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焚書(분서)≫는 중국 명나라의 사상가, 사학가, 문학가이고, 스스로 이단을 자처하며 유가의 말기적 폐단을 공격한 이지(李贄 1527~1602)의 대표 저작이다. 당시 관료의 부패와 도학자의 위선을 비판하며 소박하고 자유로운 사상을 강조하였다. 책은 출간 당시 금서로 취급되었으나, 이후 문학, 철학, 예술 등 여러 영역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지는 양명학 좌파의 대표 인물이다. 이지의 조상은 이슬람교도였으며, 주로 상업으로 생계를 이었다. 그의 선조 중에는 명초에 통역관으로 근무하면서 일본 및 류구(流球.오키나와)의 입공자(入貢者)를 맞이하여 도성까지 안내하는 역할을 한 사람도 있었다. 이지는 탁오(卓吾)를 비롯 평생 47개에 달하는 많은 호(號)를 사용했다.
이지는 공자를 비판했고, 초횡은 역시 양주(楊朱)와 묵적(墨翟)을 숭상하며 맹자를 비난하였다고 했다. 1576년 불교 연구를 시작하였다. 1581년 관직에서 물러나, 황안(黃安) 마성(麻城)에서 친구 경정리(耿定理)의 집에 거주하며 주로 강학, 저술, 연구 등 활동을 하였다. 1585년에 마성 지불원(芝佛院)에서 ≪초담집(初潭集)≫, ≪분서(焚書)≫ 등 중요한 작품을 완성했다. 1589년 지불원에 정식 출가하였으며 1590년 ≪분서(焚書)≫ 6권, ≪장서(藏書)≫ 68권과 ≪설서(說書)≫ 44편을 간행하였다. 1593년 마성의 용호(龍湖)에 원씨(袁氏) 삼형제(袁宗道,袁宏道,袁中道)를 만났다. 1597~1600년 사이 북경, 남경, 금릉(金陵) 등을 유람하였고, 마테오 리치(Matteo Ricci)와 종교에 대해 깊이 토론하였다. 76세(1602년)에 장문달(張問達)의 탄핵을 받아 투옥, 3월에 감옥에서 자결했다.
≪분서≫는 명나라 만력(萬曆) 18년(1590) 이지가 마성현 용호(龍湖)의 지불원에 거주할 때 십여 년 동안 즉 50대부터 60대까지 쓴 편지 및 역사평론, 시를 모아 만든 문집으로 ≪이씨분서(李氏焚書)≫라고도 한다. 만력(萬曆) 46년(1618)에 제자 왕본가(汪本軻)가 이지의 유문(遺文)을 보충, 편집한 ≪속분서(續焚書)≫ 5권도 있다.
≪분서≫에는 이지의 초기 생존과 창작상태가 드러나고 그의 철학적 사유도 엿볼 수 있다. 이지가 ≪분서≫를 출판하며 “대개 ‘인연어(因緣語. 사물의 현상과 변화에 대한 견해)’와 ‘분격어(忿激語. 분노에서 나온 언어)’가 많아서 보통의 말투와 다르다. 그리하여 읽는 사람에 따라 혹 질책과 원한이 생길 수도 있기에 책 이름을 ‘분서(태워 없애야 할 책)’라 했다.”고 한다.
이지는 봉건시대 예교(禮敎)의 도학자와 위선자를 가장 싫어하였으며 관료층이 극도로 추앙하는 공맹의 학문도 크게 규탄하였다. 이것은 공자를 지성(至聖)으로 높였던 종래의 관점에서 볼 때 매우 파격적이었다. 공자는 성인이 아니고 평범한 사람이라고 하였고, 공자의 시비를 모든 시비로 삼는 것은 옳지 않으며 사람마다 모두 성인이니 공자를 배울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또한 보통 유학자들이 금과옥조로 삼는 육경(六經)을 도학자가 내세우는 구실이고 거짓된 무리들의 소굴일 뿐이라고 하였다. 이지가 당시 유명한 이학가(理學家) 경정향(耿定向)에게 보낸 답서에서 반공자우상론(反孔子偶像論)과 ‘참된 도와 사람의 윤리’에 대한 논쟁을 보이는데, 이것은 명말(明末)의 중심적인 이슈였다.
이지는 불교와 양명심학을 섭렵한 이력으로 그의 사상은 주관유심주의의 성격을 띤다. 그는 만물의 근원을 현상세계에 찾아야 하는 선종의 주장을 이어받아, 구체적인 일상생활 속에서 도를 실현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이는 이지 사상에서 불교로 유교를 해석하고 불교와 유교를 융합한 측면이다.
이 책은 통치자와 전통유학자들의 비판을 불러일으켰다. 이 책이 나오자마자 금서로 낙인 찍혔다. 다만 이지의 저술이 유교 비판과 불교・도교로 기운 면도 있으나 모든 글이 다 전통을 비판하고 있지만은 않다.
이지의 사상은 명⋅청 시대에 지속적으로 비판을 받았다. 이지는 자신의 사상이 반드시 관료층과 가짜 도학자(道學者)들의 불만을 초래할 것이라고 여겼는데, 그 말대로 관료층들은 ≪분서≫를 매우 위험한 책으로 여겨서 금서로 지목되었다. 이지도 이 책 때문에 혹세무민의 죄를 뒤집어쓰고 감옥에 갇혀 끝내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그러나 독창적인 언어와 자유분방한 풍격으로 반봉건, 반전통, 반도학 사상을 담아낸 이 책은 매우 큰 영향력을 미쳤다. 독서견문에 물들지 아니한 마음을 말한 동심설(童心說), 자연미 문학론과 ‘만고의 시비를 뒤집은 역사관’ 등은 정치, 사회, 문학, 철학, 예술 등 전 영역에 큰 영향을 주었다. 남녀평등과 진심을 주장하였던 그의 사상은 근대 계몽사상의 선구적 역할을 하였으며, 근대 중국의 5⋅4운동 때는 진보적인 사상가들이 그를 비공(批孔)의 모범으로 삼기도 했다.
≪사고전서총목제요(四庫全書總目提要)≫에서는 “이지의 책은 모두 인륜에 어긋나고 포악하며 오류에 가득 찬 것으로서 성인을 그릇되다 하고 법을 무시했다. 특히 공자를 배격하여 별도로 그 포폄을 세우고 무릇 천고의 선악을 전도시켜 그 위치를 바꾸지 않은 것이 없다. 그 죄가 가히 목을 베고도 남음이 있다.”라고 평했다.
고염무(顧炎武)는 ≪일지록집석(日知錄集釋)≫에서 “고대 이래로 아무 거리낌 없는 소인배로서 감히 성인에게 반기를 든 자로 이지보자 더 심한 자는 없었다.”라고 평했다. 고염무 뿐만 아니라 명대 말기의 황종희(黃宗羲)와 청초의 왕선산(王船山), 대진(戴震), 담사동(譚嗣同) 등도 이지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우리나라에서는 허균(許筠)이 이지의 영향을 받아 유교적인 예교를 반대하고 동심설(童心說)을 수용하였다. 그 외에 이수광(李晬光), 정약용(丁若鏞), 박지원(樸趾源), 이건창(李建昌) 등 실학자들에게도 자유문예사조의 영향을 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