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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고사(古文故事)

한천정 기문〔寒泉亭記〕- 이만도/향산집10권

작성자허현|작성시간21.06.11|조회수131 목록 댓글 0

 

남명(南冥) 조 문정공(曺文貞公.조식)의 문하에 도구(陶丘.李濟臣 1510~1582)선생이 있다. 진주의 인사들이 그들의 고장에서 제향을 올리니 정강서원(鼎岡書院)이라고 한다. 선생의 선영이 의춘(宜春.의령) 자굴산(闍崛山)에 있다. 의령에 사는 문족(門族) 및 외손인 전씨(田氏)와 이곳저곳 흩어져 사는 유손(遺孫)들이 숭봉하여 400년이 지나도록 폐지되지 않았으니, 선생의 고상한 풍도와 우뚝한 절개가 사람들에게 얼마나 깊은 영향을 주었는지 알 수 있다. 계절이 쉼 없이 바뀌어 수많은 세월이 흐르도록 지금까지 첨의(瞻依.조상에 대한 존숭하고 추모하는 정을 뜻함)하는 장소에 다만 봄가을로 제향을 올리는 언덕만 있을 뿐 늘 정갈한 제수(祭需)를 마련할 재실을 건립하지 못해 그것이 근심이었다.

금년에 자굴산 아래 집 하나를 경영하여 지역 사림들과 낙성을 하고 한천정(寒泉亭)이라 이름을 붙였다. 이태식(李泰植) 군이 멀리서 내가 사는 산재까지 찾아와 그 전말을 기록해 달라고 청하였다. 아! 만도가 어찌 그 일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삼가 살펴보건대 선생의 휘는 제신(濟臣)이고, 자는 언우(彥遇)이다. 정덕(正德) 경오년(1510)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문예에 뛰어났으며, 향시에서 〈소식론(蘇軾論)〉을 지어 합격하여 일세에 이름을 떨쳤다.

배낙천(裵洛川.조식의 제자 裵紳)과 함께 일찍이 성균관에 들어가 명륜당(明倫堂)에서는 서치(序齒)의 예에 따라야 한다는 일을 청하였다. 건의가 행해지지는 않았으나 식견 있는 자들이 훌륭하게 여겼다. 잠시 뒤 시국이 어지러워질 조짐(1545년 을사사화)이 보이자 명예와 자취를 지우고자 청하 교수(淸河敎授)를 자청하였으며, 이윽고 거짓으로 미친 체하며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인종이 승하하자 삼년상을 입었다. 지리산에서 남명 선생을 종유(從遊)하였으며, 맑고 그윽한 천석(泉石)을 만나면 번번이 그리로 옮겨 가 일정하게 거처하는 장소가 없었다. “바둑을 구경하노라니 입에는 사람들 평판하는 말이 끊어졌고, 활을 쏘노라니 마음엔 반성의 사유가 보존되네.[看碁口絶論人語 射革心存反己思]”라는 시구를 뽑자 남명이 무릎을 치며 칭찬하였다.

집안이 본래 부유하였으나 모두 친척에게 나누어 주며, “변란(왜란)이 곧 일어날 것이다.”라고 하였다. 73세 되던 해에 자신이 죽을 날을 스스로 예언하였다. 예언한 날이 되자 태연히 시를 읊조리다가 마침내 편안히 세상을 떠났다.

예컨대 저 관주(官廚)에서 생선을 요리할 때 솥뚜껑이 하늘을 날아다닌 일과 같은 것은 돌아가실 조짐이었던 것이고, 노복이 애시(哀匙)를 훔쳐 밥을 먹을 때 고기를 씹다가 목이 막혀 죽은 일과 같은 것은 그 효감(孝感)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런 일들은 모두 신기하여 믿기 어려운 것이다. 하지만 하각재(河覺齋.조식의 제자 河沆)가 만시를 짓기를 “이인이요 신인이요 자유인이었으니, 세 가지 성격의 사람이 화하여 한 사람의 몸이 된 것일세.[異人神人不羈人 三人化作一人身]”라고 하였다. 이 시는 또 무엇을 뜻한단 말인가?

《주역》 〈명이괘(明夷卦) 초구(初九)〉의 효사에 “혼암(昏暗)한 시대에 새가 날 때 날개를 늘어뜨린 격이다. 군자가 어지러운 나라를 떠나감에 사흘 동안 먹지 못하니, 떠나가는 것에 대해 주인이 나무라는 말을 하도다.[明夷于飛 垂其翼 君子于行 三日不食 有攸往 主人有言]” 하였다. 대개 현인과 군자가 도와 덕을 내면에 품고서 진퇴와 존망의 까닭을 살펴 바야흐로 기미를 알아차리고 멀리 떠나려고 할 때, 그 자취가 느닷없는듯도 하고 지나치게 구애되는듯도 하며 혹 상식 밖의 행동에서 나온듯이 보이는 경우도 있다.

더구나 을사사화(乙巳士禍)의 의리는 정확히 파악하기가 쉽지 않고 말하기가 편치 않다. 선생은 재야의 인사로서 홀로 강개한 마음을 품고서 물외(物外)에 마음을 두어 미치광이처럼 방자하게 굴었으니, 하서(河西.김인후)와 후조당(後彫堂.김부필)이 산에 들어가 통곡한 것에 비겨 보건대 더욱 통렬하고 더욱 괴롭다. 이런 까닭에 당시 사람들이 선생의 평범하고 정상적인 행실에 대해서는 빠뜨리고 전하지 않았으며, 머물지 않고 거처를 옮겨 다니는 모습에 대해서는 마치 괴이한 이야기를 기록하는 것인 양 전하였으니, 군자의 지미(知微), 지창(知彰), 지유(知柔), 지강(知剛)은 본디 평상한 도(道)가 되기에 해롭지 않다는 것을 전혀 모른 것이다.

그렇다면 선생을 본받으려 하는 자는 어디에서 법을 취해야 하는가? 돌아가실 때 지은 시에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들녘을 바라보니 누르고 푸르며 / 望野黃兼綠

구름을 바라보니 희고 또 검네 / 看雲白又玄

도구노인은 머무를 곳 알았으니 / 陶翁知止處

바로 한천이었지 / 只是爲寒泉

이 시를 범범하게 보면 고반(考槃)과 형문(衡門)에서 은거하는 즐거움을 노래한 데에 불과한 것으로 보이겠지만, 깊이 음미해 본다면 머무를 곳을 안다는 것은 곧 《대학》의 지선(至善)의 소재이니, 예컨대 자식이 되어서는 반드시 효도하고 신하가 되어서는 반드시 충성해야 한다는 것을 아는 것과 같다.

한천(寒泉)은 《주역》에서 또한 ‘정도(井道)의 지극히 선한 것’이라 한 것이요 천리의 자연스러운 것이다. 이러한 지극히 선한 의리가 선생께서 역책(易簀.학덕이 높은 사람의 죽음이나 임종을 말함)하실 때에 시로 읊어져 나온 것은 또한 증자가 역책하실 때 “나의 몸을 바르게 하면 그만이다.”라고 한 의미와 같다.

그러나 밤과 낮이 번갈아 바뀌는 것이 그 이치는 하나이니, 우리들이 학문할 때에 또한 지선을 버리고 무엇을 취하겠는가. 물어보자. 자굴산이 방장산(지리산)에 비해 그 높이가 어떠한가? 산 아래의 샘이 또 덕천(德川.남명의 학덕을 의미)과 견주어 보건대 어느 것이 깊고 어느 것이 얕은가? 어느 곳이라도 물이 없는 땅이 없다는 것에 이미 감화를 받았고, 또 만 줄기의 강물에 모두 둥근 달이 비친다는 것을 깨달았으니, 나는 물이 밤낮을 쉬지 않고 흐른다는 것과 웅덩이를 채우고 반드시 바다에 이른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여기에서 침잠하여 원류의 근원을 탐색하고 여기에서 노닐고 강마하여 명의(名義)의 소재를 생각하면 이 정자를 세운 의미를 잘 알 수 있다.

정자는 모두 여섯 칸이다. 헌함(軒檻)은 지지헌(知止軒)이고, 누대는 함월루(涵月樓)이다. 이를 합쳐서 한천정(寒泉亭)이라고 하였다. 한천정 일대의 산수(山水)와 천석(泉石), 연림(煙林)과 화조(花鳥) 등의 승경으로 말하면 영남의 기숙(耆宿.원로)들께서 이미 시편에 잘 묘사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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