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고문고사(古文故事)

사육신 유고집[六臣遺稿] 권후(卷後)에 쓰다 - 김상헌

작성자허현|작성시간18.01.01|조회수180 목록 댓글 0

 

대저 우리 영묘(英廟.세종)의 시대를 당하여 육신(六臣)이 있었다고 한다. 그 당시에 인재의 성대함이 손으로 다 꼽을 수 없을 만큼 많았는데 유독 여섯 사람만을 신하라고 하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대저 신하가 되어 신하의 도리를 다한 연후에 신하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니, 옛날에 대순(大舜)을 일컬어 임금이라고 한 것이 바로 그런 것이다. 그러므로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만약 의리를 버리고 삶을 훔쳐서 지하에 가서도 부끄러움이 있는 자라면 그는 신하가 아니다.

아, 육신의 사적은 차마 들을 수 없는 바이며, 또한 감히 말할 수 없는 바이다. 지금 충신(忠臣)과 열사(烈士)들은 말이 여기에 이르면 가슴을 움켜쥐고 길이 탄식하다가 이어서 피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가 없다. 그러나 곤란하고 위축된 바가 있어서 다행히 보전되어 가까스로 남아 있는 것마저 다 채집하지 못함으로써 표양(表揚)하는 도리가 세월이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민멸되게 하니, 의리를 숭상하는 자가 이 점을 안타깝게 여기고 있다.

평양공(平陽公.박팽년)에게 숭고(崇古.박팽년의 7세손 박숭고)라는 후손이 있어서 분연히 흩어진 선조의 글을 모으면서 아울러 오신(五臣.유응부를 제외한 5명)의 유록(遺錄)도 구하여 약간의 글을 모두 합하여 한 책으로 만들었다. 중간에 나에게 보여 주면서 책머리에 실을 글을 부탁하였다.

아, 이 다섯 군자가 영묘(英廟)의 융성한 대우를 받았고 금규(金閨.귀족의 집안)에서 오랫동안 몸담고 있었으므로 출입하며 논사(論思)한 글과 여사로 다루었던 글들이 상자에 가득하고 간책(簡策)에 넘쳐날 것인데 지금 보존된 것이 이렇게까지 매몰되었다. 유씨(兪氏.유응부)의 경우는 한 편의 글에서 웅장하고 호걸스러운 기상을 볼 수 있으니, 평생 동안 감동하고 분격한 일이 많았을 텐데 어찌 다른 글이 없었겠는가마는 모두 세상에서 말하는 것을 꺼려하는 바가 되어 버렸으니,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비록 그러나 그 정충(精忠)과 의열(義烈)은 천고의 세월을 두고 늠름하며 한 마디 말일지라도 오히려 해와 별과 그 빛을 다투는데 어찌 섭섭하게 여길 것이 있겠는가.

아, 예로부터 절의가 있는 자가 반드시 문장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유독 채미(採薇)의 노래와 침상(沈湘)의 사부(辭賦)와 문신국(文信國)의 글과 방정학(方正學)의 문집(文集)과 이 글은 참으로 절의와 문장이 모두 아름답고 둘 다 완전하다고 말할 수 있으니, 성대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서문을 진실로 내가 맡을 바가 아니지만 삼가 부기(附驥)의 소원(파리가 천리마의 꼬리에 붙으면 천 리를 갈 수 있다는 말로 선배나 혹은 명인의 영향을 받아 명성을 얻는 것을 비유)이 있고 또 박군(朴君.박숭고)의 뜻을 가상하게 여겨 삼가 뒤에 이와 같이 기록하는 바이다. 을유(1645)년 12월에 안동(安東) 김상헌(金尙憲)은 발문(跋文)을 쓰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