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唐)나라 회창(會昌) 연간에 백낙천(白樂天.백거이)이 태자소부(太子少傅)로 치사(致仕.나이가 많아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남)한 후 낙양(洛陽)에 거처할 때에 어질면서도 장수한 여섯 사람과 이도리(履道里)의 집에서 함께 연회를 열어 ‘연장자를 높이 받드는 모임[尙齒之會]’을 가졌다. 그때 참여한 사람을 보면, 호고(胡杲)는 전(前) 회주 사마(懷州司馬)로 춘추 89세였고, 길민(吉旼)은 위위경(衛尉卿)으로 치사하였는데 춘추 86세였고, 정거(鄭據)는 전 용호군장사(龍虎軍長史)로 춘추 84세였고, 전 자주 자사(慈州刺史)인 유정(劉貞)과 전 시어사(侍御史)인 노진(盧眞)은 춘추가 모두 82세였고, 장혼(張渾)은 전 영주 자사(永州刺史)로 백낙천과 함께 춘추 74세였다. 그리고 비서감(秘書監) 적겸모(狄兼謨)와 하남윤(河南尹) 노정(盧貞)은 70세가 안 되어 모임에 참여는 하였으나 그 대열에는 끼이지 못하였다. 백낙천이 시를 지어 이 일을 기록하니, 후세 사람들이 이를 전하여 낙중구로회(洛中九老會)라 하였다.
그리고 송(宋)나라 원풍(元豐) 연간에 문 노공(文潞公)이 낙양 유수(洛陽留守)가 되어 또한 그곳의 기영(耆英)들과 약속하여 진솔회(眞率會)를 만들고 참여자의 형상을 묘각사(妙覺寺) 건물에다 그려놓았는데, 모두 13명이었다. 한공(韓公) 부필(富弼)은 79세, 노공(潞公) 문언박(文彦博)과 낭중(郞中) 석여언(席汝言)은 77세, 조의대부(朝議大夫) 왕상공(王尙恭)은 76세, 태상(太常) 조병(趙丙)과 비감(秘監) 유궤(劉几)와 방어(防禦) 풍행기(馮行己) 등 3명은 75세, 대제(待制) 초건중(楚建中)은 73세, 조의대부(朝議大夫) 왕신언(王愼言)은 72세, 선휘(宣徽) 왕공신(王拱辰)은 71세, 태중(太中) 장문(張問)과 용학(龍學)장도(張燾)는 70세였고, 사마온공(司馬溫公.사마광)만 당시 64세였는데, 노정과 적겸모의 예에 따라 참여시키고 온공이 그 서문을 썼다.
해동에 나라를 세워 태평성대를 이룬 지 400년(고려의 건국연도는 918년)이 되어 이제는 인물과 풍류가 중화(中華)에 대등할 정도가 되었다. 신왕(神王.신종) 무오년(1198, 신종 1)에 최 정안공(崔靖安公.최당)이 비로소 관직을 그만두고 영창리(靈昌里)에다 쌍명재(雙明齋)를 지었는데, 계해년(1203)에 사대부 가운데 늙어서 유유자적하는 이들을 여기에 모아 날마다 시주(詩酒)와 거문고, 바둑으로 함께 즐겁게 지냈다. 호사가(好事家)들이 이를 그림으로 전하여 해동기로회도(海東耆老會圖)라 하고, 조통(趙通) 역락(亦樂)이 이 일을 기록하였다. 병인년(1206, 희종 2)에 정안공의 아우 문의공(文懿公.최선)이 칠순(七旬)에 접어들게 되자 소장을 올려 사직을 하고 그 역시 이 모임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곧바로 그림 속에다 그의 초상을 첨가해 넣었고 소경(少卿) 박인석(朴仁碩)이 이 일을 기록하였다.
참여한 사람을 보면, 첫째는 태복경 보문각직학사(太僕卿寶文閣直學士)로 치사(致仕)한 장자목(張自牧)으로 78세였고, 둘째는 태위 평장 집현전태학사(太尉平章集賢殿太學士)로 치사한 최당(崔讜)으로 77세였고, 셋째는 사공 좌복야(司空左僕射)로 치사한 이준창(李俊昌)으로 태위와 같은 나이였고, 넷째는 판비성 한림학사(判秘省翰林學士)로 치사한 백광신(白光臣)으로 74세였고, 다섯째는 예빈경 춘궁시독학사(禮賓卿春宮侍讀學士)로 치사한 고형중(高瑩中)으로 백광신과 같은 나이였고, 여섯째는 사공 좌복야 보문각학사(司空左僕射寶文閣學士)로 치사한 이세장(李世長)으로 71세였고, 일곱째는 호부 상서(戶部尙書)로 치사한 현덕수(玄德秀)로 사공과 같은 나이였고, 여덟째는 태사 평장 수문전태학사(太師平章修文殿太學士)로 치사한 최선(崔詵)으로 69세였고, 아홉째는 군기감(軍器監) 조통(趙通)으로 64세였다. 이렇게 모두 아홉 사람이다. 당시에 한림(翰林) 이미수(李眉叟.이인로)가 노정ㆍ적겸모ㆍ사마온공의 고사에 따라 일찍이 여러 원로들 사이를 따라다니며 시문(詩文) 100여 수를 지어 한바탕 성대한 정경을 상세히 형용해 놓았는데, 그 내용은 그의 문집인 《쌍명재집(雙明齋集)》에 수록되어 사림(士林)들 사이에 전해지고 있다.
지금은 원나라가 지인성덕(至仁盛德)으로 천하를 길러 주고 있고, 우리나라는 제일 먼저 귀부(歸附)한 관계로 대대로 원나라의 공주(公主)와 혼인을 맺는 영광을 누려왔다. 그리고 제후(諸侯)의 도리를 준수하여 상하간에 서로 좋은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변경 지역에 조그마한 분쟁도 없었으며 해마다 풍년이 이어졌으니, 실로 태평성대(太平聖代)요 천재일우(千載一遇)의 시대라 할 만하다.
이에 주상(主上.충숙왕)이 바야흐로 온 정성을 기울여 학문을 추구하여 어진 이를 좋아하고 선(善)을 행하기를 즐겼으며, 대령군(大寧君.최유엄) 이하 대신들은 국가의 원귀(元龜.고대에 점을 칠 때 사용하는 큰 거북)로서 모두 연세가 백 살 가까이 되어 현직에서 물러나 한가롭게 지내면서 다 함께 안락을 누리고 있으니, 비록 우연히 모여 담소하는 자리라고는 해도 일대의 품격과 무관치 않다. 그분들이 평생 지켜온 훌륭한 절개와 명성이 어찌 우리나라 사람들만 경모하게 할 뿐이겠는가.
하루는 동암(東菴.이제현의 아버지 이진) 노선생(老先生)이 신진(新進)인 나를 불러 말씀하시기를,
“근래 모임에 나온 원로들이 낙사(洛社)와 쌍명재(雙明齋)의 고사(故事)를 구현해 보고자 하는데, 자네가 원로들을 위해 서문을 짓도록 하게.”
하셨다. 나는 나이도 어리고 벼슬도 낮아 상공(相公)들의 뜻을 받들기에 부족하다고 사양하였더니, 선생이 웃으며 말씀하시기를,
“옛날에 미수(眉叟)가 쌍명재에 모인 원로분들에게 받아들여진 것이 어찌 나이나 지위를 따져서 그리 된 것이겠는가. 자네는 사양하지 말게나.” 하셨다. 내가 허락을 받지 못한 채로 물러나 생각하기를,
“아, 상공들의 성대한 공덕은 사직(社稷)에 남아 있고 공론(公論)에 퍼져 있으니, 나처럼 학식이 부족한 사람이 감히 이를 드러내어 선양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러나 고금에 있었던 기로회(耆老會)의 전말(顚末)에 대해서만은 기술하지 않을 수 없다.”
하고는, 이에 삼가 그 전말에 대하여 기록해 두는 바이다.
연우(延祐) 경신년(1320, 충숙왕 7) 3월 기망(旣望)에 예문춘추관 주부(藝文春秋館注簿) 최모(崔某)는 서(序)하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