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창 군수(平昌郡守) 양사언(楊士彦)이 상소(上疏)하였는데 그 대략에,
“신이 맡고 있는 고을은 바로 옛적 예맥(穢貊)의 한 작은 고을입니다. 주민들은 모두 암굴에서 짐승처럼 거처하고 섶을 묶어 입구를 가리며 비탈밭을 경작하여 근근이 수확하면서 구차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과거에 목조(穆祖.이성계의 고조)의 비(妃.효공왕후)의 고향이라 하여 군(郡)으로 승격시키고 조세를 감면했는데도 전결(田結)은 8백 결(結)에 불과하고 민호(民戶)도 5백 호를 넘지 못했습니다. 세월이 흘러 사세(事勢)가 바뀌어 청백한 수령이 부임하지 않아서 백성들이 곤궁에 빠져 원망 속에 살아 온 지 60여 년이 되는데 그 사이 논밭은 날로 더욱 황폐해지고 백성들은 갈수록 유리(流離)되었습니다.
신이 도임한 날에 먼저 장적(帳籍)을 펼쳐보니 곡식이 9백 석이고 주민이 40호이고 잔리(殘吏)가 8~9명이고 시역(廝役.노비)이 수십 명이었는데, 귀신 같은 얼굴에 헝크러진 머리를 했고 옷은 해져서 몸도 제대로 가리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마음이 애처로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줄줄 흘렀습니다. 전지(田地)가 묵게 된 까닭을 물어보니 ‘백성들이 흩어진 지 오래인데 누구와 더불어 경작하겠는가? 40호의 힘으로 옛날 5백 호의 부역(賦役)을 감당해야 하고 1백 결의 전지로 전날 8백 결의 공물(貢物)을 내야 한다. 아비 죽은 아들과 남편 죽은 과부뿐이어서 일족이 떠난 데는 호(戶)가 끊어졌고 이웃이 떠난 데는 마을이 텅 비게 되었다. 우리 고을을 점검해 보면 위태롭고 고달픈 사연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마음에 감촉되는 바가 있어 신은 목이 메어 밥이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깊이 생각하고 심력(心力)을 다 기울여 세 가지 계책을 얻었는데 전하께서 살펴 주소서.
등(滕)나라와 설(薛)나라가 부용국(附庸國)으로 조회(朝會)하지 못한 것은 땅이 편소했기 때문이고, 여좌(閭左)의 한전(閒田)에 대해 공물을 받지 않은 것은 주민이 가난했기 때문이고, 관문(關門)과 교량(橋梁) 및 산림(山林)과 천택(川澤)에 세금을 부과하지 않은 것은 흉년이었기 때문입니다.
열 집에 아홉 집이 빈 고을이 무익하게 허명(虛名)만 있으니 삭제하고 다른 고을에 합쳐 다스리기만 하고 부역을 시키지 않는 것이 계책의 한 가지입니다. 46호의 주민들을 위로하고 각종 명목의 신구(新舊) 공물을 면제하는 것이 계책의 한 가지입니다. 미수(未收)한 대여 양곡은 포기하고 10년 동안 산림세를 면제하는 것이 계책의 한 가지입니다. 이 세 가지 계책을 쓰고도 유민(流民)이 돌아오지 않거나 양곡이 저축되지 않았다는 것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불쌍한 이 백성들이 전하의 어진 정치를 받아 10년간 부역도 공물도 세금도 부담하지 않게 된다면 어찌 한 고을만의 다행이겠습니까. 온 나라의 유민(流民)들이 다 고향으로 돌아갈 마음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신이 외람되이 수령의 직에 있으니 직분을 다할 것을 생각해야 할 것이요, 허기(虛器)만 안고 앉아 있을 수는 없겠기에 쇠잔한 고을 잿더미 위에서 먼저 세 가지 계책(計策)을 바치고 다음으로 도형(圖形)을 그려 올리니 전하께서 밝게 살피소서.
아아, 눈앞의 참담하고 급박한 상황은 문사(文辭)로만 애통해 할 정도가 아니니, 어찌 여유를 두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대신들과 상의하여 안으로는 해사(該司)에 위임하고 밖으로는 관찰사에게 하유(下諭)하여 결단을 내려 시행하신다면 백성을 은혜롭게 보호하는 정치가 이번 이 일에서 실천될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저의 어리석은 소견을 용서하소서.”
하니, 정원(政院)에 전교하기를,
“이 상소의 내용을 보니 백성을 사랑하는 심정에서 나온 것이다. 그림까지 그려 계책을 진술하였으니 그 정성이 가상하다. 해조(該曹)로 하여금 헤아려 조처하게 하고 그 뜻으로 군수에게 회유(回諭)할 것을 감사에게 하서(下書)하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