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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고사(古文故事)

해동악부(海東樂府) - 심광세(沈光世)

작성자허현|작성시간18.01.10|조회수513 목록 댓글 0

 

해동악부(海東樂府)는 조선 광해군 때의 문신(文臣) 심광세(沈光世)가 지은 사시집(史詩集)이다. 신라 · 고려 · 조선 초기의 사실(史實)로부터 흥미 있는 것을 뽑아, 그것을 설명하는 해설을 시서(詩序)로 하고, 그 사실을 시로 읊었다. 명나라 이동양(李東陽)서애악부(西涯樂府)의 악부체를 본떠 아동 교훈을 취지로 만든 것이다. 그의 자서(自序), “서애악부를 읽고, 그 말이 심금(心琴)을 울리고, 그 내용이 사람을 감발분기(感發奮起)하게 하여, 초학(初學)을 돕는 데 매우 큼을 사랑한다. 이에 동사(東史)를 읽고 그 중에서 찬영감계(贊詠鑑戒)가 될 만한 것을 골라 가시(歌詩)로 한다.” 하였다. 여기에 실린 것은 그 시서(詩序)만을 뽑은 것이다-고전번역원 대동야승 역문-

 

● 고려는 원종(元宗) 때부터 원(元) 나라를 섬겼는데, 충렬왕(忠烈王)은 드디어 원 나라 공주와 결혼하여 장인과 사위의 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로부터 거의 백여 년을 내려오면서 충선왕(忠宣王) 이하는 모두 원 나라의 외손이 대대로 나라를 다스렸다. 명 나라가 처음 일어나자 공민왕(恭愍王)이 명 태조를 의주(義主)라 하여 섬기기로 하였으나, 한때 북원(北元)과 경솔히 인연을 끊는 것이 옳지 않다고 말하는 이가 많았다. 정도전(鄭道傳)과 박상충(朴尙衷) 등은 명 나라를 섬기자고 주장했고, 이인임(李仁任)과 지대윤(池大奫) 등은 원 나라를 섬기자고 주장하여, 서로 헐뜯고 배척하다가 죄를 받은 사람도 있었다. 그 후 최영(崔瑩)이 나라 일을 맡게 되자, 마침 명나라에서 철령위(鐵嶺衛)를 설치하려 하므로, 드디어 원나라를 섬기자는 논의가 더욱 높아져서 요동을 칠 계획을 결정하였는데, 마침내 왕조(王朝)가 바뀌게 되었다. 나는 일찍이 비사(祕史)에서 듣기를, “그 당시 우리 태조(이성계)의 공명(功名)이 날로 왕성해지고, 또 ‘이씨가 임금이 될 것이다.’라는 풍설이 있었으므로 최영은 아주 그를 꺼렸으나 죄를 씌울 구실이 없었다. 그래서 요동을 치게 하여 명 나라에 죄를 짓게 하고, 그것으로써 제거해 버리려고 하여 마침내 이 계교가 나왔다.” 하였는데, 이것은 참으로 큰 잘못이다. 어찌 나라를 비어 놓고 군사를 내주어 남을 해치고 자기의 안전을 도모하고자 하고도 그 화를 입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어찌 다만 자기의 한 몸을 보존 못하는 데 그치겠는가. 망한 이의 어리석은 짓이 아니랴.

● 고려 말에 문충공(文忠公) 정몽주(鄭夢周)는 진유(眞儒)이며, 임금을 도와서 큰일을 할 만한 인재로서 나아와 높이 등용되었다. 태조의 알아줌을 가장 두터이 받아, 여러 번 그 막하(幕下)에 부름을 받았다 위화도 회군 뒤에는 태조와 함께 승진하게 하여 상(相)이 되었다. 문충공은 김진양(金震陽) 등 제공(諸公)과 함께, 몸을 잊고 나라에 충성을 다하여 고려의 사직(社稷)을 붙들려 하였다. 그때 태조의 공업(功業)은 날로 왕성해져서 여러 신하들의 마음이 그에게로 쏠려, 형세가 남의 신하로 그치기는 어렵게 되었으므로, 문충공은 그를 꺾을 계책을 세웠다. 태종이 일찍이 태조에게 아뢰기를, “정몽주가 어찌 우리 집안을 저버리겠습니까.” 하니, 태조가 말하기를, “우리가 무고한 모함을 받게 되면 몽주는 죽음으로써 우리를 변명해 주겠지만, 만약 나라에 관계되는 일이라면 알 수 없다.” 하였다. 문충공의 마음과 형적이 더욱 드러나자 태종은 잔치를 베풀어 그를 초청하고, 노래를 지어 술을 권하며,

이런들 어떠하리 / 此亦何如

저런들 어떠하리 / 彼亦何如

성황당 뒷담이 / 城隍堂後垣

다 무너진들 어떠하리 / 頹落亦何如

우리도 이같이 하여 / 我輩若此爲

아니 죽으면 또 어떠리 / 不死亦何如

라고 읊으니, 문충공도 이에 노래를 지어 술잔을 보내면서,

이 몸이 죽고 죽어 / 此身死了死了

일백 번 고쳐 죽어 / 一百番更死了

백골이 진토(塵土)되어 / 白骨爲塵土

넋이라도 있고 없고 / 魂魄有也無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 向主一片丹心

가실 줄이 있으랴 / 寧有改理也歟

하고 응수하였다. 태종이 문충공의 뜻이 변하지 않을 것을 알고 드디어 제거해 버리기로 마음먹었다. 문충공이 하루는 태조의 집에 병문안을 가서 그 기색을 살피고 돌아오는 길에, 옛날의 술친구네 집 앞을 지나게 되었다. 주인은 외출하고 뜰에는 꽃이 활짝 피어 있었는데, 바로 들어가 술을 청하여 마시고 꽃 사이에서 춤을 추면서, “오늘은 날씨가 몹시 사납구나.” 하고, 큰 대접으로 몇 대접의 술을 마시고 나왔다. 그 집 사람이 이상히 여겼더니, 얼마 안 되어 정 시중(侍中)이 해를 입었다는 말이 들렸다. 문충공이 태종의 집에서 돌아올 적에 그 앞을 가로질러 지나가는 활을 멘 무부(武夫)가 있었다. 문충공이 따라오는 녹사(錄事)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너는 뒤에 떨어져라.” 했더니, 대답하기를, “소인은 대감을 따르겠습니다. 어찌 다른 데로 가겠습니까.” 하니, 재삼 꾸짖어 말렸으나 듣지 않았다. 문충공이 살해를 당할 적에 서로 끌어안고 함께 죽었는데, 그 당시 창졸간에 그의 성명을 기억하는 사람이 없어, 마침내 후세에 전하지 못하였다.

● 고려 말에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두 아들 종학(種學)과 종덕(種德)이 다 급제하여 높은 벼슬을 지냈으나, 혁명 후 두 마음을 먹지 않았으므로 모두 곤장을 맞고 죽었다. 목은이 여주(驪州) 시골에 물러가 살고 있었는데, 하루는 문하생(門下生)이 찾아와 뵈었다. 공은 깊은 골짜기로 그를 데리고 들어가니, 문하생은 그 까닭을 몰랐다. 인적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이르자, 종일토록 목을 놓아 통곡하였다. 함께 나올 때에 비로소 말하기를, “오늘은 내 가슴이 조금 후련하다.” 하였다. 아마 두 아들의 죽음에 마음이 상해서일 것이다. 목은이 일찍이 지은 시에

송헌(松軒)이 나라 일을 맡았는데 나는 떠돌이 몸이 되었으니 / 宋軒當國我流離

꿈속엔들 어찌 이런 일이 있었을쏘냐. / 夢裏裡何曾有此事

하였는데, 송헌은 태조의 헌호(軒號)이다. 태조와는 가장 친하고 정의가 두터워서, 평소에 태조는 그의 천거를 많이 받았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 고려 말에 농암(聾岩) 김주(金澍)가 명 나라에 사신으로 갔었는데 돌아오다가 압록강에 이르렀을 때에, 이성계가 왕위를 물러 받았다는 소리를 듣고 곧 명 나라로 되돌아갔다. 하인을 시켜 한 켤레의 신을 가족에게 보내면서 말하기를, “내가 명 나라로 되돌아간 날을 내 기일(忌日)로 삼아라.” 하였다. 드디어 고황제(高皇帝.명나라 태조)에게 아뢰어 군사를 일으켜 이 태조의 죄를 묻기를 청하니, 황제가 말하기를, “제왕(帝王)이 일어남은 스스로 천운(天運)이 있는 것이요, 사람의 힘으로는 하기 어려운 것이다.” 하고, 묻기를, “네가 본국에 있을 때에 무슨 벼슬을 지냈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예조 판서를 지냈습니다.” 하였다. 이에 상서(尙書)의 녹을 주어 종신토록 형초(荊楚.호남 호북성 일대) 지방에 살게 하였는데 두 딸을 낳았다. 임진년에 명 나라 군사가 왔을 때에, 허(許)라는 유격장군(遊擊將軍)이 있었는데, 자칭 김주의 외손이라 하였다. 같은 때에 왕강(王康)은 고려 왕실의 종친으로서, 재주가 있어 벼슬이 팔도도관찰사(八道都觀察使)에 이르렀다. 그도 사신으로 명 나라에 갔다가 혁명 후에 돌아와, 마침내 왕씨와 더불어 씨족(氏族)을 같이하였다.

● 경순공주(慶順公主)는 태조의 딸인데, 방번(芳蕃)과 방석(芳碩)과 함께 신덕왕후(信德王后 태조의 계비. 정릉(貞陵))의 몸에서 태어났다. 흥안군(興安君) 이제(李濟)에게 출가했는데, 방석의 난 때에 흥안군도 죽었다. 태조가 친히 나아가서 공주의 머리를 깎으면서 눈물을 줄줄 흘렀다.

● 원천석(元天錫)은 본관이 원주(原州)인데, 고려 말에 벼슬하지 않고 원주에 숨어 살았다. 태종이 잠저(潛邸)에 있을 때에 태종을 가르친 인연이 있었으므로, 태종이 상왕이 되자 그를 특명으로 불러들이니, 천석이 백의(白衣.벼슬 없는 선비의 몸)로 와 뵈었다. 대궐 안으로 불러들여 지난날의 일을 말하여 평소의 즐겨함과 같이 하고, 여러 왕자를 불러내어 보이고는, “내 자손들이 어떠하오.” 물었다. 천석이 세조를 가리키며, “이 아이가 몹시 조부를 닮았습니다. 아, 형제를 사랑해야 합니다.” 하였다. 평생의 저서를 한 궤 속에 넣어 단단히 잠가 두고 임종 때에 유언하기를, “자손이 성인(聖人)이 아니거든 열어 보지 말라.” 하고, 그 집 사랑방 안에 간직해 두었다. 아들과 손자 때에는 열어 보지 못하였고, 증손 때에 이르러 어느 날 시제(時祭) 때에 친족들이 모두 다 모였는데, 말을 내기를, “선조께서 비록 유언이 있었으나, 세월이 이미 오래되어 반드시 혐의스러울 것이 없으니, 이제는 열어 보아도 괜찮지 않겠는가.” 하였다. 여러 사람이 모두 옳다 하여 궤를 열어 보니, 그것은 고려 말의 야사(野史)였는데, 국사와 같지 않은 데가 많았다. 이미 본 뒤이니 끝까지 소문나지 않게 덮어 두기는 어려운 일이라 죄를 짓게 될까 두려워, 드디어 그것을 불살라 버렸다. 오직 지은 시집 두 권이 있는데, 시사(時事)를 많이 읊었다. 주해(註解)에 드러난 것을 보면, 신우(辛禑) 이전은 ‘국가(國家)’라 했고, 공양왕(恭讓王) 이후는 ‘국인(國人)’이라 했으며, 우리 조정(李朝)은 다만 ‘신국(新國)’ 운운(云云)하였다.

● 문충공(文忠公) 신숙주(申叔舟)가 젊었을 때에 성삼문(成三問)과 박팽년(朴彭年) 등과 더불어 이름을 나란히 하고, 옥당(玉堂)에 있으면서 함께 문종(文宗)의 탁고(托孤)의 분부를 받았다. 세조가 왕위를 물려받자 성삼문과 박팽년 등은 충절을 다하고, 두 마음을 갖지 않았기 때문에 극형을 받았으나, 문충공은 세조의 왕실에 힘을 바쳐 벼슬이 상상(上相.영의정)에 있었다. 나이 56세로 임종(臨終)하자 한숨지으며 탄식하기를, “인생이란 마침내 이렇게 죽고 마는 것이구나,” 하였으니, 아마 뉘우치는 마음이 싹터서 그러는 것이리라.

● 이석형(李石亨)의 본관은 연안(延安)이다. 세종 때에 삼 장원(三壯元)에 올라 그 이름이 한때 으뜸이었으며, 성삼문과 박팽년 등과 서로 가장 친하였다. 세조가 즉위하자 마침 모친상을 당하였는데, 복을 마치자 곧 전라 감사를 제수 받았다. 병자년 6월 25일에 성삼문 등의 옥사(獄事)가 일어났으나, 석형은 외임(外任)에 있었기 때문에 연루(連累)되지 않았다. 27일 순찰 길에 익산(益山)에 이르러 여러 사람이 모두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에 시 한 수를 지어 벽 위에 써 놓고, 병자년 6월 27일에 지었다고 썼는데, 그 시에 이르기를,

우나라 때의 이녀죽이요 / 虞時二女竹

진나라적의 장부송이로다 / 秦日大夫松

비록 슬프고 영화로움이 다름은 있을지언정 / 縱有哀榮異

어찌 냉렬한 얼굴을 하리오. / 寧爲冷熱容

하였다. 그때 대간(臺諫)이 그 시의 뜻을 국문(鞠問)하기를 아뢰어 청하니, 세조가 그것을 보고 말하기를, “시인의 뜻이 있는 곳을 모르니, 어찌 반드시 그렇게 하랴.” 하여, 일은 드디어 그치고 말았다. 이보다 앞서 고려의 장령 서견(徐甄)이 우리 조정에 들어와 벼슬하지 않고 금천(衿川)에 은거(隱居)하고 있었다. 하루는 시를 짓기를,

천년 신도(神都. 고려의 수도 송경)가 한양에 막혔으나 / 千載神道隔漢陽

쟁쟁한 충량(忠良)들이 밝은 임금을 도왔도다. / 忠良濟濟佐明王

삼한(三韓)을 통일한 공(功)이 어디 있는고. / 統三爲一公安在

전조(前朝 고려)의 왕업이 길지 못함을 깊이 한하노라. / 深眠前□業不長

하였다. 대간이 또한 국문하기를 청하니, 세종이 대답하기를, “서견이 본조에 벼슬하지 않았으니, 애당초 물을 만한 일이 없다. 이씨의 종묘사직이 어찌 만년까지 전할 수 있겠는가. 우리 조정에 이런 신하가 있다면 가상(嘉尙)할 만한 일이니라.” 하였으니, 그만두라고 한 이유도 이것으로 알게 된 것이다.

● 연산군 말년에 정치가 문란(紊亂)해지자, 성희안(成希顔) 등이 연산군을 폐하기를 은밀히 모의하였다. 그때 문경공(文景公) 김수동(金壽童)이 좌상(左相)이었는데, 성공(成公)이 이미 여러 사람들과 의논을 정하고, 김 좌상의 집으로 찾아가 아뢰었다. 김공이 그 말을 듣자 이윽고 대답하기를, “어찌 한 재상으로서 불시에 와서 갑작스럽게 이런 말을 하는가. 그대는 내 머리를 베어 가라.” 하면서, 목을 내밀어 책상 위에 얹었다. 성공이 황공하여 땅에 엎드려 다시 말하기를, “종묘사직이 이미 위태로워 우리들은 부득이 이 모사(謀事)를 하였습니다. 사실인 즉 진성대군(晉成大君.성종의 둘째아들로 뒤에 중종)을 추대하기로 했습니다.” 하였다. 그 당시 중종은 왕제(王弟)로서 진저(晉邸)에 있었다. 김공이 말하기를, “만약 그렇다면 나도 가겠으니, 그대는 먼저 가시오.” 하였다. 성공이 일어나 나가자, 김공은 천천히 의관을 정제하고 사람들을 피하여 왔다. 그때 반정을 일으킨 제공(諸公)들은 모두군복을 입고 군사를 거느리고 창덕궁 앞에 진을 치고 있었다. 김공이 이르러 말에서 내려 바로 들어가 자리에 앉자, 곧 병조 판서를 불러 묻기를, “그대들은 군대를 보내 진성대군의 집을 호위하게 하였는가.” 하니, 미처 못 하였다고 대답한즉 곧, “판서가 친히 군인을 거느리고 가서 호위하라.” 하고 이내 대궐로 들어가 연산군을 폐출하며 울면서 말하기를, “노신(老臣)이 죽지 못하고 살아 있다가 이런 일을 당하오니 딱하옵니다. 그러하오나, 전하께서 몹시 인심을 잃었으니 역시 어찌 하겠습니까. 옥체를 잘 보중하시어 가시오소서,” 하였다. 드디어 중종을 맞아들여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그 뒤에 사직하고 집에 나와 있다가 세상을 떠났다. 김공은 젊은 나이에 급제하여 주서(主書)가 되어 그 직무를 잘 처리하였다. 참판(參判) 채수(蔡壽)가 그 때 승지로 있었는데, 그의 단정하고 무게 있음을 사랑하여, 마침내 그의 이름을 자기 아들의 이름으로 하였다. 그러므로 채판서의 아들 소권(紹權)의 어렸을 적 이름이 수동(壽童)이었다. 나의 의견으로는 연산군이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를 일으켜 많은 선비들이 모두 죽었는데도 문경공(文景公)은 현명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때에 물러나지 않고 반정한 뒤에야 은퇴했으니, 군자가 어진 사람에게 구비하기를 바라는 뜻에서 본다면, 어찌 그를 위해 재삼 탄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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