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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고사(古文故事)

망실(亡室) 고령신씨(申氏) 행장 - 박은/읍취헌유고4권

작성자허현|작성시간18.01.04|조회수263 목록 댓글 0

 

註: 조선 중기의 천재시인 읍취헌 박은은 동갑내기 아내를 25살에 잃었고 자신도 이듬해 26살에 연산군에게 죽임을 당했다. 박은은 죽은 아내의 행장(行狀)을 직접 지었다.

 

망실(亡室) 의인(宜人)은 성은 신씨(申氏)이고 보계(譜系)는 고령(高靈)에서 나왔다. 고령부원군(高靈府院君) 휘 숙주(叔舟.신숙주)란 분이 있어 세종(世宗), 문종(文宗), 세조(世祖), 예종(睿宗), 성종(成宗)을 섬기면서 정난 공신(靖難功臣), 익대 공신(翊戴功臣), 좌익 공신(佐翼功臣), 좌리 공신(佐理功臣)으로 책훈(策勳)되고 벼슬이 의정부 영의정에 이르렀으며, 졸(卒)한 뒤에는 문충(文忠)이란 시호를 받고 성종의 묘정(廟廷)에 배향되었다. 이분이 아들 휘 면(㴐)을 낳았는데 함길도 관찰사(咸吉道觀察使)로 있다가 정해년의 난리에 죽었다. 이에 조정이 포상하여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에 추증하였다. 이분이 휘 용개(用漑)를 낳았다. 이분은 지난해 겨울, 승정원 도승지(承政院都承旨)로 있다가 충청도 수군절도사(忠淸道水軍節度使)로 나갔다. 군(君.박은이 자기 부인을 이렇게 칭함)은 바로 이분의 장녀이다. 모친은 밀산 박씨(密山朴氏)이니, 지금 의정부 좌찬성인 건(楗)이 그 외조부이다.

군은 기해년(1479, 성종10) 1월 모일에 태어났다. 처음 세상에 태어나서는 외가에서 자랐는데, 어릴 때 영특하고 단정하였으며 놀고 장난하는 것이 모두 여인의 범절에 맞았다. 그래서 찬성공(贊成公)이 어질다고 여겨 친자식처럼 사랑하였다. 계축년 봄, 군의 나이 15세에 나에게 시집왔는데 잠영(簪纓.비녀와 갓끈 즉 높은 벼슬)의 집안에서 자랐으면서도 교만한 모습이 없었고 시부모의 집에 들어와서는 예경(禮敬)의 행실을 다하였다. 나의 누이들과 더불어 어버이를 모신 자리에서 기쁜 기색으로 담소하며 매우 화락하니, 시부모들이 매우 좋아하였다.

병진년(1496, 연산2)에 내가 과거에 급제하였고 정사년에 분가(分家)하여 살았다. 길쌈에서부터 담장이며 집의 건물에 이르기까지 안팎의 일들을 모두 군이 도맡았는데 일 처리가 매우 찬찬하고 꼼꼼하였다. 비복(婢僕)을 부릴 때에는 조금이라도 예의에 어긋난 행동을 하면 엄히 꾸짖어 상하가 분명하고 집안이 숙연하였다.

나는 성품이 소루(疏漏)하고 나태할 뿐 아니라 군이 어질다 하여 집안일에는 도무지 관심이 없었다. 당시에 은의 내외 왕모(王母)들이 모두 무양(無恙.병이 없음)하였는데 군은 철 따라 좋은 음식을 장만해 바치느라 늘 급급하여 여념이 없었다. 내왕모(內王母.할머니) 한씨(韓氏)는 규범(閨範)이 매우 높고 사람을 알아보는 것이 신명(神明)과 같았는데 사람들에게 자주 말하기를, “우리 손부(孫婦)는 참으로 어질다.” 하였으며, 외왕모(外王母.외할머니) 이씨(李氏)는 아직도 강건한데 나에게 말하기를, “네가 태어날 때 내 나이 예순이었으니, 오늘 네 아내의 봉양을 받을 줄 어찌 알았겠느냐.” 하였다. 나는 행검(行檢)이 없어 남들과 시주(詩酒)를 즐기기만 좋아하고 집안의 형편은 아랑곳하지 않았는데 군이 힘을 다해 비용을 마련하여 나의 마음을 즐겁게 해 주려고 애썼으며 내가 남에게 베풀 일이 있으면 역시 즐거운 마음으로 내 뜻을 따라 주었다. 그리하여 집안이 가난했으나 나는 그런 줄 알지 못하게 하였다.

평소에 내가 군과 약속하기를, “어떻게 하면 군과 함께 녹거(鹿車.사슴이 끄는 작은 수레)를 끌고 향촌(鄕村)에 돌아가 작은 집을 짓고 살며, 위로는 부모를 받들고 아래로는 자손을 기름으로써 평생의 즐거움을 이룰 수 있을꼬.” 하면 군은 문득 기뻐하며 “이것이 나의 뜻입니다. 산수(山水)의 비용은 내가 마련하겠습니다.” 하였다. 그러므로 내가 벼슬을 얻으면 군은 기뻐하지 않았고 벼슬을 잃으면 군은 슬퍼하지 않았으니, 정의(情義)가 참으로 나와 맞았다. 대저 사람은 누군들 내조(內助)를 받지 않는 이가 있으랴만 어리석은 나의 경우에는 실로 남들보다 더하였다.

올해 2월에 내가 남행(南行)하여 보령(保寧)의 수영(水營)에서 외삼촌을 뵙고 3월 10일쯤에 군이 병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서둘러 말을 달려 집에 돌아오니 군의 병이 이미 깊었다. 군은 나를 보고도 말하지 못하였으며 나 역시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군은 나의 눈물을 닦아 주려 했으나 마음대로 몸을 움직일 수 없었고 한참 만에 말하기를, “오시는 게 어이 이리 더뎠소. 하마터면 얼굴을 보고 영결(永訣)하지도 못할 뻔했구려. 그러나 이렇게 하루아침에 세상을 떠나게 될 줄 생각이나 했겠소.” 하였다. 병이 위중해지자 군은 손수 글을 써서 나의 누이들에게 주어 아이들을 부탁했으며, 그리고 말하기를, “살아서 시부모에게 효도하지 못했으나 불효한 사람이 되지 않고 싶었소. 그러나 지금 병이 낫지 않으니 어이하겠소. 내가 죽은 뒤에는 이 글을 보기를 나를 보듯이 하구려.” 하였다. 군은 글을 다 쓰고는 나를 시켜 읽게 하고 들었다. 듣기를 마친 뒤 군은 길게 탄식하였으며, 임종에 나를 돌아보고 말하기를, “잘 계시오, 잘 계시오. 나는 이제 가오.” 하였으니, 정신이 흐리지 않음이 이와 같았다.

군은 아이 여섯을 낳았다. 장남 인량(寅亮)은 이제 겨우 9세인데 장자(長者.어른)들이 보고는 모두 ‘자질이 뛰어나다’고 칭찬한다. 아버지를 따라 여막(廬幕)에 거처하면서 고기를 먹지 않고 거상(居喪)한 지 어언 3년이다. 그 사이에 병이 든 적이 있어 육즙(肉汁)을 만들어 주었더니, 물리치고 먹지 않았으며 그 뒤로는 나물죽도 먹으려 하지 않았다. 그 아래 대춘(大春)은 이제 겨우 8세이고, 그 아래 대붕(大鵬)은 태어난 지 2년 만에 요절했다. 그 아래 딸 여순(女順)은 겨우 5세이고, 그 아래 딸 여항(女恒)은 겨우 3세이다. 그 아래 아들 동숙(同叔)은 태어난 지 채 석 달이 안 되었다. 나와 군은 모두 해년(亥年)에 태어났는데 이 아이가 태어난 것도 해년이었다. 그래서 이름을 동숙이라 지었다. 이 아이는 태어나면서 용모가 매우 아름다워 군이 사랑하였다. 그래서 군이 병중에 탄식하기를, “우리 아이가 매우 아름다워 장성하는 것을 보려고 했는데 마침내 보지 못하게 되는구나.” 하였다. 군이 졸(卒)한 날은 3월 16일 계미일이고, 장례일은 5월 7일 임신일이다. 애통하도다.

배필의 의리는 크니, 살아서는 함께 늙고 죽어서는 함께 가더라도 유감이 없을 수 없다. 계축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세성(歲星.목성)이 아직 일주(一週)하지도 않았는데 백 년을 함께 살려던 계획이 여기에서 그치고 만단 말인가. 비록 함께 늙지 못하고 함께 가지는 못해도 1, 2십 년만 더 살아서 아들이 장가들고 딸이 시집가는 것만 보면 그래도 괜찮을 것이다. 아직 어린애들이 모두 강보에 있는데 군만 홀로 버리고 떠나 나의 부모에게 근심을 끼치니, 이는 모두 내가 불초하여 생긴 일이다. 군이야 운명인 것을 어이하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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