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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고사(古文故事)

통제사 이 충무공 유사[統制使李忠武公遺事] - 윤휴/백호전서23권

작성자허현|작성시간20.05.25|조회수527 목록 댓글 1

 

통제사 이순신(李舜臣)은 자는 여해(汝諧)이고, 그 선대는 경기(京畿) 덕수인(德水人)이다. 뒤에 한양(漢陽)에 살면서 대대로 유업(儒業)을 숭상하였다. 그 상세(上世)에는 고려 시대 전법 상서(典法尙書)를 지낸 이소(李劭)라는 분이 처음으로 현달하였고, 본조(本朝)에 와서는 영중추부사 홍문관 대제학을 지낸 변(邊)이라는 분이 문학으로 진출하였으며, 그의 손자인 거(琚)는 병조 참의에 이르렀다. 거는 우리 강정 대왕(康靖大王.성종)의 조정에 벼슬하였던바 이때 연산군은 동궁에 있었는데, 그가 강관(講官)이 되어 엄격한 가르침으로 두려워하는 대상이 되었고, 대간이 되어서는 비리를 탄핵하는 데에 위풍이 있었으므로, 당시에 호장령(虎掌令)이란 별칭이 있었다. 거가 백록(百祿)을 낳았고, 백록이 정(貞)을 낳았는데, 이분들은 모두 음보로 벼슬하여 드러나지 않았다. 정이 순신을 낳았는데, 그의 모친 변씨(卞氏)가 분만할 때를 당해서 꿈에 그의 조고인 거가 고하기를, “아들을 낳을 것이고 또 귀하게 될 것이니, 순신이라고 이름을 지어야 한다.”

하였으므로, 마침내 순신으로 이름을 지었다. 순신은 아이 적에 놀이를 하면서도 항상 전진(戰陣)의 모양을 만들어서 놀았고, 어려서부터 호걸스럽고 얽매이지 않아서 남들의 침범이나 기만을 받지 않았으며, 동리 사이에서 혹 불쾌한 일이 있을 경우에는 그때마다 상대방을 꺾어 굴복시키고야 말았으므로, 마을 사람들이 그를 두려워하였다.

그가 자라서는 자신을 굽히어 공손하고 삼가면서 글을 읽어 대의(大義)를 통하고 서법(書法)에도 정통하였다. 나이 20여 세가 되어서는 무거(武擧)에 종사하였는데, 용감하고 완력이 많은 데다 말 타고 활 쏘는 기예가 뛰어나서 32세로 무과에 급제하였다. 순신은 본디 성품이 고상하여 귀족들을 찾아가지 않았고 추천해준 사람도 없었으므로, 처음에는 훈련원 봉사에 보임되었다.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은 본디 그와 한 마을에 살면서 젊어서부터 서로 친구가 되어 남달리 그를 잘 알았으므로, 매양 순신에게 장수의 재능이 있음을 허여하였다. 그리하여 율곡(栗谷) 이이(李珥)가 이조 판서로 있으면서 그의 명성을 듣고는 유 상국(柳相國)을 통해서 그를 만나보기를 요구하면서 말하기를, “이군은 나와 동종(同宗)이다.”

하였고, 유 상국 또한 그에게 가서 만나볼 것을 권유하였다. 그러자 순신이 말하기를,

“동종으로 말하면 의당 만나볼 만하지만, 전형하는 자리에 있는 것으로 보아서는 만날 수가 없다.”

하고, 끝내 가지 않았다. 그리고 정승 김귀영(金貴榮)에게 서녀(庶女)가 있어 그의 작은 부인으로 삼아주고자 하여 사람을 시켜 그 의사를 전달하니, 순신이 말하기를,

“내가 벼슬길에 처음 나왔는데, 어찌 권문(權門)에 자취를 의탁해서 되겠는가.”

하고, 마침내 거절하였으니, 그 지조가 이러하였다.

이윽고 북로(北路) 보(堡.童仇非堡)의 권관(權管)이 되었다가 임기가 차서 돌아와 다시 훈련원에 출사하였다. 훈련원은 병조에 예속되어 있는데, 정랑 서익(徐益)이 법을 굽히어 품계를 뛰어올려서 원료(院僚)를 승진시키려고 하자, 순신이 간관(幹官)으로 있으면서 법을 내세워 그렇게 할 수 없음을 굳게 주장하였다. 서익은 본디 기가 세서 동료들이 그의 뜻을 감히 거스르지 못하였는데, 이날은 그가 노여움도 위협도 부리지 못하였으므로, 원중(院中)의 여러 아전들이 서로 혀를 내두르면서 말하기를,

“병부 낭중이 훈련원의 하급 관원에게 굴복당한 일은 일찍이 없었다. 게다가 이 관원이 감히 본조(本曹)에 대항하다니, 그는 유독 앞길을 생각하지 않는단 말인가?” 하였다.

이윽고 절도사의 비장(裨將)으로 호서에 가서는 자신을 검약하게 단속하고 간간이 좋은 계책으로 도와주어 주장(主將)으로부터 많은 사랑과 공경을 받았다. 이어 발포 만호(鉢浦萬戶)에 전임되어서는 항직(抗直)으로 관찰사에게 거슬리어 전최(殿最)를 논할 적에 그를 하고(下考)로 처리하려 하자, 아사(亞使)인 조헌(趙憲)이 관찰사에게 항언(抗言)하기를,

“듣건대, 이순신의 민중을 통솔하고 군대를 다스린 공적은 한 도의 으뜸이라 하니, 비록 열진(列鎭)을 모두 하고에 두더라도 이순신만은 폄하시킬 수 없다.”

하고는, 붓대를 쥐고서 관찰사의 명을 따르지 않아 하고에 넣으려던 일이 중지되었다.

그 이듬해에는 끝내 법을 굽히는 자가 틈을 만들어 행헌(行憲)에게 촉탁해서 잘못된 법을 적용함으로 인하여 파직되었다가, 몇 개월 뒤에 서용되어 다시 훈련원에 출사하였다. 한번은 시사일(試射日)이었는데 의정 유전(柳㙉)이 이순신에게 좋은 붕시(弸矢)가 있음을 알고 이를 요구하자, 순신이 대답하기를,

“붕(弸)은 하찮은 물건인데, 유 상공이 받고 순신이 바칠 경우 남들이 무어라 말하겠습니까. 하찮은 물건 때문에 상공과 소인이 함께 오명을 받는다면, 그 의리에 해로움을 어찌하겠습니까.”

하니, 유전이 부끄럽게 여기어 말하기를, “그대의 말이 옳다.” 하였다.

그 후 건원 권관(乾原權管)이 되었는데, 건원 북변의 호(胡) 중에 당시 추호(酋胡) 수을기내(艘乙其乃)란 자가 있어 그 이웃 부족인 이탕개(尼湯介) 등과 결탁함으로써 큰 변방의 걱정거리가 되었다. 조정에서는 그를 걱정하면서도 토벌하지 못하였는데, 순신이 부임하여서는 방략(方略)을 써서 그를 산 채로 체포해 와서 머리를 베어 조리돌리니, 변방의 걱정거리가 마침내 지식되었다. 이때 병마절도사 김우서(金禹瑞)가 그 일이 자기에게서 말미암지 않은 것을 혐의롭게 여겨 도리어 순신이 군대를 제멋대로 지휘했다는 것으로 탄핵하여 보고하니, 조정에서 속으로는 그 공을 가상히 여기면서도 상은 시행하지 않았다.

순신이 건원에 있을 때 부친이 작고하자 분상(奔喪)하여 삼년복을 마치고 나서, 천거로 조산만호(造山萬戶)에 제수되었다. 이 당시 또 북쪽에 걱정거리가 있었는데, 조산보가 호지(胡地)와 가깝기 때문에 순신을 가려 제수했던 것이다. 이듬해 가을에는 녹도(鹿島)의 둔전(屯田) 보호하는 일을 겸하였다. 순신이 녹도가 홀로 동떨어져 있어서 방수(防守)가 허술하다는 이유로 누차 병마절도사 이일(李鎰)에게 군대를 더 늘려서 방수시킬 것을 청하였으나 이일이 따르지 않았다. 8월에 오랑캐가 과연 군대를 일으켜 안개가 자욱한 때를 틈타 아군의 성책을 포위하였는데, 성책 안에는 군졸 10여 명밖에 없었다. 순신이 성책의 문을 닫고 손수 활을 쏘아 그 아군 진영에 접근해온 적군 수십 명을 사살하니, 오랑캐가 놀라서 달아났다. 이에 순신은 단기(單騎)로 성책문을 열고 나가서 큰 소리로 외치며 쫓아가니, 오랑캐가 마침내 모두 도망쳐 버렸으므로, 그들이 약탈해간 사람들을 모두 다시 빼앗아 돌아왔다.

그런데 이일(李鎰)은 적이 침범하게 했다는 이유로 죄를 얻을까 염려한 나머지, 순신을 죽여서 입막음하려고 순신을 수감해놓고는 참형시키려고 하였다. 그러자 군리(軍吏)들이 빙 둘러서서 보고 눈물을 흘리면서 술잔을 권하니, 순신이 정색하여 말하기를, “죽고 사는 것은 천명인데, 마시고 취하면 무엇 하겠느냐.” 하고, 술잔을 거절하였다. 그리고는 정(廷)에 나가 변론을 하였는데, 이일이 순신에게 패군(敗軍)의 정상을 공술하게 하자, 순신이 이를 거절하며, 말하기를,

“나는 녹도의 군졸이 단약(單弱)하기 때문에 누차 군졸을 늘릴 것을 청하였으나, 주장(主將)이 허락하지 않았다. 군부(軍簿)가 여기에 있으니, 만일 조정에서 그 사실을 알면 죄가 나에게 있지 않을 것이다. 또 나는 힘껏 싸워서 적을 물리치고 쫓아가 우리쪽 사람들도 다시 빼앗아 돌아왔는데, 패군으로 논죄하려고 해서야 되겠는가.”

하였는데, 사기(辭氣)가 엄장하여 좀처럼 패군의 사실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이일은 부끄러운 생각에 기가 꺾이어 그를 죽이지는 못하고 결박한 채로 압송하여 조정에 보고하니, 상이 순신의 죄가 아님을 살피고 이르기를,

“순신의 죄는 패군에 비할 바는 아니니, 백의종군(白衣從軍)하면서 스스로 공을 이루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그러다가 이해 겨울에 반호(叛胡)를 공격하여 수급(首級)을 바친 공으로 용서되었다.

그 다음해에는 조정에서 무관 중에 차례를 밟지 않고 발탁 등용할 자를 선발하였는데, 이때 형조 판서 유성룡이 이순신을 천거하였다. 또 그 다음해에는 호남 순찰사 이광(李洸)이 순신을 불러 영하(營下)에 두고 상주(上奏)하여 본도의 조방장(助防將)으로 삼아 선전관을 겸하게 하였다. 이해 12월에는 정읍 현감에 제배되었는데, 매우 치성(治聲)이 있었다. 그 다음해에 고사리 첨사(高沙里僉使)에 제수되자, 대신(臺臣)이 수령을 자주 옮긴다는 이유로 저지시켰다. 이해 8월에야 비로소 절충(折衝)의 품계에 올라 만포 첨사(滿浦僉使)에 제수되었는데, 대신이 너무 급히 승진시킨다고 말하여 원래의 직임에 유임되었다.

그 다음해 2월에 체직되어 진도 군수에 제수되었다가 가리포 첨사(加里浦僉使)에 고쳐 제수되었는데, 모두 미처 부임하기 전에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에 발탁 제수되었다. 이때가 만력(萬曆) 19년으로, 우리 소경 대왕(昭敬大王)이 즉위한 지 24년이 되는 신묘년이요, 순신의 나이 47세가 되던 해이다. 이때 통신사(通信使) 황윤길(黃允吉) 등이 일본에서 돌아와 변방의 소식이 매우 급해지자, 상이 비변사로 하여금 각각 장수가 될 만한 인재를 천거하게 하니, 좌의정 유성룡이 상에게 순신을 극력 천거하여 마침내 정읍으로부터 초천(超遷)되어 이 직임에 제배되었던 것이다.

당시 조정에서는 순변사 신립(申砬)의 건청(建請)에 따라 명하여 수군(水軍)을 파하고 육전(陸戰)에만 전심하도록 하였었다. 그런데 순신이 진영에 이르러 즉시 치계(馳啓)하기를,

“해구(海寇)를 차단하는 데는 수군만한 것이 없으니, 해전과 육전을 어느 한 쪽도 폐할 수 없습니다.”

하니, 조정에서 그 의견을 옳게 여기었다. 순신은 전구(戰具)를 대대적으로 수리하고 속진(屬鎭)들을 신칙 장려하였으며, 쇠사슬[鐵鎖]를 주조해서 바다 어귀를 가로질러 치고, 큰 군함을 마치 엎드린 거북의 형상처럼 제작하여 대판(大板)을 위에 덮고서 화살촉과 칼날은 밖으로 향하게 하고 창과 대포(大炮)는 그 안에 갈무리하고서 이를 귀선(龜船)이라 명명하여 선봉(選鋒)으로 삼아 적이 오는 데 대비하였다.

그 다음해 4월에 왜구(倭寇)가 대거 침입하자, 경상좌도 수군절도사 박홍(朴泓)과 경상우도 수군절도사 원균(元均) 등이 전쟁도 하지 않고 달아나버려, 왜적이 마침내 영남의 부산과 동래를 함락시키고 승승장구하여 북쪽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순신이 여러 장수들을 모아놓고 군대를 옮겨 그들을 공격할 것을 의논하니, 여러 장수들이 말하기를,

“수신(帥臣)에게는 지역의 분계(分界)가 있으니, 조정의 명이 없으면 움직일 수 없다. 우리는 또 호남 본도를 지켜야지, 영남의 적을 가서 토벌하는 것은 맡은 바 임무가 아니다.”

하였다. 그런데 비장(裨將) 송희립(宋希立)이 나와서 말하기를,

“수많은 적이 경상(境上)에 그득하여 장차 승승장구할 형세이니, 가만히 앉아서 한쪽 구석만 지키고 있다 해서 여기만 보존될 리는 없다. 그러니 나가 싸워서 다행히 이기면 적의 기세를 꺾을 수 있을 것이고, 불행하여 싸우다 죽더라도 또한 신하의 의리에는 부끄러움이 없게 될 것이다.” 하고, 녹도 만호 정운(鄭運)은 말하기를,

“신하가 평소에 은혜를 입고 봉록을 받으면서 이런 때에 목숨을 바치지 않고 가만히 앉아서 보고만 있으려는가.”

하므로, 순신이 크게 기뻐하여 큰 소리로 말하기를,

“희립과 운의 말이 옳다. 수많은 적이 크게 날뛰어 국가의 형세가 몹시 위태로운 상황인데, 어찌 다른 도의 장수에게 맡겨두고, 물러가 자기의 지경만 지키고 있을 수 있겠는가. 오늘의 일은 오직 나가 싸우다가 한번 죽는 데에 있을 뿐이니, 감히 다른 말을 하는 자는 목을 벨 것이다.”

하니, 온 군중이 크게 고무되었다. 마침내 앞 바다에 군대를 모으고 전함(戰艦) 20여 척을 집합시키어 군사들에게 서계(誓戒)를 내린 다음 곧 출전할 태세를 갖추었다.

이때 원균(元均)은 자기 군대를 버리고 가벼운 배를 타고서 호남의 바다 어귀에 이르러 장차 육지로 내려가 도망치려 하고 있었다. 그러자 비장 이영남(李英男)이 원균에게 말하기를,

“공은 명을 받고 수군절도사가 되었는데, 적이 막 바다를 건너온 이때에 만여 명의 수군을 다 흩어보내고, 전함 백여 척을 바다 속에 가라앉혀 버리고서 적을 보고도 싸우지 않아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후일의 책망에 대하여 어떻게 스스로 해명하겠습니까. 그러니 이웃 도에 원병을 청하여 적과 일전을 감행하는 것이 가장 나은 방법이요, 싸워서 이기지 못한 다음에 다른 계책을 쓰더라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원균이 그 말을 옳게 여기고 이영남을 시켜서 순신에게 함께 출전할 것을 요청해왔다.

5월에 순신이 당포(唐浦)에 이르러 사람을 시켜서 원균이 있는 곳을 찾으니, 원균은 홀로 옥포 만호(玉浦萬戶) 이운룡(李雲龍), 영등 만호(永登萬戶) 우치적(禹致績)과 함께 두 척의 배를 가지고 항구에 정박해 있다가 순신을 바라보고는 통곡을 하였다. 순신은 원균에게 전함 한 척을 주고 자신도 거기에 타고서, 또 이문룡ㆍ우치적 등으로 하여금 앞에서 인도하게 하였다. 3일 뒤에 적선(賊船) 30여 척을 옥포에서 만나 순신이 대장기를 지휘하여 진군(進軍)하니, 우장(右將) 정운이 맨 먼저 올라가 힘껏 싸우자, 여러 장수들이 달려가 함께 진격하여 그 적선들을 모조리 잡아 궤멸시키고 고성(固城)의 월포(月浦)까지 진격했다가 돌아왔다. 본영(本營)으로 환군한 지 며칠 뒤 순신의 꿈에, 한 백발노인이 순신을 발로 차서 일으키며 말하기를,

“어서 일어나라. 적이 왔다.”

하였다. 순신이 놀라 깨어 일어나 즉시 여러 장수들을 재촉하여 정박한 배들을 풀어 출전한 결과, 과연 노량(露梁)에서 적을 만났다. 적들이 아군을 보고는 후퇴하여 달아나자, 그들을 사천(泗川)까지 추격하여 쳐부수고 적선 40여 척을 불태워버리니, 해안을 점거하고 있던 적들이 모두 목책을 뽑고 도주하였다.

이날에 순신 또한 적의 탄환을 맞아 어깨에 관통되어 피가 발꿈치까지 흘러내렸으나, 활을 손에서 놓지 않고 종일토록 싸움을 독려하였다. 싸움이 끝난 다음에야 사람을 시켜 칼로 어깨의 살을 후벼서 탄환을 빼내게 하니, 군중(軍中)에서 비로소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달에 적의 대군(大軍)이 한양을 쳐들어오고 평양까지 이르렀는데, 이때 어가(御駕)는 의주에 머물고 있었다.

6월에는 사량(蛇梁)으로 나가 싸웠다. 이틀 후에는 당포(唐浦)에 이르러 적선 10여 척을 만나 그들을 쳐서 섬멸하였는데, 그 가운데 급갑(金甲)을 입은 추장이 화살을 맞고 바다에 빠져 죽었다. 이 싸움을 마치고 제군(諸軍)이 잠깐 휴식을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적이 또 크게 쳐들어온다는 보고가 있었다. 그러나 순신은 마치 못 들은 체하고 있었는데, 또 적이 쳐들어온다는 급보가 있자, 순신이 말하기를, “적이 오면 싸울 뿐이다.”

하였다. 이때에 장사(將士)들이 모두 싸움에 지치고 기력이 떨어져서 자못 적을 두려워하는 기색이 있었다. 그러자 순신이 군졸을 시켜 앞서 노획한 적추(賊酋)의 큰 배를 앞바다의 적들과 1리쯤 되는 거리에 끌어다가 불태우게 하였더니, 배 안에서 화약(火藥)이 폭발하여 그 소리가 마치 천둥치듯 하므로, 적들이 둘러서서 보고는 기가 꺾이어 도망쳐버렸다.

이날 밤에 군중(軍中)이 또 경동(驚動)하였는데, 순신은 가만히 누워서 일어나지 않고 군리(軍吏)로 하여금 선봉(先鋒) 부대를 돌려서 진정시키게 하였다. 이윽고 전라우도 수군절도사 이억기(李億祺)가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오자, 그의 군대와 합하여 고성(固城)의 당포(唐浦)에 이르러서 적을 만나 또 크게 싸워서 그 대장을 죽이고 왜선 30여 척을 쳐부수니, 나머지 적들은 배를 버리고 육지로 올라가 달아나버렸다. 진격하여 영등포(永登浦.거제도 장목 북쪽해안)에 이르자, 적들이 아군을 바라보고 도주하므로 또 그들을 추격하여 쳐부수고, 또 진격하여 가덕(加德)의 천성(天城)에 이르니, 적들이 모두 도망쳐서 나타나지 않으므로, 마침내 군대를 돌려 본영으로 돌아왔다.

7월에는 적의 대장 평수가(平秀家)가 경성(京城)으로부터 양산(梁山)에 이르렀는데, 스스로 수군을 거느리고 와서 결전(決戰)을 벌인 다음, 곧장 호남으로 가려고 하였다. 순신이 그 소식을 듣고는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고성의 견내량(見乃梁)으로 나갔는데, 여기에서 바다를 뒤덮고 쳐들어오는 수많은 적선을 만났다. 그러자 순신이 말하기를,

“이곳은 바다가 좁고 항구가 얕아서 무력을 쓰기에 부족하니, 저들을 큰 바다로 유인하여 섬멸하는 것이 좋겠다.”

하고는, 제군(諸軍)들로 하여금 거짓 후퇴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원균이 경솔하게 나가서 전투를 벌이려고 하므로, 순신이 말하기를, “공은 전쟁할 줄을 모른다. 이렇게 하는 것은 패하는 길이다.”

하고, 마침내 우리 전함들을 지휘하여 퇴각시키니, 적들이 승승장구하여 추격해왔다. 한산도(閑山島) 앞바다에 이르러서는 이미 좁은 목을 빠져나와 적선들이 한데 다 모였으므로, 순신이 이에 북을 울리며 일제히 지휘하여 군대를 반대쪽으로 돌려 공격하게 해서 마침내 큰 싸움을 벌이었다. 제군이 돛을 펄럭이면서 앞으로 돌진하고, 별장(別將) 정운(鄭運)은 더욱 역전(力戰)을 하니, 적들이 감히 맞서지 못하였다. 이때 순신은 귀선(龜船.거북선)을 돌진시켜 종횡으로 형세를 떨치고 나는 듯이 출입하면서 적선을 만날때마다 대포로 쏘아 부수니, 대포와 화살이 함께 발사되어 연기와 화염이 하늘에 가득하였고, 잠깐 사이에 비린 피가 바다를 벌겋게 물들인 가운데 적선 70여 척을 쳐부수었다. 이때 붉은 모전으로 장식한 채함(彩艦) 또한 대포에 의해 격파되어 적추 평수가만 몸을 빼치어 도주하니, 왜의 군중이 크게 진경하였다. 사람들이 이 싸움을 일러 한산대첩(閑山大捷)이라고 한다.

그 다음날에는 적이 또 좌도(左道)에서 와서 구원한다는 소식을 듣고 안골포(安骨浦)로 나가 적을 만났는데, 적들이 더욱 계엄(戒嚴)을 강화하여 철과선(鐵裹船)의 겉을 습면(濕綿)으로 가리고서 우리 군대가 나타나는 것을 보고는 사력을 다하여 서로 대항하였다. 이때 아군이 정예부대로 그들을 꺾어버리자 적이 지탱하지 못하여 또 적선 40여 척을 불태워 부수었다. 이날 밤에 적이 또 아군을 기습하려고 꾀하였는데, 순신이 그것을 알아차리고 제군으로 하여금 적진을 향해 일제히 고함을 지르게 한 결과, 적들이 아군에 방비가 있는 줄 알고 감히 침범하지 못하였다. 그 다음날에 또 군대를 출전시켰으나, 적들은 이미 도망쳐버렸다.

이달에 군대를 거느리고 본영으로 돌아왔다. 순신이 여러 장수들과 함께 부산에 있는 적을 진격하려는 뜻으로 의논하였는데, 이는 장차 그 근본을 경복시켜서 서쪽에 있는 적들을 요동시키려는 의도였다. 8월에는 다시 군대를 내보내서 천성(天城)의 적을 공격하였다.

9월에 부산에 이르렀는데, 적들이 이미 누차 패한 터라, 감히 군대를 내보내지 못하고 성책을 굳게 단속하고서 높은 데에 올라가 총만 쏘아대므로, 마침내 그들의 배 백여 척을 불태우고 돌아왔다. 이 싸움에서 녹도 만호 정운이 적의 탄환을 맞아 죽었다.

이때 적병들이 팔도를 유린하였으나 관군이건 의병이건 그들을 대항할 자가 없었던 터이었는데, 연이어 순신의 대첩이 보고되자, 상이 크게 기뻐하여 순신에게 극품(極品)을 내리려고 하니, 말하는 자가 너무 지나치다고 하여, 마침내 정헌(正憲) 품계에 승진시키고 글을 내려 칭찬하였다. 그 글에 이르기를,

“25년 동안 소의간식(宵衣旰食)을 하면서 계책은 오히려 국가의 근본을 튼튼히 하는 데에 있었는데, 2백 년 동안 문무관들이 모두 안일에 젖어 백성들이 전투를 익히지 못하였다. 그런데 어찌 뜻하였으랴. 분수도 모르는 도이(島夷)들이 갑자기 우리 강역의 허술함을 틈타서, 잠깐 사이에 삼도(三都)를 패배시키고 마구 유린하여 팔도를 경복시키었다. 6만의 기병이 기전(畿甸)에서 궤멸되었으니 이광(李洸)의 패전이 통탄스럽고, 2천의 군졸이 금산(錦山)에서 함몰되었으니 고경명(高敬命)의 목숨 바쳐 싸운 것이 애통하구나. 그러나 그 누가 용기를 뽐내어 앞장서서 적개심을 발휘할 자가 있었던가. 회서(淮西)의 사졸들은 배도(裵度)를 만나서 그를 장성(長城)으로 삼았고, 강우(江右)의 백성들은 관중(管仲)이 아니었으면 모두 오랑캐가 될 뻔하였다. 오직 경은 몸뚱이를 온통 담(膽)으로 삼고 나라 걱정을 마치 집안 걱정하듯이 하여, 강 가운데서 사아(士雅)의 노를 치니, 군사들이 눈물 뿌리며 태진(太眞)의 배에 올랐다. 그리하여 화염 속에 전함(戰艦)들을 밀어넣으니 당항포에 쌓인 시체가 강에 그득하였고, 거센 파도 위에서 적들을 베죽이니 한산도의 비린 피가 바다에 그득하였다. 예악만 숭상하던 그때에 오랑캐 정벌하는 데에 어두웠던 것이 매우 후회스럽고, 전쟁이 일어난 오늘날에야 비로소 진경(眞卿)이 어떤 사람인 줄을 알게 되었다. 이제 경을 정헌대부 수 전라좌도 수군절도사(守全羅左道水軍節度使)로 승진시키고, 이억기와 원균에게는 똑같이 가선대부로 품계를 올려주는 바이다.” 하였다. 

그 다음해 정월에 천장(天將) 이여송(李如松)이 평양의 적을 공격하니, 적들이 도주하여 해상으로 물러가 주둔하고 있었다. 7월에 순신이 상주하기를,

“본영은 호남에 치우쳐 있으니, 청컨대 한산도로 진영을 옮겨서 요충지에 의거하여 양도(兩道)를 제어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8월에는 조정에서 삼도의 수군이 서로 통섭(統攝)되지 않는다 하여 마침내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를 설치하고 순신에게 명하여 본직(本職)으로 겸해서 관령하도록 하였으니, 통제사의 설치가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이에 앞서 적장(賊將) 평행장(平行長)이 평양에 이르러 행재소에 투서(投書)하였다. 거기에 말하기를,

“일본의 수군 10여만 명이 또 서해(西海)로부터 오고 있으니, 모르겠습니다마는 대왕(大王)의 종사(宗社)가 앞으로는 어디로 가야 하겠습니까?”

하였다. 적들이 처음에 수군과 육군이 합세하여 곧장 요동(遼東)으로 진격해서 상국(上國)을 엿보려고 꾀했었는데, 순신이 싸울 적마다 모조리 승리하여 동해를 차단하고 있으면서 그들을 멋대로 날뛰지 못하게 하고 있기 때문에 행장이 비록 평양을 탈취하기는 했으나 형세가 고단하여 감히 더 이상 진격하지 못하였고, 우리는 북으로는 압록강을 한계로 삼고 남으로는 호남ㆍ영남까지 보호하여 능히 명 나라의 군대를 맞아서 끝내 광복(匡復)을 이룩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모두 순신의 공력이었다.

처음에 원균은 한 척의 배에 타고서 급함을 호소했을 때 순신이 구원해준 것에 감사하여 그동안 순신을 정중히 섬겨왔었다. 그런데 연명(聯名)으로 승첩을 보고함에 미쳐, 조정에서 순신의 공이 가장 큼을 알고 순신을 통제사로 승진시키자, 원균이 이에 자신이 선배로서 순신의 밑에 있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어 점차로 불화(不和)가 쌓여갔다. 그러자 순신이 말하기를,

“두 장수가 서로 불화하다가 큰 일을 그르칠까 염려스럽다.”

하고는, 스스로 인책(引責)하여 자신의 직임을 체직시켜주기를 요청하였다. 이에 조정에서 원균을 충청도 병마절도사에 옮겨 제수하였는데도 원균은 유감이 풀리지 않아 조정 대신들과 체결하여 갖가지로 순신을 무함하고, 또 말하기를,

“순신이 호남에 있으면서 처음에는 오지 않으려고 했는데, 내가 굳이 요청함으로 인하여 승첩을 거두기에 이르렀다.”

하니, 조신(朝臣)들 중 무리지어 순신을 헐뜯는 자가 많았다. 원균은 또 유언비어를 날포하여 말하기를,

“순신은 오랫동안 해도(海道)를 점거해 있으면서 병민(兵民)들의 마음을 얻어 사람들이 그를 해왕(海王)이라고 하니, 국가에 이롭지 못할 듯하다.”

하였다. 그러자 상 또한 순신을 의심하여 체찰사 이원익(李元翼)으로 하여금 은밀히 단서를 잡도록 하니, 이원익이 두 차례나 밀장(密狀)을 올려 순신의 충성됨을 진달하였다.

28년(1595)에는 적들이 재차 군대를 움직이려고 하므로, 순신이 자청하여 그들이 바다 건너오는 것을 차단하였다. 29년 정월에는 적장 청정(淸正)이 큰 비바람이 몰아치는 때를 틈타서 바다를 건너왔는데, 이때 순신은 마침 군사들을 격소(檄召)할 일로 인하여 진영을 떠나 있다가 그 사실을 미처 알지 못하였으므로, 조정의 의론이 더욱 순신을 허물하였다. 이해에 적장 평행장(平行長)이 거짓으로 수호(修好)를 맺을 것을 청하고 포로로 잡아간 왕자(王子)를 돌려보내면서 그의 비장(裨將) 요시라(要時羅)를 시켜 경상도 병마절도사 김응서(金應瑞)에게 말하기를,

“화의가 이루어지지 못한 것은 실로 우리 장수 청정(淸正)이 싸우기를 주장한 데서 말미암은 것이다. 행장(行長)은 청정과 서로 원수 사이인데 청정이 마침 한 척의 배로 바다에 이르러 현재 다시 오고 있는 중이다. 만일 수군이 바다 한가운데서 그를 요격한다면 청정을 사로잡고 전쟁을 끝낼 수 있을 것이다.”

하고, 인하여 청정의 기패(旗牌)의 모양과 색깔까지 알려주었다. 그러자 조정의 의론이 크게 미혹되어, 해평군(海平君) 윤근수(尹根壽)는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고 매우 강력히 말하면서 이에 순신을 재촉해서 행장의 말과 같이 하게 하도록 누차 아뢰었고, 도원수 권율(權慄) 또한 순신에게 진격할 것을 권하였다. 그러나 순신은 적의 말은 거짓된 것이라 하여 편의함을 지키고 움직이지 않으면서 상주하기를,

“한산도에서 부산까지 가다보면 도중에 길은 반드시 적진(賊陣)을 경유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필연적으로 우리의 형세가 파악되어 적들이 우리를 업신여기는 마음을 갖게 될 것이고, 또 부산에 당도해서는 바람을 안고 적을 맞아 싸우기에 불편합니다. 더구나 어찌 적의 말을 믿고 전쟁을 시험삼아 해볼 수 있겠습니까.” 하고, 듣지 않았다.

며칠 후 요시라가 또 와서 말하기를,

“청정이 이미 바다를 건너와버렸다. 수군은 어찌하여 이런 기회를 놓쳤단 말인가.”

하였다. 그러자 대간이 머뭇거리다가 적을 놓쳤다는 이유로 순신을 탄핵하였고, 포의(布衣) 박성(朴惺) 또한 풍문을 듣고 상소하여 ‘순신을 참수해야 한다’고 논하여, 조정의 의론이 흉흉하였다. 그리하여 영의정 유성룡은 감히 고집하여 다툴 수 없어 병을 핑계로 조정에 나가지 않았고, 이원익은 영남에서 상소하여 사실이 그렇지 않음을 논하였다. 상이 시신(侍臣) 남이신(南以信)을 보내서 그 사실을 염탐해오게 하였는데, 남이신 또한 원균의 당이 되어 사실과 반대로 보고하자, 그리하여 마침내 2월에 순신이 체포되었다. 이원익이 또 치주(馳奏)하기를,

“적이 두려워하는 것은 수군이요, 수군이 믿는 사람은 순신이니, 순신은 움직여서는 안 되고, 원균을 써서는 안됩니다.”

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순신이 결박된 몸으로 길에 오르자, 군민(軍民) 남녀노소가 모두 나와 길을 막고 부르짖어 통곡하며 말하기를, “우리는 죽게 되었다.”

고 하였다. 마침내 순신을 하옥하여 고문하고 장차 사형에 처하기에 앞서 상이 뭇 신하들에게 묻자, 판중추부사 정탁(鄭琢)이 말하기를,

“군사 기밀의 이해 관계는 멀리서 헤아릴 수 없습니다. 순신은 명장이니, 그가 요격하지 않은 데는 반드시 어떤 의도가 있었을 것입니다. 온 강역이 조용하지 못한 이때에 까닭없이 대장을 죽이는 것은 국가의 원대한 계책이 아닌 듯하니, 청컨대 우선 용서해주어 후일의 성과를 책임지우소서.”

하니, 상 또한 그의 노고를 생각하여 이에 감사(減死)하고 관직을 삭탈하여 백의종군(白衣從軍)하면서 스스로 공을 이루도록 명하였다. 이에 순신은 도원수 권율의 막하로 들어갔다.

이때 순신의 모친은 호남에 있었는데 순신이 하옥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배를 타고 바닷길로 돌아가다가 너무 놀라고 걱정된 나머지 바다에서 별세하였다. 순신은 감옥을 나와 아산(牙山)으로 달려가서 초빈을 행하고는 곧 떠나면서 대단히 슬퍼하여 말하기를,

“임금께 충성을 하려고 하자 죄가 이미 이르렀고, 어버이께 효도를 하려고 하자 어버이는 가셨구나.” 하였다.

한편 원균은 통제영에 이르러 모든 일을 순신이 하던 것과 반대로 하여, 장사(將士)들 중에 순신이 썼던 사람은 모두 내쫓았고, 자기의 비장인 이영남(李英南)은 일찍이 순신의 군대와 합세할 것을 건의하였고 그 일을 익히 알고 있다는 이유로 그를 배척하여 군사(軍事)에 참여시키지 않았다. 그리고는 술이나 즐기고 형벌이나 남용하여 온 군중이 해체(解體)되었다. 이때 요시라가 또 와서 김응서를 속여 말하기를,

“조선이 비록 청정은 놓쳤으나, 지금 일본의 수군이 또 곧 나올 것이니, 만일 수군으로 그들을 요격한다면 또한 이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조정에서 그 사실을 듣고는 마침내 다시 앞서 순신에게 했던 것처럼 원균에게 유시하니, 원균은 이미 순신을 고자질하여 죄를 얻게 하고 통제사의 자리를 차지한 터라, 이때에 이르러 그 일이 어려운 줄을 알면서도 감히 말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7월에는 원균이 수군을 모조리 지휘하여 부산으로 들어가 공격하였으나, 과연 순신이 말한 책략과 같이 크게 패하였다. 이때에 적들은 해안 이동(以東)을 끼고 주둔해 있었으므로, 원균이 수군을 거느리고 한산도로부터 바다를 건너갈때에 적들은 이미 먼저 정보를 입수하고 있었다. 마침내 절영도(絶影島.영도)에 이르러 적을 만나서 원균이 제군(諸軍)을 독촉하여 나가 싸우게 하자, 적들이 거짓 후퇴하는 척하면서 유인하니, 원균은 형세를 타고 마구 진격하였다. 그런데 적들이 짐짓 아군을 피로하게 만들기 위해 바다 가운데 배만 띄워놓고 종일토록 교전을 하지 않자, 우리 군사들은 형세를 잃어 물러나서 뱃머리를 돌려 되돌아오려 해도 거의 빠져나갈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러다가 밤이 깊어지고 파도가 심해져서 호남 수군의 배 7척이 표류하게 되자, 원균은 그 나머지 배만 거두어서 가덕도(加德島)로 돌아와 정박하였다. 여기서 군사들이 기갈(飢渴)에 못 이겨 서로 다투어 배에서 내려가 마실 것을 찾는 동안에 적들이 갑자기 나타나 아군을 습격함으로써 우리 장사(將士) 4백여 명을 잃었다. 그리고는 칠천도(漆川島)로 옮겨 정박했다가 다시 적의 추격을 받고 바다 가운데서 싸웠으나 크게 패하였다. 이에 원균은 배를 타고 언덕으로 올라가 도주하려다가 적에게 잡혀 죽었다. 이때에 전라도 수군절도사 이억기와 충청도 수군절도사 최호(崔湖)는 모두 죽었고, 경상도 수군절도사 배설(裵稧)은 항구를 탈출하여 도망쳐 죽음을 면하였다.

한산도가 함몰되자, 적들이 마침내 승승장구하여 서쪽으로 진격해서 남해(南海)ㆍ순천(順天)을 연해 함락시키고, 두치강(豆恥江)을 경유하여 육지로 올라와서는 남원(南原)을 격파하였다. 이때 천장(天將) 양원(楊元)은 겨우 몸만 도망쳐 살아났으며, 호서ㆍ호남이 크게 진경하였다.

처음에 적이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승승장구로 진격했지만, 오직 우리 수군에게만은 누차 꺾이었으므로, 수길(秀吉)이 대단히 분하게 여겨 행장(行長)에게 기필코 수군을 궤멸시키도록 책임지웠다. 그리하여 행장이 김응서에게 반간(反間)을 놓음으로써 이에 순신이 죄를 얻게 되고 원균이 패전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한산도의 패전 보고가 이르자 조야가 진동하였다. 상이 묘당에 계책을 묻자, 경림군(慶林君) 김명원(金命元)과 병조 판서 이항복(李恒福)이 말하기를,

“이렇게 된 까닭은 다름이 아니라, 순신을 교체하고 원균을 진용한 탓입니다. 지금 만일 순신의 직임을 회복시킨다면 해낼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원균이 패한 뒤에 도원수 권율이 소식을 듣고 순신에게 달려가 만나보고는 경악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자, 순신이 말하기를,

“청컨대, 내가 오늘이라도 몸소 연해 지방을 다니면서 형세를 살피고 편리함을 가려서 다시 도모해본다면 아마 퇴패한 것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하니, 권율이 크게 기뻐하였다. 순신이 마침내 장사(壯士) 몇 사람과 함께 진주(晋州)로 달려가서 흩어진 군졸을 모집하니, 장사들이 점차로 모여들었다. 이때에 또 체찰부에서 편의에 따라 순신에게 통제사의 호칭을 임시로 내리고 행재소에 주문(奏聞)하였다.

8월에 조정에서 다시 순신에게 통제사를 제수하는 교지를 내리자, 남쪽 백성들이 그 소식을 듣고 놀라며 기뻐하지 않는 이가 없었고, 장성한 사람들은 자기 집에 고하기를,

“우리 공(公)이 왔으니 너희들은 죽지 않을 것이다. 나는 가서 공을 따르겠다.”

고 하였다. 순신이 보성(寶城)에 이르자 따라붙은 장사가 백여 명이었다. 이때에 수군은 막 패하여, 경상도 수군절도사 배설만이 남은 배 10여 척을 이끌고 도망쳐 호남의 바다 한 모퉁이에 머물고 있었다. 순신이 배설을 만나 앞으로의 계책을 물으니, 배설이 “어찌할 수가 없다.”고 말하고, 순신에게 유리한 쪽을 선택할 것을 권하였다. 순신이 응하지 않자 배설이 자기 군사를 버리고 달아났으므로, 순신이 그 군사를 수령하고 배설을 잡아 참수하였다. 그리고는 마침내 전진하여 갈도(葛島)에서 적병을 추격하였다.

9월에는 어란도(於蘭島)에서 적병을 패배시켰다. 이때 조정에서 순신의 군대가 약함을 걱정하여 순신에게 육지로 올라와서 진퇴(進退)하도록 하니, 순신이 주문하기를,

“신이 한번 육지로 올라가고 나면 적들이 서해를 경유하여 곧장 올라가서 서울이 요동할 것입니다.”

하였다. 이때 호남에 피난하는 사민(士民)을 실은 수백여 척의 배가 여러 섬에 흩어져 정박해 있었으므로, 순신이 그들과 약속을 하여 그들로 하여금 군진(軍陣)의 뒤에 열지어 서서 성세(聲勢)를 이루게 하고 전함 10여 척만을 앞가리개로 삼고서 진도(珍島)의 벽파정(碧波亭) 아래서 적을 맞아 싸웠다.

원균이 패한 이후로 이미 한산도의 요새지를 잃은 터라, 순신이 중과부적으로 넓은 바다에서 교전하기가 어려우므로, 물러나 벽파정 아래 좁은 목을 지키면서 형세를 이용하여 의병(疑兵)을 설치하고 있었다. 이때에 이르러 적선 3백여 척이 명량(鳴梁)을 경유하여 곧장 아군의 진영으로 진격해온다는 첩보가 있자, 순신이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나가 방어하였는데, 적들이 아군을 수십 겹이나 포위하고 군대를 나누어 교대로 싸우는 가운데 적병은 많고 아군은 적어, 여러 장수들이 사기를 잃고 모두 퇴각하여 달아나려고 하였다. 이때 순신이 바다 한복판에 배를 머물러두고 꼼짝하지 않자, 적들이 그것이 대장선(大將船)임을 알고는 마침내 수백 척의 배를 가지고 차츰 죄어 들어왔다. 형세가 더욱 긴박해지매, 그리하여 순신이 대장기로써 지휘하여 나가 싸울 것을 독려하였는데, 이때 거제 현령(巨濟縣令) 안위(安衛)가 싸움을 버티지 못하고 머뭇거리며 후퇴하려고 하므로, 순신이 뱃머리에 서서 크게 고함을 질러 안위의 머리를 잘라오라고 하였다. 그러자 안위가 적진에 돌입하여 적과 교전하다가 배가 곧 함몰되려 하므로, 순신이 또 배를 돌려 그를 구해주니, 안위 또한 사력을 다해 싸웠고, 포시(炮矢)를 사방에서 발사하여 적병이 즐비하게 쓰러져 마침내 적을 크게 패배시켰다. 이때 적의 맹장 마다시(馬多時)를 사로잡아 참수하였고, 적선 30여 척을 부수었으며, 죽은 적병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고, 나머지 백성들은 포위를 풀고 도주함으로써 우리 군성(軍聲)이 다시 크게 떨쳤다.

처음에 적이 원균을 격파하고 나서는 장차 대군을 이끌고 곧장 서해로 쳐들어가서 장수를 뽑고 군대를 모집하여 결전을 한번 벌이려고 했었다. 그런데 순신은 막 패전한 뒤에 일어나서 병세(兵勢)가 아주 단약한데다 갑자기 거대한 적을 만났으므로, 인심이 대단히 불안하게 여기었다. 마침내 순신이 바다로 들어가 적을 맞으니, 적들이 아군을 사방에서 포위하여 포성(炮聲)이 바다를 진동하고 검광(劍光)이 햇볕을 요동시키는 듯하였으므로, 이때 남쪽에 피난온 사민(士民)들로 산에 숨어서 싸움을 구경하던 수만 명이 서로 아군을 바라보고 통곡을 하였었다. 적들은 교대로 나가고 물러가고 하면서 온종일 혈전을 벌였으나, 순신은 적은 군대로 많은 적병을 상대하여 끝내 큰 승첩을 거두었다. 날이 저물고 전쟁이 끝난 뒤 적병들이 모조리 섬멸되고 아군의 배만 우뚝 서있어 망루(望樓)도 파손되지 않았음을 보고는, 이날 관전했던 사람들이 몹시 감탄하여 진동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승첩의 보고가 올라가자, 상이 크게 기뻐하며 순신을 숭품(崇品)에 올리려고 하니, 말하는 이가 순신의 작질(爵秩)이 이미 높다고 함으로써 제장(諸將) 이하에게만 포상하였다. 천조(天朝)의 경리(經理) 양호(楊鎬)는 이때 경성에 있었는데, 그 역시 기뻐하여 말하기를, “근래에는 이런 승첩이 없었다.”

하고, 홍단(紅段)과 백금(白金)을 보내서 위로하고 상 주었다. 순신은 마침내 강진(康津)의 고금도(古今島)로 나가 진영을 만들고, 피난 온 사람들을 모아 살게 하고서 양식을 저축하고 배를 만들며, 쇠붙이를 불리고 농사를 짓도록 하니, 백성들이 어린아이를 등에 업고 모여들었다. 그리하여 몇 개월도 안 되어 병세(兵勢)가 더욱 장대해졌다.

이해 11월에는 천조의 경리 양호가 적장 청정을 도산(島山)에서 공격하다가 불리하여, 만세덕(萬世德)이 그를 대신해서 여러 장수를 나누어 보내 사로(四路)에서 적을 토벌하였다.

다음해 7월에는 천조의 수군도독(水軍都督) 진린(陳璘)이 수군 5천을 거느리고 남쪽으로 내려가 고금도로 들어가서 순신의 군대와 합세하였는데, 진린은 성질이 거칠고 포학하고 교만하였다. 진린이 경성에 이르렀을 때 상이 청파(靑坡)에 나가 전송하였는데, 진린은 자기 군인들이 수령을 구타하며 모욕을 주는 것을 내버려두고 독우(督郵)를 때려서 땅에 질질 끌곤 하였다. 유 상국(柳相國.유성룡)이 한 좌석에 있던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애석하다. 순신의 군대가 지금 또 패하게 되었다. 진린과 군중에 함께 있으면 반드시 그가 장수의 권한을 침범하고 군사들에게 포학을 자행할 것인데, 그 비위를 거스르면 노여움을 가중시키게 되고 그대로 따라주면 한이 없을 것이니, 군이 어떻게 패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니, 여러 사람이 서로 탄식하였다.

순신은 진린이 곧 온다는 소식을 듣고 미리 사냥을 많이 해다가 술과 음식을 성대히 차려서 그를 대접하였다. 진린이 바다에 들어올 적에는 군의(軍儀)를 갖추어 멀리 나가 맞이하였고, 이미 도착한 뒤에는 크게 연향을 베풀어 호궤하여 여러 장수 이하가 모두 실컷 취하였으므로, 사졸들이 서로 말하기를, “과연 명장이다.”

고 하였다. 그런데도 그 사졸들이 여리(閭里)에 들어가 약탈을 자행하여 여리가 소란해지자, 하루는 순신이 군사들을 시켜 옥개(屋蓋)를 모조리 철거시키고 옷가지와 양식만 싸가지고 배에서 내려갔다. 진린이 그 광경을 보고는 괴이하게 여기어 사람을 시켜 순신에게 묻자, 순신이 말하기를,

“천병(天兵)이 오는 것을 부모처럼 우러렀는데, 이제 도리어 횡침을 받아 사졸들이 실로 견디지 못하여 각자 도피하고 있으니, 나는 대장으로서 어찌 혼자만 남아 있을 수 있겠는가. 나 또한 다른 섬으로 옮겨가기 위해서이다.”

하니, 진린이 크게 부끄러워하며 즉시 순신에게 나아가 간절히 사과하였다. 그러자 순신이 말하기를,

“만일 대인(大人)께서 내 말을 들어준다면 내가 즉시 머무르겠습니다.”

하니, 진린이 말하기를, “당연히 일체 공의 말씀대로 따르겠습니다.” 하므로, 순신이 말하기를,

“천병이 우리 조선 사람들을 하인처럼 보아서 전혀 기탄하는 바가 없으니, 대인께서 만일 나에게 범법자들을 편의대로 처단하도록 허락해준다면 두 군영이 무사하게 서로 보전될 것입니다.”

하니, 진린이 말하기를, “삼가 승낙합니다.”

하였다. 이뒤로는 금령을 범한 한인(漢人)에 대해서 순신이 직접 법으로 다스리니, 한인들이 더욱 무서워하여 감히 명령을 어기는 자가 없어 도중(島中)이 조용해졌다.

녹도 만호 송여종(宋汝琮)이 한선(漢船)과 함께 적을 공격하여 적의 머리 70두를 참획하였는데, 한인은 참획한 것이 없었다. 진린이 한창 순신과 함께 연회를 하다가 그 소식을 듣고는 부끄럽고도 성질이 나서 그 한인을 마구 꾸짖었다. 그러자 순신이 그의 뜻을 알고 말하기를,

“대인이 와서 아군을 통제하고 있으니, 아군의 승첩이 곧 천병(天兵)의 승첩입니다. 어찌 감히 우리가 사사로이 하겠습니까. 70두의 머리를 모조리 드릴 터이니, 대인께서는 속히 황조(皇朝)에 주문(奏聞)하소서. 대인이 이곳 진영에 온 지 오래지 않아서 적들을 쳐서 잡았으니, 이 큰 공을 황조에 주문하면 어찌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진린이 크게 기뻐하여 순신의 손을 잡고 말하기를,

“본래부터 공은 동국의 명장이란 소문을 들었는데, 지금 보니 과연 그렇습니다.”

하였다. 송여종이 실망하여 스스로 자기 변명을 하므로, 순신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적들의 머리는 썩은 살덩이가 아닌가. 한인에게 주는 것이 무어 그리 애석한가. 너의 공은 내 장주(狀奏) 속에 들어있다.”

하니, 송여종 또한 복종하였다.

이로부터는 진린이 과분한 대우에 더욱 기뻐하였고, 또한 순신의 군사 다스리는 것과 승첩 거두는 것을 보고는 크게 흠복하여 매사를 반드시 순신에게 자문해서 하였다. 그리고 밖을 나갈 때는 순신과 교자를 나란히 타고 나가고 감히 먼저 가지 않았으며, 전쟁을 할 때는 반드시 우리 배보다 앞에 출전하였고, 자기 군사들을 단속하여 일체 순신의 호령을 따르게 하였다. 그가 일찍이 순신에게 말하기를,

“공은 소국(小國)의 인물이 아니오. 만일 중국으로 들어간다면 의당 천하의 상장(上將)이 될 것인데, 어찌하여 여기에서 스스로 고생을 하십니까?” 하였고, 또 우리 조정에 올린 글에는,

“순신은 경천 위지(經天緯地)의 재주와 보천 욕일(補天浴日)의 공이 있습니다.”

라는 말이 있으니, 대체로 순신에게 심복했던 것이다.

9월에는 적이 장차 철수하여 돌아갈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는 순신과 도독이 수군을 거느리고 순천의 예교(曳橋)에 나가 진을 쳤는데, 천조의 육군도독(陸軍都督) 유정(劉綎)도 묘병(苗兵) 1만 5천을 거느리고 역시 예교의 북쪽에 와서 진을 쳤다. 이때 적장 평의지(平義智)는 또한 남해로부터 와서 행장과 합하였다.

10월에는 유 제독과 함께 행장을 협공(夾攻)하기로 약속하고 순신이 진 도독과 함께 수군을 거느리고 나가 싸웠는데, 유 제독의 군대는 약속을 어기고 응하지 않았다. 이때에 행장이 수길(秀吉)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속히 철수하여 돌아가기를 꾀하면서 우리 수군을 두려워한 나머지, 유정에게 뇌물을 먹였기 때문에 그 공격을 늦추었던 것이다. 그들이 또 은밀히 진린에게도 재화(財貨)를 보내면서 길을 빌려줄 것을 매우 간절히 요구하자, 진린 또한 이를 허락하려 하므로, 순신이 목편(木片)에다 은밀히 글을 써서 진린에게 보여 충고하니, 진린이 부끄럽게 여겨 그만두었다. 그리고는 그 사람에게 말하기를,

“허락해주고 싶으나 통제사를 보기가 부끄러우니 어찌하겠느냐.”

하였다. 행장이 그 사실을 알고는 사람을 시켜 순신에게 총ㆍ칼 등의 물품을 보내주자, 순신이 이를 물리치면서 말하기를,

“나는 임진년 이후로 적을 수없이 죽이고 노획한 총ㆍ칼이 산더미처럼 쌓였는데, 이것을 무엇 하겠느냐.”

하니, 적의 사자가 아무 말도 못하고 물러갔다. 진린은 이미 적의 뇌물을 받았으므로, 굳이 길을 열어서 적들을 내보내주고자 하여 또 순신에게 말하기를,

“나는 행장을 놔두고 먼저 남해의 적들을 토벌하고자 합니다.” 하니, 순신이 말하기를,

“남해에는 모두 우리 백성들로서 포로가 된 자들이지, 적이 아닙니다.”

하자, 진린이 말하기를,

“이미 적에 붙었으니, 이 또한 적입니다. 내가 지금 가서 토벌하면 힘 안 들이고도 많이 벨 수 있습니다.”

하므로, 순신이 말하기를,

“황상(皇上)께서 장수를 명하여 적을 토벌하게 하신 것은 우리 소국의 인명(人命)을 구해주시려는 것인데, 이제 그 인명을 구해주지 않고 차별없이 베 죽인다면 아마 황상의 본의가 아닐 듯합니다.”

하였다. 그러자 진린이 화를 버럭 내면서 말하기를, “황상께서 나에게 장검(長劍)을 내리셨소.”

하므로, 순신이 말하기를,

“한 번 죽는 것이 하관(下官)에게는 애석할 바가 아닙니다. 다만 나는 우리나라의 대장이기에 결코 적을 놔두고 우리 인민을 죽일 수는 없습니다.” 하니, 진린은 말이 굴하여 대꾸하지 못하였다.

이윽고 행장의 군대가 대거 출동하여 남해의 적과 서로 화응하고, 곤양(昆陽)ㆍ사천(泗川)의 적 또한 노량(露梁)으로 와서 회합하였는데, 사천의 적은 곧 일본 살마주(薩摩州)의 군대로서 무적의 용맹을 지닌 군대이기에 행동을 진중히 하여 싸우지 않고 있다가 반드시 병세(兵勢)가 가장 위중한 곳에만 사용되었었다. 그런데 이때에 이르러 행장이 급하게 된 것을 보고는 군사를 모조리 출동시켜 와서 구원하는 것이었다. 이날 밤에 순신은 진 도독과 진격하기를 약속하고 적선 5백여 척을 맞아 밤새도록 대전을 벌인 끝에 적선 2백여 척을 불태우고 군졸과 무기를 죽이고 노획한 것이 헤아릴 수도 없었지만, 순신 자신은 적탄을 맞아 별세하였다. 이날 밤 3경에 순신이 배 위에 나와서 향을 불사르고 축원하기를,

“원컨대 하늘이시여, 속히 이 적들을 멸하게 해주소서. 적을 물리치는 그날에는 신이 죽음으로써 나라에 보답하겠습니다.”

하였는데, 갑자기 큰 별이 바다 가운데로 떨어지므로, 보는 이들이 이상하게 여겼었다. 그런데 이때에 이르러 적을 추격하여 남해 경계에 이르러서는 순신이 뱃머리에 서서 친히 시석(矢石)을 범(犯)하면서 독전하므로, 좌우에서 간하였으나 듣지 않다가 갑자기 날아온 적탄에 맞았다. 장막 안으로 부축해 들이자, 순신이 말하기를,

“싸움이 한창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

하고는 그대로 운명하였다. 순신의 형의 아들 완(莞)은 본디 담략이 있어, 순신의 죽음을 숨기고 순신의 명령대로 독전하니, 군중이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전쟁은 더욱 어렵게 되어 적들이 도독의 배를 포위하여 곧 함몰될 지경에 이르자 제군이 다투어 가서 구해주니, 적이 마침내 포위를 풀고 달아났다. 정오쯤에 이르러서는 적이 크게 패배하였고, 행장은 그 사이에 은밀히 외양(外洋)으로 빠져나가 도망쳐버렸다. 이때 진린이 사람을 보내 누차 공을 위로하였는데, 배 안에서는 이미 발상(發喪)을 거행한 뒤였다. 도독이 그 소식을 듣고는 스스로 의자 밑에 주저앉아 가슴을 치고 대성통곡을 하면서 말하기를,

“죽은 통제사가 나를 구해주었구나. 나는 이제 누구와 함께 한단 말인가.”

하였고, 양쪽 군사들이 모두 통곡을 하여 곡성이 바다를 진동하였다. 행장이 도망가고 나자 사천 및 연해의 적들도 차례로 모두 달아나 남해가 전부 말끔해졌다.

조정에서는 순신의 부음을 듣고 예관을 보내서 조제(吊祭)하고 특별히 의정부 우의정을 추증하였다. 영구(靈柩)를 아산(牙山)으로 운반했는데, 이르는 곳마다 사민(士民)들이 제(祭)를 지내고 상여를 끌면서 부르짖어 통곡하여 그 행렬이 천리를 끊이지 않았으며, 길가는 사람들도 눈물을 뿌리었다. 그로부터 8년 뒤에 선무공신(宣武功臣) 1등에 책록되고 좌의정 덕흥부원군(德興府院君)에 추증되었다.

순신은 젊어서 웅대한 뜻이 있어 항상 말하기를,

“장부가 세상에 나서 쓰이면 몸을 바칠 것이요, 쓰이지 못할 경우에는 초야에서 농사짓고 사는 것으로 충분하다. 권귀에게 아첨하여 한때의 부귀를 훔치는 일은 내가 매우 부끄럽게 여긴다.”

하였다. 그러므로 출신하여 처음 벼슬할 때부터 대장이 되기에 이르기까지 이 도리를 변함없이 지키었다. 그래서 훈련원의 낮은 벼슬아치는 직무가 난잡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이를 꺼렸으나, 순신은 태연하게 취임하였다. 순신은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지 않았고 나긋나긋한 태도를 좋아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오랫동안 낮고 고달픈 지위에 있으면서도 초연하게 대처하였고, 자신을 단속하는 풍도가 늠름하여 일체 무턱대고 몸을 굽혀서 남을 따른 적이 없었으니, 그 천성이 그러했던 것이다.

정여립(鄭汝立)의 역옥(逆獄)이 일어났을 적에 순신은 정읍(井邑)에 있었는데, 도사(都事) 조대중(曺大中)이 역옥에 연루되어 체포되자, 금오랑(金吾郞)이 문서들을 수취(搜取)하는 과정에서 순신이 조대중과 문답한 글이 있음을 발견하고는 순신에게 은밀히 말하여 그것을 없애버리려고 하니, 순신이 말하기를,

“내 글에는 다른 말이 없다. 그리고 이미 수취한 가운데 들어간 것을 어찌 훔쳐낼 수 있단 말인가.” 하였다. 그 후 조대중이 죽어서 널[柩]이 정읍을 지날때 순신이 곡하며 보냈는데, 이를 힐난하는 이가 있자, 순신이 말하기를,

“조군(曺君)이 자복하지 않고 죽었으니, 그 죄의 유무는 알 수가 없다. 그리고 금방 사객(使客)을 지낸 터에 무관한 태도로 볼 수가 없다.”

하였다. 의정 정언신(鄭彦信) 또한 옥에 갇혀있을 적에 순신이 마침 사령에 따라 서울에 왔다가, 그가 옛 장수였기 때문에 그 감옥에 나아가 문안을 하니, 듣는 이들이 순신을 의롭게 여겼다. 순신이 대간의 평론에 의해 하옥되어 의율(議律)할 적에 옥리가 뇌물을 쓰면 죄를 가볍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은밀히 말하여 자제가 그 사실을 보고하니, 순신이 노하여 말하기를,

“죽게 되면 죽는 것이지, 어찌 정도를 위배하여 살아나기를 구할 수 있단 말이냐.” 고 하였다.

순신이 장수가 되어서는 간이하게 다스리면서도 법도가 있어 한 사람도 함부로 죽이지 않았지만, 삼군(三軍)에 감히 명령을 어기는 자가 없었고, 아무리 신분을 믿고 빳빳하게 구는 자라도 순신의 풍채만 바라보면 저절로 굽히었다. 일을 만나면 과단성 있게 처리하여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고, 사람들에게 형벌을 쓰거나 상을 내리는 데 있어서도 일체 귀천이나 친소 관계로 인하여 마음속에 경중을 두지 않았으므로, 뭇 아랫사람들이 두려워하면서도 사랑하였다.

그가 진영에 있을 적에는 먼데까지 척후(斥候)를 하고 경위(警衛)를 엄격히 하고서, 항상 갑옷을 입고 부월(鈇鉞)을 베고 누웠다가, 적이 오면 반드시 먼저 알아냈다. 그리고 매일 밤마다 군사들을 휴식시키고 반드시 스스로 전우(箭羽.화살에 꽂는 것)를 다스리었고, 싸울 때에 당해서는 처음에 사사(射士)들에게 빈 활만 주었다가 반드시 적이 가까이 온 다음에야 화살을 나누어 주었으며, 또 말하기를,

“우선 적을 많이 죽이는 데에 힘쓰고 머리 베는 것을 일삼지 말라. 너희들의 힘으로 안 되는 것을 내가 직접 본 바이다.”

하였으니, 군사들이 모두 스스로 분발하여 수공(首功)을 숭상하지 않았다. 그리고 매양 싸움에 당해서는 장사(將士)들과 똑같이 활을 쏘았으므로, 장사들이 도리어 적탄에 몸을 상할까 염려하여 순신을 부액하고 간하기를,

“어찌하여 나라를 위해 자중자애하지 않으십니까.”

하면, 순신이 하늘을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내 명이 저기에 달려있는데, 어찌 너희들에게만 대적하게 할 수 있겠느냐.”

하였다. 예교(曳橋)의 싸움에서 순신의 인척인 사도 첨사(蛇渡僉使) 황세득(黃世得)이 전사하여 여러 장수들이 조문을 하자, 순신이 말하기를, “세득은 왕사(王事)에 죽었으니, 그 죽음은 영광된 것이다.” 하였다.

순신은 7년 동안 군중에 있으면서 군무에만 노심초사하였고 일찍이 여색을 가까이하지 않았다. 그가 얻은 상사(賞賜)들은 모조리 흩어서 여러 장수들에게 나누어주고 사사로 남겨둔 것이 없었다. 또 사람들을 어루만져 편안하게 하는 데에 힘쓰고, 농사를 가르쳐 곡식을 저축하고, 어염(漁鹽)의 이끗을 크게 일으켜 근본적인 계책을 내기에 힘썼다. 이 때문에 군량이 넉넉하여 핍절된 적이 없었고, 남쪽 백성들 가운데 이것으로 명맥을 유지한 사람도 수만 가호에 달하였다.

처음 진(鎭)에 이르렀을 때부터 사졸들의 양식이 떨어질 것을 걱정하여, 순신이 해로통행첩(海路通行帖)을 만들고 명령을 내리기를,

“삼도(三道)의 강과 바다에 공선(公船)이든 사선(私船)이든 통행첩이 없이 다니는 배는 간첩으로 논할 것이다.”

하였다. 그러자 바다에 들어가는 배들이 각각 배의 크고 작은 차등에 따라 쌀을 바치고 통행첩을 받아감으로써 10일 동안에 만여 석의 양식을 얻었다. 또 백성들을 모집하여 강철(鋼鐵)을 거두어서 대포를 주조하고, 나무를 베다가 배를 건조하여 일마다 힘써 대비하니, 민심이 더욱 견고해져서 도중(島中)이 성시를 이루었다.

한번은 정미(精米) 만 곡을 별도로 저축하여 창고에 저장하자, 어떤 이가 어디에 쓰려는가를 물으니, 대답하기를,

“상께서 용만(龍灣.평안도 의주)에 계시는데, 만일 평양의 적이 서쪽으로 돌진할 경우에는 어가가 요동(遼東)으로 건너가게 될 것이니, 나의 직분에 있어서는 의당 용주(龍舟)를 바다에 띄워 어가를 맞이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늘이 당(唐) 나라를 멸망시키지 않는다면 그대로 회복을 도모할 것이고, 비록 불행하게 되더라도 임금과 신하가 우리나라 땅에서 함께 죽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러나 또 내가 죽지 않는 한 적들이 감히 서쪽을 범하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한산도에 있을 적에는 당(堂)을 하나 지어 운주(運籌)라 명명하고 주야로 그곳에 거처하면서 여러 장수들과 함께 병사(兵事)를 논하였는데, 아무리 낮은 군졸일지라도 병사를 말하려는 자가 있으면 즉시 와서 고하도록 허락하여 군정(軍情)을 통하게 하였다. 군중에서는 매양 한밤중에도 반드시 촛불을 밝히고 일어나 일을 보되, 아무리 병이 심할 때에도 일 보는 것을 폐하지 않았다. 좌우에서 휴식을 취하도록 청하면, 공이 말하기를,

“적과 서로 마주하여 승패가 순간에 결정나는 때인 만큼, 장수 된 자의 도리로서는 아파서 죽을 지경만 아니면 스스로 편히 있어서는 안 된다.”

하였다. 그리고 싸움을 하기에 앞서 비장들을 두루 불러서 계획을 물어 정한 다음에 싸웠기 때문에 싸움에 임해서도 의사가 편안하고 한가로워서 항상 여유가 있었다. 또 널리 꾀하고 좋은 방도를 취하여 용맹을 분발해서 기략을 결단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쓰이는 것을 즐거워하였다.

매양 전쟁에 승리했을 적마다 여러 장수들에게 ‘반드시 교만해진다’는 뜻으로 경계시키기 때문에 여러 장수들이 신중을 기하여 가능함을 보아 진격하고, 어려움을 알아서 후퇴하되, 후퇴할 적에는 반드시 세 번 취타(吹打)를 하고 나서 군대를 재빨리 선회시켰다. 그러므로 그가 죽던 날에도 기율(紀律)과 절제(節制)가 그대로 유지되어 끝내 승첩을 거두었던 것이다.

건원보(乾原堡)에 있을 적에는, 어버이를 장사지낸다는 소식을 듣고도 떠나지 못하는 수졸(戍卒)에게 자신이 타던 말을 풀어서 부의하기도 하였다. 일찍이 원균과는 거슬림이 있었으나 전혀 원균의 단점을 말하지 않았고, 무함이 날로 이르를 적에도 조금도 자신을 변명하는 일이 없었으니, 의리를 좋아하고 남을 잘 용납하는 것이 이러하였다.

관리의 사무에도 밝아서 있는 곳마다 잘 다스린다고 일컬어졌다. 상국 이원익이 체찰사로 남쪽에 내려갔을 때 백성들의 소첩(訴牒)이 적체되었으므로, 순신을 불러 처결하게 한 결과 남김없이 모두 처결해내니, 원익이 크게 감복하였다. 원익이 한산도에 들어가 일을 보고 돌아오려 할 적에 순신이 청하여 말하기를,

“군정(軍情)이 반드시 상공께서 호상(犒賞)을 내릴 것이라고 여기고 있으니, 지금 이것이 없으면 실망됨이 없지 않을 듯합니다.” 하니, 원익이 말하기를,

“참으로 옳은 말이오. 그러나 다만 내가 애당초 조금도 갖추어온 것이 없으니 어찌하겠소?” 하므로, 순신이 말하기를,

“내가 상공을 위하여 이미 마련해놓았으니, 상공께서 허락만 해주신다면 의당 상공의 명으로 호궤를 내리겠습니다.”

하였다. 원익이 기뻐하여 마침내 제군을 크게 호궤하니, 온 군중이 뛸 듯이 기뻐하였다. 순신이 작고한 뒤에도 이 상공이 매양 이 일을 말하면서 감탄하여 말하기를,

“이 통제는 대단히 재국(才局)이 있었다.” 고 하였다.

순신에게 두 형이 있었으나 먼저 작고하였다. 그 유고(遺孤)들을 어루만져 보살피되 은혜가 자기 자식에게보다 더하였고, 시집보내고 장가들이는 일에 있어서도 반드시 형의 자식을 먼저 하고 자기 자식을 뒤로 하였다.

순신은 을사년(1545)에 태어나서 무술년(1598)에 작고하니, 향년이 54세였다. 순신이 작고하자, 해변의 백성들이 서로 협력하여 사당을 세워서 철마다 그를 제사지내니, 장사꾼들이 왕래하거나 행군(行軍)이 출입할 때나 군민(軍民)으로서 그 밑을 지나는 모든 사람들도 모두 술 한 잔씩을 부어 올린 다음에 떠났다. 또 돌을 다듬어 비석을 세워서 ‘이장군타루지비(李將軍墮淚之碑)’라 하였다. 그 후에 조정에서 묘액(廟額)을 ‘충민(忠愍)’이라 내리고 비석을 세워 그 사실을 기록하였고, 뒤에 시호를 ‘충무(忠武)’라 하였다.

아들 회(薈)는 현감이고, 예(䓲)는 정랑이며, 면(葂)은 담력이 있고 강하고 건장하여 자기를 닮았다고 했었는데, 모친을 모시고 집에 있다가 왜인에게 죽었다. 첩에게서 낳은 아들은 훈(薰)과 신(藎)인데, 모두 용력이 있어 무과에 합격하였으나, 벼슬을 얻지 못하였다.

조그만 웅덩이에는 큰 고기가 없고, 작은 나라에는 거인(巨人)이 없다고 하지만 어찌 그렇겠는가. 통제공 같은 분은 바로 그 수립한 바가 고인(古人)에게서 찾아보더라도 진실로 주아부(周亞夫)ㆍ이 서평(李西平)ㆍ악 무목(岳武穆) 등에게 손색이 없으니, 심산 대택(深山大澤)의 용호(龍虎)와 같이 변화를 헤아릴 수 없는 괴걸(魁傑)한 인물이라 이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의 선인(先人.윤효전)께서 공의 딸(이순신의 서녀)을 외부(外婦.첩)로 삼으셨으므로, 나는 그나마 공의 집사ㆍ하인 및 공을 섬긴 사람들을 만나서 공의 용모와 기호와 모습이 어떠한 사람이었나를 물어 알 수 있었다. 공은 큰 체구에 용맹이 뛰어나고 붉은 수염에 담기(膽氣)가 있는 사람이었다. 평상시에도 본디 비분강개하여 적을 죽이면 반드시 간(肝)을 취하였다.

예교(曳橋)에서 싸움이 급해졌을 때는 공이 뱃머리에 나가 싸움을 독려했는데, 장사들이 나가지 못하도록 극력 간하였으나, 듣지 않고 말하기를,

“적만 죽이면 나는 죽어도 유감이 없겠다. 적이 물러가면 내가 죽어도 너희들은 편안할 것이다.”

하였으니, 이 말이 사실이라면, 공은 진실로 사훼(蛇虺)가 세상을 독란(毒亂)시킨 것에 분개함과 동시에 고래 같은 고기는 작은 도랑에 오래 있을 수 없음을 또한 알았던 것이 아니겠는가. 아, 슬프다.

내가 일찍이 뜻을 굳게 지킨 우리 옛 선배들을 논한 바 있는데, 삼가 생각건대, 공은 둘도 없는 국사(國士)였기에, 나는 그 밑에서 채찍이라도 잡고 싶은 흠모를 느끼는 바이다. 그 당시 마치 홍파(洪波)의 지주(砥柱)처럼 해적(海賊)을 굳게 차단하여 황상께서 동쪽을 돌아보는 근심을 늦춤과 동시에 해적들로 하여금 한번 크게 혼이 남으로써 종신토록 기를 펴지 못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준동하지 못하게 한 일로 말하자면, 공을 천하에 남겼다고 하더라도 무슨 부끄러울 것이 있겠는가. 우리나라는 벽루한 곳에 있어 증거가 없으므로, 그 위대한 공적과 꿋꿋한 행실이 끝내 세상에 드러나지 못할까 두려워서 이렇게 기록하여 천하 후세에 고해서, 우리 소국에도 이런 괴걸한 사람이 없지 않다는 것을 알게 하는 바이다. 그 당시 항오 사이에서 함께 공의 지업(志業)을 도왔던 사람들에 대해서도 역시 듣고 본 것을 엮어서 끝에 붙이는 바이다.

그리고 유서애(柳西厓.유성룡)ㆍ이 완평(李完平.이원익)ㆍ정 상국(鄭相國.정탁)ㆍ경림(慶林.경림부원군 김명원)ㆍ오성(鰲城.오성부원군 이항복) 등 제공 같은 이들은 이 사람을 전후좌우에서 발탁시키고 붙들어 주어서, 세상의 못난 위인들로부터 씹고 비웃음을 받지 않고 끝내 지업을 성취하도록 하였으니, 또한 어찌 어진이를 돕고 덕 있는 이를 보필하고 충신을 현창시키는 대신(大臣)의 일이요 인자(仁者)의 공이 아니겠는가.

상고하건대, 《지봉유설(芝峯類說)》에 이르기를,

“승평(昇平)의 중 옥형(玉浻)이란 자가 일찍이 통제사 이순신을 따라 수군에 있으면서 공을 세웠는데, 통제사가 작고한 뒤에는 그대로 충민사(忠愍祠)에 수십 년을 있으면서 스스로 제전(祭典)을 드리고 있는바, 지금 나이 80여 세가 되었다. 그는 또 해상(海上)에 경보(警報)가 있을 때면 통제사가 반드시 사전에 현몽하는데, 언제나 어긋남이 없었다고 말했다.”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그 영령이 아직 다 사라지지 않고 있어서 한 조각 국가 위하는 마음만은 몸이 죽어도 죽지 않은 것이 아니겠는가. 이것도 의당 유사(遺事) 안에 첨입시켜야 되겠기에 기록해두는 바이다.

심공 총(沈公摠)에게서 들은 바에 의하면, 통제사가 재임(再任)되었을 적에 그의 외대부(外大父)인 추포(秋浦) 황공(黃公)이 호백(湖伯)으로 있으면서 통제사를 도중(島中)에서 만났는데, 붕가(棚家) 수십 칸을 짓고 기술자들을 모아서 집구(什具)를 만들고 있으므로, 황공이 말하기를,

“이것을 만들어 무엇을 하려는 겁니까?” 하자, 통제사가 웃으며 말하기를,

“인사(人事)를 닦으려는 것일 뿐입니다.”

하니, 황공이 이에 남쪽 정벌 때에 조정의 귀인(貴人)들에게 향유(餉遺)할 뜻이 있음을 알고서 서로 한바탕 웃었다. 통제사에 대한 비방이 일어나자 황공이 그를 극력 구원하니,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 또한 이모(李某)의 안자(鞍子)를 받은 유이다. …… ”

고 했다 하였다. 아, 그렇다면 남쪽 정벌에 관한 말은 곧 도움을 구하려는 것이 아니라, 냉담한 말로 남의 귀를 시리게 하지 않고자 한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나는 이것이 자기를 위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해치는 것으로써 위로 나라에까지 미치지 않게 하고자 해서라고 여기는 바이다.

슬프다. 충신이나 국사(國士)가 쇠퇴한 세상에 처하자면, 그 뜻이 슬프고 그 생각 또한 주도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일에 있어서는 통제사의 뜻이 있으면 가능하거니와, 통제사의 뜻이 없으면 될 수 없는 일이니, 이것을 어찌 속인(俗人)들과 말할 수 있겠는가.

내가 일찍이 은봉(隱峯) 안공(安公.안방준)이 정운(鄭運)의 일을 기록해놓은 것을 읽어보니, 군사를 내어 사력을 다해 싸운 공을 정운에게 돌리어서 마치 통제사를 하찮게 여긴 듯한 뜻이 있었다. 아, 정운이 군사를 내는 일을 도운 것은 용맹이고, 죽음을 돌아보지 않고 힘껏 싸운 것은 충성이었다. 그러나 통제사가 주장이 되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런 충성을 바칠 수 있었겠는가. 이는 참으로 훌륭한 덕과 용모를 지닌 어질고 슬기 있는 대인이 사람을 쓰는 데 있어 자기로 말미암는 도리인 것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그것을 알지 못하니, 또한 이런 뜻을 미루어 밝혀야 한다. 옛말에 이른바, “남에게서 취하기를 좋아한다.”는 것은 곧 혼자만 군자가 되기를 부끄럽게 여긴 것이니, 어찌 사람을 멀리할 수 있겠는가. 한 고조(漢高祖)가 이르기를,

“나는 삼걸(三傑.장량,소하,한신)만 못하다.”

고 하였으니, 바로 그 삼걸만 못한 것이 결국 그들을 쓰게 된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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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허현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0.05.25 나라에서 시호(諡號)를 충무공(忠武公)으로 내린 인물은 우리나라 역사에서 이순신을 비롯해서 김시민,조영무,김응하,구인후,이수일,정충신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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