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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고사(古文故事)

서거정의 《필원잡기(筆苑雜記)》서문과 발문 - 조위.이세좌

작성자허현|작성시간18.01.21|조회수395 목록 댓글 0

 

필원잡기(筆苑雜記) 서문(序文) - 조위(曺偉)

우리 동방은 기자(箕子)가 봉해진 뒤로부터 세상에서 일컫기를, “문헌(文獻)이 중화(中華)와 비견할 만하다.” 하였다. 전조(前朝.고려) 500년 간 문학하는 선비가 수없이 배출되어 유고(遺稿)로써 세상에 전하는 자가 무려 수십여 명이었으니, 인재가 성하다 이를 만하다. 그러나 당세의 조정과 민간의 일과, 명신ㆍ현사(賢士)의 언행(言行)을 기술하여 세상에 전한 사람은 드물었는데, 홀로 이학사(李學士.이인로)의 《파한집(破閑集)》과 최대위(崔大尉.최자)의 《보한집(補閑集)》이 지금까지 시인(詩人)들의 논담하는 자료가 되고 사대부들의 사랑하는 바가 되었다.

그러나 모두 문장을 다듬는 것에 불과하고, 국가의 경세(經世)하는 법전(法典)에 대해서는 일체 취할 것이 없다. 그 뒤에 익재(益齋) 이문충공(李文忠公.이제현)이 《역옹패설(櫟翁稗設)》을 지었는데 비록 간혹 골계(滑稽.익살을 부리는 가운데 어떤 교훈을 주는일)의 말이 있기는 하나 조종(朝宗)의 세계(世系)와 조정의 전고(典故)에 대해서 기재하고 변증(辨證)한 것이 많으니, 실로 당세의 유사(遺史)이다.

지금 좌주(座主) 달성상공(達城相公.서거정)이 편찬한 《필원잡기》를 보니, 그 규모가 대략 《역옹패설》과 부합하였으니, 극진하도다. 대유(大儒)가 언론을 세워서 후세에 전함이여, 출생은 비록 선후의 차이가 있으나, 그 언론은 한 사람의 말과 같음은 어째서인가. 사람은 선후가 있으나 도(道)는 다름이 없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내가 생각하건대, 익재는 난세에 태어나서 나라가 미약한 때에 험난을 무릅쓰고 힘을 다하여 임금을 생각하고 나라를 근심하는 정성이 지극한 심정에서 나왔으니, 능히 공명(功名)을 보전하고 시종 여일한 절개를 지켜서 더할 수 없이 우뚝하였다. 지금 공은 태평한 조정에 등용되어 밝은 임금을 만나 군주를 가까이 모시며 보필하여 훌륭한 정치를 이룩하고 유림(儒林)의 으뜸이 되어 일세의 모범이 되었으니, 그 마음과 그 학문과 그 사업의 거룩함은 진실로 익재에게 양보함이 없을 것이며, 그 편찬한바 훌륭한 임금과 어진 신하의 제작(制作)과 행사(行事)의 자취는 고려의 군신(君臣)이 그 만에 하나도 따를 수 있는 바가 아니다. 그렇다면 이 글의 전함이 《역옹패설》에 비할 바가 아님은 확실한 일이다. 혹자는 말하기를, “공이 기록한 것은 모두 후세에 교훈이 될 만하나. 한두 가지 내용은 《역옹패설》의 익살[滑稽]을 면치 못하고 있으니, 이는 무엇 때문인가.” 하기에 대답하기를, “공의 해박한 지식과 뛰어난 기억력은 천성(天性)에서 나왔다. 혹 한가할 때에 붓을 희롱하여 그 평상시에 듣고 본 것을 기록한 것일 뿐이요, 애초에 저서에 뜻을 둔 것이 아니다. 우맹(優孟)ㆍ시전(施旃)ㆍ동방삭(東方朔)의 말을 사마천(司馬遷)과 반고(班固)가 사기에 빼지 아니하고 기록하였으니, 이것도 기사체(記事體)이다.” 하였다.

아, 기자로부터 지금까지가 거의 3천 년인데, 사필(史筆)을 잡은 선비가 세상에 끊어지지 않았으나 언론을 세워 세상에 전한 이가 모두 몇 사람 되지 않음은 그 지은 사람이 없는 것이 아니라, 실은 오래 전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 스승 될 만하지 못하고 그 말이 본받을 만하지 못하면, 비록 남산의 대나무를 다 베어 죽간(竹簡)을 만들고 수천 마리의 토끼털로 붓을 만들어서 날마다 수많은 말을 기록할지라도 능히 한때에도 전할 수 없는데, 하물며 후세에 전하기를 감히 바라리오. 그렇다면 공의 이 책은, 사람의 스승 될 만하고 말이 법이 될 만하니, 무궁토록 전할 것은 당연한 일이다. 후일에 사가(史家)가 옛 사고(史稿)를 찾아 상고한다면 장차 이 책에서 취하지 않겠는가. 성화(成化) 기원 23년(1487) 계추일(季秋日)에 문생 봉열대부 함양군수(奉列大夫咸陽郡守) 하산 조위(夏山曺偉)는 서(序)한다.

 

필원잡기(筆苑雜記) 발문(跋文) - 이세좌(李世佐)

위의 《필원잡기》는 우리 좌주(座主)인 사가(四佳) 서 상공(徐相公.서거정)이 한가한 가운데 붓 가는 대로 기술한 수필본이다. 정미년(1487) 봄에 홍문관 교리 유호인(兪好仁)이 의성(義城) 고을의 원으로 내려올 때에 공이 손수 등사한 한 권의 수초본(手抄本)을 주며 판각하게 하라 하고, 드디어 나에게 글을 보내어 힘써 달라 부탁하였다. 나는 명을 받은 이래로 모든 각수(刻手)들을 모으고 비용 공급 등의 일을 한결같이 모두 인근 고을에 글을 보내어 협력을 구하고는 유호인에게 세상에 영구히 전하도록 굳게 부탁하였다.

아, 이 책은 모두가 우리 동방의 전고(典故)와 어진이의 사적이니, 해박하면서도 겸비하고 너르면서도 분명하여 실로 국승(國乘)에 우익(羽翼)이 될 것이요, 익살스러운 소설의 비교가 아니다. 하물며 공의 높은 업적과 문장은 진실로 일세를 덮고 백대(百代)에 솟아날 것이니, 어찌 이 책의 전포를 기다린 뒤에 더욱 나타나랴. 그러나 후세 사람들이 이 책을 보면, 족히 공의 학문이 넓고, 조종조의 제작이 성대함을 알 것이며, 어진 사대부의 좋은 말과 아름다운 행실이 장차 후세에 모범이 될 것이니, 어찌 작은 보탬이 되겠는가.

성화(成化) 기원 23년(1487) 9월 일에 문인(門人) 관찰사(觀察使) 한원(漢原) 이세좌(李世佐)는 삼가 발문을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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