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고문고사(古文故事)

임진잡사(壬辰雜事) 1/2 - 박동량

작성자허현|작성시간18.01.19|조회수278 목록 댓글 0

 

● 시민이 도성의 안팎 산에 모여 술과 풍악을 갖추어 저물도록 노래하고 춤추다 돌아가는 것이 봄과 가을에 성행하였다. 경인ㆍ신묘 연간에 서울에서 떠도는 말에, 오래지 않아서 세상이 바뀔 터이니, 살아 있을 동안 실컷 먹고 마시는 것만 같지 못하다 하면서 서로 다투어 놀이를 일삼아, 어떤 사람은 파산하는 지경에 이르기도 하였다. 이것을 식자들은 상서롭지 못하게 여겼다.

● 임진년(1592, 선조25) 4월 13일에 푸른 무지개가 궁중의 우물에서 일어나 상에게로 다가왔다. 상이 이것을 두세 번 피하였지만 곧 따라오므로 문을 닫으니 비로소 멎었다. 이날 왜적이 부산을 함락하였다는 소식을 듣고서 매우 두려워하여 피난할 계책을 세웠다. 이상은 서현기(徐玄紀.서성)가 말한 것이다.

임진년 4월에 이일(李鎰)이 충주에 이르러, 적의 형세가 대단하다고 큰 소리로 말하였다. 상은 이 보고를 보고 매우 두려워했다. 하루는 새가 궁중에 날아와 처마 위에서 밤낮을 그치지 않고 울었는데 그 소리가 매우 처절해서 마치 사람을 향해 슬피 부르짖으며 빨리 떠나라고 재촉하는 듯 하였다. 원근에서 이 소리를 듣고 마음이 크게 무너져 내렸다. 상도 괴상하게 여기고 드디어 서도(西道)로 피난할 것을 결정하였다. 그 새의 모양은 뻐꾸기 같은데 작고, 꼬리도 짧았다. 사람들이 일찍이 보지 못한 것으로 어떤 사람은 금강산에 이 새가 있다 하였다. 이 새가 그믐날이 되어서야 어디론지 날아 갔으니, 이 역시 괴이쩍은 일이다.

● 이자정(李子政.이정립)이 말하기를,

“임진년에 한가로이 성문 밖에 살았기로, 일찍이 상이 서울을 떠나려는 뜻이 있음을 듣지 못하였다. 사람이 혹 이런 말을 하면, 곧 그럴 이치가 없다고 대답했다. 하루는 새벽에 남녀가 물밀 듯 쏟아져 나와 길을 메우더니, 이윽고 임금의 행차가 북도로 향했다고 들었다. 이자정은 당황하여 말을 타고 양주(楊州)로 따라 가 길가는 사람에게 두루 물었더니, 모른다고 하기에 돌아왔다.”

하였다. 나는 병조의 낭관으로 밤낮 마영(馬營)에 있었는데, 충주가 무너지게 되자 사람과 말이 궁 안에 뒤섞여 들어오고 상하가 부르짖으며 통곡하며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나는 드디어 여러 동료와 같이 외병조(外兵曹)에 나가 있으면서 길 떠날 준비를 하는데, 어떤 아전이 와서 전하기를,

“상은 선인문(宣人門)으로 벌써 나가셨다.”

하였다. 우리들이 허둥지둥 대궐에 들어갔더니, 거짓말이었다. 나는 대궐 바로 가까이 있으면서도 오히려 잘못된 전달을 받았는데, 이자정이 따라간 것이 어찌 괴이하랴. 기자헌(奇自獻)의 말에는,

“임금의 뒤를 쫓아 안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전달이 잘못된 것임을 알고 평양으로 돌아왔다.”

하니, 근사치도 않는 말이다.

서현기(徐玄紀)는 성질이 굳세어 사람 배척하기를 잘하였다. 임진년 4월에 조정에는 임금의 서행(西行)을 그만 두기를 청하는 상소가 많았다. 어느 날 나는 여러 동료에게 말하기를,

“우리들도 본 병조에 있는데 우리만 서울 떠나는 것이 그르다고 말하지 않는단 말인가?”

하니, 유보(裕甫)가 기뻐하며 대답하기를,

“내가 상소문의 뜻을 일어 줄 터이니, 그대는 이것을 쓰시오.”

하였다. 그 글에,

“산천의 형승으로 말해도 한양보다 나은 데가 없는데, 전하께서는 이곳을 버리고 어디로 가시려 하옵니까? 성과 호(壕)가 험준함도 한양보다 나은데가 없는데, 전하께서는 이곳을 버리고 어디로 가시려 하옵니까? 인구가 많고 축적이 많음을 전하께서는 홀로 생각지 않으십니까? 종묘가 여기에 있고 사직이 여기에 있으며, 또 왕릉이 여기에 있사온데, 전하께서는 차마 떠나실 수 있사옵니까? 서행(西行)하시려는 뜻은 이미 내정해 놓고 경향에다 방을 붙여 설유하기는, ‘마땅히 사수(死守)한다.’ 일렀으니, 전하께서 비록 백성을 속이실지라도 조종의 신령을 속일 수 있겠습니까? 조종도 속일 수 없는데, 하물며 하늘을 속이겠나이까?”

하였다. 글귀는 많지 않지만 뜻이 잘 반영되어 읽어갈수록 간절하였으니, 한때의 모든 사람들이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상소문이 완성되자, 유보가 말하기를,

“대의가 관계되는 바라서 어쩔 수 없이 이같이 하였으나, 한편으로 말하면 군부(君父)를 포위된 성에 계시게 하는 것도 신자(臣子)로서 차마 할 일이 못된다.”

하니, 서현기가 눈을 부릅뜨고 말하기를,

“이 같다면 맹자도 또한 불충(不忠)이오.”

하였다. 이 날 저녁에 유보는 사사로이 차비문(差備門) 밖으로 나아가 속히 난을 피하기를 청하고, 그믐날 또 이같이 하였다. 이에 서현기가 분개하며 말하기를,

“이홍로는 하나의 외인(外人)으로 감히 이와 같이 하니, 우리들도 차비문 밖에서 극력 간하는 것이 옳겠다.”

하였다. 유보는 이홍로의 자(字)이다.이자상(李子常.이항복)이 말하기를,

“대가를 따라 임진강에 이르러 어떤 여아를 만났는데 나이 열 너댓 살쯤 되어 보였다. 이 여아는 비 속에 길을 잃고 혼자 가다가 강을 건너가지 못하여 눈물을 흘리며 서 있었는데, 얼굴이 범상하지 않았다. 곧 배를 타라 하여 건너 주니, 그 여아는 정면으로 고맙다고 사례를 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며 가지 않는 것이 말하지 못할 사연이 있는 듯하였다. 나는 그 여아가 동행할 뜻이 있어 그러는 줄을 알았지만 데리고 가지 못한 것이 지금까지 한이 된다.” 하였다.

● 왜변이 난 처음에 상이 임진강에 도착하니, 민빈(閔嬪)이 가마에 다쳐 날이 어두워서야 도착했다. 배가 서쪽 언덕에 닿으니, 군인이 사방으로 흩어져가고, 하늘에서 또 비가 와 갈 곳을 몰랐다. 상이 이항복에게 이르기를,

“급히 병조 낭관과 같이 사람을 불러들이는 것이 좋겠다.”

하니, 이항복이 말을 타고 다니면서 외쳤다. 내가 사형(士瑩.이영)과 함께 어떤 배에 가서 불렀더니, 10여 인이 나오므로 데리고 오니, 상이 대단히 기뻐하였다. 이어 어좌(御座)를 보니 오직 유서애(柳西厓.유성룡)만이 들어와 임금 앞에 엎드려 있었고, 좌우에는 신성(信城)ㆍ정원(定遠) 두 왕자가 엎어져서 잠을 자고 있었다. 상은 여전히 채찍을 들고 앉아 있었는데, 당시 궁색한 행색 중에 이 날이 제일 심하였다.

● 임진강에 당도한 그날 저녁에 상하가 질서없이 강을 건너느라 인마를 많이 잃었다. 나는 사형과 약속하기를,

“그대가 말을 얻으면 나를 불러 같이 타고, 내가 말을 얻어도 그대와 함께 타겠소.”

하고, 진흙 속을 맨발로 가다가, 어떤 때는 무릎까지 빠져서 넘어지기도 했다. 어둡기가 칠흑 같아 지척을 분별할 수 없었는데, 말을 타고 오는 사람이 있기에 누군가 물었더니, 바로 유보(裕甫.이홍로)였다. 유보가 말하기를,

“내가 먼저 가서 밥을 지어 놓고 기다릴 테니, 그대들 두 사람은 잘 살펴 오시오.”

하였다. 조금 후에 병랑(兵郞)을 부르는 자가 있었다. 내가 사형에게 말하기를,

“내가 매우 걸음이 빠르니, 그대는 여기서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오.”

하니, 알았다고 하였다. 나는 상의 앞으로 쫓아가 횃불 하나를 얻어 들고 어마(御馬)를 수행하여 오니, 밤이 이미 깊어서, 또 사형을 만나지 못했다. 10리를 채 못가서 사형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급히 대답하기를,

“말을 얻어 그대를 기다려도 오래도록 오지 않아서 이미 가버렸으리라 생각했지만, 그래도 약속을 어기게 될까봐 감히 가지도 못하였소.”

하였다. 그제서야 둘이 함께 말을 타고 갔다. 유보는 찾지 못하였는데, 다음날 유보가 말하기를,

“그대들은 왜 오지 않았는가?” 하였다.

정경진(鄭景眞)이 동파(東坡)에 이르러, 부제학에서 뛰어올라 예조 판서를 제수받고 나서 말하기를,

“나이가 젊은데 갑자기 승급되어 여기에 이르니, 나는 죽을 것입니다.”

하고, 소를 만들어 면직을 빌고자 하였는데, 홍군서(洪君瑞)가 말리며 말하기를,

“나라는 깨어지고 집은 망하고, 지존은 몽진(蒙塵) 길을 떠났으니, 우리들의 생사가 조석에 달렸소. 어찌 유독 갑자기 승진된 것 때문에 죽는다 하오.”

하니, 드디어 면직을 청하지 않았다. 정(鄭)의 이름은 창연(昌衍)이고, 홍(洪)의 이름은 인상(麟祥)인데, 뒤에 이상(履祥)으로 고쳤다.

대가가 개성부(開城府)에 머물렀다. 어느 날 대소의 종신(從臣)들이 함께 한 문 안에 있었는데, 구원유(具元裕)가 문득 내소문(內小門)으로부터 몸을 구부리고 나왔다. 그리고 급히 부르며 말하기를,

“상께서 삼사(三司)는 입시하라 하시오.”

하니, 어떤 사람은 명을 듣지 못했다 하여 머뭇거리며 감히 들어가지 않았다. 구원유는 드디어 대사간 김숙진(金叔珍)의 손을 잡아 일으키며 말하기를,

“내가 친히 전교를 받들었는데, 어찌 감히 들어가지 않는가?”

하니, 마침내 모두 일어났다. 이공보(李公輔)도 헌납으로서 홍사신(洪士信)의 곁에 있다가 또한 일어나려 하니, 홍사신이 옷을 잡아 않히며 말하기를,

“누가 명을 전달했다고 자네들이 바로 입시하려 하는가?”

하였다. 대개 그들이 아계(鵝溪.이산해)를 논죄하기 위한 일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입시하자, 여러 사람이 아계옹(鵝溪翁)이 적과 내통하여 나라를 그르친 죄를 공격하였다. 또 구원유가 소리 높여 말하기를,

“황붕(黃鵬)은 산해의 조카인데, 그대가 어찌 감히 여기에 함께 참여했는가?”

하였는데, 난잡하여 질서가 없고 말들이 시끄러워 입시하는 때 같지 않았다. 구원유의 이런 행동은 내통했다는 말을 빌어서 아계에게 죄를 입히자는 것이었지만 친히 전교를 받았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 심 공망(沈公望)은 언사가 자못 강개하였다. 상이 송경(松京)에 도착하여 호남ㆍ영남 지방에서 징병하고자 하였으나 보낼 사람이 없었다. 심공망이 자청하여 아뢰기를,

“이런 시기에는 죽음도 두렵지 않사오니, 신이 가겠습니다.”

하니, 상이 위로하여 보냈다. 물러 나와서 오음(梧陰.윤두수)에게 말하기를,

“공은 지금 재상입니다. 공변된 마음을 펴고 사사로운 정을 버릴 수 있겠습니까?”

 

하니, 대답하기를, “그대의 말이 옳소.” 하였다.

● 정경진이 사당의 신주를 묻자고 의논하던 날, 신백준(申伯俊)은 상의 어찰(御札)을 받아 서울로 향하여 남아 있는 백성을 위유하려 하였다. 그가 마산(馬山)에 이르러서, 적이 벌써 도성을 점령했다는 잘못된 소문을 듣고는 겁이 나서 곧장 돌아왔다. 상이 개성을 출발하니, 행색이 황급하여 두서가 없었다. 보산(寶山)에 이르니, 종실 해풍(海豐)이 와서 오음에게 말하기를,

“어찌 종묘 없는 나라가 있겠는가. 공은 알지 못하는가?”

하니, 오음이 깜짝 놀라면서 말하기를,

“아무 날이 내가 재상이 된 날인데, 내가 재상이 되어 나라가 망했소.” 하고, 탄식하며 울었다.

거가(車駕)가 지나는 곳마다 아랫 사람들이 저지르는 행폐가 평상시보다 갑절이나 되었는데, 환관의 종들이 백관의 종들에 비하여 더욱 심했다. 금암(金岩)에 도착하던 날에는 떡과 반찬을 빼앗으려고 어소(御所)에까지 함부로 들어왔다. 선전관이나 여러 무관도 모두 금하지 못하였고, 상에게 드리는 물건도 빼앗기게 되었다. 신계 현령(新溪縣令) 정윤지(丁胤祉)는 거짓으로 땅에 쓰러졌다가 눈을 뜨고 똑바로 보면서 마치 기절한 사람같이 하였다. 그리고는 하인에게 돌아다니며 소리쳐, ‘아무 현령이 살해를 당했소.’라고 말하게 하였다. 상이 크게 놀라 급히 그를 움켜잡은 자를 체포하여 베이게 하니, 드디어 어찬(御饌)을 뺏긴 책임을 모면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사람이란 꾀가 있어야 한다. 오늘의 난동은 이 사람이 아니었으면 막을 수 없었으니 말이다.” 하였다.

상이 개성에서 유기성(兪杞城)ㆍ이오성(李鰲城)에게 신성(信城)ㆍ정원(定遠) 두 왕자를 모시고 먼저 평양으로 가도록 명하였다. 또 글을 내려 정인성(鄭寅城)을 불러서 왕자를 보호케 하였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내 평소에 경의 충절(忠節)이 대사를 부탁할 만한 줄 알고 있소.”

하였다. 글이 강계에 도착하자, 정인성이 곧 길을 떠나려 하니, 부사 홍세공(洪世恭)이 허락하지 아니하고 말하기를,

“비록 내리신 교서는 있지만 의금부의 공문이 오지 아니하였으니, 가시게 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그러다가 상이 평양에 왔다는 말을 듣고서야 비로소 허락하였다. 홍세공을 대단하게 여기는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난리 때에는 일을 마땅히 조심하고 치밀히 하여야 하는데, 이 사람은 강직하여 취할 만하다.”

하였는데, 내가 그 말을 듣고 말하기를,

“하서(下書)는 임금의 말이요, 공문은 작은 일이다. 대가가 송경에 도착하여 일이 갑작스러운 것이 많아 군신의 예절도 다하지 못하는 판국인데, 의금부의 공문을 어디로 보내겠는가. 망령된 행위라 한다면 괜찮지만 강직하다 하는 것은 내가 모를 말이다.”

하였다. 유기성(兪杞城)이 정승이 되고 나서 도체찰사를 겸직하였다. 행장을 꾸리고 떠나려고 할 때 내가 공사(公事)를 가지고 그 집에 갔더니 목공(木工) 네 사람이 마침 뜰에서 일을 하고 있었고, 허공언(許功彦.허성)ㆍ이징원(李澄源.이유징)이 종이와 붓을 잡고 좌우에 앉아 있었다. 나는 이상히 여겨 그 까닭을 물으니, 허와 이가 미소를 지으며 말하기를,

“나무 깎는 것은 가마[馬轎]를 만들려는 것이요, 종이와 붓은 격문을 기초하려는 것인데, 기성 또한 격문을 스스로 구상하고 있다.”

하였다. 대체로 세 사람이 각각 기초하여 그 가운데서 하나를 선택하여 쓰자는 것이다. 내가 돌아가서 윤해평(尹海平.윤근수)에게 말하니, 해원(海原.윤두수)이 곁에 있다가 웃으며 말하기를,

“그 애는 오활(迀闊)하여 쓸 수가 없다.” 하였다.

신립(申砬)이 패한 뒤에 거가(車駕)가 그날로 한성(漢城)을 출발하였다. 신립이 패전한 곡절은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고, 또 생사도 알지 못한다. 혹은 그가 산으로 들어가 중이 되었다 하고, 혹은 남중(南中)으로 내려가 다시 거사를 도모한다 하고, 혹은 방금 해서(海西.황해도)에 이르러서도 죄받을까 두려워서 감히 나오지 못한다고 하였다. 하루는 상이 여러 신하를 불러 함께 계획할 일을 의논하는데, 근심스러운 안색으로 이르기를,

“적의 기세는 과연 당하기 어렵구나.”

하였다. 이원부(李元夫.이충언)가 도승지로서 일어나 어전에 엎드려 얼굴을 들고 소리를 높여 아뢰기를,

“상감께서는 근심하지 마시옵소서. 신이 믿을 만한 사람에게 들으니 신립은 과연 죽지 않고 해서에 있다고 합니다. 불러 쓰시면, 왜적은 근심거리가 못됩니다.”

하니, 상은 허망한 말이라 생각하면서 비웃으며 이르기를,

“지금 장수감이 없는데, 도승지 같은 사람이 좋지 않겠는가?”

하였다. 이원부가 또 일어나 절하고 아뢰기를,

“신은 진실로 착착하여 장수가 될 수 없습니다.”

하니, 듣는 사람들이 포복절도하였다.

감사 권징(權徵)이 임진(臨津) 군중에 있으면서 치제하기를,

“마전 군수(麻田郡守) 박치홍(朴致弘)이 처음에는 벼슬을 버리고 관동(關東)으로 피했다고 하나, 실은 잘못 전해진 말을 듣고 그렇게 한 것이니, 중한 죄를 줄 필요가 없을 듯하옵니다. 또 이제 그 아버지를 위하여 호조 판서 박충간(朴忠侃)의 종사관이 되어 방금 행장을 꾸리고 있으니, 백의종사(白衣從事)의 형률로써 속죄하게 해 주시기 청합니다.”

하며, 많은 말을 반복하였는데 모두 박치홍을 구해 주려는 것이었다. 해원(海原)이 보고서 낯을 찌푸리며 말하기를,

“큰 도적이 경내에 들어 왔고 고군(孤軍)이 처음으로 모였는데, 자신이 경기 감사로 있으면서 할 일이 그리 없어 이런 일에만 급급(汲汲)합니까. 박치홍이 죄를 면하는 것이 과연 경기 감사에게 관계되는 일입니까? 이 분이 허둥지둥하는 것을 보니, 반드시 실성한 것입니다.” 하니, 내가 말하기를,

“권 감사는 침착하여 서두르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으니, 허둥지둥하는 것은 아니다.”

하였다. 해원이 말하기를,

“그대는 권징을 구원하고자 하는가?” 하니, 내가 대답하기를,

“만일 침착하여 서두르지 않은 것이 아니라면 장계가 어찌 이토록 자세하겠습니까?”

하였다. 이에 온 좌중이 모두 웃으며 아주 좋다고 거듭 말하였다.

● 송강(松江)이 서애에게 말하기를,

“내가 강계에 있을 때에 애들이 서울에서 글을 보내기를, ‘오늘의 의론은 서애가 대단히 준엄하여 기어이 사지(死地)에 몰아 넣으려 한다 합니다.’ 하였기에, 나는 아니라고 대답하였소. 뒤미처 또 글을 보내기를, ‘지난 번에 알린 말은 잘못 전했습니다. 구해준 분은 서애입니다.’ 하므로, 내 또 아니라고 대답하였소. 이 말이 공의 뜻에는 어떠하시오.”

하니, 서애는 옳다고 하였다. 나는 이 말을 인성(寅城.송강)에게서 들었다.

기성(箕城)의 비변사 뒤에 방 한 개가 있었는데, 여러 재상이 그곳에 가서 쉬었다. 하루는 홍사신(洪士信)이 그 방에 먼저 오고, 인성이 뒤에 와서 말을 나누는 사이에 서로 얼굴을 바라보며 둘 다 불편한 기색이 있었다. 조금 후에 인성이 배를 움켜쥐고,

“소합원(蘇合元)이 있는가?”

하니, 좌우가 모두 없다고 하였다. 사신만이 곧 말하기를,

“소인이 마침 가지고 있습니다.” 하고, 드리니, 인성도 아무렇지도 않게 이것을 받았다.

● 간관(諫官)이 아계 이산해의 죄를 논의하여 법으로 처형하려 하는데, 서애도 면치 못하게 되었다. 자상(子常)이 나에게 말하기를,

“유(柳)를 만일 함께 논의한다면 국사에 있어서 불미한 처사이니, 그 사이에 또한 어찌 차등이 없을 수 있겠는가. 빨리 아는 사람에게 통지하시오.”

하였다. 나는 대궐 문 밖에서 마침 윤 가회(尹可晦)를 만나, 그를 함께 논의하는 것이 불가하다고 힘주어 말하고 있는 중에, 해평이 오기에 또한 이것을 힘주어 이해시켜 드디어 중지시켰다. 아계옹(鵝溪翁)과 서애를 논의하자는 말은 원유(元裕)가 주장한 것이다. 임진강 싸움에서 패한 뒤에 여러 신하가 모두 말하기를, 평양은 서울처럼 꼭 지켜야 할 곳은 아니니, 버리고 떠나는 것이 낫다고 하였다. 오음만이 평양을 지켜야 한다고 역설하다가 그것을 말리지 못할 것을 알았다. 그래서 또 아뢰기를,

“서쪽 의주로 향하다가 상국(上國)에 달려가 호소하는 것이 대의가 됩니다.”

하고, 상ㆍ중ㆍ하의 세 가지 대책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상은 그것을 채택치 아니하고 드디어 여러 사람의 의론을 따랐다.

장차 북쪽을 향해 함흥(咸興)으로 가려 하는데, 심공직(沈公直.심충겸)이 부제학이 되어 함흥의 설을 주장하였다. 이윽고 이일(李鎰)이 대탄(大灘)으로부터 왔다는 말을 듣고 모두 말하기를,

“이일은 용렬한 부류가 아니니, 마땅히 이 사람을 기다려서 거취를 정해야 한다.”

하였다. 이일이 당도하자, 상하가 모두 말하기를,

“이일이 무슨 말을 할까” 하였다. 오음이 말하기를,

“평양을 포위하려 하는데, 공의 뜻은 어떠하오?” 하니, 이일이 말하기를,

“적의 기세는 당해낼 수 없소. 함흥은 북쪽에 용감한 토병(土兵)이 있고, 남쪽에는 험준한 산천이 있으니, 믿고서 견고한 곳이 될 만합니다.”

하였다. 심공직이 이일의 뒤에 앉았다가 갑자기 그의 등을 치며 말하기를,

“참으로 장수다운 말이오.”

하니, 징원(澄源)이 분연히 성내어 말하기를, “모두 용렬한 사람이다.”

하였다. 오음 또한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 인성은 익살이 섞인 농담을 잘 하였는데, 난리 중에도 여전하였다. 늘 서애ㆍ공언ㆍ징원 부자와 나 그 외 여러 사람이 연광정(練光亭)에 모여 멀리 적의 불이 소나무 사이에 깜박거리는 것을 보았는데 총소리도 끊이질 않았다. 서애가 울며 말하기를,

“우리들의 생사가 조석에 달렸으니, 이 모임이 영결(永訣)이 아닌 지도 모르겠소.”

하니, 인성이 말하기를,

“그렇지 않소. 결국은 다 함께 죽을 것인데, 어찌 영결이라 하겠소.”

하였다. 서애가 눈물을 닦고 웃으며 말하기를,

“신정(新亭)에서 청담(淸談)이 어찌 없을 수 있소.” 하였다.

평양에 홍문관(弘文館)을 설치하고 숙직을 폐하지 아니하였다. 하루는 서애ㆍ공저(公著)ㆍ공직(公直)ㆍ수백(守伯) 형제와 내가 그곳에 모였다. 공저가 말하기를,

“우리는 가마솥 안에 있는 고기라 이를 만하오.”

하니, 내가 말하기를,

“그렇지 않소. 걸어 다니는 시체요, 달리는 살덩이란 말이 바로 우리를 두고 말한 것이오.”

하였다. 서애가 말하기를, “그 말은 참 좋은 형용이요.” 하였다.

유지숙(兪止叔)이 평양에 머물며 지키게 되자, 당황하여 어찌할 줄을 몰랐다. 그래서 급히 그 아들 대건(大建)을 불러 말하기를,

“내가 앞으로 여기에 머물게 되었으니, 어찌할 것인가?”

하니, 대건이 귀에다 대고 얼마 동안 무슨 말을 속삭였다. 유지속은 상께 청하여 공저(公著)로 부랑(副郞)을 삼고 대동관(大同館)으로 나아가 소매를 빼고 교의(交椅)에 높이 걸터 앉았다. 공저가 하늘을 쳐다보며 말하기를,

“사람이 세상에 나서 이런 난리를 만나고 또 유홍(兪泓)의 부사(副使)가 되었으니, 어찌 치욕이 아닌가.”

하였다. 오음이 나에게 여러 사람의 말을 전하라 하기에 유지숙에게 가서 말하기를,

“이곳에는 이미 감사ㆍ병사가 있고, 또 따로 순찰사가 있으니, 이것으로 족합니다. 호종(扈從)이 너무 적으니, 다시 부사를 둘 필요가 없지 않소.”

하니, 유지숙이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나를 죽이겠다는 것인가. 이미 사지(死地)에 빠뜨리고 또 부사마저 빼앗으려고 하니, 이것은 나를 죽이는 것이다.”

하였다. 이를 돌아와 보고하니, 오음이 웃으며 말하기를,

“기성(杞城.유지숙)이 어찌 노했겠는가. 반드시 대건이 노한 것이리라.”

하였다. 다시 가서 알리니, 유지숙이 그 아들에게 말하기를,

“국사는 자제(子弟)와 논하지 않는 법이나, 너의 뜻은 어떠하냐?”

하였다. 대건이 드디어 교의(交椅) 뒤에서 몸을 숨기고 머리만을 내밀고 허락할 수 없다고 말하였다. 이에 유지숙이 곧 말하기를,

“차라리 죽을지언정 따를 수 없소.”

하였다. 다음 날 내가 또 공사(公事)로 찾아 가니, 유지숙이 멀리서 나를 바라보고는 불러 말하기를, 그대는 또 공저 때문에 온 것이 아닌가 하므로, 나는 공사 때문에 왔다고 대답하고, 또 좌상이 공의 임무를 대행하고 있는데, 공이 어째서 여기에 있느냐고 하였다. 유지숙이 기뻐하면서, 해원(海原)도 부사를 두었느냐고 물었다. 내가 아니라고 대답하자, 유지숙이 말하기를,

“해원이 나를 징계하는 건가?” 하였다.

자상(子常.이항복)이, 임진강의 방위가 결국 적을 막지 못할 것을 알고는 여러 번 조정에 말하여, 중국에 원병을 청하자고 하였는데, 오음이 채택하지 않았다. 하루는 의주 목사 황진(黃璡)이 파발을 보내 아뢰기를,

“관전총병(寬奠摠兵)이 군사를 이끌고 강을 건너와 친히 사정(事情)을 탐지한다 하기에, 왜적이 비록 관서에 다가 왔으나 우리 나라 병력으로도 이것을 대적할 수 있다고 대답했더니, 총병이 웃고 갔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것을 보고 크게 놀라, 대답을 잘못한 죄인을 잡아다 문초하기 위해 별도로 한 재신을 선택하여 보내려 하였다. 오음은 어쩔 수 없이 유회부(柳晦夫.유근)로써 그 선임에 응하였는데, 유회부의 뜻도 오음과 같아서 청병하려 하지 않았다. 자상이 이 때에 대사헌이 되어 장차 말을 만들어 체차하려 하였다. 마침 유회부가 예조 참판에 승직되니, 자상이 소매에 장계 초본을 가지고 있었으나 꺼내지 아니하고 말하기를,

“행하지 아니하면 직도 바뀌게 되니 어렵구나.” 하였다.

● 오음이 청병하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유회부를 보낸 뒤에 국사가 점점 급해지니, 명보(明甫.이덕형)는 조정에 극력 말하여 급히 천조에 청병하자고 하자, 오음이 마침내 이를 따랐다. 도리어 오음은 처음부터 청병을 주장하던 자와 같이 하였다.

● 내가 자상(子常)에게 묻기를,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명보가 관동으로부터 평양으로 따라 가던 날, 마침 어버이 곁에 있으면서 사람들이 길에서 장방창(張邦昌)의 고사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을 듣고서 오히려 빨리 출발하지 않고 엿새 동안 시일을 끌었다.’ 하는데, 나는 명보와 서로 알지는 못하나 이 말이 과연 근사합니까.” 하니, 대답하기를,

“명보는 반드시 그 말이 놀랄 만한 것임을 알지 못하고 엿새 동안 시일을 끌었을 것이니, 무엇이 이상하오?”

하였다. 내가 또 어찌 억측으로 사람을 평가하겠느냐고 하자, 대답하기를, 마음에 반분이라도 의심하는 생각이 들지 않기 때문에 안다고 하였다.

명보는 평양으로 뒤쫓아 와서, 인심이 이반되어 일을 할 수 없다고 극력 말하였다. 이어서 그는 인심을 위무(慰撫)할 수 있는 것을 진술하였는데, 끝말은 왕의 양위(讓位)와 그리고 왕의 자책(自責) 등의 일을 지적하는 것 같았으나, 오음이 대답하지 않았다. 그래서 마침내 그 말은 내지 못했다.

홍사신은 천성이 호걸스럽고 교만하여, 일찍이 남에게 굽히는 일이 없었다. 대가가 평양을 출발하려 하니, 그는 집으로 가 행장을 꾸려 호위하려 하였다. 그 때 길가의 난민들이 큰 막대로 그의 등을 치며 말하기를,

“금관자(金貫子)ㆍ옥관자(玉貫子)를 단 도적들아! 평시에는 많은 녹봉으로 잘 살고 있다가, 이미 도둑을 막지 못하더니 또 임금에게 우리를 버리고 가게 하느냐.”

하면서, 마구 때렸는데, 말에서 떨어져 겨우 죽음을 면하였다. 그는 다른 이에게 오늘 죽을 뻔 하였다고 말하고는 등을 만지며 아픈 것을 참고 앉았다. 징원이 말하기를,

“이 사람의 마음은 평양 사람에게 이미 죽은 것이네.” 하였다.

● 평양에 승정원을 설치하고 또 주서방(注書房)을 두었는데, 궁벽하여 일이 없으므로 여러 사관들이 청담이나 농담을 주고 받을 뿐이었다. 하루는 내가 그 방에 가니, 임진초(任晉初)가 슬픈 어조로 격동되어 말하기를,

“연로한 재상들은 부귀를 오래도록 누려서 비록 난리를 만났다 해도 유감이 없겠지만, 그대의 나이 겨우 20이 넘었고, 조정에 벼슬한 지는 1년도 못 되었는데, 어버이와 집을 떠나 우리와 함께 난리에 죽게 되었으니 어찌 원통하지 아니하오.”

하니, 이 말에 백준(伯峻)ㆍ선계(善繼)도 거들었다. 나는 무엇 때문에 이 말을 하는지 매우 괴이쩍었다. 다음 날 아침에 공저(公著)가 대중 앞에서 소리 높여 말하기를,

“사관으로 나이 어린 두세 무리가 스스로를 생각하기를, 조정에 선 지가 오래지 아니하니, 옛 임금님에게 그다지 큰 의리가 있는 것은 아니다 하여 위태로운 발언을 함에 이르렀고, 무사를 유인하여 같이 달아날 계획을 세우려고 하니, 진실로 가슴 아픈 일이다.”

하였다. 어떤 사람은 조공(趙公)이 너무 심하다고 말하였다.

오음이 정승이 된 뒤에 자못 시국을 담당하고 나가니, 최ㆍ유 두 분은 팔장을 끼고 있을 뿐이었다. 어느 날 오음이 상처(喪妻)하여 비변사에 나오지 아니하니, 여러 재상들이 종일토록 머리를 맞대고 있으면서도 한 가지 일도 처리하지 못하였다. 공저가 말하기를,

“오늘에야 비로소 정승이 없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마치 병아리 떼가 어미를 잃어버림과 같아서 논의하여도 절충할 곳이 없습니다.” 하니,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영의정, 우의정은 정승이 아닙니까?”

하니, 공저가 머리를 흔들며 말하기를,

“논의는 할 수 있지만 절충은 해내지 못합니다.” 하였다. 

김의백(金宜伯)이 어전에서 평안ㆍ함경도에 대한 지리의 원근을 논하였는데 매우 자세하였다. 상이 기재(奇才)라 생각하여 병조의 낭관으로 발탁하고는 북도를 탐지해 오게 하였다. 김의백이 떠날 때 울면서 나에게 말하기를,

“서북의 이해(利害)에 대하여 조정의 의론이 이미 한결같지 않고, 상의 마음 또한 결정한 것이 없으니, 나는 반드시 중도에서 낭패하여 임금과 어버이 둘 다 못 뵙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이번 걸음이 영원한 이별인 것 같습니다.”

하였다. 얼마 안 되어 대가가 의주로 향했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와 양덕(陽德)에 도착하니, 사신(士信)이 말하기를,

“주상께서는 벌써 요동으로 건너 가시고 세자는 간 곳을 모르니, 사세가 어찌할 수 없게 되었다.”

하니, 김의백이 통곡하고 갔다고 한다.

오음이 여러 사람과 인물을 논할 적에 위압함이 있어 감히 떠들지를 못했다. 어느 날 상이 여러 재신(宰臣)에게 일을 의논하게 하자, 좌우 신하들이 각각 소견을 말하고 그것을 옳다고 여겨 꼭 자기의 주장을 실행하고자 하였다. 상도 여러 의론이 한결같지 않음을 들어 난색을 표하였다. 이에 오음이 말하기를,

“옛 사람은 말을 드릴 뿐이옵고 그것이 시행되고 안 되는 것은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 아니하오면 어떻게 여러 계책을 굽힌다[屈群策]하겠나이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참으로 그렇소.”

하였다. 여러 사람이 드디어 잠잠하였다.

● 적이 임진강을 건너자 조정에서 생각하기를, 중화(中和)는 평양과 가까우니 수령을 불러들이는 것만 못하다 하고, 바로 군수 김요립(金堯立)을 불렀다. 이 때에 서애는 마침 이 의론에 참여하지 않았다. 김(金)이 와서 뵙자, 서애는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이것도 도주한 것이다.”

하고, 빨리 효수(梟首)하려고 계주(啓奏)하기에 이르렀다. 오음과 여러 재신이 그 곡절을 낱낱이 말하자, 서애가 말하기를,

“수령이 도주를 잘 하는 것은 군률이 엄하지 않기 때문이니, 용서할 수 없소.”

하였다. 여러 사람이 극력 해명했으나 듣지 않더니, 결국은 사형을 감하고 장(杖)을 치기로 결정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사람의 운명은 알 수 없다. 도주하고서 산 자는 무수히 많지만 도주하지 않고 죽을 뻔한 자는 이 사람 뿐이다. 마땅히 도주하는 것이 쌀밥 먹는 것과 같다는 말이 있을 만하다.” 하였다.

이일(李鎰)이 순변사(巡邊使)가 되어 상주(尙州)에 당도하여, 얻은 군사는 1천을 넘지 못하였고, 충주에서 패전한 것도 이일의 죄가 아니었다. 또 해암(蟹岩)에서 승전한 일이 있으므로 조정에서는 특별히 그를 우대하였다. 대탄(大灘)의 군사가 무너지자, 이양원(李陽元) 이하가 혹은 흩어져 도주하고 혹은 북도(北道)로 들어갔는데, 이일만은 수천의 군사를 이끌고 평양으로 향하니, 조정에서 그를 더욱 가상하게 여겼다. 그는 도중에 먼저 사람을 보내어 성을 지키는 방책을 올렸는데, 매우 조리가 있어서 모든 사람들이 기쁘게 여겼다. 조정에 나오는 날, ‘대가는 함흥으로 피해야 하고 평양은 지킬 수 없다.’고 즉시 말하자, 이명보(李明甫)ㆍ심공직(沈公直)이 뒤편에 있다가 극력 찬성하니, 상하가 실망하였다. 오음이 이일에게 묻기를,

“공은 어째서 평양을 포기하는 것이 성을 지키는 계책이라 말했소.”

하니, 이일이 한참 생각하다가 말하기를,

“종사관이 스스로 한 짓이지 저는 알지 못합니다.”

하였다. 오음이 어찌하여 서명하였느냐고 묻자, 이일은 머리를 숙이고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오음이 다른 사람에게 이 사람은 실성했다고 말하였다.

심사진(沈士進)이 나와 함께 비변사에 있을 적에 의론이 시사(時事)에 미쳐서 내가 말하기를,

“이미 어떻게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니, 심사진이 대답하기를,

“근심하지 마오. 중흥(中興)은 멀지 않을 것이오.”

하였다. 내가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심사진이 대답하기를,

“홍연길(洪延吉)의 아들이 어리석고 글자도 모르는데 어느 날 꿈에 글 한 구절을 얻었습니다. 그 글에,

보슬비 오는 날 버들은 푸른 빛을 머금었는데 / 細雨天含柳色靑

샛바람 불어와 말발굽이 가벼웁네 / 東風吹途馬蹄輕

태평해져 명관들이 조정으로 돌아 오는 날 / 太平名官還朝日

승전가를 올리니 기쁜 소리 장안에 가득하구나 / 奏凱歡聲滿洛城

하였습니다. 이것이 신묘년(1591, 선조 24) 겨울의 일입니다. 홍연길의 적소(謫所)로 부쳐 보내며, 오래지 않아서 귀양이 풀릴 것이라 하였습니다. 이에 홍연길이 꾸짖어, 누구에게 속임을 당하여 이런 말을 하느냐 하였으니, 어찌 중흥의 징조가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내가 연길에게 묻기를, “이 말이 과연 그러했습니까?” 하니, 그가 대답하기를,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문리(文理)가 넉넉지 못하여 주개(奏凱)를 내가 석방되어 돌아 가는 징조로 해석한 모양입니다. 천함(天含)이란 또 무슨 뜻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하였다. 나는 웃으며 말하기를,

“만일 중흥의 공을 논하게 되면 그대의 아들이 제일이겠습니다.”

하니, 홍연길도 웃었다.

유지숙(兪止叔)이 정승이 되니, 도체찰사(都體察使)를 겸했기 때문이다. 유지숙이 하직하고 나간 뒤에 상이 좌우의 신하들에게, 우상이 어떠냐고 말하자, 어떤 이가 기절(氣節)이 있다고 대답했다. 이에 상은, 기절은 어떤지 모르겠거니와 단지 생각하지 않고 말을 한다고 하였다. 그 후에 송강이 이 말을 듣고 말하기를,

“신하를 알기는 임금만한 이가 없다. 형용을 잘함이 이 넉 자(不思而言)만한 것은 없을 것이다.” 하였다.

유지숙이 비변사에 있을 적에 어떤 사람이 동쪽에서 왔는데 말하기를, 적의 형세가 고단하고 취약하다고 하면 꼭 이 사람은 쓸 만하다 하고, 적의 형세가 성하다고 하면, 꼭 이 사람은 쓸 만한 사람이 못 된다 하였다. 어떤 사람이 이것을 기롱하여 말하기를,

“공은 사람을 올리고 낮추는 것이 모두 혀끝에서 나오니, 어찌된 일입니까?”

하니, 유지숙이 대답하기를,

“적진의 형태를 자세하게 보아야 외롭고 약함을 알 수 있는 것이니, 이것은 쓸 만한 것이요, 단지 적이 횡행하는 것만을 멀리서 바라보고 성하다고 말하는 자는 쓸 만하지 못한 것이오.”

하였다. 듣는 사람들이 웃으며, 정승다운 말씀이라 하였다.

요인(妖人) 이화(李和)가 《논명서(論命書)》를 얻어서 곧잘 사람들의 평생을 점쳤는데 간혹 맞는 것도 있었다. 유지숙이 신묘하게 여겨 꼭 그와 함께 다녔다. 유지숙이 체찰사가 되어 길흉을 물었더니, 이화가 말하기를,

“금년에 반드시 큰 공을 세울 것입니다.”

하였다. 유지숙이 여러 사람들 앞에서 큰 소리로, 내가 중흥의 제일 공신이 될 것이다 하면서 자못 자부심을 보였다. 뒤에 또 점을 치니, 이화는 본명(本命)은 매우 좋으나 점사(占辭)는 극히 흉하다고 하였다. 이에 유지숙이 멍하니 낙심하여 감히 길을 떠나지 못했다. 이 얘기를 들은 사람들은, 비록 이화의 점사가 극히 길하다 하더라도 왜적이 망하지 아니하면 운이 오지 않을 것이니, 어쩌겠는가고 말하였다. 사람들이 모두 아니꼬와 했다.

서울을 떠나던 날, 상하가 매우 두려워하여 모두, 중도에 반드시 큰 변이 생길 것이라고 말하니, 인심이 서늘해져 조석을 보전하지 못할 것처럼 여기고, 따르던 관리들도 주저하는 기색이 있어, 이미 옷을 바꾸어 입었다. 동파역(東坡驛)에 당도하자 자상(子常.이항복)과 나는 중숙(重叔)의 뒤에 있었는데, 내가 웃으면서 흑각관자(黑角貫子.서인이 사용하는 것)를 가리키니, 중숙이 벌써 자기를 놀린 줄 알았다. 이날 저녁에 다시 금관자로 바꾸었다.

● 유지숙이 내전(內殿)을 모시고 영변에서부터 박천(博川)에까지 대가를 뒤쫓아 왔다가 세자가 벌써 강계(江界)에 갔다는 말을 듣고 즉시 아뢰기를,

“신은 늙고 몸이 쇠하여 상을 수행할 수 없으므로 세자를 수행하기 바라옵니다.”

하니, 상이 그 말을 들어 주었다. 박천군 안의 5리쯤 되는 곳은 나무가 울창하였는데, 한 가닥 오솔길이 열려 있었다. 임진년 6월 삼경에 대가가 출발하니, 종관 10여 인이 앞에서 길을 인도하였는데, 무사는 겨우 5ㆍ6명에 불과하였다. 자상이 말을 채찍질하면서 나를 불러 말하기를,

“나와 그대는 모두 병관(兵官)이고 또 전위대가 너무 허술하니, 앞서 가야 하지 않겠는가.”

하고는, 곧 어마(御馬)를 매질하며 나갔다. 상이 내관(內官)을 돌아보며 누구냐고 물으니, 아무개 아무개 올시다 하였다. 당시에 시위가 고단하고 취약하며 인심이 매우 두려워하는 것이 임진강(臨津江)에서 보다도 더 심하였다.

한리학관(漢吏學官) 이재영(李再榮)이 사자관(寫字官)을 이끌고 중도에서 도망가니, 종행하던 여러 신하들이 모두 계문(啓文)의 규식(規式)을 알지 못할 뿐 아니라, 또 글을 쓸 만한 사람도 없었다. 하루는 내가 자상(子常)ㆍ대년(大年)과 같이 각각 장계 하나씩을 지었는데, 문세(文勢)와 자체(字體)가 제대로 되지 못하였다. 그 뒤에 자상ㆍ대년은 팔에 병이 나 쓰지 못하여 내 혼자 쓴 것이 10여 편이나 되었다.

이공저(李公著)는 매우 농을 좋아했다. 대가를 따르는 신하 가운데 6품은 단지 나 한 사람뿐이었는데, 이미 병조의 낭관으로서 또 이조통부(吏曹通符)를 차고서 예조ㆍ호조의 일을 겸하여 다스리고, 또 내승(內乘)의 수레 모는 사명을 띠었다. 이공저가 말하기를,

“공의 재주는 소 계자(蘇季子)보다 훨씬 낫소. 소 계자는 6국의 재상인(宰相印)만을 찼을 뿐이었는데, 공이 다스리는 것은 6조 이외에도 태복시(太僕司)의 일을 더 맡았으니 말이오.”

하자, 일행이 모두 껄껄 웃었다. 대가가 영변에 머물러 있을 동안 외탄(外灘)이 무너졌다는 말을 듣고, 요동으로 갈 것을 결의하면서 이공저에게 상이 이르기를,

“경은 이미 늙었으니, 세자를 수종하는 것이 마땅하오.”

하였다. 이공저가 이징원과 이별하려 할 때 부자가 대단히 슬피 울었다. 얼마 안 되어, 성중(誠中)에게도 대가를 수종하라는 상의 전교가 내리니, 공저는 그렇게 된 이유를 전혀 알지 못했다. 대가가 정주(定州)에 도착하던 날, 나는 뒤처져 말을 몰아 가니, 정여인(鄭汝仁)ㆍ윤선수(尹善修)ㆍ민중심(閔仲深) 등 세 사람이 말 안장을 부려 놓고 길가에 앉아 있었다. 내가 왜 여기에들 있느냐고 물으니, 모두 병이 들어 갈 수가 없다고 하였다. 나는 그들의 언사를 괴이쩍게 여기고 먼저 갔는데, 조금 뒤에 정여인이 혼자서 왔다. 정의 이름은 희번(姬藩), 윤의 이름은 우신(又新), 민의 이름은 준(濬)이다.

사간 유선여(柳善餘)와 응교 윤자술(尹子述)이 나와 함께 어느 촌가에 모였다. 말이 시사(時事)에 미치자, 유선여가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신묘년에 꿈을 꾼 적이 있었는데, 다시 좋은 때를 볼 것이 아닌가 하오.”

하니, 윤자술이 말하기를,

“내가 소시 적에 운명을 추정한 말[推命辭]이 있었는데, 역시 틀리지 않았소. 만일 그것이 맞다면 앞길이 역시 원대할 것입니다.”

하였다. 나는 시험삼아 그 얘기를 해보라고 하였다. 유선여가 말하기를,

“꿈에 대궐 안의 인정전(仁政殿) 같은 곳에서 공신을 위해 큰 잔치를 베풀었는데, 나도 그 자리에 참여하였으니, 어찌 중흥의 녹훈(錄勳)을 받을 징조가 아니겠소.”

하니, 윤자술이 말하기를,

“운명을 추정한 말에, ‘임진년 7월에 마땅히 이마에 옥을 꽂을 경사가 있겠고, 이후로부터는 이름과 지위가 빛나 벼슬은 정승ㆍ판서에 오르고 편안하게 40년간 부귀를 누린다.’고 하였습니다. 과거에 합격하여 고을 원으로 나간 해도 그 말과 똑같이 맞았으니, 어찌 믿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두 분의 꿈이 모두 길하니, 시사(時事)는 근심할 필요 없겠소.”

하니, 유선여가 말하기를,

“이 말을 하게 된 것도 답답한 소망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였다. 윤자술은 그 뒤 7월에 과연 당상에 올랐다.

● 이여진(李汝震)ㆍ심공망(沈公望)과 나는 베개를 나란히 하고 용천군 문루 마루판 위에서 잤다. 심공망이 밤에 갑자기 일어나 탄식하며 말하기를,

“대적(大賊)이 뒤따르는데 한 사람도 막는 자가 없구나. 압수(鴨水)는 단지 한 나부랭이 띠처럼 사이에 두고 있어 갈 곳도 없는데, 인심은 느릿느릿하여 걱정하고 절박해 하는 태도가 없으니, 조용히 죽기란 어렵다고 누가 일렀는가.”

하니, 이여진이 말하기를,

“우리도 장차 옛 사람에게 부끄러움이 없게 되겠는가?” 하고, 내가 말하기를,

“왜놈은 금수 가운데서 하나의 별종이어서, 사람을 만나면 곧 모두 잡아 죽입니다. 사람이 잡히면 죽게 되어도 쫓지 아니하지만, 어찌 모두 의를 품은 사람이겠습니까”

하자, 모두 그렇다고 하였다.

● 수문장 이사공(李士恭)은 무사들이 흩어져 달아나는 때에 홀로 늙은 어머니를 버리고 대가를 인도하여 갔다. 영변에 이르자, 대간과 사관도 많이 뒤처지고, 수행 무관도 10명이 되지 않았는데, 이사공은 한 마음만을 먹고 딴 생각을 하지 아니하였다. 조정이 둘로 나뉘어 가게 되자, 양쪽의 종관(從官)이 모두 낙점되었는데, 이사공은 세자를 따르게 되었다. 이사공이 나에게 묻기를,

“모든 사람들이 요동으로 건너가는 것은 꼭 죽으러 가는 것인 줄 알고, 세자를 따르는 것은 사는 것으로 압니다. 세자 또한 작은 임금이기에 배행(陪行)해야 하겠지만, 내 마음으로 말하오면 간절한 일념은 옛 임금에게 있습니다. 비록 대가를 따르더라도 의리에 해롭지 아니합니까?” 하니, 내가 대답하기를,

“다같이 우리 임금이지만 어찌 정의(情義)의 소재야 없겠소. 하물며 도망가는 유가 아니니, 크게 해로울 것은 없을 것 같소.”

하니, 이사공이 그렇게 알고 갔다. 얼마 후에 돌아와 말하기를,

“동궁과 대가는 의리로 보아 피차를 따질 것이 없지만, 일은 순리대로 받아들여야 하니, 임의로 수행함은 자못 온당한 일이 아니라 생각되기에 강계로 방향을 정했습니다.”

하였다. 그가 사세와 의리의 사이를 저울질하고, 거취의 마당에서는 침착하게 처신하는 것은 사람마다 미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사알(司謁) 최세준(崔世俊)이 나이가 많아서 잘 걷지 못하여 의주(義州)의 뒷 다리 옆에서 땅에 엎드려 크게 울면서 말하기를,

“늙은 놈이 끝까지 떠나가지 않는 것은 옛 임금에 대한 정을 잊지 못해서 입니다. 걸어가자니 숨이 가빠서 여기에서 죽겠습니다.”

하니, 가엾게 여기지 않는 종관이 없었다. 그를 수레에 싣고 오게 하였다.

● 관서 일대에서 대가가 거처간 곳의 사람들은 모두 말하기를,

“적의 소망은 단지 대가를 따라 잡는 데에 있다.”

하고, 원근에 말을 전하니, 서로 잇달아 도망갔는데, 의주가 더욱 심했다. 목사와 판관은 각각 종 한 사람을 데리고 갈 뿐이었다. 목사 황경미(黃景美)가 빈청(賓廳)에 말하기를,

“백성들은 피난해도 되겠지만, 성안의 새까지 다 바다를 건너 갔으니, 어찌 변이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10여 일 뒤에야 차츰차츰 다시 모여 들었다.

이자상(李子常)ㆍ이명보(李明甫)가 일찍이 등창병을 얻어 연일 방에 누워 신음하였다. 이자상이 이명보에게 시 한 수를 지어 보냈는데, 그 끝구절에,

우리는 마치 서리 맞은 귤 같아서 / 吾儕正似迎霜橘

아직 가을이 깊지 않은데도 반쯤 누렇구려 / 未到深秋一半黃

하였다.

● 이여진(李汝震)은 일찍이 남의 과실을 말하지 아니하였는데, 어느 날 정사를 의론하는 자리에서 크게 말하기를,

“사람의 마음 씀은 알 수 없다. 임진년 변란 초에 정언 정사신(鄭士信)이 소를 올려, 늙은 어미를 뵙기를 청하니, 이런 때에는 어버이를 돌아볼 수 없다고 비답하여 사신이 모친을 뵈러 가지 못했다. 매양 여러 사람 가운데서 화제가 시사(時事)에 미치면 반드시 통곡하였는데 말이 대단히 강개(慷慨)하였다. 대가가 반송(盤松)에 당도했을 적에 이 사람이 어디로 갔는 지를 몰랐다. 그 사람의 못난 형상이 이와 같았다.” 하였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