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公)의 이름은 봉길(奉吉, 1908~1932)이고, 아버지는 윤황(尹璜)이다. 예산군(禮山郡) 덕산면(德山面) 시량리(柿梁里)에 살았고, 본관은 파평(坡平)이며, 어머니는 김원상(金元祥)이다. 공은 1908년 5월 22일에 태어났다. 7세에 서당에 가서 공부하였는데 총명하여 여럿 가운데 특출나서 원근에서 칭찬하며 신동이라 일컬었다. 타고난 성품은 정직하고 용감하여 남에게 굽히려 하지 않았으니 어른이 회초리를 때려도 반드시 따지며 대들었고 혹 꾸지람을 들으면 도리어 눈을 부릅뜨고 쏘아보았다. 15세에 더욱 독서에 힘을 쏟아 문장과 시를 지을 수 있었다. 하루는 스승이 여러 손님과 모임을 하면서 공의 재주를 시험하려고 연환시(連環詩)를 지으라 명하고는 ‘명(明)’, ‘청(晴)’, ‘성(聲)’ 3자를 운자로 집어 주었다. 공이 즉시 명에 따라 다음과 같이 읊조렸다.
썩지 않을 이름으로 선비의 기상 밝으니 / 不朽聲名士氣明
선비의 기상 밝고 밝아 만고에 맑으리라 / 士氣明明萬古晴
만고에 맑은 마음 모두 배움에 달렸으니 / 萬古晴心都在學
모두 학행에 달려 있어 명성 썩지 않으리 / 都在學行不朽聲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크게 칭찬하며 말하였다.
“기상이 공경스러우니, 이 아이는 비범한 인물이다.”
16세가 되어 공이 스스로 일본어를 수학하였다. 스승이 반대하였으나 공이 듣지 않고 1년 내에 그 요령을 터득하였다. 17세에 마을의 원로들이 간절히 권하여 교수로 초빙하니 공이 이에 동의하여 민중을 가르치고 육성할 강사로 취임해 두 해 동안 민중의 계몽에 노력하였다. 19세에 농촌의 아동들에게 취학의 길이 없는 것을 알고는 원로들과 상의하여 작은 초당을 짓고서 가난한 농부의 자제들을 모아 야학을 열었다. 부지런히 가르쳐 성과가 매우 뛰어나자 마을에서 칭찬하였다. 학예회를 열어 이를 통해 감정을 서로 교류하고 학부형의 친목과 우호를 증진하기도 하였으며, 월례회(月例會)를 열어 고금의 재미있는 내용을 강연하여 통속 교육을 촉진하기도 하였다. 공이 이때에 스스로 마을에 대한 노래를 지어 사람들을 면려하였다.
23세에 노동으로 고생하는 민중들이 점차 깊은 물과 타오르는 불구덩이에 빠져드는 것을 목격하고 환하게 스스로 깨달았다. 공이 스스로 적은 기록의 한 구절을 근거로 말하면 다음과 같다.
“내가 이에 스스로 각오가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메마르고 꺾여 가는 민중을 차마 그대로 보고 있을 수 없었고, 물에 빠지고 불에 타고 있는 동포를 차마 볼 수가 없었으며, 또 차마 태연히 강 건너 불구경하듯 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내가 말하는 각오란 무엇인가. 나의 굳센 주먹을 치켜들고 우리들의 적을 분쇄하는 것이었다. 나의 굳센 주먹은 관 속에 들어가면 쓸 데가 없어질 것이고, 늙으면 쓸 데가 없을 것이다. 쟁쟁하게 귓전을 울린 것은 상해 임시정부였다. 무슨 많은 말이 필요하겠는가. 내가 이러한 각오를 품고 분연히 고향을 떠나 나의 부모, 형제, 처자식과 이별하고서 고통을 인내하며 압록강을 건넜다. 길을 나선 뒤에 가장 먼저 꼭 죄어 온 것은 경제적 어려움이었다. 겨우 산동성(山東省) 청도(靑島)에 도착한 뒤에는 다시 한 걸음도 나아가기 어려웠기에 상해로 갈 방법이 없었다. 결국 잠시 세탁소에서 일을 하며 근검절약하여 돈을 모아 예전에 진 빚을 갚았다. 예전에 진 빚이란 내가 조직한 월진회(月進會)에서 내가 산동성에 올 수 있도록 여비로 빌려준 것이다. 예전에 진 빚을 갚고 나니 또 남은 돈이 없었다. 그래서 1년간 산동성에 남아 돈을 모았다. 24세가 된 해의 5월 8일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내가 오래도록 동경하던 대본영(大本營)이 있는 곳에 도착하였다. 비록 부두에 나와서 나를 맞이해 주는 사람은 없었지만 마음속으론 그래도 매우 기뻤다.”
공이 처음 상해에 도착했을 때에 언뜻 보기에는 구조를 받으러 온 난민 같았으니, 등나무 가방 하나를 들고 남루한 복장에 초췌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미간 사이에는 한 점 꾸밈없고 참된 기상이 있었다. 이해에 또 종품 공사(鬃品公司)의 직공이 되었다. 공은 17명의 직공과 공우회(工友會)를 조직하였고 천거되어 회장이 되었다. 이후 노동자와 자본가 간에 충돌이 생겨 결국 퇴사하고 계춘건(桂春建)과 함께 홍구(虹口)에 작은 채소 상점을 열었다. 비록 그렇지만 마음속은 요동쳐 나라를 위해 적을 죽이고자 하는 바람은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당시 임시정부는 김구에게 명하여 누차 죽기를 각오한 지사를 사방으로 파견하게 하였으니, 적국 왕을 죽이기 위해 이봉창(李奉昌)을 도쿄로 파견하고, 적국 총독을 죽이기 위해 유모(兪某)와 서모(徐某)를 한국으로 파견하고, 우치다(內田), 혼조(本莊), 도이하라(土肥原) 등을 죽이기 위하여 유상근(柳相根), 최흥식(崔興植), 이성원(李盛元), 이성발(李盛發)을 만주로 파견한 것이 그 예이다. 거사를 위한 제4차 ‘죽기를 각오한 지사’ 모집에서 윤봉길이 선발되었다.
1932년 4월 29일 새벽 김구는 명에 따라 공을 불러 만나서 방침을 전달하였고 아울러 폭탄 2개를 주었다. 맹세 후에 사진을 찍어 남기고 전례에 비추어 의식을 거행하였다. 맹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나는 삼가 우리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국애국단 단원이 되어 중국을 침범하는 원수인 군인 우두머리를 도륙해 정의를 새기고자 맹세합니다. 대한민국 14년 4월 26일 윤봉길.” - 입단 후 4일째였다. -
이날 의식을 마치고 공은 자동차를 타고 달려가 경계가 삼엄한 홍구공원(虹口公園) 안으로 곧장 들어갔다. 어깨에는 보온병 하나를 비껴 매고 손에는 도시락 통 하나를 들고서 태연히 군중을 밀치고 단상 앞에 서서 기회를 엿보았다. 번뜩이는 두 눈은 마치 먹이를 채 가려는 매와 같고, 고요히 움직이지 않는 것은 쥐를 잡으려는 고양이와 같으며, 한국의 분노를 한 몸에 전부 모아 양 떼 사이에 호랑이가 서 있는 듯하고 여우들 사이에서 사자가 노려보고 있는 듯하였다. 이날은 적국 왕 히로히토(裕仁)의 생일로, 상해에 있는 일본 교민과 육ㆍ해군(陸海軍) 1만 4000여 명이 홍구공원에 모여 전승(戰勝) 축하와 경축 대회를 거행하려 하였다. 아침 9시 시라카와(白川) 사령관의 검열을 받으려는 제9사단, 해군 육전대(海軍陸戰隊) 총 1만 2000여 명이 있었다. 그중에는 기관총 부대, 기병대, 보병대, 야전포대, 탱크 부대, 철갑차 부대, 운송 부대, 중포(重砲) 부대, 고사포(高射砲) 부대, 치중대(輜重隊) 등의 6000명이 있었고, 해군 철갑차 1개 부대 8대, 오토바이 부대, 구호(救護) 부대 등 3000여 명이 있었으며, 아울러 헌병대 1000여 명이 줄줄이 연이어 들어왔다. 상해의 일본 교포들은 남녀 모두 손에 태양기(太陽旗)를 들고 바닷물이 밀려오듯 길가로 나와 깃발을 흔들며 환호하였고 우레가 진동하듯 미친 듯이 노래를 불렀다. 모두 3만여 명의 적국 사람들이 해군 군악대의 음악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개미처럼 공원에 모였던 것이다.
9시에 적국 사령관 시라카와가 비로소 공원에 들어왔다. 삼엄한 경비 속에 먼저 공부국(工部局) 경찰의 오토바이 1대가 길을 열었고, 양쪽으로 무장 경찰이 바짝 붙어 호위하였다. 두 번째 차량은 완전 무장을 한 일본 경찰의 자동차이고, 세 번째 차량은 시라카와 대장과 그의 참모장 다시로(田代)와 4명의 부관(副官)의 자동차이고, 네 번째 차량은 또 공부국 서양 경찰의 자동차였다. 시라카와가 입장한 뒤에 시게미쓰(重光) 공사, 우에다(植田) 중장, 노무라(野村) 사령관, 무라이(村井) 주상해 총영사, 상해 일본 교민 단장 가와바타(河端), 거류민단 서기장 도모노(友野) 등과 함께 매우 기뻐하며 스스로 동아시아의 패권을 차지한 것으로 여기면서 잇따라 단상에 올라 일렬로 섰으며, 각 부대는 단상 앞 양쪽 옆에 서서 실탄이 든 총을 매고 좌우에서 호위하였다.
단상 위는 화려한 장식으로 꾸미고 사면은 붉은색과 흰색의 천을 둘렀으며 위는 장막을 펼쳤는데, 단상은 공원 가운데 노천의 풀밭에 있었다. 먼저 시라카와가 연설하였고, 다음으로 시게미쓰 등이 서로 이어 연설을 하며 사기를 북돋았다. 비행기 18대가 낮게 날며 재주를 뽐냈고, 11시 20분이 되어 행사가 끝났다. 각국의 총영사는 앞뒤로 단상을 내려왔고, 시라카와, 우에다, 노무라, 시게미쓰 등만 그대로 단상에 남아 마치 죽음의 신을 기다리는 사람들 같았다. 단상의 왼쪽 첫 번째 사람은 무라이 총영사였고, 다음은 우에다 사단장, 다음은 시라카와 사령관, 다음은 노무라 해군 중장, 다음은 시게미쓰 공사, 다음은 도모노 서기장, 그리고 가장 오른쪽 사람은 가와바타 거류민 단장이었다.
시게미쓰 마모루(重光葵)가 단상 아래 일본인 학생에게 연설을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이때에 단상 1미터 거리의 인파 가운데서 커다란 폭탄 하나가 날아와 7명의 적이 둘러선 단상 위에 정확히 떨어졌다. 칙칙 소리를 내면서 아직 터지지는 않았는데 한 명이 눈여겨보고는 위험하다고 크게 소리쳤다. 누가 발로 차려고 하자 다른 사람이 얼굴이 흙빛이 되어 말리며 “이것은 분명 폭탄이다.”라고 하였다. 형태가 보온병과 같았기 때문에 그들이 성내는 소리를 듣고서 폭탄인 줄은 알았지만 한순간에 커다란 굉음이 일고 짙은 연기가 사방을 덮었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지는 듯하여 온 행사장이 깜짝 놀라게 되었다. 단상과 사령대(司令臺)의 괴수들이 모두 소리와 함께 엎어졌다. 시게미쓰는 미처 말을 마치기 전에 가장 먼저 단상 아래로 고꾸라졌고 무라이가 부축하려다가 그도 역시 엎어졌으며, 시라카와는 단상에서 엎어졌다. 행사 단상은 이에 따라 무너졌다. 가와바타는 즉사하였고, 시라카와는 온몸에 300여 개의 파편이 꽂히고 빰은 온전하지 못하여 열흘이 못 되어 주검으로 돌아갔다. 우에다는 발가락이 부러지고 온몸에 파편을 맞아 1년간 일어나지 못했고, 노무라는 눈이 튀어나왔으며, 시게미쓰는 폭발에 무릎이 잘려 다리의 일부분까지 톱으로 잘라 냈다. 무라이와 도모노는 가장 경미한 부상을 입었지만 이들도 몇 개월간 일어나지 못했다. 단상 아래에 있던 일본 교민 4명도 중경상을 입었다.
보온병을 알루미늄 재질로 만들어 그 안에 다량의 강력한 폭약을 담았다. 알루미늄 파편은 뼈에 박혀 뽑아낼 수 없었다. 단상 앞의 지면은 폭발로 커다란 웅덩이가 생겼는데 직경이 석 자 남짓이고 깊이는 헤아릴 수 없었다.
공이 다시 도시락 폭탄을 던지려 하였으나 실행하지 못한 채 적병에 포위되었고, 붙잡혀 적군 사령부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공의 태도는 더욱 장하여 마치 전쟁에 승리하여 승전을 알리는 장군 같았다. 나이 25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