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아, 지난 병자년(丙子年,1636)에 국운(國運)이 비색(否塞)하여 호기(胡騎.청나라 기병)가 침범하매 강도(江都.강화도)가 함락되었도다(병자호란을 말함). 취화(翠華.임금이 쓰는 깃발)가 하성(下城.인조가 남한산성에서 항복코져 나온것을 말함)하매 대군(大君.뒤에 효종이 된 봉림대군)은 볼모가 되고 연공(年貢)을 처음 정해서 신사(信使)가 잇따라 왕래하였도다. 그 후 갑신년(1644, 인조22)에 이르러서는, 명(明) 나라 운수[統]가 이미 떨어져서 신기(神器.임금의 보위)가 넘어갔으니, 하늘의 뜻을 믿기 어려웠도다. 그 일을 어찌 차마 말하랴!
이 뒤로부터는 동지(冬至)ㆍ정조(正朝)ㆍ천추절(千秋節)의 방물(方物.그 지방에서 특별히 나는 산물)을 온통 한 사신에게 부쳐서 절사(節使)라 부르며, 세수(歲首.연초)에 바치기도 하였다. 임진년(1712, 숙종38)에 청국(淸國)에서 백두산(白頭山)에 돌을 세워 경계(境界)를 확정(確定)하고, 예단(禮單)을 줄여서 방물로 이준(移准.옮겨 대충하는 것)하도록 허가하며, 진공(進貢)하던 금(金)을 혁파하고 또 표피(豹皮)를 감하며, 변경 백성이 국경을 넘은 자를 사의(査議)하는 것을 면제하였다. 이 네 건(件)에 대해 또 4기(四起)를 갖추어서 특히 절사(節使)에게 그 사은(謝恩)을 겸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장동(壯洞) 상국(相國) 김창집(金昌集)을 정사(正使)로, 명곡(明谷) 참판 윤지인(尹趾仁)을 부사(副使)로, 장령 노세하(盧世夏)를 서장관(書狀官)으로 삼아서, 그해 동짓달 초사흗날, 한양(漢陽)에서 길을 떠나게 되었는데, 나는 부사의 편비(偏裨.보좌관)로서 외람되게 그 뒤를 따랐다. 한 번 연산(燕山.燕京)을 바라보니, 성난 머리털이 먼저 곤두서고 허리에 찬 칼이 저절로 울었다. 다만 한 차례 장한 구경을 한 것이 기뻤으나, 지식이 고루하고 문사(文辭)가 거칠고 졸렬하여 중국 산천과 이역(異域) 풍속을 오히려 능히 자세히 기록하지 못했다. 그러나 겨울에 갔다가 봄에 돌아왔는데, 그동안에 날마다 보고 들은 것을 뒤에 기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