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고문고사(古文故事)

松窩雜說(송와잡설) 1/2 - 이기(李墍)

작성자허현|작성시간17.07.23|조회수396 목록 댓글 0

 

註:「松窩雜說(송와잡설)」은 조선중기의 문신 이희(李墍 1522~1600)가 쓴 시화잡록(詩話雜錄)으로『대동야승(大東野乘』에 실려 있다. 이희의 본관은 한산(韓山)이고 호는 송와(松窩)이다.

이 책에는 기자조선 때로부터 조선 선조 때까지의 기록 130여건이 포함되어 있다. 그중에는 수령들의 탐오(貪汚)함을 비판하거나 개가 금지법의 부당함을 지적한 것도 있고, 신식 병기의 편리함을 인정하고, 중국과 우리나라의 농기구를 용도에 따라 설명하는등 언어,풍속상에 참고가 될 만한 사항들도 실려있다.

또한 이 책에는 저자의 선조인 이곡(李穀)과 이색(李穡) 부자에 관한 이야기와 그 밖의 조상에 관한 일도 들어 있다. 특히 이곡과 이색이 원나라에 가서 부자가 중국 과거에 오름으로써 동국(東國)에 한산(韓山)이라는 고을이 있음을 천하가 알리게 되었다고 기록하여, 저자의 문벌(門閥)을 자랑하고 있다.

이는 조선중기 우리 양천(陽川) 허문의 5문장가(五文章家)을 비롯한 명조(名祖)들께서 문명(文名)을 떨쳐 동방의 명문벌족(名門閥族)으로 알려졌던 바를 생각케한다. 분량이 많으므로 2차로 나누어 기록한다.

 

 

● 왕씨(王氏)는 용(龍)의 종(種)이므로, 아무리 못난 자손과 먼 후손이라도 그 몸의 어딘가에 반드시 비늘이 있다. 세상에 전해 오는 말에,

“우(禑)의 왼쪽 어깨 위에 바둑돌만한 비늘이 있었는데, 우는 항상 숨기고 나타내지 않았다. 그런데 임영(臨瀛.강릉)에서 죽음을 당하던 날에는 어깨를 드러내어 옆에 사람에게 보이면서, ‘지금 만약 보이지 않고 죽으면 내가 신(辛)가가 아닌 줄을 너희들이 어찌 알겠느나?’ 하였다.” 한다. 이 일이 비록 역사에는 기록되지 않았으나, 임영 사람은 지금까지 그 얘기를 하고 있다.

 

● 운곡(耘谷.원천석) 선생은 이숭인(李崇仁)ㆍ정도전(鄭道傳) 등과 함께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다. 목은(牧隱.이색)이 일찍이 여흥(驪興)에서 귀양살이하고 있었는데, 공은 일부러 찾아가서 만나보고, 시를 지어 서로 화답한 시편(詩篇)이 많았다. 공은 우왕(禑王)이 폐위(廢位)되어 강화(江華)로 귀양갔다는 말을 듣고, 대서특서(大書特書)하기를,

“나라에서 선왕(先王)의 아들을 신돈(辛旽)의 아들이라 하여 폐위하고 서인(庶人)으로 만들어, 강화에 내쳐버렸다.” 하고, 이어서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시조왕의 신서가 하늘을 감동시켜 / 祖王信誓應乎天

남기신 은택이 오백 년을 내려오네 / 餘澤流傳五百年

진위를 어찌하여 일찍 분간 않았는고 / 分揀假眞何不早

저 하늘의 실피심은 밝게 빛나네 / 彼蒼之鑑昭昭然

 

창왕(昌王)은 폐위되어 강화로 가고, 우왕은 강화에서 강릉으로 옮겼다가 죽음을 당했다는 사실을 듣고는 시를 지었다.

 

선왕의 부자분이 각각 떨어져 / 先王父子各分離

동쪽 서쪽 하늘 끝 만리 길일세 / 萬里東西天一涯

몸은 비록 서인된다 하여도 / 縱使一身爲庶類

마음만은 천고에 변치 않으리 / 寸心千古不遷移

 

이와 같이 공은 우왕ㆍ창왕 부자를 선왕이라 하여 시를 쓰고 곡(哭)하였다.

 

● 운곡공(耘谷公)은 통제사(統制使) 최영(崔瑩)이 형(刑)을 당했다는 것을 듣고 통탄하는 마음으로 시 세 편을 지었다.

맑은 빛 묻히고 기둥이 무너져 / 水鏡埋光柱石䫝

사방 백성 모두가 슬퍼하누나 / 四方民俗盡悲哀

빛난 공업 마침내 쓰러졌지만 / 赫然功業終歸朽

꿋꿋한 충성이야 죽은들 사그라지랴 / 𥗫爾忠誠死不灰

역사에 기록할 일 편질에 가득한데 / 紀事靑篇曾滿秩

가엾게도 황토더미 벌써 되었네 / 可矜黃壤巳成堆

생각건대 아득한 저 황천에서 / 相應杳杳重泉下

동문에 눈을 걸어도 분 못 풀리 / 掛眼東門憤未開

 

조정에 홀로 설 제 뉘 감히 간여하랴 / 獨立朝端誰敢干

충의로써 어려운 일 꾀하였네 / 直將忠義試諸難

육도 백성의 바람 따라서 / 爲從六道黔黎望

삼한 사직을 편안케 했네 / 能使三韓社稷安

동료 영웅들은 낯이 어이 두터우뇨 / 同列英雄顔更厚

죽지 않은 간인들도 뼈가 서늘하리 / 未亡邪侫骨猶寒

어지러움 다시 오면 뉘 헤쳐 나가리 / 更逢亂日誰爲計

가소롭다 세상 사람 하는 짓이 간사하다 / 可笑時人用事奸

 

내 지금 부음 듣고 애도의 시 짓노니 / 我今聞訃作哀詩

공 위한 슬픔보다 나라 위한 슬픔일세 / 不爲公悲爲國悲

천운의 비태도 알기 어렵고 / 天運難能知否泰

국가의 안위도 정해지지 않았네 / 邦基未可定安危

날카롭던 칼날 꺾였으니 슬퍼한들 무슨 소용 있으며 / 銛鋒已絶嗟何及

충성스러운 마음 늘 외로우리니 못내 한스러워라 / 忠膽常孤恨不支

산하를 홀로 대해 이 가락 노래하니 / 獨對山河歌此曲

흰 구름 흐르는 물이 다 서글퍼하여라 / 白雲流水摠噫嘻

 

● 노산군(魯山君)이 영월군(寧越郡)에 물러간 후에도 매양 아침이면 대청에 나와서 곤룡포(袞龍袍)를 입고 걸상에 걸터앉아 있으니, 보는 사람으로서 공경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하루는 금부도사(禁府都事)가 내려왔으나, 문틈으로 바라보고는 움찔하면서 감히 손을 쓰지 못하였다. 날이 차츰 저물자 도사는 때를 늦추었다는 책망이 있을까 두려워, 걸상 옆에 있는 하리(下吏)와 의논하였다. 그리하여 노산군이 앉은 후면(後面)의 창구멍을 통해, 긴 끈으로 당기도록 하였다. 끈이 모자라자 베띠를 이어서 마침내 목을 졸라 죽였다.

 

● 노산군이 영월에서 죽으니, 관(棺)과 염습(斂襲)도 갖추지 않고 짚으로 빈소(殯所)를 마련하였다. 하루는 젊은 중이 와서 매우 슬프게 곡하며 말하기를,

“평소에 이름을 알고 지냈고, 보살핌을 받은 분의(分義)가 있노라.”

하고, 며칠을 머물러 있다가, 어느 날 밤에 시체를 지고 도망쳐버렸다. 어떤 사람은 ‘산골짜기에서 태워버렸다.’ 하고, 어떤 사람은 ‘강물에 던져 버렸다’ 한다. 지금 무덤은 거짓으로 장사한 것이라 하니, 두 가지 말 중에 어느 편이 옳은지는 알 수 없으나, 점필재(佔畢齋.김종직)의 글로써 본다면 강에 던졌다는 말이 그럴 듯하다. 그렇다면 중은 호승(胡僧) 양련(楊璉)의 무리로서, 간신(奸臣)이 지휘한 것이었다. 세월이 오래되었으나 그 한스러움이야 어찌 다하랴? 혼은 지금도 의탁할 곳이 없어 떠돌아다닐 터이니, 진실로 애달프다.

 

● 목은(牧隱)은 우리 태조(太祖)가 크게 존중(尊重)한 사람이었다. 태조가 일찍이 자(字)와 당호(堂號)를 지어주기를 청하고, 또 둘째 아들의 이름도 지어달라고 청하였다. 목은은, 계화(桂花)는 가을에 희고 깨끗하며, 계수나무의 짝으로는 소나무만한 것이 없다 하였다. 공이 중히 여기는 것이 절의(節義)이므로 변치 않음을 숭상한 것이다. 그래서 자를 중결(仲潔), 당호를 송헌(松軒)이라 하였다. 또 셋째 아들의 이름을 방의(芳毅)라 지었다. 전에 둘째의 이름을 방과(芳果)라 지었는데, 과(果)와 의(毅)는 서로 돕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 한 편을 지었다.

 

추부에 들어서는 난 체하기 부끄러워하고 / 着鞭樞府愧揚揚

같은 날 어깨 겨루며 대성에 들어갔네 / 同日摩肩入臺省

달빛이 가득하니 산과 바다가 어찌나 밝던지 / 月滿海山何皎皎

겨울이 차가우니 송백 더욱 푸르구나 / 歲寒松柏愈蒼蒼

우애와 공순함으로 넉넉한 정을 보겠고 / 友恭可見親情洽

과단하고 굳세니 적의 형세강함을 어찌하여 걱정하리 / 果毅何憂敵勢强

원하노니 일시의 여러 대장들과 / 願與一時諸大將

종시토록 곽 분양을 스승으로 삼으소서 / 共師終始郭汾陽

 

● 목은은 고려 공양왕(恭讓王) 기사년(1389) 12월에 귀양을 당해, 장단(長湍)에 있다가 경오년 4월에는 함창(咸昌)에 부처(付處)되고, 그해 5월에 청주(淸州) 옥(獄)으로 왔으나, 수재로 인해 용서를 받고 다시 장단에 와서 있었다. 임신년 4월에 또 금양(衿陽)으로 귀양갔고, 6월에는 금양에서 여흥(驪興)으로 옮겨졌다. 벽사(甓寺)에서 거처하면서 ‘배를 띄워 노자암(鸕鷀巖)에 갔다’는 등의 시가 있는데, 시는 이것이 끝이다.

혁명(革命)한 후에 조정에서 중형(重刑)으로 처치하려고 의논하였으나 태조가 특별히 용서하여, 여흥에서 장흥부(長興府) 남벽사역(南碧沙驛)으로 유배(流配)되고, 그해 겨울에 석방되어 한산(韓山)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공은 한 곳에 편안히 있지 못하였다. 을해년(1395, 태조 4) 가을에는 관동 지방을 유람하다가 오대산(五臺山) 에 들어가서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그해 11월에 태조가 친서(親書)로 여러번 부르므로 공은 부득이하여 교자(轎子)를 타고 들어가서 뵈었다. 태조는 어탑(御榻)에서 내려와, 친구간의 예로써 대우하면서, “덕이 부족하고 식견(識見)이 어둡다 하여 버리지 말고, 한 말씀 가르쳐주시길 바라오.” 하니 공은,

“망국(亡國)의 대부(大夫)로서 일을 도모할 수 없다 하였으니, 다만 이 해골(骸骨)이나 고향 산천에 묻히기를 원할 뿐이오.”

하였다. 태조는 그를 머물게 할 수 없음을 알고 중문까지 걸어 나가서 서로 읍(揖)한 다음, 작별하였다.

병자년 여름에는 공이 여흥으로 피서(避暑)하기를 간절히 요구하여, 5월 초3일에 벽란(碧瀾) 나루에서 배를 타고 강을 거슬러 가는데, 호송(護送)하는 중사(中使)도 또한 와서 있었다. 초7일에 여흥 청심루(淸心樓) 하류 연자탄(燕子灘)에 도착하여 배안에서 공이 죽었는데, 공의 죽음을 사람들이 많이 의심하였다. 대개 고려 왕씨(王氏)의 자손이 배안에서 많이 처치를 당했는데 이것이 모두 정도전(鄭道傳)과 조준(趙浚) 등의 술책이었으므로 공의 죽음에 대하여서도 여러 사람의 의심이 없을 수 없었다. 애통하도다.

 

● 광묘(光廟.세조) 병자년 변란(變亂)에 하위지(河緯地)도 형을 당했다. 그 처자(妻子)가 일선(一善.선산)에 있었는데, 조정에서 연좌법(連坐法)을 걸어 금부도사를 보내서 처치하게 하였다. 하위지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큰아들 하호(河琥)는 당황하여 어찌할 줄 모르며 땅에 엎드려 말이 없었고, 둘째 아들 하박(河珀)은 나이가 20이 못 되었는데, 조금도 두려워하는 빛이 없고 행동이 평소와 같았다. 도사(都事)를 돌아보며,

“도망할 리는 없으니, 형(刑)을 조금만 늦추어 주십시오. 부득이 모친과 영결(永訣)하는 말을 해야겠습니다.”

하였다. 도사가 허락하니, 박이 문으로 들어가서 모친 앞에 꿇어앉아,

“죽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아버님이 이미 죽음을 당했으니, 자식으로서 홀로 살 수는 없습니다. 비록 조정의 명령이 없더라도 자결(自決)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다만 누이동생이 시집갈 나이가 되었습니다. 비록 적몰(籍沒)되어 천한 종이 되더라도 여자의 의리로써는 죽을 때까지 한 지아비만을 섬겨야 할 것이니, 훗날 개돼지같은 행실은 하지 말게 하십시오.”

하고, 드디어 두 번 절하고 나와서 조용하게 죽음을 당했다. 사람들이 모두들 하위지는 훌륭한 자식도 두었다 하였다.

 

● 교리 정붕(鄭鵬)은 선산인(善山人)이다. 깨끗한 절조(節操)로 자신을 수양하여, 그의 문간에는 뇌물을 가지고 오는 사람이 없었다. 그때에 유자광(柳子光)은 적개좌리공신(敵愾佐理功臣)으로서 무령군(武靈君)에 봉해졌는데 간사하고 탐심(貪心)이 많으며, 또한 방자하여 기세가 조정을 휩쓸었다. 공은 유자광과 외가 친척이 되므로 비록 문안(問安)하는 예는 폐하지 않았으나, 여종이 갈 때에는 반드시 숙마(熟麻) 끈으로 팔을 단단히 묶고, 묶은 자리에 표를 해서 보냈다가 돌아오면 풀어주었다. 그것은 묶인 곳이 아파서 그의 집에서 지체하지 않고 빨리 갔다가 빨리 돌아오게 하려 한 것이었다.

한번은 공이 입직(入直)하였는데 집에 양식이 떨어졌다. 공의 부인이 유자광의 집에 꾸어줄 것을 청하자, 유자광이 쾌히 말하기를,

“친척의 정의(情誼)는 서로 구휼하는 데에 있다. 교리가 지나치게 괴퍅하지만 내가 어찌 괄시하겠는가?”

하며, 곧 쌀을 자루에 넣고, 장을 항아리에 담아 종을 시켜 노새에 실려 보냈다. 공이 직소(直所)에서 나와서 옥같은 쌀밥을 보고, 얻어온 곳을 물으니, 부인은 사실대로 알렸다. 공은 상을 밀치고 웃으면서 일어나,

“입직하던 날 아침에 비지를 사다가 죽을 쑤어 주기에 나는 양식이 떨어진 줄을 알았소. 그런데도 내가 조처를 하지 않았으니, 이것은 나의 실수이지 집사람의 허물이 아니오.”

하고, 드디어 친구들에게 편지를 띄워 쓴 만큼을 채우고 본디 쌀과 합쳐서 돌려보냈다. 그가 궁핍(窮乏)하여도 절조를 변하지 않는 것이 이와 같았다.

 

● 상공 신용개(申用漑)는 젊어서부터 의기가 구구하지 않고 큰 절조가 있었다. 그의 아비 신면(申㴐)이 함길도(咸吉道) 감사로 있었는데, 이시애(李施愛)의 변란이 갑자기 일어나 변란에 대처할 길이 없었으므로, 대청 위에 있는 작은 다락 틈에 뛰어 들어가서 있었다. 적졸(賊卒)이 감사를 찾지 못하고 가려는 참이었는데, 소리(小吏)가 그가 숨은 곳을 가리켜 주어서, 마침내 죽음을 당했다.

공이 장성하자 부친이 도적의 손에 죽은 것을 애통하게 여겨, 반드시 부친의 원수를 갚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홍유손(洪裕孫)과 친교를 맺고 여러번 함길도에 가서, 그 아전의 얼굴 모습과 성명(姓名)을 자세히 알아두었다. 하루는 그 아전이 일이 있어 서울에 오다가 중간에 인가(人家)에서 묵었다. 공은 그때에 사인(舍人)으로 있었는데, 홍유손과 함께 어둠을 타서 도끼를 가지고 그 사람이 유숙하는 곳으로 걸어서 갔다. 홍유손을 시켜 불러내어 관청일로 서로 고해 주는 척하게 하고 공은 뒤에서 도끼로 찍어 죽인 다음 돌아왔다. 그러나 주인집과 동행하던 사람은 마침내 무슨 연고로 누구에게 죽음을 당했는지 알지 못하였다.

 

● 고령(高靈.고을 이름으로 봉호) 신숙주(申叔舟)의 부인 윤씨는 윤자운(尹子雲)의 누이동생이다. 숙주는 영묘(英廟.세종) 때에 8학사(學士)에 참여하였고, 성삼문(成三問)과는 더욱 친하였다. 광묘(光廟.세조) 병자년 변란 때에 성삼문 등의 옥사(獄事)가 발각되었는데, 그날 저녁에 신숙주가 자기 집에 돌아오니, 중문(中門)이 활짝 열렸고 부인은 보이지 않았다. 공은 방으로 행랑으로 두루 찾다가, 부인이 홀로 다락에 올라 손에 두어 자 되는 베를 쥐고 들보 밑에 앉아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공이 까닭을 물으니, 부인이 답하기를,

“당신이 평소에 섬삼문 등과 서로 친교가 두터운 것이 형제보다도 더하였기에 지금 성삼문 등의 옥사가 발각되었음을 듣고서, 당신도 틀림없이 함께 죽을 것이라 생각되어, 당신이 죽었다는 소문이 들려오면 자결(自決)하려던 참이었소. 당신이 홀로 살아서 돌아오리라고는 생각지 못하였소.”

하였다. 공은 말문이 막혀 몸둘 곳이 없는 듯하였다. 상고하건대, 이 일은 을해년 여름 노산군이 왕위에서 물러나고 세조가 임금의 자리에 오르던 날에 있었던 일로, 진신(搢紳) 사이에 미담(美談)으로 전해오던 것이다. 그러나 이 기록은 잘못 전해 듣고서 쓴 것이다. 부인은 병자년 정월에 죽었고, 육신(六臣)의 옥사는 그해 4월에 일어났으니, 이러저러한 말이 어찌 있을 수 있겠는가?

 

● 판서 이세좌(李世佐)의 부인 모씨(某氏)는 모관(某官)의 딸이다. 성묘(成廟) 때에 폐비(廢妃)에게 죄를 주려 할 적에, 공이 대방 승지(代房丞旨)로 사약(死藥)을 가지고 갔다. 그날 저녁에 공이 집에 돌아와서 부인과 함께 한 방에 누워 있었다. 부인이 묻기를,

“들으니, 조정에서 폐비를 논죄(論罪)한다더니 필경 어찌 되었소?”

하니, 공은, “벌써 사사(賜死)되었소. 하자, 부인은 깜짝 놀라 일어나 앉으면서,

“애달퍼라, 우리 자손은 씨도 남지 않겠구려. 어미가 죄없이 죽음을 당했는데, 자식으로서 훗날 보복하지 않겠소? 조정에서 세자(世子)를 장차 어떤 처지에 두려고 이런 일을 한단 말이오?”

하였다. 그후 연산군(燕山君) 갑자년(1504)에 공의 아들 이수정(李守貞)이 죽음을 당했고, 공도 또한 동쪽 저자[市]에서 참혹한 죽음을 당했다. 그리고 그때에 폐비론(廢妃論)을 고집하던 벼슬아치의 자손들이 남김없이 모두 죽었고, 나라도 거의 망할 뻔하였다. 부인의 앞을 내다보는 지혜는 실로 여러 신하들이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었다.

 

● 목은(牧隱)은 고려 말기 새 임금을 세우려고 논의할 적에, 홀로 전왕의 아들을 세워야 한다고 뭇 사람의 떠드는 중에서 주장하였다. 그후 우왕(禑王)이 폐위되어 강화(江華)에 있을 때에 공은 미복(微服)으로 가서 뵙고, 국화(菊花)를 보고 지은 시가 있다.

 

인정이 어이하여 만물처럼 무심하리 / 人情那似物無情

요즈음 경색 보니 마음 편치 못하여라 / 觸景年來漸不平

동리(국화)를 우연히 향하니 못내 부끄러워라 / 偶向東籬羞滿面

진짜 국화가 가짜 도연명을 대했구나 / 眞黃花對僞淵明

 

막막한 용사(중국 북방의 사막)에 추풍이 부니 / 龍沙漠漠又秋風

시든 풀 이어지는 구름에 낙조만 붉네 / 衰草連雲落照紅

국화를 꺾었으나 누구에게 바치리 / 折得黃花誰上壽

해서 천릿길, 여기가 행궁이네 / 海西千里是行宮

 

또 국화시가 있다.

 

울타리 옆 두어 가지 서리 맞은 꽃이 고와 / 數枚籬畔媚霜葩

한산 사람 목은의 집 빛나게 하네 / 潤色韓山牧隱家

이 늙은이 갑자 쓸 줄 어이 알리오 / 此老豈知書甲子

문앞에 푸른 버들 연기 띠고 늘어졌네 / 門前碧柳帶煙斜

 

공의 간곡한 뜻을 알 수 있다.

 

● 판서 이자(李耔)는 자(字) 는 차야(次野), 호는 음애거사(陰崖居士)이며, 우리 한산이 본관이다. 문장이 능하여 과거에 장원으로 합격하였고, 엄숙하고 충직(忠直)하여 당시 사람들이 뜻을 크게 펼칠 것을 기대하였다. 김안로(金安老)와는 인아(姻婭.동서)의 친분이 있고, 또 주계군(朱溪君.심원)에게 함께 배웠다. 그러나 평생에 하는 짓은 향초와 누린내 풀처럼 서로 반대였다. 그리하여 김안로는 매양 공을 해칠 뜻이 있었으나 공이 올바른 도를 지키므로 기회를 얻을 수 없었다. 기묘년(1519, 중종 31)에 여러 현인이 내침과 죽음을 당하던 날에 공도 또한 파직되고 내침을 당해, 용궁현(龍宮縣)에 살고 있었다.

그후 병신년(1536, 중종 31)에 김안로가 좌의정으로 휴가를 받고, 함창(咸昌) 지역에 와서 성묘를 하면서, 먼저 공에게 사람을 보내 돌아가는 길에는 옛 벗을 찾겠노라고 알려왔다. 그러나 실상은 공을 꺼리고 미워하여 정탐하려는 것이었다. 공은 그의 심사를 미리 알았으므로 그가 온다는 날 아침에 홰나무 꽃물로 낯을 씻고는, 이불을 두르고 앉아서 서로 대면하였다. 김안로는 공의 손을 잡고서 지극히 다정하게 대하고 눈물을 흘리며 작별하고 나와서는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음애공(陰崖公)이 죽게 되었으니, 염려할 것이 없다.”

하였다. 군자(君子)가 소인을 대할 때에 가끔은 스스로를 숨겨서 화를 피하는 것도 또 하나의 방도이다.

 

● 목은(이색)이 장단으로 귀양 가서 성(省)에 낭관으로 있는 여러 아들에게 시를 부쳤다.

 

현릉(공민왕) 일대에 소인 선비로 / 玄陵一代小人儒

중서성 간의대부 역임했노라 / 揚歷中書諫大夫

시중이 된 것은 요행이었지 / 得至侍中徼幸耳

사문에 무엇으로 맞먹게 보답하리 / 斯文何事答相圖

 

중용과 대학에서 증자ㆍ자사 배웠는데 / 中庸大學學曾思

사람들은 영왕(풍도)이 네 스승이라 하네 / 人道瀛王是汝師

요즘 와서 장락(풍도가 오래 즐긴것)이 나만은 아니리 / 長樂邇來非獨我

뉘 다시 귀거래사 지을것인가 / 有誰重賦去來辭

 

작년에 큰자식이 황천으로 갔는데 / 去年長子入黃泉

오늘 아침 중씨가 바닷가로 귀양갔네 / 仲氏今朝謫海堧

들으니 셋째 자식 탄핵을 당한다니 / 聞說三郞方被劾

어이한 하늘인가 어이한 하늘인가 / 奈何天也奈何天

 

세상의 성쇠는 돌고 도는 것 / 世間榮悴似循環

송백이 푸르러도 추위에 시달린다 / 松柏蒼蒼又苦寒

중니(공자)를 배워 구괘를 벌이고서 / 且學仲尼陳九卦

흰 머리 이 신세를 장단에 부쳤노라 / 白頭身世付長湍

 

벼슬길은 고금이 위태로운 것 / 官途今古足危機

늘그막의 시비됨이 무엇이 괴이하리 / 何怪衰年惹是非

성은에 감사하니 천지도 한없어라 / 再拜聖恩天地大

눈은 산에 가득한데 사립문이 닫혔네 / 滿山殘雪掩柴扉

 

탄핵 상소 큰 기세로 사람을 놀래지만 / 彈章大勢乍驚人

익히 읽고 생각하면 모두 진심 잃었구나 / 熟讀深思摠失眞

노옹을 잡아오라는 그 네 글자 / 捉敗老翁惟四字

쫓아낸 중이 도리어 왕륜 같을까 두렵구나 / 黜僧還恐似王倫

 

장단 태수 생선을 보내왔기에 / 長湍太守送纎鱗

시장할 제 먹어보고 그 좋은 맛에 새삼 놀랐네 / 晩食還驚味更珍

성랑에게 왕의 은혜 심중함을 알았노니 / 始識省郞恩深重

주리면서 공직할 이 어이 없으리 / 忍飢供職豈無人

 

현릉 갑인년 책사에 뽑히고 / 玄陵第士甲加寅

신씨 때 방이 붙어 출신하였네 / 放榜辛朝始出身

지금엔 황야에 물러나 있는 운수이니 / 坐數至今荒野去

온 조정의 귀인들이 한 사람도 없구나 / 滿庭靑紫絶無人

 

천자께서 부르시어 팔진미를 내리시니 / 天子呼來賜八珍

시중의 광채가 조정의 신하를 놀라게 했네 / 侍中光彩動朝臣

화복이란 피하기가 어려운 것 / 請着倚伏難逃處

적적한 시골에서 들 사람과 벗하였네 / 寂寂荒村伴野人

 

송헌(이성계)은 정권을 잡고 나는 떠도는 신세 / 松軒當國我流離

꿈 속엔들 이런 일을 생각했으리 / 夢裏何曾有此思

두 정씨(정도전,정총)가 더구나 큰 논의에 참여했으니 / 二鄭況今參大議

한 집안 어느 때나 모여질런가 / 一家完聚果何時

 

너는 가문 믿고 너의 완악 부리지만 / 汝恃家門逞汝頑

아비가 (햇볕나면 녹아 없어지는)빙산임을 네 어이 알겠느냐 / 那知汝父是氷山

탄핵문은 죽이고 용서하려 않는데 / 彈文直欲殺無赦

아직도 천지간에 함께 삶이 다행이라 / 尙幸竝生天地間

 

죄주려 하면 할 말이 어이 없을소냐 / 欲加之罪豈無辭

헐뜯는 듯 기리는 듯 세상이 다 아는 바네 / 似毀疑褒世所知

필경에는 하늘 믿고 걱정하지 않노라 / 畢竟有天吾不患

살진 고기 삶아 놓고 술잔이나 기울이리 / 爛烹肥肉倒深巵

 

목은이 시중(侍中) 송헌(松軒.이성계)에게 부친 시는 아래와 같다.

 

죽어 마땅한 신의 죄 성주의 인자로 / 臣罪當誅聖主仁

관내에 살게 되어 몸 편하다오 / 屛居關內得安身

어이 천행을 만났는가 물어 온다면 / 問渠何以逢天幸

송헌이 나의 친구여서라고 / 只爲松軒是故人

 

흰 머리 신세가 사양에 놓였으니 / 白頭身世已殘陽

직 없고 밭 없어도 상관 없어라 / 無職無田赤不妨

산에 노니는 흥취 있는데 / 只有游山高興在

낭묘에서 헤아려 주기까지 바라리까 / 敢煩廊廟一商量

 

들판에 가을 드니 경치 맑게 변하여서 / 秋入郊原淑景移

물화가 산뜻한데 비 또한 적셔주네 / 物華晴好雨仍奇

태평한 낭묘에 훌륭한 모임 많았는데 / 太平廊廟多高會

언제나 연 구경가는 이 그 누구이런고 / 每趣看蓮又是誰

 

세 번째 함창길 흥 다시 새롭구나 / 三到咸昌興更新

여전히 꾀꼬리는 친절도 하여라 / 依然黃鳥赤相親

한산은 나의 부모 산소가 있는 고을 / 韓山有我先墳在

중추에 맞추어 양친께 배례하리 / 欲及中秋拜兩親

 

삼한이 천명 맞아 날이 방금 한창인데 / 三韓迓命日方中

백 번을 꺾여도 사귀는 정 물이 동으로 흐르는 듯 / 百折交情水必東

난리는 저절로 사라지고 화기 동함은 / 乖亂自消和氣動

황각에 맑은 기풍 있어서이네 / 只緣黃閣有淸風

 

목은은 정포은(鄭圃隱.정몽주)이 죽음을 당했다는 것을 듣고 우연히 시를 지었다.

 

성의 공격 대의 탄핵 지금까지 이르더니 / 省擊臺彈直到今

오천(정몽주 고향 연일)의 기화가 남의 맘을 놀라게 하네 / 烏川奇禍駭人心

오고 가며 마음을 쓰나 일에 무슨 방해되랴 / 往來屑屑何妨事

송헌이 날 사랑하는 것 다시금 느꺼워라 / 更感松軒愛我深

 

무자ㆍ기축년(1588~1589, 선조 21~22) 사이에 건원릉(健元陵.태조능) 위에서 곡성(哭聲)이 들려왔는데 수호(守護)하는 군사들이 가서 살펴보면 들리지 않았다. 수호하는 군사들만 들은 것이 아니라, 삭망제(朔望祭) 때에 헌관(獻官)과 집사원(執事員)도 가끔 주산(主山)에서 가느다란 곡성이 나는 것을 들었는데, 무슨 연고인지는 알지 못하였다. 임진년 여름에 왜적(倭賊)이 바다를 건너와서 대가(大駕)는 서쪽으로 가고, 종묘사직이 폐허가 된 다음에야 비로소 성조(聖朝)의 혼령(魂靈)이 지하에서 걱정하고 애달파하여 이 세상에 정녕하고 간곡(懇曲)하게 가르쳐준 것임을 알았다. 그런데 상하(上下)가 모두 어둡고 어리석어서 경계할 줄 몰랐으니, 얼마나 애통한 일인가!

 

● 우리 나라가 개국한 지 2백 년이다. 세종(世宗)과 성종(成宗)이 백성을 편케 하고 은덕으로 보살폈다. 연산군(燕山君)이 정사를 어지럽히고 살육(殺戮)을 하였지만, 중종과 명종이 정사를 거듭 밝혀, 너그럽게 돌보았다. 대단한 병란으로 인한 참혹함도 없었고, 9년 홍수(洪水)와 7년 대한(大旱)같은 재앙도 없이, 금상(今上.현재의 임금 즉 선조) 때까지 이르렀다. 그동안 백성은 번거로운 부역(賦役)에 곤란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전야(田野)는 개척(開拓)되고 일정한 살림이 있었고 숫자도 많아지고 부유하였다. 그리하여 위로는 조정(朝廷)에서, 아래로는 여염집 필부(匹夫)까지 호사하기를 숭상하여, 오직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음식을 먹는 것에 힘을 썼다.

물(物)이 성했다가 쇠하여지는 것은 천도(天道)의 상례이다. 수십 년 이래로 역질(疫疾)이 유행하여 백성이 많이 죽었고, 기축년 옥사(1589년 정여립 모반사건)에 죄를 얽어 만들어서 3년을 끌며 끝나지 않았는데, 죽은 자가 무려 1천여 명이었다. 그리고 임진년에는 왜노가 온 나라 군사를 몰고 와서 우리 백성들을 거의 다 죽였고, 간혹 남은 백성은 직업을 잃고 농지를 잃어 성안과 지방에 누워 죽은 시체가 서로 잇달아 있었다. 또 호서(湖西)와 해서(海西)에 반란을 일으키려는 역적(逆賊)이 있다는 고발이 있어, 그들은 비록 형(刑)을 받았으나, 서민(庶民)들도 또한 많은 해를 입었다.

더구나 역질이 한창 성한 중에 학질(瘧疾)이 횡행하는데, 고약한 비바람에 여러 가지 놀랄 만한 재앙이 잇달아서 한번 전염되기만 하면 이내 죽으니, 겨우 살아남은 사람인들 그 어찌 며칠 안 되어서 다 없어지지 않겠느냐? 아! 인간을 사랑하여 살리고자 하는 것은 하늘의 본심인데, 어찌하여 진노(震怒)하기를 그만두지 않는가? 왜노를 불러들여 폭행을 하게 하고 악귀가 흉한 짓을 하도록 맡겨두어 죽이고 또 죽여서, 지금 와서는 더욱 심하게 하니, 인(仁)으로 덮어주고 하민(下民)을 불쌍하게 여기는 지극한 덕이 과연 이와 같은가? 옛 사람이 말하는 죽을 운수가 끝나지 않아서 그런 것이나 아닌가? 온 세상 사람을 다 죽여버리고 별도로 마땅한 사람 하나를 낳게 하려고 그러는 것인가? 청구(靑丘) 수천 리 지역에 다시는 인간이 없고 원귀(寃鬼)의 터로 변하게 하려고 그러는 것인가? 아니면 어지러움이 심하고 비운(否運)이 극도에 이르게 하여 인심이 허물을 후회하고 다스림을 생각하도록 한 다음에 다시 태평한 운수를 열어주려고 그러는 것인가? 하늘의 뜻을 진실로 알 수 없다.

 

● 삼국(三國) 시대는 예문(禮文)이 소박하고 간략하였으며, 고려도 5백 년이나 오래된 나라였으나 상례(喪禮)가 간략함이 많았다. 그러나 우리 왕조에 와서는 예절 조목이 크게 갖추어져서, 비로소 최질(衰絰.상복)과 거려(居廬.상주가 여막에서 사는 것)하는 제도가 있게 되었다. 그러나 연산군이 정사를 어지럽히면서 예법을 탕멸(蕩滅)하여, 드디어 상기(喪期)를 단축하는 제도를 만들고 어기는 자는 죄를 주었다. 사대부(士大夫)가 휩쓸려 따랐으나 또한 예법을 지켜, 심상(心喪)하는 자도 있었다.

중종이 즉위하자 예전의 예법을 회복하였고, 정덕(正德) 기묘년 무렵에는 여러 현인(賢人)이 조정에 가득하여 《주자가례(朱子家禮)》를 강구해서 당시 후진들이 앞을 다투어 따랐다. 그리하여 여염에서는 단지(斷指 손가락을 끊어 그 피를 죽어가는 부모에게 먹이는 것)ㆍ할고(割股 다리 살을 베어서 병든 부모를 살리는 것)ㆍ철죽(啜粥 삼년상 동안 죽만을 마시는 것)ㆍ여묘(廬墓) 사는 일은 흔히 있는 일들이었고, 혹 애훼(哀毁 지나치게 슬퍼함)하여 얻은 병이 고질이 되어도 오히려 권도(權道)를 따르지 않아 그대로 죽는 자가 또한 많이 있었다.

효도란 비록 천성(天性)에 근본한 것이나, 진정에서 나오지 못하고 억지로 힘쓰는 데서 나온다면 바꾸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그 이치상 그러한 것이다. 그러므로 명종 때에는 이에 한 가지 핑계로써 스스로 편리하게 하려는 의논이 있어, ‘3년 동안 여묘를 사는 것은 가례(家禮)의 본뜻이 아니고, 권도를 좇는 것이 성인(聖人)의 남긴 가르침이다.’라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드디어 반혼(返魂.장사지낸 후 신주를 집으로 모셔오는 일)을 하게 되니, 어진 사람이거나 못난 사람이거나 모두 예법을 하는 일이라 하여 그대로 따랐다. 그 사이에 옛법을 좋아하는 인사(人士)가 우리 나라는 중국과 같지 않으므로 반혼하는 것이 마땅치 못하다는 뜻을 힘껏 말하였으나, 바로잡지 못하였다. 이로부터는 상례(喪禮)의 기강(紀綱)이 나날이 무너져 상주된 자가 반드시 궤연(几筵.영궤와 혼백ㆍ신주를 모셔두는 곳)을 받들고 집으로 돌아와서 스스로 병을 핑계하고 안방에 거처하면서 마시고 먹고, 손님 접대하기를 평소와 다름없이 하였다.

임진년 왜란 이후에 조정에서 무사(武士)에게 기복(起復.거상중에 나와 벼슬하는 것)해서 종군(從軍)하라는 명이 있었다. 비록 종군하더라도 기복의 복색이 저대로 있었는데, 졸곡(卒哭 삼우제 다음 지내는 제사)도 지내기 전에, 혹은 연상(練祥.소상)도 마치기 전에, 고기를 먹고 채색 옷을 입어 조금도 어려워하는 기색이 없었으니, 그 무부(武夫)에 대하여서는 나무랄 것도 못 되거니와, 문관(文官)으로서 재상의 반열에 있는 자도 자기 스스로 기복한 자가 많았다. 혹은 모집을 핑계대고, 혹은 의병을 핑계하여 윤리와 기강을 돌보지 않고 오로지 자신을 이롭게 하기만 일삼았다. 선비로서 스스로 글을 읽었다는 사람이나 예법을 배웠다고 자칭하는 자도 모두 상(喪)을 입지 않고 한 집안에 윗사람 아랫사람,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하나도 상례를 실행하지 않았다. 그 동안에 예법을 숭상하여 상례를 지킨 자는 아주 없고 겨우 몇만 볼 수 있었다. 아! 전일에 권도를 따르기를 즐겨하지 않던 자는 무슨 마음이었으며, 오늘날에 상주로서 남을 대하고 마음대로 먹는 자는 또한 무슨 심사인가? 이것이 이른바 본심을 잃어버린 자들이다.

대저 삼년상이란, 천경지의(天經地義.하늘의 떳떳함을 얻고 땅의 마땅함을 얻은 도리. 즉 정당하여 바꿀 수 없는 도리)이며, 백성이 지켜야 할 도리인 것이다. 그런 까닭에 어진 자는 삼년상도 가볍게 여기나, 못난 자는 마땅히 애써야 할 바이다. 이는 어찌 이와 같이 우리 본연(本然)의 애달파하고 망극하게 여기던 본심이 하루아침에 흉악한 왜적의 변으로 인하여 씻은 듯 없어지고, 금수(禽獸)의 지경에 빠져들어도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탄식할 노릇이고, 괴이한 노릇이다.

 

● 임진년(1592) 여름에, 왜적이 바다를 건너 국경에 들어왔다. 잇달아 변경 성(城)을 함락시키고, 별다른 저항을 받음도 없이 그대로 달려왔다. 이일(李鎰)의 군사는 상주(尙州)에서 패하고, 신립(申砬)의 군사는 충주(忠州)에서 함몰되었다.

29일 저녁에 급보가 갑자기 왔다. 이튿날 새벽에, 대가(大駕)는 종묘와 사직의 신주(神主)를 받들고, 동궁(東宮)ㆍ중전(中殿)ㆍ여러 빈(嬪)과 함께 비를 맞으며 허둥지둥 나섰다. 임진(臨津) 나루를 건너, 동파역(東坡驛)에서 자고, 개성(開城)을 거쳐 다시 관서(關西)로 방향을 바꾸었다. 종실(宗室) 및 문무 백관(文武百官)이 중도에서 도망쳐 흩어지고 대부분 호종(扈從)하지 않았다. 심지어 첨지(僉知) 성세령(成世寧)ㆍ전 직장(前直長) 성세강(成世康)같은 자는, 사대부로서 또는 7품 녹봉(祿俸)을 먹던 신하로서, 성안에 편하게 있다가 왜노에게 항복하였다. 성세령은 손녀(孫女)를 왜장에게 아내로 주어 귀염을 받아 그 덕에 온 동리가 편하였다. 종친 및 사족(士族) 등이 처음에는 모두 성문을 나서서 기내(畿內) 고을에서 난을 피하였으나, 성세령 형제가 평안 무사함을 보고 다시 성안에 들어간 자도 또한 많았다. 삼의사(三醫司)와 각 관청의 서리(書吏)ㆍ전복(典僕) 및 잡색(雜色) 무리도 모두 왜적에게 항복하였다. 그리하여 저자를 벌이고 물자를 교역(交易)하기를 평시와 다름없이 하였다. 날마다 왜적들과 술자리를 벌이고 서로 방문하고 도박도 하였다.

더욱이 통분(痛憤)한 것은 대가(大駕)가 막 성문을 나섰고, 왜적은 채 입성(入城)하기도 전인데, 성안 사람이 궐내에 다투어 들어가서 내탕 부고(內帑府庫)에 있던 재물을 서로 탈취(奪取)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세 궁궐(경복궁ㆍ창덕궁ㆍ창경궁) 및 육부(六部), 크고 작은 관청에다 일시에 불을 질러 연기와 불꽃이 하늘에 넘쳐서, 한 달이 넘도록 계속해서 불탔다. 그들의 심사를 살펴보면 흉적(凶賊)의 칼날보다 더 참혹하였으니, 매우 두렵다.

그후 중국 군사가 압록강을 건너와서 평양에 있던 왜적이 섬멸(殲滅)되니, 왜적들은 저희들의 형세가 어려워짐을 스스로 깨닫고 물러가려고 사방 성문을 모두 닫고, 오직 숭례문(崇禮門) 하나만 열어두었다. 그리고 밤중에 분탕질하면서 성안의 늙은이 젊은이를 몰아다가 죽였으므로 죽음을 면한 자가 거의 없었다. 그 중에 요행으로 빠져나온 자는 도리어 말을 요사스럽게 꾸며서, 전일에 도성에 남고 떠나지 않은 것은 우리 군사가 오기를 잠시 기다렸다가 내응(內應)하고자 해서였다고 하였다. 민정(民情)이 이랬다 저랬다 하여 헤아릴 수 없으니, 그 두려운 것이 또한 이와 같았다.

 

● 야인(野人.여진족)이 모든 모물(毛物)을 진상(進上)할 때에는, 반드시 소속 변장(邊將)에게 간품(看品) 받는데, 변장은 그 수량의 많고 적음에 따라 각각 거둬들이는 것이 있으니, ‘상납(上納) 인정(人情)’이라는 명목이었다.

서울에 오게 되면 각 해조(該曹)와 정원의 하리(下吏)에게도 또한 다 인정물(人情物)이 있었다. 정축년(1577, 선조 10) 겨울에 내가 나가서 양주 원 노릇을 하는데 나의 자식이 돌아가는 야인을 길에서 만나 동행하면서 묻기를,

“네가 진상한 것이 얼마이며, 어떤 것을 상으로 얻었느냐?” 하니 야인은,

“우리가 진상한 담비 가죽이 극히 좋았으므로, 당초 생각으로는 관직(官職)을 얻게 될까 기대했었는데 다만 상으로 포(布)를 받고 돌아왔소.” 하였다.

“어찌하여 관직을 받지 못하였는가?” 하고, 다시 물으니,

“인정 쓴 것이 모자랐던 까닭이오. 딴 사람은 다 주었는데 승지(承旨)에게는 주지 못한 까닭에 관직을 얻지 못한 것이오.”

하였다. 이 말은 반드시 정원 하리를 지목한 말일 것이다. 그러나 변장이란 자가 간품(看品)하면서 인정물을 직접 받았으므로, 저 사람들은 각 관청에 인정 쓰는 것은 모두 관원이 받았다고 여기는 것이다. 아! 우리 나라 인정 쓰는 폐단이 그 해(害)가 먼 지방 사람에게도 미쳐, 욕된 말이 조정 근시(近侍)의 반열에까지 이르니, 애닯구나.

 

● 성종 때에 손순효(孫順孝)는 아주 융성한 은총(恩寵)을 받았다. 관동 방백(關東方伯)으로 나갔는데, 하루는 서울에 들어와서 숙배(肅拜)하게 되었다. 성종은 편전(便殿)에 납시어 인견(引見)하고 술을 내리고 조용하게 서로 말을 주고받기를 오랫동안 하다가 파하였다. 손순효가 그날로 하직하고 돌아갔는데, 양사(兩司)는 손순효가 번신(藩臣)으로서 소명(召命)이 없었는데도, 마음대로 서울에 올라왔다 하여 그를 파직시켜, 무례한 죄를 징계할 것을 청하였다. 성종은 편전에 양사 관원을 불러 술을 내리면서 묻기를,

“오랫동안 탑전(榻前)을 떠나 있으면서 그 임금이 그리워서 와서 보고 갔다. 이것은 인신(人臣)으로서 지극한 정인데, 이와 같이 논하니, 죄의 가볍고 무거움은 나로서는 모르겠으니, 모름지기 밝혀라.” 하니, 양사 관원은 어쩔 줄 몰라하며 물러났다.

 

● 순회세자(順懷世子.명종의 아들로 세자였다가 요절함) 때에 사부(師傅)와 빈료(賓僚)로서 나와서 뵙는 자가 모두 신(臣)이라 일컫지 않았다. 새로 제수(除授)된 관원이 동궁에게 사은(師恩)할 때에도 신이라는 글자는 쓰지 않았다. 순회 때에만 그랬던 것이 아니고, 인종이 동궁에 있을 때에도 예가 또한 그러하였다. 무릇 춘방(春坊) 관원으로서 동궁의 신하라 하지 않고 궁료(宮僚)라 하는 것은, 대개 위에 군부가 계시므로 나라에 두 지존(至尊)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지금 나라가 결딴이 난 나머지 집정자(執政者)가 조종(朝宗) 여러 대를 계속해서 준행(遵行)해 오던 법규를 강구(講究)하지 않고 다만 《오례의(五禮儀)》의 ‘신이라 칭한다[稱臣]’는 조문에만 의거하여 그 예법을 갑자기 바꾸어 버렸다. 무릇 나와 뵈옵는 관원은 반드시 신이라 일컫고, 사은하는 단자(單子)와 문서에도 모두 신이라는 글자를 쓰게 되었다. 대개 기묘 제현(己卯諸賢.조광조 등 기묘사화에 관련된 여러 신하들)이 예법 조문을 강구하여, 잘못하거나 빠뜨린 것이 없었다. 그들도 《오례의》에 신이라 일컫는 조문이 있음을 모르지는 않았을 터인데, 그때에는 신이라는 글자를 쓰지 않았다. 논의를 고쳐 정할 때에 반드시 정설(定說)이 있었을 텐데 지금엔 얻어 볼 수 없으니, 어찌 한스럽지 않겠느냐?

 

● 남사고(南師古)는 울진(蔚珍) 사람으로 여러번 향시(鄕試)에 합격하였고, 음양(陰陽)의 여러 가지 방서(方書)에도 능통하였으며, 천문(天文)과 망기(望氣)하는 술법도 잘 알았다. 조정에서 불러서 동반직(東班職)에 제수하였으나, 6품으로 승진하지 못하고 서울 집에서 죽었다. 일찍이 말하기를, “원주(原州) 동남쪽에 왕기(王氣)가 있다.”

하였는데, 사람들은 모두 믿지 않았는데, 임진년 여름에 광해군(光海君)이 왕세자가 된 다음에야 그의 말이 증명되었다. 대개 공빈(恭嬪)의 부모와 그의 선대가 살던 곳이, 원주에서 동남쪽으로 1사(舍 30리) 되는 지역인 손이곡(孫伊谷)이었고, 그들의 무덤도 모두 그곳에 있었다. 이때에 와서 사람들이 비로소 그의 술법이 정묘(精妙)함에 탄복하였다.

 

● 연산군이 정사를 어지럽혀 극도에 이르자, 박원종(朴元宗)ㆍ성희안(成希顔)ㆍ유순정(柳順汀) 세 대장이 성씨가 다른 경대부(卿大夫)로서, 이윤(伊尹)ㆍ곽광(霍光)이 한 일(반정을 뜻함)을 행하여, 광포(狂暴)한 사람을 폐하고 성왕(聖王)을 세워서,중종 40년 동안의 태평한 치적을 이루어 사직에 공업(功業)을 세우고, 명성이 후세(後世)에까지 드리웠다. 세 사람 중에서도 성희안은 더욱 문신(文臣)으로서 세상 사람에게 존중을 받았다. 그러나 성희안은 연산군의 후궁(後宮)을 첩으로 삼아 데리고 살았다. 아! 임금이란 하늘이다. 하늘을 피할 수 있을 것인가? 섬기던 임금이라도 나라를 망치게 하면 종묘사직을 위하여 그만 두게 할 수밖에 없는 일이지만, 그 일신으로는 만고에 불행한 변고인 것이다. 그런데 도리어 그 임금의 후궁을 첩으로 삼았으니, 이런 일을 차마 할 수 있다면 무슨 일인들 차마 하지 못하랴? 성희안이 성취한 공이 그리 작은 것은 아니지만, 지은 죄는 천지에 가득하다. 이런 무리와 함께 임금을 섬길 것인가? 저 따위라니. 저 따위라니.

 

● 용만(龍灣.의주)은 강 하나가 띠[帶]처럼 서로 막고 있어, 여기에서 서쪽은 말이 통하지 않으므로 귀머거리나 소경과 같아 보통 하는 말이라도 반드시 역관(譯官)에 의탁해야 된다. 요동은 본디 고구려 땅이었다가 당(唐) 나라 정관(貞觀.연호로 627~649) 말에 중국으로 들어가 버렸으니, 그 전에는 반드시 우리 나라 말을 능히 했을 것이다. 이것은 우리 나라도 중국말을 잘하지 못할 리가 없고 다만 오랫동안 익숙해지다 보니 그렇게 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 심하역(深河驛) 서쪽과 마파하(馬坡河) 동쪽에 유관(渝關)이 있는데 바로 송(宋) 나라가 요금(遼金)과 서로 쟁탈(爭奪)하던 곳이다. 금(金) 나라가 차지하면 철마(鐵馬)와 견갑(堅甲)으로 멀리 휩쓸 수 있고, 송 나라에서 빼앗기면 평주(平州)ㆍ난주(灤州) 등 고을을 지켜내지 못한다. 사람들은,

“진시황(秦始皇)이 몽염(蒙恬)을 시켜, 장성(長城)을 쌓으면서 유관을 한계로 하였다.”

하나, 이것은 전혀 그렇지 않다. 다만 성터로 볼 만한 곳이 없을 뿐 아니라 또한 관문(關門)을 만들어서 한계로 할 만한 곳도 아니다. 삼차하(三叉河) 동쪽을 요동이라 하는데, 유관에서 삼차하까지는 거의 8백여 리가 된다. 장성이 만약 유관까지였더라면 《사기(史記)》에 반드시 ‘임조(臨洮)에서 시작하여 요동에 이르렀다.’라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지역의 형세를 보고 나의 의견을 간추리면, 몽염이 석문령(石門嶺)을 한계로 한 것이 틀림없을 듯하다. 어떤 이는,

“진시황이 한번 포거(鮑車)에 오른 뒤에 부소(扶蘇.진시왕의 장자)가 죽음을 당했고 몽염(蒙恬.장수이름)이 칼을 받았으니, 준공(竣功)이 되기 전에 벌써 살해된 것이다. 그러면 유관과 석문령이 모두 당시에 역사(役事)를 미처 마치지 못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하기에 나는,

“《사기》 및 여러 가지 서적(書籍)에는 모두 성 쌓던 역사를 철회했다는 말이 없다. 그리고 조고(趙高)가 몽염을 죽일 때에 오히려 준공을 제때에 못한 것을 죄로 삼았다. 이세(二世)의 말년에 와서도 오히려, 여좌(閭左.땅 이름)의 백성을 일으켜서 어양(漁陽) 수자리에 가게 하였으니, 그 당시에 끝내지 못한 역사가 어찌 있겠느냐?” 말했다. 어떤 이는 또,

“진시황이 백성에게 해를 끼친 것이 극도에 달했지만, 지금까지 장성(長城)의 덕을 보고 있다. 만약 도(道)가 있어 사방의 오랑캐가 잘 지켜준다면, 성이 있고 없고는 따질 것이 없으리라. 그러나 만약 영구히 다스리지 못하고, 몹시 어수선해진다면 3리 되는 성과 7리 되는 외성[郭]도 오히려 삼가 지켜서 난폭한 사람을 막아야 하는데, 하물며 화외(化外)에 있는 천교(天驕.흉노)의 사납고 거친 것들이야 요해처(要害處)에 방어 시설(防禦施設)을 하고 막아내지 않을 수 있겠느냐? 한 시대 사람을 수고롭게 하여, 만세(萬世)의 백성을 편하게 하였음은 하늘의 뜻이라 하니할 수 없다. 시황이 비록 포악하고 패려함이 심하다지만 어찌 능히 하늘을 어기면서 이런 거창한 역사를 완성하였으랴?“ 한다. 그 말이 이치에 근사하기에 우선 적어두는 바이다.

 

● 김안로(金安老)는 폐출(廢黜)되어 풍덕(豐德)에 살고 있었다. 민수천(閔壽千)이 북경(北京)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김안로를 찾아보고,

“영공(令公)이 뛰어난 재주로써 연세도 아직 높지 않은데, 조정에 돌아가지 않고 여기에서 마치시려고 합니까?” 하니, 김안로는 다가앉으면서 넌지시 말하기를,

“조정으로 돌아갈 뜻이 어찌 없으리오. 다만 그 길을 얻지 못하였소.” 하니, 민수천은

말하기를, “지금 세 허씨(許氏)와 두 심씨(沈氏)가 국론(國論)을 잡고 있으니, 만약 이 사람들이 끌어준다면 조정에 들어가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이는 허항(許沆)ㆍ허흡(許洽)ㆍ허확(許確)과 심언경(沈彦慶)ㆍ심언광(沈彦光)을 말한 것이었다. 김안로가, “세 허씨와 두 심씨가 하고 싶어하는 것은 어떤 일인가?”

하고 묻자, “기묘 제현(己卯諸賢)의 원통함을 풀어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이리하여 김안로는 조정 논의가 지향(指向)하는 바를 자세히 알고 그후부터는 남을 보면 반드시, 기묘 제현의 원통한 일을 풀어주지 않아서는 안 된다는 뜻을 크게 말했다. 그리고는,

“내가 만약 조정에 돌아간다면 어찌 이와 같이 어물어물 세월만 보내고 말겠는가?”

하였다. 허항 등이 이런 소문을 듣고 자기들의 뜻이 같으니, 김안로를 의지해서 일을 성취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를 성원하고 싶었지만 명분을 만들기가 어려웠다. 김안로의 아들 연성위(延城尉)는 인종의 매부(妹夫)였으므로 동궁을 보도(輔導)한다는 핑계로 말을 만들어, 힘껏 성원하였다. 그런데 김안로가 조정에 들어오자, 전일에 한 말을 뒤집어 기묘 제현의 죄를 더욱 꾸며댔다. 허(許)와 심(沈) 등은 이미 그 당파에 들어가 도리어 김안로의 부리는 바가 되었다.

그래서 혹은 매와 개[鷹犬] 노릇을 하고, 혹은 발톱과 어금니[爪牙]가 되어 조정의 기강은 어지러워지고 나라의 형세도 위태로워졌다. 다행히도 태평할 운수가 열려서, 간신(奸臣)이 죄를 입게 되어 세 허씨와 두 심씨도 혹은 내침을 당하고 혹은 참형(斬刑)을 받았으며, 민수천도 역시 죽은 뒤에 관직을 삭탈당하는 형을 받았다. 소인(小人)이 틈을 타서 진출(進出)하기를 구하는 기미(機微)가 처음에는 아주 하찮은 일이었으나, 악인끼리 서로 결탁하여 돕는 화가 이 지경에 이르니, 매우 두려운 바이다.

 

● 목은(이색)이 우연히 지은 시가 있다.

 

현릉(공민왕)의 장상이 몇이나 남았는고 / 玄陵將相幾人存

벽상의 도형 또한 침침하구나 / 壁上圖形赤已昏

병 많은 목은은 벼슬 그만두었고 / 多病牧老頻任已

지금의 정사는 송헌 홀로 맡았네 / 至今經濟獨松軒

 

송헌(이성계)의 충의 하늘에 닿으니 / 松軒忠義薄雲天

한의 강후 당의 양공과 어깨 겨루리 / 漢絳唐梁與比肩

태평한 참 기상을 알고 싶거든 / 欲識太平眞氣像

문 닫고 베개 베고 단잠 자노라 / 閉門高枕得安眠

 

단잠 자며 내 이미 무위함을 기뻐하니 / 安眠喜我已無爲

뜬 구름같은 세상 공명 생각 끊었네 / 浮世功名絶不思

다만 한 되는 건 평소의 버릇 남아 / 只恨多生餘習在

때때로 흥이 나면 시를 짓는 것 / 時時寓興卽題詩

 

● 목은이 스스로를 읊조린 시가 있다.

 

이 늙은이 신장은 안영 같지만 / 老翁身似晏嬰長

비파 밀치니 증점처럼 뜻이 크구나 / 舍瑟還同點也狂

돌아감 청했으나 어디로 가리 / 縱得乞歸何處去

복사꽃 흐르는 물 아득하기만 하여라 / 桃花流水渺茫茫

 

자사가 당일에 중용을 지으시고 / 子思當日作中庸

극구 칭찬했네 그 조부의 풍도를 / 極口稱揚乃祖風

대대로 아름다운 건 한산의 문자인데 / 世美韓山文字耳

지금엔 시구도 잘 짓기 어려워라 / 只今詩句尙難工

 

● 목은의 ‘실인(室人)’을 읊은 시가 있다.

 

젊어서는 벼슬하느라 하늘가에 떨어져서 / 少年遊宦各天涯

꿈 속에 서로 만나 그리움을 나누었소 / 夢裏相逢話所思

오늘도 전날과 같은 줄을 어이 알리 / 今日那知是前日

마음이야 기쁘지만 또 한편 의심되오 / 縱然心喜又心疑

 

● 또 사물을 대하여 지은 시가 있다.

 

전 자로 된 창이 구 자 뜰에 닿는데 / 田字窓臨口字庭

조석으로 밥 짓는 연기 빈청에 가득하네 / 炊煙朝暮鎻虛廳

문에 나서서 긴 휘파람 불 만하구나 / 出門可是舒長嘯

눈앞의 관악산이 각별히 푸르러 / 滿眼冠山分外靑

 

● 점필재(佔畢齋.김종직)가 영해부(寧海府)를 지나다가 목은을 회상하여 지은 절구(絶句)가 세 편이 있다.

 

무가보 뜰 가운데 화씨의 구슬이요 / 無價庭中和氏璧

관어대 아래 북해의 곤어였네 / 觀魚臺下北溟鯤

소매 흔들며 연ㆍ계 지방 놀고부터는 / 自從擺袖遊燕薊

운몽호(雲夢湖)도 시시해서 삼킬 것이 못 되었네 / 雲夢區區不足吞

 

창해라 동쪽 끝에 선비를 몰라 / 滄海東頭不識儒

천 년의 간기(천지간에 뻗은 기운)가 다만 괴소였네 / 千年間氣只塊蘇

선생이 한번 나매 사람의 상서 되어라 / 先生一出爲人瑞

이로부터 단양엔 초목도 시들어지리 / 從此丹陽草木枯

 

사우의 연원이 전후에 뛰어나서 / 師友淵源絶後前

청구의 인물을 다 키워내셨네 / 靑邱人物盡陶甄

지금에야 비로소 즐기시던 곳 지나니 / 如今始過軒渠地

동시에 태어나 채찍 잡지 못함이 한스러워라 / 恨不同時執一鞭

 

● 고려 공양왕(恭讓王) 때에 왕방(王昉)과 조반(趙胖)이 명(明) 나라에서 돌아가 말하기를,

“예부(禮部)에서 신등을 불러, ‘너희 나라 사람 파평군(坡平君) 윤이(尹彛)와 중랑장(中郞將) 이초(李初)가 황제(皇帝)에게 나와서 호소하기를, 「고려 이 시중(李侍中)이 왕요(王瑤)를 임금으로 세웠으나, 왕요는 종실(宗室)이 아니고 인친(姻親)입니다. 그리고 왕요는 이 시중과 더불어 군사를 일으켜서 상국(上國)을 위태롭게 하려 하므로, 재상 이색(李穡) 등이 옳지 못하다고 하다가 곧 모두 죽음을 당하고 귀양도 갔습니다. 귀양간 재상 등이 우리를 보내, 천자에게 알리는 것입니다.」하고 이어 천하의 군사를 일으켜서 토벌하여 주기를 청하였다.’는 것입니다.”

하고, 이어 윤이왕 이초가 기록하였다는 성명(姓名)을 내어보였다. 이리하여 대간(臺諫)에서 윤이ㆍ이초의 당(黨)을 문초하게 하는 한편, 이색등을 청주(淸州) 옥에 가두고 문하 평사(門下評事) 윤호(尹虎) 등을 보내서 문초하게 하였으나 여러 죄수는 모두 자복(自服)하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뇌성과 비가 크게 일고 앞 냇물이 급히 넘쳐 남문을 휩쓸고 바로 북문을 덮쳤다. 성안에 물 깊이가 한 길이 넘고 관사와 민가가 거의 다 떠내려가고 잠겨버렸다. 객사(客舍) 앞에 은행나무 수십 그루가 있었는데, 옥관들은 허둥지둥 나무를 부여잡아 죽음을 면하였다. 이 일이 알려지자, 왕이 교서(敎書)를 내려 석방하였다.

권 양촌(權陽村.권근)은 이런 시를 지었다.

 

떠도는 말이 불행하게 주공에게 미치니 / 流言不幸及周公

갑작스러운 큰 바람에 좋은 벼 쓰러졌도다 / 忽有嘉禾偃大風

듣건대 서원에 홍수가 넘쳤다니 / 聞道西原洪水漲

천도는 고금이 같음을 알았노라 / 始知天道古今同

 

김자수(金自粹)가 한산(韓山)을 제목으로 읊조렸다.

 

동국 문장을 집대성한 이로 / 東國文章集大成

가정(이곡) 부자가 뭇 인재 중 첫째였네 / 稼亭父子冠群英

산천의 빼어난 정기 지금도 예와 같은데 / 山川孕秀今猶古

묻노니 어떤 이가 그 성명을 이을런고 / 且問何人繼姓名

 

조계생(趙啓生)이 그 시를 차운(次韻)하였다.

 

산은 곰나루를 끼고서 첩첩이 서 있는데 / 山傍態津疊嶂成

마침내 이씨가 그 영기를 받았구나 / 終敎李氏稟其英

부자가 과거에 오른 후부터 / 自從父子登科後

이 고을 이름을 천하가 다 알았네 / 天下皆知此邑名

 

‘뽕잎 먹는 누에소리[食葉蠶聲]’에 대한 시로,

푸른 나무 그늘 속에 가을비 뿌린다 / 綠樹陰中洒秋雨

 

‘솜 타는 활소리[彈綿弓響]’에 대한 시로,

흰 구름 무더기 속에 봄 우뢰가 동한다 / 白雲堆裏動春雷

 

라는 것을 세상에서 어무적(魚無迹)의 시라 전해 온다. 비록 전해 오는 말이 옳은지는 지금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참으로 소리 있는 생생한 그림이라 할 수 있다.

세상에 전해 오는 시가 있다.

 

밭 가는 소에겐 밤 넘긴 풀 없는데 / 耕牛無宿草

광에 있는 쥐는 남은 양식 있구나 / 倉鼠有餘糧

만 가지 일에 분수 정해 있는데 / 萬事分前定

덧없는 인생 스스로 바빠하네 / 浮生空自忙

 

이것이 어떤 사람의 시인지 알 수 없으나, 또한 재물을 탐내기에 급급하여 분수를 지키지 않는 자에게는 경계가 될 만하다.

 

● 고려 말엽에 시승(詩僧) 선탄(禪坦)이 어느 날 새벽에 송경(松京) 동쪽 성문 밖을 지나다가 닭소리를 듣고 시를 지었다. 그 시의 끝 연구(聯句)에,

 

천 마을 만 부락이 다 꿈속인데 / 千村萬落同昏夢

꼬리 빠진 수탉은 때를 잃지 않는구나 / 斷尾雄鷄不失時

 

했다. ‘꼬리 빠졌다[斷尾]’는 것은 선탄이 자신을 비유한 것이다. 나라가 장차 망할 참인데, 여러 사람이 능히 알지 못함을 탄식한 것이었다.

 

● 진사 조욱(趙昱)은 자는 경양(景陽), 호는 보진암(葆眞庵)인데, 만년(晩年)에 용문산(龍門山) 밑에 집을 짓고 용문거사(龍門居士)라 하기도 하였다. 능란한 문장과 조촐한 절조로써 한 세대에 훌륭한 인사였다. 조정에서 특별히 발탁하여 보은 현감(報恩縣監)으로 삼았으나, 부임한 지 오래지 않아 곧 병을 핑계하고 돌아왔다. 일찍이 원성(原城) 노 처사(盧處士)를 방문했다가 만나지 못하고 시를 지었다.

 

경장천 냇가에 해가 질 무렵 / 慶莊川上日斜時

문앞에 말 세우고 목동에게 물었더니 / 立馬門前問牧兒

주인은 서울 갔다 알려주누나 / 報道主人京洛去

온 하늘 풍월인데 시 못 지음이 한스러워 / 一天風月恨無詩

 

● 선조(先祖) 양경공(良景公) 이종선(李種善)은 목은의 막내 아들인데, 무덤이 한산(韓山) 고을 목은 무덤 아래 있다. 성종이 폐비 윤씨(廢妃尹氏)에게 사약(死藥)을 내릴 때에, 공의 손자 이파(李坡)가 예조 판서로 있었다. 연산군이 당시의 재상과 언관(言官)의 죄를 물을 때에 이파는 벌써 죽어 관을 쪼갬[剖棺]을 당했고, 공도 또한 연좌(緣坐)되어서 무덤을 허물려서 평평하게 되었다가 중종이 반정(反正)한 후에도 오랫동안 봉분(封墳)을 쌓지 못하고 있었다. 좌의정(左議政) 이유청(李惟淸)은 양경공의 형 이종학(李種學)의 증손이니, 공에게는 종손(從孫)이 된다. 하루는 일찍 서울 집에 달려와서 봉화(奉化) 원을 지낸 나의 증조(曾祖) 이장윤(李長潤) 공에게 묻기를,

“꿈에 의젓한 어른이 말하기를, ‘집이 부서져서 비가 새어도 자손이 재력(財力)이 모자라서 수리하지 못하는데, 문중(門中)에 오직 그대만이 할 수 있으니, 보살펴 주기를 바란다.’고 하였습니다. 꿈을 깨고 보니, 나도 모르게 등에 땀이 젖었습니다. 우리 문중에 반드시 변을 겪은 뒤에 미처 하지 못한 일이 있을 것이므로, 감히 와서 아뢰는 것입니다.”

하였다. 봉화 어른께서 양경공의 무덤이 허물어진 뒤에 여러 해가 되도록 복구하지 못한 사유를 자세하게 말하니, 상공(相公)은 크게 놀랐다. 드디어 함께 힘을 합쳐 흙을 보태어서 봉분을 만들었다.

 

● 연산 무오년(1498)에 사화(士禍)가 크게 일어나서, 김일손(金馹孫) 등을 죽였다. 그후에 연산군은 명문(名文)을 짓는 선비를 이미 잃었으니 이를 대신할 사람을 구해야만 한다고 하여, 드디어 서울에다가 유생(儒生)을 크게 모아 시험을 치러 뽑았는데, 전시(殿試)에 책문(策文) 한 가지만 짓게 하였다. 과차(科次.과거에 급제한 사람의 차례)를 정하는 참인데, 한 시권(試券)은 말 꾸민 것이 졸렬하고 껄끄러워 집필관(執筆官)이 차등(次等 4등임)으로 정하려 하였다. 상고관(上考官)은 삼하(三下.차상 차중 차하 3등중 셋째 등급)에 들 만하다 하였으나, 집필관이 인정하지 않았다. 상고관은 계속 우겼고 고시에 참여한 여러 관원은,

“만약 이런 것을 입격(入格)시키면 반드시 과방(科榜)에 오르게 될 것이니, 참으로 불가하다.”

하여, 서로 옥신각신하였다. 상고관이 삼하로 정하도록 강압하자, 집필관은 분이 나서 붓을 휘둘러 가로 세 획을 그은 데다가 바로 획을 내리긋고 점을 찍은 다음 나가버리니, 실제로는 이하(二下.2등중 셋째급)가 되어버렸다. 고사(考査)하기를 마친 후에 등수를 갈라서 서계(書啓)하자, 연산군은 2등에다 낙점(落點)하였다. 훌륭한 문장과 뛰어난 글씨로 삼상(三上)에 입격한 자는 모두 떨어지게 되었고, 다만 김극성(金克成) 등 6인이 뽑혔다. 그릇 이하(二下)로 적힌 자는 횡성 훈도(橫城訓導) 오희증(吳希曾)의 글인데, 말등(末等)에라도 참여하게 되었으니, 어찌 운명(運命)이 아니냐?

 

● 정소종(鄭紹宗)이 젊었을 때, 꿈에 한 노인이 정소종의 손바닥에다,

 

우임금 발자취 있는 산천 밖이요 / 禹跡山川外

우 나라 뜨락의 새와 짐승 사이다 / 虞庭鳥獸間

 

라는 시구를 적었다. 소종은 그 시구를 기억하여 두고 잊지 않았다. 연산군 갑자년(1504) 겨울에 특별히 전시(殿試)를 보이는데, 칠언율시(七言律詩)로 하였다. 그 글제는, ‘봄에 이원(梨園)을 개방하고 한가롭게 기악(妓樂)을 본다.’라고 하였는데, 연산이 직접 낸 것이다. 정소종은 홀연히 젊었을 때 꿈에 본 노인의 시구가 떠올라 각각 두 자씩을 보태어, 글귀를 지었다.

 

봄은 우임금의 발자취가 있는 산천에 무르익고 / 春濃禹跡山川外

풍악은 우 나라 뜨락 새와 짐승 사이에 울린다 / 樂奏虞庭鳥獸間

 

그때 김 모재(金慕齋.김안국)가 고시관(考試官)으로 참석하였다. 상고관이 정소종의 글을 하등(下等)으로 정하려 하였으나 모재가 이것은 실로 귀신의 말이라고 크게 칭찬하여, 드디어 상등으로 정했다. 그런데 최세절(崔世節)이 다른 시구와 통산[通算]하여 장원이 되고, 정소종은 넷째로 되었다. 과방(科榜)이 발표된 후에 정소종이 은문(恩門.과거 급제자가 시관을 일컫는 것)으로서 모재를 가서 뵙자, 모재는 시상(詩想)이 여기까지 미치게 된 것을 물었다. 정소종이 젊었을 때 꿈을 꾼 일을 자세히 말하였더니, 모재는 더욱 경탄(驚歎)하였다. 모재의 글을 알아보는 명성이 이로부터 나타났다.

 

● 상공(相公) 안당(安瑭)은 평소에 자라 먹기를 좋아하여 가끔 삼강(三江) 어부(漁夫)에게서 구해 오고, 또한 공이 즐긴다는 말을 듣고서 가지고 와서 드리는 사람도 있었다. 공이 화(禍)를 당하기 전에, 동전(銅錢)만한 작은 자라가 행랑 마루 안팎 뜰에 헤아릴 수 없이 흩어져 다녀 다 쓸어낼 수 없어, 뜰에 독을 두고 집어넣었다가 가득 차면 독을 져다가 강물에 놓아주었다. 그런 후 겨우 1년이 되자, 공의 아들 안처겸(安處謙)이 무함을 받아 죽음을 당했고, 공도 또한 연좌되어 죽었으니, 화가 난 것이 자라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지만, 또한 자라의 요변(妖變)이라 하겠다. 그의 집은 소격동(昭格洞)에 있었고, 무과(武科) 이승종(李承宗)이 살았는데, 임진년 난리에 왜적이 불태워 버렸다.

 

● 무과 조현범(趙賢範)이 경주 부윤(慶州府尹)이 되었는데, 부엌에서 아침 저녁으로 올리는 것이 자라탕이었고, 공도 또한 그것을 즐겼다. 한번은 어부가 3~4일 이 지나도록 자라를 바치지 않자, 부엌일을 맡은 아전이 공에게 알려 공문을 띄워서 재촉한 다음에 큰 자라 세 마리를 가지고 왔다. 공은 자라목을 새끼로 잇달아 묶어, 부엌일을 맡은 아전에게 주고 내일 올리도록 하였다. 그날 밤에 꿈을 꾸었는데, 칼[枷]을 쓴 죄수(罪囚) 세 사람이 한 소장(訴狀)으로 호소하기를,

“당초에는 우리 무리가 참으로 번성하였는데, 본디 죄과(罪科)도 없이 날마다 죽음을 당한 지 이제 30여 년이 되었고, 이제 우리 세 사람도 또한 잡혀 갇히게 되어, 북쪽 청사 마루 밑에 엎드려 있습니다. 총명하신 부윤께서는 용서하시길 바랍니다.”

하는 것이었다. 공은 꿈에서 깨어, 곧 형리(刑吏)를 불러서 문틈으로 물었다.

“같은 죄로 잡혀서 갇힌 자가 누구누구인가?” 하니, 형리는,

“갇힌 사람 중에 같은 죄를 지은 사람은 없습니다.”

하였다. 공은 다시 부엌일을 맡은 아전을 불러서 세 마리 자라가 있는 곳을 물었다. 부엌일을 맡은 아전은, “관청 광 안에 두었는데, 없어져서 지금은 간 곳을 모릅니다.”

하였다. 공이 북쪽 청사 마루 밑을 찾아보게 하였더니, 목 묶인 세 마리 자라가 과연 그 밑에 있었다. 공은 크게 놀라며 괴이하게 여겨, 곧 건장한 아전을 어부들이 있는 곳에 달려 보내어, 이제부터 다시는 자라를 잡지 말 것이며, 비록 잡히는 것이 있더라도 모두 놓아주게 하였다. 관아(官衙)에 있는 세 마리 자라는 공이 직접 가서 강에 놓아주고, 이날부터 다시는 자라를 먹지 않았다.

 

● 무주(茂朱.무주는 지명으로, 무주 원님을 나타내는 것) 윤명은(尹鳴殷)은 집이 흥인문(興仁門) 안 동학(東學) 근처에 있는데, 문간 뜰에 늙은 홰나무가 있었다. 윤명은이 벼슬하기 전에 한번은 사정(射亭)에 있는 친구 집에 걸어서 갔다가, 술을 너무 마시고 흠뻑 취하여 날이 어두워서 홀로 돌아오다가 길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술이 깨어 머리를 들어보니, 달은 지고 별은 엉성한데 고요하게 사람 소리가 없었다. 다만 남자 한 명이 자신이 누워 있는 곁에 앉아 있는 것이 보였으나 윤명은은 감히 성명을 묻지 못하였다. 술이 덜 깨어서 느린 걸음으로 돌아오는데, 그 남자도 뒤따라오는 것이었다. 길에서 어떤 사람이 그 남자와 만나 서로 말하는데, “어디를 갔었는가?” 하자, 남자가, “주인이 밤 늦도록 돌아오지 않아, 가서 맞아 온다.”

하는 것이었다. 자기 집 홰나무 밑에 와서 보니 보이지 않았다. 그때서야 비로소 그 남자가 뜰에 있는 홰나무의 신(神)임을 알았다.

 

● 병술년(1586) 겨울에 여강(驪江)에서 어부가 얼음을 깨고 잉어 한 마리를 잡았는데 크기가 두어 자나 되었다. 짊어지고 집에 돌아왔더니, 그날 밤에 고기가 주인의 꿈에 나타나,

“부디 나를 놓아주고, 해를 끼치지 말라.”

는 것이었다. 주인은 괴이하게 여겨 삶아 먹지 않고, 이웃 사람에게 팔아 버렸다. 이웃 사람의 꿈에도 또한 그러하였으나, 이웃 사람은 놓아주지 않고 마침내 잘라서 삶았다. 그런데 그 국을 한 종지라도 맛을 본 사람은 누워 앓지 않는 이가 없었고, 6~7일이 지난 다음에야 비로소 일어났다. 아! 고기의 신이 능히 어부의 꿈에 급한 신세는 알리면서도, 얼음 밑의 낚시바늘은 피하지 못하였고, 또 국 먹은 사람에게 병을 줄 줄은 알면서 식탐 있는 사람에게 삶김은 능히 면하지 못하였으니, 이것은 신으로서도 궁(窮)한 바가 있고 지혜로는 미치지 못함이 있어서 그런 것인가? 안쓰럽구나.

 

● 송강사(松江寺) 돌비[石碑]에 이런 시가 있다.

 

비기를 서로 전해 9백 년인데 / 秘記相傳九百年

앞 사람은 벌써 갔고 뒷사람에게 옮겨지네 / 前人已去後人遷

삼도 한낮에 여우와 토끼 오는데 / 三都白日來狐兎

오부 봄날에는 젓대와 거문고에 취하네 / 五部靑春醉管絃

신숭에 잎이 지니 차가운 비 내리고 / 木落神嵩寒泣雨

궁원에 풀이 나니 새벽 연기 자욱하네 / 草生宮苑曉生煙

황은은 너그러운 바다같이 깊어서 / 皇恩寬宥深如海

삼한을 두 번이나 온전하게 하였네 / 坐使三韓再得全

 

비석에 이 시가 있은 지가 오래되었는데 오늘에야 발견되었고, 또 누가 지은 시인지도 알 수 없으니, 매우 괴이한 일이다.

 

● 전라 감사(全羅監司)의 계본(啓本)에,

“광양 현감(光陽縣監)의 첩정(牒呈)에, 예전부터 쇠무덤[鐵塚]이라 부르는 곳이 있어 헤쳐 보았더니, 쇠붙이는 없고 다만 지석(誌石)이 있는데, 글자가 새겨져 있다는 것이었다. 그 내용은 ‘동쪽으로 15리쯤 되는 거리에 황금총(黃金塚)이 있는데, 이것을 발견하면 그 이익을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다만 자식이 아비를 업신여기고, 종이 주인을 업신여기고,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업신여기고, 중도 삿갓을 쓴다. 중이 속인(俗人)의 일을 하고 속인이 중의 일을 하며, 유생(儒生)은 붓과 벼루를 버리고, 베짜는 계집은 베틀과 북을 버리고, 농부는 쟁기와 보습을 버린다. 임진년에 나라가 셋으로 갈라졌다가 계사년에는 도로 안정되고, 오년(午年)ㆍ미년(未年)에는 태평하여진다. 두류산(頭流山)에 들어가서 피난하는 것이 제일이고, 호서(湖西)가 조금 편안하고, 여강(驪江)은 혈육이 낭자할 지역이다. 한양(漢陽)으로 환도(還都)하면 주(周) 나라 같이 8백 년을 지날 것이고, 중국 군사가 임진강(臨津江)을 건넌다면 주 나라보다 2백 년은 더할 수 있다.’ 하였습니다.”

한다. 대개 하늘이 인간을 사랑하는 것이 지극하다. 항상 편하게 보전코자 하건마는 오직 그 인사(人事)의 득실(得失)과 운수(運數)의 소장(消長)으로 감응(感應)하여 간혹 혼란하기에 이르기도 하나, 이것이 어찌 하늘의 본심(本心)이겠느냐? 지금 이런 말로써 본다면 국가의 다스려짐과 어지러움과 흥하고 망함이 모두 일정한 운수에 연유한 것으로써, 하늘도 또한 어찌할 수 없으며, 사람의 힘도 그 사이에 능히 용납되지 못하는 것인가? 괴이한 일이다.

 

● 세상에 전해 오는 말에, “어떤 사람이 남의 문간 벽에다 절구(絶句) 한 수를 적어놓고 갔다.” 하는데, 그 시에,

 

나는 신라의 말엽 사람 / 我是新羅末葉人

나이가 팔백 하고 다시 세 살이로세 / 年將八百又三春

바쁜 걸음에 비는 오고 돌아갈 길 멀어 / 行忙雨濕歸程遠

당신과 더불어 얘기하지 못하오 / 不與高門談笑然

 

그런데 사람들은, “최치원(崔致遠)이 지선(地仙)이 되어, 가야산(伽倻山)에 들어가서 지금까지 생존해 있는데, 이것은 반드시 고운(孤雲)의 시일 것이다.”

고 하였으나, 나는 고운의 시원스러운 문장으로써 반드시 이렇게 속된 시는 쓰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된다. 하물며 고운이 지금까지 생존했다는 것도 믿을 수 없으니, 이것은 미친 아이가 한번 희롱삼아 읊조린 데 불과한 것이리라.

 

● 중종조 정덕 연간(1505~1521)에 원역(院驛) 벽에 절구 두 수를 적은 것이 있었다.

 

비바람이 지난날 놀라게 하여 / 風雨驚前日

문명이 이때를 저버렸다오 / 文明負此時

외로운 지팡이로 우주에 노닐며 / 孤笻遊宇宙

시끄러움 싫어서 시마저 그만뒀네 / 嫌閙竝休時

 

새는 무너진 원 구멍을 엿보고 / 鳥窺頽院穴

중은 석양의 우물물을 긷누나 / 僧汲夕陽泉

천지를 집 삼는 길손 / 天地爲家客

건곤 어느 곳에 끝이 있던가 / 乾坤何處邊

 

세상에 전해 오는 말에,

“교리(校理) 정희량(鄭希良)이 연산 때에 갑자년의 화(禍)가 있을 줄 알고 몸을 빼쳐 가버렸다. 어떤 이는 ‘강에 빠져 죽었다.’ 하고, 어떤 이는 ‘중이 되어 구름처럼 떠돌아다녔다.’ 하는데, 이것은 정희량의 시이다.” 한다. 지금에 와서 비록 정말인지 아닌지는 알지 못하나, 또한 난을 피해 은둔한 자의 말이리라.

 

● 선조 가정(稼亭.이곡)께서 36세 때 원(元) 나라 조정에 들어가서 제과(制科.천자가 친히 시험 보이는 과거)에 이갑(二甲)으로 등과하였다. 가정 이전에는 동국(東國) 사람으로서 이갑으로 등과한 사람이 없었으므로, 중국 사람에게 칭찬을 받았다. 그리고 목은(牧隱.이색)이 27세 때에 제과에 응시하였는데, 고관(考官) 구양현(歐陽玄)이 크게 칭찬하고 장원으로 정하려 하였다. 그런데 그때 외국 사람이란 이유로 논란이 있어 억울하게 이갑 제이인(二甲第二人)으로 정해지고 말았다. 목은이 일찍이 말하기를,

“우리 부자(父子)가 중국 과거에 오른 뒤에, 천하가 모두 동국에 한산(韓山)이란 곳이 있는 줄을 알게 되었다.” 하였다. 그의 시에,

 

부자가 중국 과거 오른 후부터 / 自從父子登科後

천하가 이 고을 이름 모두 알게 되었네 / 天下皆知此邑名

 

라는 것이 이것이다.

 

● 원주(原州) 흥원참(興原站)은 왜노가 수로(水路)로 우리 나라에 왕래하는 곳으로, 참(站)에는 뱃사람 이일정(李一貞)과 사삿집 종[私奴] 원유공(元有功) 등이 있는데, 왜말을 잘 해서 왜인들과 서로 친하였다. 내가 이일정을 불러서,

“왜인이 쳐들어오는 이유를 너는 평소에 이미 알고 있었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어찌 몰랐겠습니까? 기축년 봄에 감사 정윤희(丁胤禧)가 체직되어 떠나는데, 도사(都事) 안중길(安重吉)이 따라왔습니다. 감사는 배로 건너고 도사는 우선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때 왜의 사신 평조연(平調淵)이 서울로 가면서 여기에 배를 대었습니다. 참정(站亭)에서 식사할 참인데, 반찬과 술과 안주가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았다는 것으로써 하인을 결박하여 땅에 넘어뜨렸습니다. 도사가 이 소식을 듣고 향통사(鄕通事)를 잡아가니, 왜의 사신은 크게 성을 내며, ‘관원은 각자 맡은 일이 있는 것이고, 우리들이 먹는 것은 국가 회계(會計)에서 빼주는 물건이니, 도사가 관여할 것이 아니다. 내가 정식대로 먹겠다는데, 도사는 자기일도 아니면서 이와 같이 업신여기오?’ 하며, 상을 밀치고 먹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나와 원유공을 부른 다음, 칼을 휘둘러 옆 사람들을 물리치고, 말하기를, ‘우리 나라가 너희 나라를 해치려고 하는 것은 우리 때문이 아니고, 오로지 너희 나라에 잘못이 많기 때문이다. 우리 나라에서 배를 만들고 칼을 주조하여 멀리 휩쓸어 버리려는 계획을 한 지가 벌써 30여 년이다. 명년에 우리 국왕의 사신이 나오면, 반드시 3~4년 이내에 군사를 크게 일으켜서 너희 나라에 들어올 것이다. 국왕의 사신이 나와서는 배와 사냥개 등 여러 가지 물건을 많이 청구할 터인데, 이것은 모두 너희 나라 형편을 정탐하려는 것이다. 우리 나라 형벌은 너희 나라 태장(笞杖)과는 다르다. 만약 잘못이 있으면 곧 작은 환도(環刀)로 목을 자르고 쟁반에 담아 여러 사람에게 보이므로 각자 힘껏 싸우니, 너희 나라에서는 당해낼 도리가 없다. 너희들은 만약 우리 군사가 바다를 건넜다는 소식을 듣거든 우리들이 갈 수 없는 곳으로 피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우리 나라 사람 중에는 착한 자도 있고, 악한 자도 있다. 착한 자를 만난다면 숨어 피하게 하여 해치지 않겠지마는 악한 자를 만난다면 보는 대로 곧 죽일 것이다. 내가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고 너희들을 위해 진심에서 하는 말이다.’ 하였습니다.

소인이 원유공과 함께, 비록 그 말을 믿지는 않았으나 또한 의심되는 바가 없지 않았습니다. 하루는 그 말을 목사(牧使) 김찬광(金纘光)에게 알렸더니, 목사는 ‘너는 어찌해서 망령된 말을 하느냐? 저들이 비록 그런 말을 하였다 하더라도, 꼭 온다는 것도 아니고, 비록 들어온다 하여도 어찌 우리 나라 군사를 당하겠느냐? 조심하고 다시는 말하지 말라.’ 하고 꾸짖었습니다. 그해 왜국에서 사신이 나와 매와 사냥개를 청구하였고, 오가는 길에 우리를 업신여기는 기세가 많았습니다. 그후 4년이 지난 임진년에 왜군이 바다를 건너와서 곳곳에 분탕질을 하였는데, 이들 중에 사람을 잘 죽이는 자도 있고, 죽이지 않는 자도 있어 평조연의 말과 꼭 같았습니다. 그때야 비로소 우리를 속이지 않았음을 믿게 되었습니다.” 하였다.

 

● 함경도(咸鏡道)는 야인(野人)과 이웃하여 있고 또 번호(藩胡)도 있어, 조정에서는 예부터 방어(防禦)하는 일을 중하게 여겼다. 그리하여 남북 병사(南北兵使)와 북도(北道)의 대소 수령(守令)은 모두 무부(武夫)를 가려서 보내는 것이 예(例)였다. 더구나 조정과는 아주 멀리 떨어져 있어 수령이 두려워하거나 꺼리는 것이 없이 오로지 가혹한 징수와 혹독한 형벌을 일삼았고, 백성을 초개(草芥)같이 여겼다. 그래서 백성도 또한 수령을 ‘낮도둑’이라 지목하여 원수같이 여겼다. 간혹 문관(文官)을 가려서 보내기도 하나 백성들의 기대에 걸맞는 사람은 아주 적었다.

북도 시골 사람으로 서울에 처음 온 자가 있었는데, 동소문(東小門)으로 들어와서 성균관(成均館) 앞길에 이르러서는 같이 온 사람에게,

“여기는 어느 고을 읍내(邑內)이기에 관사(官舍)가 이같이 높고 넓은가?”

하고 물으니, 같이 온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모르는가? 여기는 읍내가 아니라, 조정에서 ‘낮도둑’을 모아서 기르는 곳이다”

하였다. 이 말이 비록 너무 감정이 북받쳐서 한 말로 그 마음이 이해는 가지만 듣기에 또한 괴이하다.

 

● 기자(箕子)가 중국에서 유학(儒學)과 예악(禮樂)을 아는 사람 및 기예(技藝)에 능한 온갖 공인(工人)들을 3천여 명이나 거느리고 왔다. 상(商) 나라 문물(文物)을 다 거둬 동쪽으로 와서 평양에 도읍했던 것이다. 처음 왔을 때는 미개해서 머리털을 풀어 헤치고 있었고, 말이 통하지 않아 땅에다 글자 써서 비로소 뜻을 통할 수 있었다. 그들에게 보궤(簠簋)에 담아서 먹고, 변두(籩豆)에 담아서 제사(祭祀)지내도록 가르쳤으며, 살아있는자를 봉양(奉養)하게 하고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였으며, 남녀 혼인에도 모두 예절이 있었다. 여덟 조목의 가르침을 베풀고 인의(仁義)의 교화(敎化)를 일으켜 도둑이 화하여 양민(良民)이 되고, 오랑캐가 변하여 중화(中華)가 되었다. 그가 실시하였던 정전(井田) 제도는 유지(遺址)가 아직도 남아 있다. 지금 천여 년 동안에 동국 백성으로서 삼강 오륜(三綱五倫)을 알고 군신 부자(君臣父子)의 도리를 유지하여 금수(禽獸)와 같이 됨을 면한 것은 모두 기자의 교화이니, 비록 집집마다 그의 신위(神位)를 만들어서 축원하고 제사하여도, 그의 덕을 갚기에는 오히려 모자랄 것이다.

 

● 하늘에는 열 가지 날이 있고 사람에게는 열 가지 등급이 있으니, 위로 공경(公卿)에서 아래로 하인에 이르기까지 높고 낮은 차례와 귀하고 천한 분수는 천지의 떳떳한 의(義)로써 진실로 문란하게 할 수 없다. 우리 나라 공천(公賤)ㆍ사천(私賤)의 법은 실로 성왕(聖王)의 정사가 아니다. 다 같은 동포(同胞) 백성이건만 억지로 종으로 만들어서, 대대로 내려가며 천한 무리에 쓸어 넣어 사족(士族)에 참여하지 못하게 하니, 심히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런데 기자가 삼인(三仁.즉 비간,미자,기자)의 한 사람으로서 중국에서 나와 중국에도 없는 법을 만들었으니, 어찌 그만한 까닭이 없겠는가?

대개 동방은 산과 땅의 형세가 이리저리 꾸불꾸불하여 험하게 생겼고, 인심과 버릇이 억세고 간사하며, 법령(法令)을 잘 따르지 않고 이랬다 저랬다 하여 제어하기가 어렵다. 아침에 내린 명으로 저녁에 단속할 수 없고, 또한 사형으로 악을 징계할 수도 없었기 때문에, 간사한 도둑이나 장물을 탐하는 무리는 잡아다가 그 집 노예(奴隸)로 삼아, 각자 도맡아 다스리게 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좋게 변화시켜 대문을 닫지 않아도 되는 훌륭한 다스림을 이룩하여 이로부터 드디어 동방 대대로 바꾸어지지 않는 큰 법을 이루게 되었다. 집집마다 군신(君臣)의 의리가 있고, 사람마다 상하(上下)의 분의(分義)를 알았으며, 나라의 역적(逆賊)과 사가(私家)의 반노(叛奴)를 같은 법률로 다스렸다. 지금도 수천여 년을 그대로 따라 지켜서 바꾸지 않아 예양(禮讓)하는 후(厚)함과 형정(刑政)의 훌륭함이 다른 나라가 따르지 못할 바이다. 그런 까닭에 중국 사람이 모두 예의의 나라라 일컬었고, 혹은 작은 중화(中華)라고 지목하니, 이것은 중국과 같은 방법이 아니면서 결국 다스려진 것이었다. 지금에 와서 그 제도를 바꾸어 중국과 꼭 같이 하려는 자가 있으니, 이것은 정사가 풍속에 따라 변하고 풍속에 따라서 교화시키는 뜻을 모르는 것이다. 다만 크게 어지럽힐 뿐이니, 이를 시행해서는 안 된다.

 

● 우리 나라에서 인심과 풍속이 교활(巧猾)하여 교화시키기 어려운 곳으로는 반드시 호남(湖南)을 첫째로 삼는다 한다. 그러나 이 말은 덕 있는 사람의 말이 아니니, 만약 덕으로써 인도한다면 어찌 변화하지 않는 사람이 있겠는가? 다만 남방(南方)에 보통 있는 물건을 보더라도 산야(山野) 채소의 맛과 개울의 물고기와 과수원의 과일 모양이 모두 동북(東北) 지방의 것과 같지 않으며, 새ㆍ까치의 울음, 닭ㆍ개의 소리가 모두 앙칼지고 급하며, 집에서 기르는 돼지도 붉은 빛이 많고 고양이의 얼룩도 모두 어두운 청색이거나 회색이며, 흑백 바탕에 금색 얼룩무늬가 있는 것은 아주 없다. 도내(道內)가 모두 그러하니, 물색(物色)이 다른 지방과 다름이 이와 같으니, 매우 괴이하다.

 

● 우연히 진양산(陳兩山)이 기록한 것을 보았다.

“도척(盜跖)이 말하기를, ‘도둑질하는 데에 또한 도(道)가 있으니, 남의 방안에 있는 것을 의식하는 것은 성(聖)이고, 될지 안 될지를 아는 것은 지(智)이고, 먼저 들어가는 것은 용(勇)이고, 뒤에 나오는 것은 의(義)이고, 고르게 나누는 것은 인(仁)이다. 이 다섯 가지 도(道)가 없이 큰 도둑이 되는 자는 천하에 없다.’ 하고, 부자가 말하기를, ‘부자가 되고 싶거든 먼저 5적(賊)을 버리라. 5적을 버리지 않고 능히 부자가 되는 자는 천하에 없다. 5적이라는 것은 인ㆍ의ㆍ예ㆍ지ㆍ신(仁義禮智信)이다.’ 하였다. 도둑은 다섯 가지의 도를 보존하여 그들의 도둑을 이루려고 하고, 부자는 다섯 가지가 적이라 하여 꼭 버리고 부자가 되려 하니, 그렇다면 지금 큰 부자는 옛날 큰 도둑보다 심한 자들이다.”

하였으니, 진공(陳公)이 세상을 풍자(諷刺)한 뜻이 지극하다. 양화(陽貨)가

“부자가 되려 하면 어질지 못해진다.” 한 것도 또한 그 하나이다.

 

● 중원(中原) 영평부(永平府) 칠가령(七家嶺)에서 서쪽으로 5리쯤 되는 곳에 높은 봉우리 위에 당(堂)같은 무덤이 있는데, 경계가 분명하므로, 통역에게 묻기를,

“이 산이 무슨 산이며, 누구네 무덤인가?” 하니, 통역은,

“환야산(幻爺山)입니다.” 라고 답했다. “환야는 무슨 뜻인가?” 하고 물으니,

“옛날에 어떤 사람이 자식을 두었는데, 공순하지 못하여, 동쪽으로 가라 하면 서쪽으로 가고 북쪽을 물으면 남쪽을 가리켰으며, 땔나무를 하게 하면 반드시 돌을 져오고, 물을 길어 오게 하면 반드시 불씨를 받아왔다. 그 아비가 병들어 죽게 되었는데, 그 자식에게, ‘나를 반드시 높은 봉우리 위에다 장사하라.’고 하였다. 대개 그 아비의 뜻은 평지에 장사하라 하면 반드시 높은 봉우리에다 장사할 것이므로 높은 봉우리에다 장사하라 한 것은 아래쪽 바람을 피할 수 있는 곳을 얻고자 해서였다. 그런데, 그 자식은, ‘임종(臨終) 때의 말이니, 따르지 않을 수 없다.’ 하고, 이곳에다 장사하여 길 가는 사람이 지금까지 그 얘기를 한다고 하며, 살았을 때나 죽은 뒤에 그 아비의 뜻을 어기지 않은 것이 없다 하여, 이 산을 환야산이라 이름 하게 된 것이다.”

하였다. 이것도 옛날 이리 새끼가 그 아비의 죽을 무렵의 말을 따라 물속에다 장사하고, 모래를 쌓아서 무덤을 만들었다는 것과 꼭 같다. 불순(不順)한 자식을 경계하는 말이다.

 

● 옛날 명왕(明王)은 뇌물 받은 사람에 대한 처벌을 엄하게 지켜서 조금도 용서하지 않았으니, 뇌물 받은 사람에 대한 처벌을 엄하게 하지 않고 능히 그 국가를 보존한 자는 있지 않았다. 한(漢) 나라 광무황제(光武皇帝)와 같이 너그럽고 어진 임금으로서도 수천 학도(學徒)가 궐문(闕門)에 서서 슬프게 부르짖음에는 비록 애달파하였지만, 구양흡(歐陽歙)의 죄는 끝내 용서하지 않아 마침내 옥중(獄中)에서 죽었다. 광무만이 그랬던 것이 아니고 당(唐)ㆍ송(宋) 여러 임금으로서 조금이라도 다스림의 도를 아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이가 없었다.

우리 조종(祖宗)의 세대는 조정이 맑고 밝아서 간사한 것이 행해지지 못하였었으니, 세종ㆍ성종 두 임금의 다스림은 후세에서 능히 따르지 못하는 것이다. 중종 초년은 비록 연산군의 혼란을 겪은 다음이지만 국가의 전장(典章)이 아직도 남았고, 공정한 논의도 없어지지 않아서 사대부(士大夫)로서 탐심이 많고 행실이 더러워서 남의 기롱을 당한 자는 모두 조정에 발을 붙일 수 없었다. 그리고 자문(咨文)에 쓰는 종이 한 장이라도 개인적으로 쓴 자는 종신토록 누명(累名)을 면치 못하였으니, 그 금법(禁法)이 엄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6~7년 이래로는 권력 잡은 간사한 자가 잇달아 기율이 없어지고, 재물을 탐내는 버릇이 나날이 성해져서, 공정한 논의에 의해 버림을 당해 남의 손가락질을 받던 자가 교만스럽게 큰소리를 치며, 남들이 비웃고 욕을 해도 다시 부끄러워함이 없다. 다만 법대로 거행하지 않을 뿐 아니라, 도리어 서로 그 본을 받고, 더욱 그릇된 곳으로 유인하니, 이러고서 민생이 곤란하지 않고 종사(宗社)가 망하지 않을 리가 있겠는가?

 

● 제왕(帝王)의 법이란 모두 인정(人情)에 근본하므로, 반드시 인정에서 근본하고 천리(天理)에 순응(順應)한 다음이라야 시행하는 데에 어긋남이 없고 후세에 나무랄 일이 없다. 우리 나라 법에 알 수 없는 것이 두 가지가 있다. 여자의 정절(貞節)은 극히 권장할 만한 것이나, 나이 젊은 과부를 일체 금고(禁錮)하고, 개가(改嫁)하여 낳은 자식은 간음(姦淫)하여 낳은 것으로 단정해 버리니, 이것이 과연 인정에 가까운 것일까? 그리고 고자[宦者]라는 것은 남자도 여자도 아니고 흉하고 더러워서 실상 인류(人類)가 아닌데, 아내를 두고 가정을 이루어 일반 사람과 똑같이 살고, 혹 아내가 행실을 삼가지 못하면 죄를 주니, 이것이 천리(天理)에 합당할까? 인정에 어긋나고 천리에 거스림이 이보다 더함이 없으니, 성인의 법이 아닌 듯하다.

 

● 춘정(春亭) 변계량(卞季良)이 최영(崔瑩)의 무덤을 지나다가 시를 지었다.

 

위엄 떨치고 나라 구하느라 귀밑머리 희어졌네 / 奮威匡國鬢星星

말 배우는 아이까지 장군 이름 다 아누나 / 學語街童盡識名

한 조각 장한 마음 어이 없어질손가 / 一片壯心應不死

천추에 영원히 태산과 우뚝하리 / 千秋永與太山橫

 

● 고려 조정은 오직 백성을 애호하는 것을 중하게 여겨서, 낭장(郞將) 등은 백성의 일에 익숙하지 못하고 다스리는 도를 모른다 하여, 백성을 다스리는 벼슬은 제수(除授)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거제(巨濟)는 바다 가운데 있어, 왜적이 우리 나라에 오는 첫 길목이지만, 오히려 문관(文官)으로서 6품에 처음 오른 자를 차임(差任)하였다. 이규보(李奎報)가 서문(序文)을 지어, 작별한 글이 《동문선(東文選)》에 기재되어 있어 지금에도 볼 수 있다. 충렬왕(忠烈王) 때에 낭장 등의 호소로 인하여, 비로소 선택해서 교대로 차임하겠다는 논의가 있었으나, 낭장으로서 수령(守令)이 된 자 역시 드물었고, 이때에 무과(武科)에서 뽑는 것이 다만 네 사람뿐이었다. 이리하여 5백 년 동안 백성이 생업을 편케 할 수 있었고 인구가 많아지고 또 부유하였으며, 여러 고을의 창고가 또한 가득 차게 되었다. 우리 나라도 대대로 무관은 내지(內地)에 차임하지 말라는 명이 있었는데, 정릉(靖陵.중종) 중년 이후에 권세가 있는 간신이 잇달아서, 뇌물만 좋아하고 방비하는 데에는 소홀하여, 친하고 나이 어린 무관을 부유한 고을 원으로 차임한 적이 많았다. 그 원들은 세도를 믿고 방자하여져서 남에게 환심을 사고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일이라면 못하는 짓이 없어 민심이 원망하여 배반하고 나라의 근본이 병들어 버렸다.

 

● 왕궁의 법전(法殿)은 남향(南向)을 하는데, 그것은 정사를 듣고 조회를 받는 바른 위치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부(政府)와 추부(樞府)ㆍ6조(曹) 여러 관청이 모두 광화문 밖에 벌여 있어 동쪽에 있는 것은 서쪽을 향하고 서쪽에 있는 것은 동쪽을 향해 있다. 한갓 관청만 그런 것이 아니다. 사대부의 사가(私家)나 대청마루도 모두 동향이나 서향으로 되어 있어, 감히 남향으로 하지 못하는 것은, 비록 집에 있을 때라도 분수에 넘치게 남쪽을 향해 앉을 수 없어서였다. 도성(都城) 안에, 고가 세족(故家世族)의 집들이 바둑돌같이 벌여 있고 별처럼 흩어져 있으나, 모두 북향하여 있었는데, 중종 이후로 기강이 점차 해이해지고 인심이 나날이 사치스러워져, 분수를 어기고 예도를 넘는 일이 끝이 없어 집의 좌향(坐向)이 남인가 북인가는 물을 것도 없었으니, 세도(世道)가 점점 못하여지고 인심이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조종 때에는 오직 대전(大殿)과 동궁빈(東宮嬪)만은 사대부 집 딸의 나이 단자(單子)를 거둬, 그들을 대궐에 들어오게 하여 선택하였고, 이 밖에는 비록 대군(大君)의 아내라 하더라도 혹 상궁(尙宮)을 시키거나 혹은 감찰각씨[監察可氏]를 시켜서, 여염집 처녀의 본집에 가서 선택하여 의정(議定)하였다. 금상(今上) 때에 와서 후궁(後宮)이 낳은 여러 군(君)의 아내도 모두 단자를 거두고 처녀를 대궐에 오게 하여 직접 선택하는데, 이것은 선왕 여러 대로 지켜 오던 가법을 어긴 것일 뿐 아니라, 분수를 넘치고 예도를 넘는 화(禍)도 또한 여기에서 시작된다.

 

● 중국은 문명한 지역이다. 구주(九州) 밖의 사해 모퉁이에 있는 나라는 각각 호칭이 있으니, 남쪽을 만(蠻)이라 하는데, 만이란 벌레 같다는 것이고, 서쪽을 강(羌)이라 하는데, 강은 양[羊]과 같다는 것이고, 북쪽은 적(狄)이라 하는데, 적은 개와 같다는 것이다. 우리 동방만은 이(夷)라 하는데 이는 궁(弓)에다 대(大)가 있는 것으로 이것은 큰 활이니, 활을 잘 쏘는 것을 말한 것이다. 기자(箕子)가 봉(封)해진 지역으로서, 민속(民俗)이 어질고 오래 사는데 ‘이적(夷狄)에 임금 있는 것이 중국에 임금 없는 것보다 낫다.’는 말이 있고, 공자가 여기에서 살고 싶다고 한 곳도 여기다. 또한 대살[竹箭]은 중국이 비록 넓다 하여도 오직 형주(荊州)의 형산(衡山)에서만 생산될 뿐 다른 고을에는 없는 까닭에, 중국 사람은 모두 나무로써 화살을 만든다. 우리 나라는 북방에서만 나지 않을 뿐이고, 각 도 모두에서 생산된다. 활이 억세고 화살이 날카로우며 사람이 날쌔고 말이 건장한 것은 하늘이 내린 것이다. 수 양제(隋煬帝)와 당 태종(唐太宗)이 천하 군사를 일으켜 왔어도 능히 뜻대로 하지 못하고 갔는데, 지금 왜적에게 패하여 감히 저항하지 못한 것은 활 재주가 예전 같지 못한 것이 아니고 다만 민심(民心)이 흩어져 배반한 지가 이미 오래였고 여러 장수가 소문만 듣고도 달아나서, 능히 진격하지 못해서이다. 통분하고 통분하다.

 

● 천하가 넓어 기후가 고르지 않고 풍속도 달라 외적(外賊)을 막아 싸우는 기구도 또한 그 지방에 따라 각각 다르다. 중국에는 중국의 장기가 있고 이적(夷狄)에는 이적의 장기가 있으니, 춘추 시대(春秋時代) 여러 나라를 보더라도, 진(秦)ㆍ초(楚)의 견고한 갑옷과 날카로운 칼날, 제(齊)ㆍ진(晉)의 깃발과 칼ㆍ창, 그리고 한(韓)ㆍ위(魏)의 넓은 수레와 말배때끈과 가슴걸이[韅靷], 또 연(燕)ㆍ조(趙)의 굽은 창과 긴 목투구가 그것이다. 억센 활과 굳센 쇠뇌[弩]로 쏘는 것마다 맞추는 것은 우리 나라의 장기이고, 포환(砲丸)을 묘하게 쏘고 창검(槍劍)에 익숙한 것은 왜적의 장기이다.

군사를 잘 쓰는 자는 나의 장점을 숨기고 적의 단점을 알아내고, 나의 단점을 닦고 적의 장점을 꺾는다. 그리하여 기병(奇兵)과 정병(正兵)이 서로 기회를 틈타 적을 유인하여 승리로 이끄니, 이것이 손무(孫武) 삼사(三駟)의 법이다. 만약 예부터 전해 오는 나의 기술을 싫어하고 저들의 새 재주를 본받는다면 한단의 걸음[邯鄲之步]이 되니 잘할 수 있겠는가? 나의 장점을 더욱 익히고 적의 능한 것을 겸한다면 진실로 불가할 것이 없다. 그러나 내가 보건대, 양쪽 군사가 어울려서 싸울 때는 바람처럼 달리고 번개처럼 때리며, 구름을 따르고 비도 따르듯 하여 숨도 쉴 수 없다. 이런 때를 당하여 나아가고 물러나면서 창을 휘두르는 기술과, 내려다보고 쳐다보면서 칼을 쓰는 방법은 반드시 쓸 곳이 없을 것이니, 다만 조총(鳥銃)을 배울 것이요, 딴 것은 반드시 본받을 것이 아니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