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의 8수(首) 시는 이른바 ‘소상팔경(瀟湘八景)’에 대해 읊은 시이다. 중국 호남성(湖南省) 동정호(洞庭湖) 남쪽 영릉(零陵) 부근에서 소수(瀟水)와 상수(湘水)가 합친 곳을 ‘소상(瀟湘)’이라 부르는데 풍광이 매우 아름답다. 송대(宋代)의 화가 송적(宋迪)이 이 소상의 풍경을 8폭으로 그려 ‘평사낙안(平沙落雁)’, ‘원포귀범(遠浦歸帆)’, ‘산시청람(山市晴嵐)’, ‘강천모설(江天暮雪)’, ‘동정추월(洞庭秋月)’, ‘소상야우(瀟湘夜雨)’, ‘연사만종(煙寺晩鐘)’, ‘어촌석조(漁村夕照)’ 여덟 가지의 화제(畫題)를 달았다. 그 뒤로 시인묵객들이 이 ‘소상팔경’을 소재로 시를 읊은 일이 많았는데, 지봉(이수광)의 『지봉집』1권에 실린 8수의 시 또한 마찬가지이다.
모래톱에 내려앉는 기러기〔平沙落雁〕
하얀 갈대꽃에 백설 같은 모래톱 / 蘆白沙如雪
줄줄이 석양 속에 날아 앉는구나 / 聯翩下夕暉
주살을 잘 피한다 말하지 말라 / 休言能避弋
평지에도 위태로운 덫이 있으니 / 平地有危機
먼 포구에 돌아오는 돛단배〔遠浦歸帆〕
빈 들에도 외려 바람이 있고 / 野曠風還有
빈 강이라 마치 비가 없는 듯 / 江空雨似無
졸던 해오라기 화들짝 일어나니 / 忽驚眠鷺起
물안개 너머 저녁 돛배 하나 / 煙外晩帆孤
소상강의 밤비〔瀟湘夜雨〕
소상강 대나무에 아롱진 핏자국 / 斑斑竹上血
아황 여영 그날의 원통함이라지 / 當日二妃冤
깊은 밤 강물에 비가 내리건만 / 半夜江心雨
눈물 자국 언제 씻은 적 있던가 / 何曾洗淚痕
옥경이 금경을 머금고 있으니 / 玉鏡涵金鏡
맑고 밝게 위아래가 텅 비었구나 / 澄明上下空
인세에는 이러한 경치가 없으니 / 人間無此景
오직 달 속의 광한궁뿐이라오 / 除是廣寒宮
동정호의 가을 달〔洞庭秋月〕
옥경이 금경을 머금고 있으니 / 玉鏡涵金鏡
맑고 밝게 위아래가 텅 비었구나 / 澄明上下空
인세에는 이러한 경치가 없으니 / 人間無此景
오직 달 속의 광한궁뿐이라오 / 除是廣寒宮
산시의 청람〔山市晴嵐〕
자욱한 이내가 아침 해를 감싸니 / 宿靄籠朝旭
바위벼랑 시리도록 맑게 개누나 / 巖崖霽色寒
숲속의 한 줄기 희미한 오솔길 / 依俙林際路
흡사 그림 속을 보는 듯하여라 / 恰似畫中看
강천의 저녁 눈〔江天暮雪〕
강 바람이 싸늘히 눈을 빚어내니 / 江風寒醞雪
강 해가 담담하게 빛을 잃었도다 / 江日澹無輝
어디에서 이 사람 노를 돌렸나 / 何處人回棹
대규 찾아갔다가 오는 길이겠지 / 知從訪戴歸
어촌의 낙조〔漁村落照〕
땅거미 질 무렵 낚싯대를 막 거두고 / 薄暮初收釣
물고기 삶으니 사발 가득 술이로다 / 烹魚酒滿甌
돌아온 배 하릴없이 묶어 두지 않아 / 歸舟閑不繫
귤꽃 핀 모래톱으로 둥둥 떠가누나 / 漂去橘花洲
안개 낀 산사의 저녁 종소리〔煙寺晩鐘〕
푸른 산 깊숙이 승려 하나 가는데 / 翠微僧獨去
안개 길 가늘어 분간하기 어렵도다 / 煙逕細難分
산사가 가까이 있음을 알겠나니 / 認取招提近
저녁구름 속에 종소리가 퍼지누나 / 鐘聲出暮雲
▼ 하동의 악양루에 게판되어 있는 소상팔경 화제(畵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