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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고사(古文故事)

김인로 명행기(金仁老名行記) - 박은/읍취헌유고4권

작성자허현|작성시간18.01.08|조회수145 목록 댓글 0

 

성묘(成廟.성종)께서 인정(仁政)으로 국가를 다스리시매 인재를 구하는 것을 급무로 삼고 학교를 일으키는 것을 중요히 여기셨다. 그리하여 늠료(凜料)를 넉넉히 지급하고 율조(律條)를 관대하게 정한 다음 사람을 뽑아 사장(師長)을 삼아 사방의 선비를 기다렸다. 이에 사방의 선비들이 택궁(澤宮)에 운집(雲集)하여 모두 스스로 학문을 닦고 서로 남의 선(善)을 보고 배웠다.

그중에 사람들이 우러러 흠모하고 애써 친근하면서 자신을 벗으로 거두어 주지 않을까 걱정하는 이가 있었으니, 그를 모두 ‘인로(仁老)’라 하였다. 상(上)께서 즉위하여 과거를 열었을 때 제 2 과(第二科)에서 군(君)이 장원으로 뽑혔다. 이에 공경(公卿) 이하로 모든 이들이 그 재능을 높이 인정하고 그 이름을 공경하여 그와 교유하기를 원하나 감히 친압하지는 못하였으니, 그를 모두 ‘김군(金君)’이라 하였다. 그가 죽자 그를 아는 이들은 슬퍼하고 그를 모르는 이들은 애석해하여 모두 “선인(善人)이 죽었다.” 하며 재물을 보내고 관곽(棺槨)을 갖추어 장사를 지냈다. 장사를 지낸 뒤 내가 군과 사귀던 벗들에게 말하기를, “인로는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 광중(壙中)에는 기(記)가 없고 그 묘소에는 갈석(碣石)이 없으니, 그 이름과 행실이 오래 지나면 인몰(湮沒)되지 않겠는가.” 하니, 모두 “그렇다.” 하고 나에게 군의 평소 사적을 말해 주어 한두 가지 얻어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또 군의 종부형(從父兄)인 예조 좌랑 인령(引齡)을 통해서 그의 세계(世系) 및 집안에서의 행실을 알 수 있었다. 이에 그중 사람들에게 두드러지게 알려진 것을 모두 모아 차례로 기술하여 그 후인(後人)에게 주는 한편 사필(史筆)을 잡은 이들이 참고할 수 있도록 한다.

군은 휘가 천령(千齡. 김천령은 이 글을 지은 박은과 동방급제 했음)이니, 경주 김씨(慶州金氏)이다. 경주 김씨는 보계(譜系)가 신라 경순왕(敬順王) 부(傅)에게서 나왔다. 그 후예에 휘 곤(稇)이 있었는데 여말(麗末)에 우리 태조(太祖)를 도와 개국(開國)에 공로를 세워 계림군(鷄林君)에 봉해졌다. 그 손자에 종순(從舜)이란 이가 있었으니, 청덕(淸德)으로 높은 지위에 올랐고 졸(卒)한 뒤에 공호(恭胡)란 시호가 내려졌다. 공호의 아들은 치세(致世)이니, 관직은 홍주 통판(洪州通判)으로 마쳤다. 홍주 통판은 안씨(安氏)의 따님을 아내로 맞아 군을 낳았으니, 그해는 기축(己丑)이요 그달은 건미(建未)요 그날은 경진(庚辰)이다.

군은 11세에 부친을 잃고 18세에 모친을 잃어 혈혈단신으로 의지할 곳이 없었으나 남달리 영특하여 학문이 매우 조숙하였다. 그래서 일찍이 시부(詩賦)로 진사시(進士試)에서 장원을 차지하여 상사생(上舍生)이 되었으며, 유생들과 궐문(闕門)에 엎드려 항소(抗疏)하여 조정의 일을 논박한 것이 두 차례였다. 이에 사대부들 사이에 군의 이름이 자주 일컬어져 마침내 명성을 크게 떨치게 되니, 사람들이 큰 그릇이 될 것으로 기대하였다.

병진년(1496, 연산2)에 군의 나이 28세였으니, 이때에 과거에 급제한 것이 그다지 늦은 것이 아니었는데 논자들은 모두 ‘군으로서는 너무 늦었다.’고 하였다. 과거를 관장한 이가 오직 공을 잃을까 걱정했고 과거를 마치자 군이 일방(一榜)에 장원으로 뽑히니, 사람들이 인재를 얻은 것을 국가의 경사로 여겼다. 군은 어려서 고아가 되어 부모의 도움을 받지 못했는데도 자립하고 힘써 학문하여 문장을 익혀서 과거에 급제하되 한 번도 남의 뒤에 처지지 않았으니, 천품이 남보다 탁월하지 않으면 이러할 수 있겠는가.

규례대로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에 제수되었고 이조 좌랑에 선임되어 사직(史職)을 겸하였으며, 《성종실록(成宗實錄)》을 편수하는 일에 참여하였다. 교서관 교리(校書館校理)로 자리를 옮겼고 호조 정랑으로 바뀌었다. 전조(銓曹.이조와 병조)가 ‘군은 문학을 잘하므로 의당 시종(侍從)의 자리에 있어야 하니 미염(米鹽)을 관리하는 곳은 군이 있을 곳이 아니다.’ 하여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로 옮겨 제수하였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부응교(副應敎)로 승진하였다.

군은 외면은 온화하여 포용력이 있었으나 내면은 강인하여 결단력이 있었으며, 발언은 강직하였고 처사(處事)는 분명하였다. 선(善)을 들으면 미처 돕지 못할까 걱정하였고 악(惡)을 들으면 미처 없애지 못할까 걱정하였으니, 그 본성이 그러하였다. 홍문관에서 매양 언사(言事)로 회의할 때 사람들이 저마다 자기 입장을 생각하여 저마다 다른 의견을 주장하면 군은 한마디로 꺾고 들뜬 말에 흔들리지 않았다. 이 때문에 언사를 하고자 하는 사람은 군을 든든히 의지하였다. 일찍이 동렬(同列)과 더불어 연변(沿邊)에 성을 쌓는 일의 이해(利害)에 대해 상소하였다가 처음 이 일을 발의한 사람을 비판했다 하여 문죄(問罪)하라는 하교가 있었으나 이윽고 불문에 부쳐졌다. 얼마 뒤에는 또 언사로 재상의 비위를 거슬러 파면된 사람도 있고 좌천된 사람도 있었는데 군은 좌천되어 승문원 교감(承文院校勘)이 되어 성절사(聖節使)를 따라 연경(燕京)에 가서 중국어를 질정(質正)하였다.

그리고 돌아와서는 사헌부에 들어가 장령이 되었다. 입대(入對)할 때 경전의 글을 인용하고 고금의 일로 증명하여 그 말이 명백하고 개절(凱切)하고, 지루하게 무익한 말을 하지 않으니, 진언할 때마다 성상의 뜻을 움직였다. 이에 원로 재신(宰臣)들이 서로 돌아보고 찬탄하며 말하기를, “참대관[眞臺官]이다.” 하고 물러나 집에 가서는 자제들에게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해 마지않았다. 마침 병으로 입대하지 못한 지 여러 날이 되자 상께서 묻기를, “요즈음 어찌하여 김모(金某)가 오래 보이지 않는가?” 하셨으며, 사직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고 휴가를 내리고 약물(藥物)을 지급하셨다. 이에 군은 얼마 뒤 병석에서 일어나 공직(供職)하였다. 전조(銓曹)가 군을 오래 헌대(憲臺)에 두어 조정의 기강을 진작하고자 하여 집의로 승진시켰다. 이에 군은 재차 병을 이유로 사직하니, 윤허가 내렸다. 그러나 군을 외직에 제수해서는 안 된다 하여 홍문관 직제학(弘文館直提學)으로 자리를 옮기고 예문관 응교(藝文館應敎)를 겸임하게 하였다. 응교는 극선(極選)의 자리로, 장차 문병(文柄)을 잡을 사람이 아니면 맡을 수 없었다. 군이 석갈(釋褐)한 지 겨우 8년 만에 아홉 차례 승진하여 이 벼슬을 맡았으니, 재상의 자리에도 오래지 않아 오를 수 있었다. 그러나 군은 평소에 염퇴(恬退)하고 영진(榮進)을 부끄럽게 여겨 한 번 승진할 때마다 마음이 즐겁지 않았다. 게다가 병으로 대관을 사직하자 외직에 제수하지 않고 내직에서 자리를 옮겨 주니, 군은 사양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병이 이어져 마침내 사직하지 못한 채 운명하고 말았다.

대저 명성이란 선비가 추구하는 바이고 사환(仕宦)이란 사람들이 영광으로 여기는 바이니, 그것이 자신에게 오지 않더라도 스스로 힘써 가지려고 한다. 그런데 하물며 절로 자신에게 오는 것을 피하려 하겠는가. 군의 마음을 미루어 간다면 어찌 천백 사람 중에 한 사람 있을 뿐이 아니겠는가.

군은 생활이 매우 가난하였으며, 서사(筮仕.처음으로 관직에 나아감)한 뒤로 모두 청요직(淸要職)을 맡았고 3품(品)의 벼슬에 올랐으나 가산(家産)을 이룬 것은 하나도 없었다. 거주하는 곳인 선친에게 물려받은 집은 겨우 처자식이 들어가 살 수 있을 정도로 비좁아 담장도 없고 손님을 맞을 자리도 없었다. 그런데도 그 아우를 위해 혼수를 마련하여 제때 혼인을 시키니, 사람들이 칭찬하였다. 군이 세상을 떠났을 때에 너무 가난하여 빈소를 차릴 수 없고 상구(喪具)를 갖출 수 없어 염습과 장례의 물품들이 붕우들의 손에서 나왔으니, 군은 이에 더욱 어질다는 평판을 받았다.

군은 정월에 걸린 질병이 오래 끌고 낫지 않아 8월 갑진일에 이르러 졸(卒)하였고 9월 을유일에 장례를 지냈다. 그곳은 실로 고양(高陽) 치소(治所) 동쪽 대자산(大慈山) 아래 승보리(昇甫里)의 둔덕이니, 선친 통판공의 무덤에서 10보쯤 떨어진 곳이다. 태어난 지 35년째인 계해년(1503, 연산9)이다.

배(配)는 종실(宗室)의 딸로 부친 이금정(李金丁)은 명산부수(明山副守)이다. 5남 1녀를 두었다. 딸은 아직 비녀를 꽂을 나이보다 몇 살이 적고, 장남은 겨우 11세라 유모의 등에 업힌 채 위차(位次)에서 곡(哭)하니, 조객들이 더욱 슬퍼하였다.

나는 군과 동방급제(同榜及第)한 사람이다. 군이 홍문관에 벼슬할 때 나는 수찬으로 있었고 군이 좌천될 때 나도 파직되었다. 그러므로 내가 군을 가장 잘 안다. 군은 모습이 간정(簡靜)하여 겉보기에는 쉽게 가까이할 수 없을 듯하나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에는 흥미진진하게 담소를 늘어놓아 듣는 사람이 피로한 줄 몰랐으며, 때로 술잔을 잡고 고금을 담론할 때에는 흉금이 시원스러워 조금도 고집과 격의가 없었으니, 참으로 개제군자(愷悌君子)라 할 만했다. 찬(贊)은 다음과 같다.

행실이 닦여지지 않은 것도 아니요 / 行非不修也

세상에 쓰이지 않은 것도 아니건만 / 世非不用也

수명만은 유독 길지 못하였으니 / 而年獨莫之與也

누구를 탓할 것인가 / 將誰尤

하늘을 탓해야 할 것이다 / 其尤天乎

아아, 명예가 드날려지지 못하는 것은 붕우의 잘못이니, 인로(仁老)와 같이 어진 사람의 이름이 민몰(泯沒)되어 후세에 전해지지 않는다면 어찌 우리의 부끄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내가 지은 이 글이 반드시 후세에 전해질 것이라 감히 자신할 수 없으며 내가 인로를 아는 것도 한두 가지에 불과하니 어찌 다 기술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인로를 아는 이들이 이 글을 이어서 기술하고, 기술하여 마지않는다면 인로의 사적을 거의 다 기술하여 널리 세상에 전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두 장의 종이에 이 글을 베껴서 하나는 의춘(宜春) 남군 사화(南君士華.남곤)에게 주고, 하나는 덕수(德水) 이군 택지(李君擇之.이행)에게 준다. 이 두 사람은 모두 인로의 벗이다.

계해년(1503, 연산9) 겨울, 10월 모일에 고령(高靈) 박은(朴誾)은 쓰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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