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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고사(古文故事)

임진잡사(壬辰雜事) 2/2 - 박동량

작성자허현|작성시간18.01.20|조회수184 목록 댓글 0

 

● 오음(윤두수)은 평양을 지키라는 명을 받고, 서애(유성룡)는 명나라 장수를 영접하라는 명을 받았다. 서애는 망설여서 출발치 않고 있다가 대가보다 나중에 떠났다. 그리고 조승훈(祖承訓)ㆍ사유(史儒) 여러 장수들까지도 영접하지 않았다. 의주에 이르자, 상이 서애에게 먼저 정주(定州) 등지로 가서 군량을 수습하여 천조(天朝) 군사의 양곡을 준비하라고 명하였는데도 병을 핑계삼아 오랜 동안 출발하지 아니하니, 상이 여러 번 가기를 재촉하였다. 오음이 유서애는 병이 들어 길을 떠날 수 없으니, 대신 가겠다고 말하였다. 그런 뒤에야 서애는 비로소 길을 떠났다. 이 일 때문에 사람들은 그가 일을 회피한다고 의심하였다.

어느 날 이자상이 말하기를,

“사변 당초에 상이 서애에게 명하여 서울을 남아서 지키라 하였을 적에 내가 생각건대 만일 상국(上國)과 교접(交接)하게 되면 응대(應對)할 적에 이 사람이 아니고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여, 여러 번 단독으로 아뢰어 끝내는 이백춘(李伯春.이양원)으로서 그를 대신케 하였고, 평양에서도 그를 힘써 구원하였습니다. 이제 대절목(大節目)을 보니, 옳지 못한 곳이 있습니다.”

하니, 내가 말하기를,

“중국 장수를 영접하고, 군량을 수습하는 일을 말함이 아닙니까?”

하니, 아니라고 대답하고는 끝내 말하지 아니하였다.

이자상ㆍ이효언(李孝彦.이호민)과 내가 일찍이 용만관 바깥에서 달을 구경하며 산책한 적이 있었다. 이자상이 성루에 가 보는 것이 좋겠다 하여 손들을 잡고서 갔다. 돌아 올 때에, 이자상이 어찌 말을 달려서 가지 않겠는가 하고는 채찍질하여 달려갔다. 이효언도 이자상과 같이 가버렸고, 나는 말이 다리에게 거꾸러져서 군색한 걸음으로 돌아 왔더니, 이효언이 심히 조롱하였다. 이튿날 내가 이효언에게 말하기를,

“어제는 말이 쓰러져서 그랬지, 내 잘못이 아니오. 오늘 나와 한 번 시합해 보지 않겠소?”

하였다. 그래서 연달아 채찍질하여 달려서 겨우 큰길에 나오자, 이효언은 풀쩍 말에서 떨어져 말 달리는 길 위에 가로 넘어졌다. 나는 말을 달려서 성루에 이르렀다. 그리고는 이효언에게 되묻기를,

“오늘 말 달리기는 어떠하였소.” 하니, 이효언이 웃으며 대답하기를,

“다친 데는 묻지 않고 말 달리는 것만 물으니, 그대는 이기기를 좋아하는 자라 하겠소,”

하였다. 이자상이 이 말을 듣고 말하기를,

“불쌍하다 효언이여, 불쌍하다 효언이여.” 하였다.

● 이이립(李而立.이상신)은 유회부(柳晦夫)의 종사관으로서 평양으로 향하다가 대가가 벌써 박천에 당도했다는 말을 듣고 구성(龜城)으로 돌아 들어갔다. 이 때에 평양이 또 무너지니, 원근이 모두 두려워하였다. 부사(府使) 윤자일(尹子一.윤승길)이 윤자술(尹子述)과 마주 앉아 일을 계획하고 있었는데, 문득 한 아전이 달려와 고하기를,

“황당한 행차 하나가 객헌(客軒)에 들었습니다.”

하였고, 관노가 또 들어와 놀랜 얼굴로 고하기를,

“부내(府內)의 백성들이 모두 왜놈의 장수가 부에 이르렀다고 하고는 벌써 다 흩어져 갔는데, 어찌하여 오래 여기에 앉아 계십니까?”

하였다. 윤자일이 다시 아전에게 묻기를,

“왜놈의 장수란 말이 어디에서 나왔는가? 이는 바로 좌랑 이상신(李尙信)이니, 놀라지 말라.”

하니, 아전이 엎드려 말하기를,

“소위 이 좌랑이라는 사람은 말하는 것이 크고 느리며 입과 눈이 찌그러지고 걸음걸이도 매우 수상하여 사람들이 이 때문에 왜장이라 하였습니다.”

하였다. 윤자일이 이이립에게 이 일을 빠짐없이 말하니, 이이립이 크게 부끄러워했다.

● 감사 이원익(李元翼)은 몸집이 크지 않았다. 임진년 7월에 강변 여러 고을에서 군사를 모아 가지고 곧 행조(行朝.피난간 조정)에 도착하니, 그가 탄 말은 작고 수행한 사람이라고는 단지 두 명의 작은 동자가 앞서서 올 뿐이고,절월(節鉞.절은 깃발과 같고 부월은 도끼와 같이 만든 것으로 생살권을 상징)도 또 중간이 부러졌다. 어떤 사람이 이것을 보고 놀려대기를,

“참으로 작은 나라의 감사다.” 하니, 이원익이 말하기를,

“제관(第觀)을 작게도 하고 크게도 하는 것이 내 장점이다.”

하자, 듣는 사람이 모두 웃었다.

● 이자상이 어느 날 나에게 말하기를,

“근자에 오공(梧公.이원익)이 하는 일을 보니, 일개 무모한 사람에 불과하오.”

하니, 내가 대답하기를,

“무모하다면 온화한 정이 또 많겠습니다.”

하였다. 이자상도 그렇다고 하였다.

인성(寅城)이 일찍이 말하기를,

“내 일생에 꿈과 현실이 많이 부합되었습니다. 신묘년에는 꿈에 강계 부사가 되더니, 얼마 안 되어 강계로 귀양살이를 갔고, 위리안치(圍籬安置) 중에 또 종명(宗溟.인성의 아들)이 대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으나 거리를 돌아다니는 일이 없는 꿈을 꾸었더니, 얼마 안 되어 용방(龍榜)의 선발에 뽑혔고, 또 이경(李璥)이 종기가 생겨 진주(晉州)에서 죽는 꿈을 꾸었는데, 지금 장계를 보니, 과연 그러하였소.”

하였다.

인의(引儀) 이춘간(李春幹)이 일찍이 압마관(押馬官)으로서 요동에 부임하여 공마(貢馬) 8필을 잃어버렸다. 이춘간이 길에서 부르기를, “말이 어디로 갔소?”

하니, 요인(遼人)이 세모[甚磨 무얼 그러시오]라고 하였다. 이춘간이 즉시 묻기를,

“사마(四馬.네 필의 말)를 알아 들었다면 나머지 사마는 못 알아 듣는가?”

하였다. 대개 세모[甚磨 셈모라고 발음되는데 빨리 말하면 세마, 사마(四馬)로 들린다.]의 음이 사마와 비슷해서이다. 이어 수레를 몰고 오는 자가 있었다. 이춘간이 또 길을 막고 서서 그 바퀴를 붙드니, 요인이 바퀴로 기어 올라 오려나 생각하고, 까오까오[高高 높아요, 높아요. 못 올라 와요.]라고 말했다. 이춘간이 즉시 대답하기를,

“갑오(甲午)생이라니, 바로 나와 동갑이오.”

했다. 대개 까오[高]의 음은 갑오(甲午 까오와 갑오는 음이 비슷하다)와 비슷하다. 그래도 가지 아니 하자, 요인이 크게 노하여 마구 때리고 갔다. 이공저(李公著)가 늘 이 사람은 내 소시적 친구라고 말하였다.

● 이자상이 농담을 잘 하였는데,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동인, 서인의 싸움이 결국 왜놈을 불러 들였으니, 매우 가슴 아픈 일이오.”

하니, 이자상이 대답하기를,

“동서의 사람들은 싸움에 익숙한데, 조정에서는 어찌하여 이들더러 왜적을 막으라 하지 않는가.”

하였다. 이공저가 나에게 말하기를,

“내 얼마 전 인성(寅城)을 만나 보았더니, 분당(分黨)하는 마음이 지나쳐 아직도 그치지 아니하니, 민망한 일이다.”

하니, 내가 대답하기를,

“군국(軍國)의 중대사에는 한 마디 말도 하지 아니하니, 도리어 오음(梧陰)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전에 들은 바와는 크게 다르다.”

하였다. 이공저가 말하기를,

“유독 동서의 말만 끌어내면 언론이 바람일 듯하여 모든 사람이 따라가지 못하니, 가위 당론(黨論)을 위해서 태어난 사람이라 하겠다.” 하였다. 징원(澄源)이 나에게 말하기를,

“인성(寅城)은 청백하고 소탈하나 동서 싸움에 누(累)가 되었고, 서애(西厓)는 주밀하고 자세하나 사정(事情)에 너무 찰찰하고, 오음은 천품은 좋으나 사(私)에 지나쳐서, 모두 씀에는 적당치 못한 데가 있다. 그러나 서애에게 규구(規矩)와 제도를 강론하여 결정하게 하면 오음보다 훨씬 나을 것이다.” 하였다.

● 유회부(柳晦夫)는 식견이 얕고 좁아서 일을 알지 못했다. 일찍이 도승지가 되어 해조(該曹)의 관리가 옛 법을 따르지 아니하는 것을 보고는 절도없이 꾸짖으니, 사람들이 모두 노했다. 어느 날 징원이 말하기를,

“회부가 일을 처리함은 너무도 신산하여 말할 것이 못된다.”

하니, 이효언이 말하기를,

“어찌하여 유(柳)를 매(梅.매실은 시기 때문에 비꼰 말임)로 고치지 않느냐?”

하자, 여러 낭관들이 듣고 모두 명언이라 말했다.

이공저(李公著)는 남의 좋은 점과 나쁜 점을 말하기 좋아하였다. 일찍이 말하기를,

“오음은 일에 있어서 사사로운 것이 많고, 또 동서 당론에도 관심이 없지 않는데 유독 상의 비위 맞추는 것만을 좋아하지 않으니, 이것은 취할 만하다.” 하였다.

정충신(鄭忠信)이라는 자가 있어 나이 17세에 징병에 응모하여 최원(崔遠)을 따라 강화에 이르렀다. 일찍이 왜인들의 목을 베고 이어서 서장(書狀)을 가지고 왔다. 그 얼굴이 매우 아름답고 말이 유창하였는데 극히 조리가 있어서 사람들이 모두 사랑하였고, 그 중에서도 이자상이 특히 심하였다. 그래서 그와 같은 이불에서 자고, 길 갈 때에도 꼭 동행하고 앉을 때에도 꼭 붙어 있었다. 그에게 과거 보기를 권하여 마침내 무과에 합격하니, 사람들이 그를 이 판서(李判書)의 별실(別室)이라고 하였다.

● 징원(澄源)이 어느 날 이자상과 변방의 일을 논쟁하면서 서로 굽히지를 아니하니, 이자상이 변색하고 말하기를,

“근래에 기강이 해이하여 낭청이 당상과 다투려 하니, 놀랄 일이다.”

하니, 내가 말하기를,

“일이 옳지 못하면 임금과 아버지의 과실도 다투는데, 더구나 어수선한 때를 당하여 수수방관만 한다면 당상과 낭관의 체모는 서겠지만, 적의(適宜)치 못한 처사는 끝내 바로잡을 길이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오음이 참으로 옳은 말이다 하였다.

● 이자상이 여러 대신과 일을 의론한 적에 그것이 불가함을 분명히 알면서도 입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말하기를,

“이런 때를 당하여 자신이 병조 판서로 있으면서도 일에 임하여 시비를 가리는 것이 없으니, 어찌 공에게 바라는 바라 하겠습니까. 승지에서 몇 품계를 뛰어 올려 정경(正卿)을 제수한 것은 침묵만 지키고 있으라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하니, 이자상이 웃으며 대답하기를,

“대소의 일을 오음이 이미 주장하였소. 나의 생각이 꼭 그보다 낫지 않는데, 혹시 간섭하여 일을 방해하게 되면 이것은 침묵하는 것만 못할 것이오.” 하면서, 끝내 그 태도를 고치지 아니하였다.

● 심백구(沈伯懼)가 말하기를,

“임진년 봄에 사간원에 들어가 사간이 되었습니다. 그때 이미 신립(申砬)이 전라도 순변사가 되어 재인(才人)의 계집을 데려다 기르므로 어쩔 수 없이 그 허물을 다스려야 한다는 의론이 있었습니다.”

 

하였다. 심백구가 나와서 말하기를,

“처음 장계를 올려 3일이 지나도록 윤허를 받지 못했는데, 이윽고 서당(書堂)의 관원을 몹시 바쁜 자리에 오래 있게 함은 불가하다 함이 있어, 서당관(書堂官)으로 대간(臺諫)에 있는 자를 모두 체차했습니다.”

하였다. 대개 그 때에 대간으로서 서당에 선임된 자는 홀로 심백구 한 사람뿐이었다. 바로 체차되어 사성이 되자, 그 날로 그 논란이 중지되었다. 사람이 비방을 면하려고 하니, 그 교묘함이 이와 같았다. 이 의논을 주장한 사람은 정사신(鄭士信)이었다.

● 경연에 입시하는 여섯 승지는 그 순서를 의론하여 정했는데, 차례를 잊어 버리는 자가 없었다. 유회부(柳晦夫)가 도승지가 되어서 인대(引對)가 있으면 대체로 입시하여 다른 승지들은 한 사람도 참여하지 못하였다. 심백구가 승지가 되어 유회부에게 말하기를,

“경연의 입시는 정해진 규례가 있는데, 공은 어찌하여 단독으로 입시하는 것을 좋아하시오. 여러 동료들은 비록 소회가 있더라도 진언(進言)할 기회가 없으니, 매우 온당치 못한 듯합니다.”

하니, 유회부는 부끄러운 빛이 있었다.

● 설 조사(薛詔使)가 오니, 조정에서는 만일 글로 서로 교접하는 일이 있게 되면 그때에는 반드시 난처한 일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였다. 그래서 가까운 곳에 있는 문관을 불러 오도록 전교를 청하였지만 상께서는 이것을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유회부가 갑자기 스스로 전지를 받들고 들어 왔다. 상이 노하여 함부로 아룀을 책망하자, 윤회부가 아뢰기를,

“제가 비록 주장하였으나 일은 바로 예방(禮房)의 소관이옵니다. 담당 승지는 마땅히 대죄(待罪)해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홍희고(洪希古.홍진)가 노하여 말하기를,

“이것이 무슨 죽을 죄나 됩니까? 어째서 억지로 저더러 대죄(待罪)하라 하십니까?”

하고, 오래도록 서로 힐난하니, 동료들은 몰래 웃었다.

박계길(朴季吉)은 천성이 소탈하여 남에게 속임을 많이 당했다. 하루는 황화보(黃和甫)에게 말하기를,

“내게 술 한 병이 있는데 자네가 만일 간청하면 한 잔을 보내겠소.”

하니, 황화보가 대답하기를,

“비록 술을 못얻어 마시고 죽는다 해도 맹세코 그대에게는 청하지 아니하겠네.”

하였다. 이에 박계길이 뽐내면서 가자, 황화보는 곧 그 뒤를 밟아 갔다. 그리고는 주인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서 술을 물로 바꾸어 넣고 병마개를 봉하여 원래대로 해 놓았다. 박계길이 손님을 맞아하여 그 술병을 열어 보니, 바로 맹물이어서 분개하면서도 그 까닭을 몰랐다. 얼마 있다가 황화보가 하인을 보내어 박계길에게 전하기를,

“내게 술 한 병이 있으니, 자네가 만일 주기를 애걸한다면 남은 찌꺼기라도 보내겠네.”

하니, 박계길이 하인을 쫓아 보내며 말하기를,

“강도하고는 같이 말할 수 없다고 하여라.”

하자, 듣는 사람이 모두 포복절도하였다.

● 나라 임금의 명은 지제교(知製敎)가 관장하고, 통정 이하는 모두 선발에 참여하게 된다. 김사중(金士重.김천일)이 기병하여 수원에 도착하자, 조정에서 특별히 창의사(倡義使)라 칭하고, 이어 교서를 내려 위로하고 교유하였다. 그런데 유회부가 승정원에 있으면서 지제교의 일을 가로채 행하고 크게 절의가 있다고 칭찬하여 사람들에게 과시하였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지신사(知申事)는 지위와 명망이 높아서 또한 당시 무리에게 칭찬받기를 바라지 않는다.” 하였다.

이실지(李實之)는 천성이 경솔하여 남의 인품을 잘 형용하였다. 어느 날 나에게 유회부(柳晦夫)는 수염 난 어린애라 말하므로, 내가 무슨 말이냐고 물었다. 유실지가 말하기를,

“남이 어쩌다가 자기의 글을 칭찬하면 비록 원수라 하더라도 감정을 잊어버리고, 어쩌다가 흠을 잡으면 좋지 않게 여겨 무엇을 잃은 것같이 하고 있습니다. 그가 일을 할 때엔 남이 자기 칭찬해 주는 것을 기뻐함이 더욱 심하니, 참으로 수염 난 어린애가 아니라고 하겠습니까.”

하니, 징원(澄源)이 옆에 있다가 웃으며 말하기를,

“이 사람은 자못 편협하여 여자 같소.” 하였다.

징원이 사간으로 어느 날 상의 부름을 받아 아뢰기를,

“1ㆍ2년 이래로 궁궐이 엄하지 못하고 조정이 편안하지 못하여 매양 사람들의 마음을 거슬려서 원망하는 말이 길에 가득합니다. 사변이 생긴 뒤로 인심이 와르르 무너져내려 수습할 수 없게 되어 심지어 김공량(金公諒) 자매(姊妹)를 지척하는 말도 있사옵니다. 하늘과 사람이 이치는 한 가지라, 떠나고 합하는 것이 여기에 있사옵니다. 게다가 서울을 떠난 뒤로 상감께서 한 번도 당신을 탓하는 교서가 없으시니, 무엇으로써 인심을 위로하겠습니까.”

하고, 반복해서 간곡히 아뢰었으나, 상은 끝내 아무 대답이 없었다. 이공저도 입시하였다가 문을 나와서 말하기를,

“오늘 유징(幼澄) 때문에 여러 대신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조회를 파하였으니, 참으로 웃기는 일이다.”

하니, 오음(梧陰)이 말하기를,

“우리가 열 마디 한 것보다 낫다.” 하였다.

● 최언명(崔彦明)이 의주에 있을 적에 흰 무지개가 해를 관통하는 것을 보고 일관(日官)에게 무슨 징조냐고 물으니, 마침 대군(大軍)이 강을 건너는 날이니, 이것은 바로 승전할 징조라고 대답했다. 최언명이 이에 소리 높여 꾸짖기를,

“네가 나에게 이산해(李山海)를 본받게 하려고 하는 것인가?”

하였다. 이것은 경인년 겨울에 형혹성(熒惑星)이 남두성(南斗星)에 들었는데, 이산해가 임금께, 화성(火星)이 남두를 가리고 지나갔다고 아뢴 것을 말한 것이다. 최언명은 곧 이산해에게 붙은 사람이라, 사람들이 매우 그를 천박하게 보았었다.

이실지(李實之)가 구원유(具元裕)를 방문하고 나서 나에게 들러, 구원유가 대단히 어리석다고 말하였다. 내가 무슨 말이냐고 물었더니, 이실지가 말하기를,

“구원유의 말에, ‘권세를 남의 손에 맡겨 두는 것은 불가하니, 삼사(三司)의 관원도 뜻을 같이 하는 자로 충원함이 옳겠소.’ 하므로, 내가 그에게, ‘그렇게 할 필요는 없소.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면서 저들에게 틈을 탈 수 없게 하면 그만이오. 기축년에 서인이 꽉차지 않았음은 아니나 일망타진이 되었소. 진실로 공론을 우리에게 있게 하면 저들이 비록 권세를 잡고 있다 하여도 도리어 우리들에게 이용될 것입니다.’ 하였더니, 구원유는 끝내 그렇게 여기지 아니하고 말하기를, ‘공은 새 교제에 물들었으니, 더불어 말할 수 없소.’라 하였습니다. 이것은 존중(存中.윤영립)과 헌지(獻之)를 가리킨 것이니, 이 사람이 어찌 대단히 어리석지 아니합니까.”

하니, 내가 말하기를,

“오늘의 구원유가 바로 기축년의 이춘영(李春英)이오.”

하였다. 이실지가 웃으며 대답하기를,

“이것은 참으로 무슨 마음입니까?” 하였다.

임진년 겨울에 대궐 문 바깥에서 상인의 무리가 요동 사람을 꾀어들여 사사로이 서로 무역하므로 대간이 그 중 한 사람을 잡아 가두었다. 이것은 효언(孝彦)이 주동한 것이었다. 마침 사고 팔던 자들은 빠져나가고 잡힌 자는 김공량의 종이었다. 그래서 크게 두려움을 느껴 놓아 주었다.

● 임진년 겨울에 우계(牛溪.성혼)가 해서(海西)로부터 행조(行朝)로 왔다. 이튿날 오음이 한 자급(資級)을 더 올리기를 청하여 마침내 자헌(資憲)으로 승진되었다. 나와 이자상(李子常)이 이 일을 이야기할 적에 이자상은,

“어리석은 사람도 하지 않을 짓을 했으니, 오음은 실성한 사람이라 하겠다.”

하였다.

● 교검(校檢) 허징(許徵)은 사람들이 얼굴이 흉하여 밉살스럽다고 지목하였다. 임진년 8월 어느 날 밤에 이자상ㆍ효언과 내가 용만관의 길가에 모여 있었는데, 허징도 따라 왔었다. 효언이 말하기를,

“때를 잘못 만나 해적이 난리를 일으켰다. 흉한 칼날이 지나가는 곳마다 모두 그 독을 받아서 백성들의 부모 처자가 죽기도 하고 욕을 당하기도 하니, 이런 변은 유사 이래 없었던 것이다.” 하니, 허징이 말하기를,

“남의 나라를 쳐서 생령(生靈)으로 하여금 살던 곳을 잃고 부모를 서로 보지 못하고, 처자를 서로 보전하지 못하게 하니, 이런 견지에서 보면 비록 순(舜)임금 같은 성인이라 할지라도 삼묘(三苗.중국 상고의 나라 이름)를 정벌한 것은 나는 역시 온당하지 않은 것으로 여기오.”  하자, 듣는 자들이 포복절도하였다.

● 월정(月汀.윤근수)이 임진년에 예조 판서가 되어 낮이면 압록강을 건너가 중국 관리와 강설(講說)하고, 밤이면 예조의 일을 처리하여 밤 늦도록 늘 조금의 틈도 없었다. 그러나 거개가 실속없는 일들이어서 역관과 하인들이 이것을 모두 괴로워하였다. 그들이 비록 여럿이 함께 가서 배고프다고 고하여도 한 시각 잠깐 동안도 떠나지 못하게 하였다. 한 낭관이 있었는데, 집이 멀지 않은 곳에 있었던 까닭으로 매양 부름을 받게 되니, 또한 이것을 괴롭게 여겨 마침내 먼 곳으로 옮겨 갔다. 오음이 이 말을 듣고 말하기를,

“가련하구나, 자고(子固)여! 나이가 80이 되더라도 반드시 인사(人事)를 깨닫지 못하고 죽을 것이니, 어찌 가련하지 않겠느냐.”

하니, 듣는 사람들이 옳은 말이라고 하였다.

● 서울을 떠나는 날, 대가가 벽제(碧蹄)에 도착하여 정원에 전교하기를,

“호종하는 인원으로서 참하면 6품으로, 참상이면 4품으로, 4품이면 준직(準職)으로, 당하면 당상으로 올리도록 하라.”

하니, 대체로 헛된 상(賞)만으로 권장한 것이다. 이홍로(李弘老)는 이 말을 듣고 기뻐서 말하기를,

“대가가 가는 곳마다 이런 전교가 있게 되면 며칠 안 되어 나는 허리에 금띠 띠고 이마에 옥을 붙이는 고관이 될 것이다.”

하였다. 대가가 동파(東坡)를 출발하는 날, 호위하던 병사들이 모두 흩어져 가고, 병조ㆍ도총부(都摠府) 관원도 모두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먼저 앞으로 나가 대가를 인도하려는 사람이 없었다. 효언(孝彦)은 선전관으로서 혼자서 선행 대열에 끼었다. 이홍로가 나에게 말하기를,

“우리들은 병관(兵官)이니, 앞서서 대가를 인도함이 옳겠소.”

하므로, 나도 그렇게 생각하여 말을 몰고 앞서 갔다. 이홍로가 말 위에서 효언에게 말하기를,

“오늘의 선행(先行)에는 깃[羽]을 꽂아야 되겠소.”

하고, 의기가 양양하여 만족하게 여기는 것 같았다. 상이 말을 끄는 자에게 묻기를,

“여기에서 바로 평안도를 가는 길이 있느냐?”

하니, 이홍로가 몸을 굽히며 아뢰기를,

“아무 곳으로 해서 아무 군(郡)에 도착하면 바로 샛길이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대답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으므로 이홍로라고 아뢰었다. 이홍로는 상이 묻자, 말 위에서 응대하고는 스스로 남들이 모두 하지 못할 말을 했다고 생각하여 기쁨을 참지 못했다. 그 사람의 경망함이 어린애 같아서 사람들이 차마 보지를 못했다.

임진년 6월에 대가가 평양에 머무르고 있을 적에 왜적의 형세는 이미 황주에 이르렀다. 여러 의론은 모두 성을 버리고자 하였는데, 대신들만은 버리고 갈 수 없다고 생각했다. 성 안의 사대부가 생각하기를,

“이 성을 나가야 살 길이 있을 것이다.”

하며, 다투어 공포심을 불러 일으켰으나 대신들은 고집을 부리며 나가지 아니하였다. 이상홍(李尙弘)이 선유어사(宣諭御史)로서 의주에 갔다가 다시 평양에 도착하여 보통문(普通門)으로 들어 왔다. 그가 처음 대가가 성을 나간다는 말을 듣고 숙천(肅川)으로 달려 돌아가 배회하면서 감히 들어오지 못하고 있다가 결국은 길 위에서 복명하였다.

평양에서 대가가 출발하던 날, 해원(海原)은 대가를 보통문까지 전송하고 돌아왔다. 내가 성 안에서 따라 나갔더니, 해원이 말 위에서 손을 잡고 울면서 말하기를,

“오늘의 일은 신자(臣子)의 죄입니다.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다만 상감의 뜻을 보건대, 아직도 갈 방향을 정하지 못하였습니다. 영변과 강계는 평양만큼 지킬 만한 곳이 못되지만 함흥은 다르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조정의 신하들 중에서 만일 함흥으로 가기를 청하면 공은 죽을 힘을 내어 이것을 막으시오. 나도 이 의론에 대해 상감께 극력 말씀 드렸더니, 상감의 마음이 많이 돌아 왔소. 그러니 공은 과히 힘들지 않을 것이오.” 하였다.

대가가 처음 의주에 도착하여서 조정에서 묻고 의론하는 것은 단지 청병(請兵)하는 한 가지 일 뿐이었다. 하루는 오음이 마침 여러 재상과 모여 앉았다가 역관 한국보(韓國輔)를 불러 말하기를,

“그대는 당상으로 승자하고 싶으냐?”

하니, 한국보는 머리를 숙이고 감히 말을 못할 뿐이었다. 드디어 상께 아뢰어 그를 당상으로 올렸다. 대체로 오음의 뜻은 이렇게 깜짝 놀랄 일을 하여 한편으로는 역관의 마음을 권장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원근의 소망을 불러일으키기도 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좌우의 사람들은 그가 조정의 정권을 함부로 희롱하여 자기 물건같이 한다고 비웃었다.

● 서애와 송강이 안주에서 만났는데, 송강이 묻기를,

“사람들이 ‘대감도 내가 감정을 가지고 최영경(崔永慶)을 죽이려 한다.’고 말하였다는데, 이런 일이 있습니까?”

하니, 서애가 웃으며 대답하기를,

“그 때에 본 형적(形迹)이 비슷했기 때문에 일찍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을 것이오.”

하자, 송강이 깜짝 놀랐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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