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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고사(古文故事)

남명(南冥)을 만나다 - 금난수/성재일기

작성자허현|작성시간20.02.14|조회수349 목록 댓글 0

 

성재(惺齋) 금난수(琴蘭秀)는 안동 출신의 문신이자 의병장으로 퇴계의 문인 조목(趙穆)의 매제였는데 그의 일기인 <성재일기(惺齋日記)> 1561년 4월 18일에는 당대의 명유(名儒) 남명(南冥.조식)을 만난 기록이 있다.

 

이 훈도(이원), 생원 김용정 및 권명숙, 정긍보와 함께 남명을 뵙고 뇌룡당(雷龍堂.합천군 삼가면 외토리 소재 현재의 뇌룡정)에 좌정하였다. 각자가 술을 가지고 왔는데, 술자리가 무르익자 남명이 먼저 노래를 부르면서 좌중에도 권하여 모두 노래를 하였다. 옛 노래를 부르지 않고 스스로 지은 말로 노래를 하도록 하였다. 성품이 높고 뛰어나 곁에 있는 사람들을 의식하지 않았으니 과연 이전에 들은 대로였다. 기개는 보통 이상이나 원만한 뜻이 모자랐다. 항상 이 훈도를 조롱하지만 놀리는 가운데 진실이 있었다. 이 훈도도 지지 않았는데, 남명이 “내가 이처럼 빈정거려도 화를 내지 않으니 이점이 본받을 만하다.”고 운운 하였다. 또 말하기를, “길재(吉再)선생은 주상이 토지 백 결(結) 남짓을 내려주었으나 모두 곡식을 갈아먹지 않고 대나무를 심었는데, 나중에 관죽전(官竹田)이 되었다. 이 대단한 이야기는 우리나라 야사(野史)에 없어서 사람들이 모두 알지 못하니 한탄스럽다.”고 하였다. 또 이색(李穡)에 대한 고사를 말하기를, “태조가 그를 부르자 전각 아래에 나아가 서 있으면서 절을 하지 않았는데, 태조가 전각을 내려와 읍(揖)을 하니, 이색이 ‘이제 서로 보았으니, 돌아가려오.’하여 마침내 귀가를 허락하였다. 이는 큰 절개이나 후대 사람들이 모르면서 의심을 하였으니, 잘못이다.”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노군자(老君子)만 있고 소년군자(少年君子)는 없으니, 내가 전후의 변천을 살펴보건대, 흰데 검다 하고 검은데 희다고 하니, 조금도 서로 비슷한 점이 없다. 비록 ‘군자답다.’고 하나, 내가 믿지 못하겠다.” 고 운운하였다. 또 말하기를, “그대는 퇴계(이황) 문하에서 무엇을 배우는가?”하기에, “다행히 한 고을(안동)에 있으면서 마을이 가까워 때때로 나아가 뵐 따름이지 배우는 바는 없는데, 또 무슨 말씀드릴 만한 일이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하니, 남명이 “그대의 말이 과감하다.”고 운운하였다. 또 말하기를, “퇴계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 그대는 호남의 여러 유생들(기대승을 말하는듯)이 퇴계와 성리(性理)를 논변한 내용을 보았는가? 전현(前賢)의 논석(論釋)이 지극하고 극진하여 후생이 전현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데, 전현의 말을 찾아 따지기만 하고 실천하는 힘은 부족하다. 전현의 말을 찾아 실천하지는 않고 성리의 학문만 높게 논하는 일이 옳은지 모르겠다. 질문을 하는 사람이 비록 묻더라도 퇴계는 그를 제지하는 것이 옳겠다. 퇴계가 또한 그렇게 할 것인지는 내가 비록 자신할 수는 없으나 혹시 나에게 물어 온다면 나도 그렇게 할 것이다. 내가 전현의 말을 깨닫지 못했는데, 어느 겨를에 다시 성리를 논하겠는가. 그대는 이 말을 퇴계에게 고하라.”고 하였다. 만류하여 자도록 하였으나 속히 집으로 돌아가야 하기에 사양하고 돌아왔다. 

출전: 국학진흥원 스토리테마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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