장하는 地名은 三千浦, 露梁, 昌善, 興善, 梯巖, 榧子堂, 錦山, 巨濟, 閑山, 蛇梁, <黑+今>魅, 娜羅, 煙霞, 辱芝, 耽羅 등이며, 기념건축으로는 忠愍祠, 南海大戰碑, 明水軍都督 陳璘 紀念石, 霞亭臺, 聖祖祠, 白泉寺, 등이 있다.
  • 작성자허현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4.11.27 걸었던 길: 창선삼천포대교(어연재)-연태산-대사산(금오산)-율도고개-속금산-국사봉-대방산-운대암.
    미수공의 기행문중 태복시(太僕寺)에서 감목(監牧)을 두어 말을 길렀던곳이 지금의 당항리 뒷산 대사산(금오산) 정상부의 평평한 일대임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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