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로부터 문인 재자(文人才子)는 이 세상에 태어나서 항상 억눌려 마음을 펴지 못하고 괴로워하다가 요절하는 경우가 있다. 영원히 전해질 정도로 훌륭한 글을 남기며, 오래 살고 높은 벼슬에 올라 세상 사람들의 부러움을 받는 일은 이치상 겸할 수 없으니, 옛말에 이른바 ‘이빨을 제거하면 뿔을 남겨두고, 다리가 둘이면 날개를 준다.’라는 비유가 아니겠는가. 당(唐)나라의 사걸(四傑 즉 왕발,낙빈왕,노조린,양형)은 훌륭한 시를 남겼지만 그들의 일생을 논하자면 먼 훗날에도 눈물을 흘릴 만하다. 우리나라의 경우로 말하자면 근세의 묵재(默齋) 심공(沈公.심사순) 같은 분은 슬퍼할 만하다.
공은 어려서부터 영특하여 태어난 지 십 년이 지나자 곧 글을 지을 줄 알았다. 스무 살이 넘자 과거에 급제하여 조정에 올라 사가독서(賜暇讀書)하고 사헌부와 승정원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깊이 생각하여 글을 지었기에 글솜씨가 뛰어나다는 명성이 날로 높아졌다.
마침 권신(權臣.김안로)이 공의 부자와 사이가 벌어졌는데, 같은 당의 인척되는 자가 그의 비위를 맞추려고 익명서로 공을 무고하였다. 그리고 공을 구속하고 심문하여 결국 감옥에서 죽게 하였다. 옛적 한(漢)나라 조정에서는 낙양 소년(洛陽少年.가의)을 미워하였으나 삼상(三湘) 사이에 두었을 뿐인데 공은 비명횡사하고 말았구나. 아,잔인하도다.
정유년(1537, 중종32)에 정국이 바뀌자 익명서를 지어낸 자가 죄를 자백하여 공은 누명을 벗고 원직으로 복관되었다. 하지만 공은 이미 죽었으니 어찌하겠는가. 안타깝구나. 하늘이 주고서 하늘이 빼앗아 가는 것이야 그 사이에 사람의 힘이 개입할 여지가 없지만, 하늘이 낳아 주었는데 사람이 다시 꺾었으니 애통하기 그지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가만히 들으니, 공희조(恭僖朝.中宗朝)에 시인들이 앞을 다툴 적에 용재(容齋.이행)가 문단의 맹주였다고 하는데 지금까지도 후배들이 외고 본받기를 그치지 않는다. 공이 사가독서(賜暇讀書)하던 시기는 실로 용재가 대제학으로 있던 때였다. 공이 항상 윗사람으로 대접하였는데 자주 칭찬을 받았으니, 공의 시가 어떠한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죽지 않고 조금만 오래 살며 단련하기를 멈추지 않고 크게 확장하였다면 그 성취가 어찌 끝이 있었겠는가.
나는 공의 시고(詩稿)를 본 적이 있으나 전부 읽지는 못하였다. 어리석고 식견이 없어 감히 함부로 평가할 수는 없지만 조금 엿본 바로는 제법 부옹(涪翁.정자)의 기미가 있었으니, 용재가 감탄하며 칭찬하였다는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공은 지위가 재주에 걸맞지 않았고 나이도 노년에 이르지 못하고 도중에 죽은 데다 뜻하지 않은 화로 인해 죽었다. 그 당시의 참혹한 화란은 훗날에 듣는 사람들조차 가슴이 막히거늘, 하물며 아들의 입장에서야 어떤 마음이겠는가. 수간(守簡) 씨가 돌아가신 부친을 추모하여 시고 약간 편을 뽑아 불후히 전하려는 생각에 어찌 끝이 있겠는가. 옛적에 내게 서문을 써야 한다고 말하기에,
긴 밤에 원한을 품은 지 몇 해가 지났나 / 厚夜銜冤閱幾年
서문을 구하니 재주가 현안(황보밀)보다 못하여 부끄럽네 / 序求玄晏愧才綿
하고, 시를 지어 답하였다. 얼마 후 내 글을 얻었으면 한다고 부탁하였다.
아, 지금 세상에서 재주 있는 사람을 불쌍히 여겨 순풍에 소리를 얹듯이 사람들에게 전하여 드러내 줄 사람을 얻기가 쉽지 않다. 내가 어찌 공에게 현안과 같은 존재가 되어 낙양의 종이값을 올릴 수 있겠는가. 나는 단지 그의 뜻에 부응하여 서술하였을 뿐이다.
공은 휘가 사순(思順), 자가 의중(宜中)이며 관직은 부제학에 이르렀다. 묵재는 그의 자호(自號)이다. 수간은 공의 막내아들이라고 한다.
註: 《묵재집》은 심사순(沈思順)의 문집으로 그 서문은 월정(月汀) 윤근수(尹根壽)가 1588년 4월에 썼다. 심사순은 남곤(南袞)과 함께 기묘사화(己卯士禍)를 주도한 심정(沈貞)의 아들이다.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