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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고사(古文故事)

遊伽倻山錄[가야산 유람록] - 정구(鄭逑)/한강집9권

작성자허현|작성시간14.02.01|조회수280 목록 댓글 1

 

기묘년(1579년 한강나이 37세) 9월에 나는 이백유(李伯愉.李仁愷), 이공숙(李恭叔.李仁悌) 형제와 사촌(沙村.한강이 태어난 성주의 사월리)의 계숙(溪塾)에 있었는데, 곽양정(郭養靜.郭䞭)도 와서 함께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글을 읽는등 동지들끼리의 낙을 즐겼다. 그런지 여러 날이 지나 내가 말하기를, “가야산은 우리 고을의 경내에 있으며 세상에서 선경(仙境) 가운데 으뜸으로 꼽히는 곳이네. 나는 가까스로 한번 구경한 적이 있으나 제군은 그렇지 못했으니, 어찌 유감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지금은 단풍과 국화꽃이 한창 아름답고 구름이며 안개가 말끔히 자취를 감춘 때이니, 한번 그 정상에 올라 한껏 둘러보며 답답한 가슴을 씻어 보는 것도 좋지 않겠는가. 더구나 정덕원(鄭德遠.鄭仁弘)이 지금 막 영양(永陽.永川)에서 군수직을 그만두고 돌아왔으니, 더더욱 이 벗과 함께 모이지 않을수 없네.” 하니, 제군이 모두 그렇게 하자고 대답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행장을 꾸렸는데, 쌀 한 전대, 술 한 병, 반찬 한 상자, 과일 한 바구니였다. 책은 근사록(近思錄) 한책과 남악창수집(南嶽唱酬集. 1167년 주희,장식,임용중등 세 사람이 중국 형산을 유람하는 도중에 보고 느낀 감회를 읊은 시를 모은책)뿐이었으니, 심존중(沈存中.송나라 沈括)이 산을 유람할 때 갖춘 짐과 견주어 볼때 한층 더 간단하였다. 이날이 9월 10일이었다.

 

● 11일 맑음. 백유(伯愉)가 먼저 길을 떠났고 내일 송장(宋丈.宋師頤)과 만나기로 약속하였다. 김지해(金志海)의 편지를 받았는데 보름경에 성사(城寺)에서 모이자고 하였기에, 우리는 오늘 길을 떠나니 함께 동행하자고 답하였다. 나는 양군(兩君)과 늦게 출발하여 여우재(狐嶺.성주 대가면과 수륜면 경계로서 칠봉산옆에 있는 호령고개)를 넘어가려 할 때 날이 이미 저물었는데, 마침 같은 길을 가는 무인(武人)과 동행하여 무사히 재를 넘어갔다. 선영(先塋)을 지나다가 말에서 내려 그 쪽을 향해 절을 하고 한강(寒岡.여기서 한강은 寒岡精舍를 말함)으로 갔다. 어시헌(於是軒.한강정사 부근의 바위에 위치했음)에 올라가 잠시 옷섶을 풀고 쉬었다가 뒷산에 올라갔다. 휘영청 밝은 달빛 아래 솔 그림자가 어른거리는데 흰 바위는 한결 더 하얗고 푸른 개울 물소리는 차가운 기운이 감돌았다. 천지를 둘러보며 자유롭게 소요하노라니 가슴속이 한가로워 세속의 잡념이 말끔히 사라진 것을 느꼈다. 재사(齋舍)로 돌아와 촛불을 밝히고 그곳에 보관해둔 주자연보(朱子年譜)중에서 운곡기(雲谷記)를 꺼내 한 번 읽은 뒤에 그것도 여행 짐 속에 넣었다. 이날 밤은 매우 피곤하여 곤하게 잠을 잤다.

 

● 12일. 아침에 다시 뒷산에 올라갔다가 내려와서는 서둘러 밥을 먹고 출발하였다. 길을 돌아 선영으로 가서 성묘하였는데, 선조를 그리는 슬픔을 가눌수 없었다. 마침내 송장(宋丈)을 찾아가 간단히 안부를 물었는데, 송장은 우리 고을의 선배로서 깨끗한 생활 속에 절개를 지키는 자세가 존경스럽다. 나는 타고 가던 말이 넘어져 장딴지를 다쳤다. 옆 사람에게 술을 데워 오게 하여 소합원(蘇合元) 한 알을 씹어 술로 넘겼다. 백유(伯愉)가 와서 함께 어울려 길을 갔다. 밤재(栗峴. 현재 수륜면 신파리에서 백운리로 넘어가는 59번 지방도상 고개)에 이르렀을 때 동자(童子) 배협(裵協)이 뒤따라 왔다. 심원암(深源菴.현재 만물상 왼쪽골에 있던 절)에 당도하니 여기서부터는 수석(水石)이 조금씩 맑아 보였다. 말에서 내려 조금 쉬면서 각기 홍시 한 개와 술 반 잔을 먹었다.

홍류동(紅流洞.현재 소리길이 있는 해인사계곡)에 이르러 시냇가 바위에 앉아 있는데 어떤 중이 말하기를, “금년 단풍은 예전보다 못하다.” 하였다. 그러나 푸르고 누렇고 붉은 잎들이 어우러져 진하거나 옅은 색깔로 들쭉날쭉 깔려 있으니, 눈에 들어오는 대로 흥취를 부친다면 충분히 울적한 가슴을 씻을 수 있고, 게다가 구름 깔린 산골의 수석으로도 재미있는 흥취가 다분한 만큼 단풍잎이 좋고 궂은 것이야 깊이 따질 것이 없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가을 구경으로는 약간 철이 이르다.”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지금이 바로 적기이다.”라고 하였는데, 철이 아직 이르다면 이는 강절(康節.소옹)이 노래한 ‘꽃구경은 피기 전의 봉오리가 좋다네(看花取蓓蕾)’라는 뜻에 부합되고 만일 제철이라면 더욱 좋은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바쁜 세상에 이곳에 와서 구경하는 이 자체가 곧 다행스러운 일이니, 철이 이른가 늦은가 하는 문제야 따질것이 무에 있겠는가.

계곡의 물줄기가 어지러운 바위틈에서 쏟아져 시끄럽게 흐르는데 마치 천둥치듯 쾅쾅 울리고 밝은 대낮에 날리는 물방울이 숲속의 나무다리에 흩뿌리는가 하면, 혹은 한 굽이에 머물러 빙빙 돌며 흐르는데 그 깊이를 측량할 수 없었다. 산봉우리는 드높고 골짝은 깊은데 소나무와 전나무가 울창하고 바위 비탈이 웅장하였다. 시내의 길이는 8, 9리 정도가 되는데 한 걸음 한 걸음 위치가 바뀔 때마다 맑고 기이한 광경에 눈이 휘둥그레졌으니, 정말 아름다운 경치였다. 호사가가 절벽과 너럭바위에다 이름을 지어 글자를 새겨 놓았는데 글자의 획이 또렷하였다. 이를테면 홍류동(紅流洞), 자필암(泚筆巖), 취적봉(吹篴峯), 광풍뢰(光風瀨), 제월담(霽月潭), 분옥폭(噴玉瀑), 완재암(宛在巖) 등의 이름을 다 그들이 지은 것으로, 앞으로도 오랫동안 마모되지 않고 유람하는 사람들의 구경거리를 제공할 만하였다. 또 최고운(崔孤雲.최치원)의 절구시 한 수를 폭포 곁의 바위에 새겨 두었으나 해마다 장마철이면 물이 불어나 소용돌이치며 깎아 내는 바람에 지금은 더 이상 글자를 알아볼 수 없었다. 한참 동안 더듬다 보니 어렴풋이 한두 자를 구분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 시는,

바위 골짝 치닫는 물 첩첩 산골 뒤흔드니 / 狂奔疊石吼重巒

말소리는 지척에도 분간하기 어려워라 / 人語難分咫尺間

세속의 시비 소리 행여나 들릴세라 / 常恐是非聲到耳

흐르는 계곡 물로 산 둘러치게 했나 / 故敎流水盡籠山   라고 되어 있었다.

점심을 조금 먹고 술 한잔을 따라 마신 뒤에 동자 배협이 쌀가루를 권하여 그것도 먹었다. 먼저 배 동자를 절 안으로 들여보내고 나는 제군과 시내 기슭을 몇 리쯤 천천히 거닐다가 말을 타고 홍하문(紅霞門)에 당도하니, 중들이 나와서 우리 일행을 맞아들였다. 신열(信悅)이라는 중은 나와 예전부터 서로 아는 사이였으므로 그에게 앞장서서 길을 인도하게 하여 감물방장(鑑物方丈)에 행장을 풀었다. 조금 뒤에 피리 소리가 울려 퍼지며 사람들이 절 안으로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는데, 김박사(金博士)와 이충의(李忠義)의 일행이라 하였다. 나를 만나 보고 싶다 하기에 병을 이유로 거절하였다. 저녁 무렵에는 학사대(學士臺.최치원 선생이 신라의 국운이 기울어짐을 한탄하며 거문고를 켜고 머물렀다는 곳)에 올라갔다가 왔다. 밤이 깊어지자 돌 침상이 너무 차가워서 잠들지 못해 마당으로 나가 거니노라니 달빛이 맑고 밝았다. 술을 각기 반 잔씩 마시고 조금 뒤에 잠자리에 들었다.

 

● 13일. 맑음. 아침 일찍 일어나 근사록 몇 장과 남악창수집의 서문을 읽었다. 김 박사가 또 나를 보자고 청하기에 학사대에서 잠깐 만났다. 그 뒤에 불전(佛殿)과 뜨락 사이를 서성거렸다. 이 절은 신라 애장왕(哀莊王)때 창건한 것으로 여러 번 중수를 거쳤는데, 그 규모가 웅장하고 아름다우니, 민생의 피땀을 여기에 많이 쏟았다 하겠다. 덕원(德遠)에게 편지를 보내 함께 유람하자고 했더니, 지금은 어버이의 병환이 있어 안 되고 보름날 지해(志海)를 초청하여 해인사(海印寺)에서 함께 모이자고 답을 보내왔다.

길을 재촉하여 산을 오르는데 돌길이 험난하여 말을 타고 가기도 하고 혹은 그냥 걷기도 하였다. 내원사(內院寺)에 당도하여 보니, 문밖에 작은 비석이 있고 비석 앞에는 사각형의 우물이 있었는데 중이 이곳은 득검지(得劍池.가야산 중턱에 있는 못으로서 못을 팔 때 장검이 나와 붙인 이름)의 고적이라 하였다. 비석 곁에는 점필재(佔畢齋.金宗直), 한훤당(寒暄堂.金宏弼), 탁영(濯纓.金馹孫)등 여러 선생의 시가 새겨져 있었으나 마모되어 읽을 수 없었다. 이 절은 화재를 겪고 새로 지었는데 그 공정이 이제 막 끝났다. 구름 아래 산빛은 농염하고 아름다우며 바위 계곡은 깊고 고요하여 기상이 담박하고 시계가 시원하게 트이니, 해인사와 견줄 정도가 아니었다. 한훤 선생이 일찍이 이 절에서 글을 읽어 덕을 닦고 도를 쌓은 공이 아마도 이러한 환경에서 만들어졌을 것이라고 생각되는데, 우리들은 단 하루도 여기서 책을 펴보지 못하니 어찌 한탄스럽지 않겠는가.

하늘 끝에 희미하게 보이는 것이 무슨 산이냐고 물었더니, 중이 두류산(頭流山.지리산)이라고 대답하였다. 밤이 깊어갈 때 뜨락으로 걸어나갔다. 달빛은 대낮처럼 환하고 산기운은 고요한데 맑은 바람이 솔솔 불어오고 차가운 물소리가 은은히 울려와 황홀한 기분에 젖은 나머지 내 자신이 이미 속세를 떠나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 14일 맑음. 새벽에 일어나 앞 강당에 앉아 근사록 두세 판(板)을 읽었다. 구름과 산을 바라보며 온갖 잡념을 비운채 선현이 남긴 가르침을 받들어 음미하노라니 나도 모르게 정신이 전일해지고 맛이 있었다. 아침밥을 먹은 뒤에 지팡이를 끌고 몇 리를 걸어가니 이른바 정각암(淨覺菴)이라는 암자가 있었는데, 내원사보다 더 높은 곳에 위치한 곳으로, 경관이 내원사보다 한층 더 낫다고 느껴졌다. 어제 양정(養靜.곽재우의 종숙인 곽준)이 내원사에서 그곳의 한적한 기운이 좋아 나중에 거기에 와서 글을 읽겠다는 다짐을 했었는데, 이곳을 보고는 더 좋아하자 공숙(恭叔)이 말하기를, “양정, 여기서도 글을 읽겠다는 다짐을 해볼 만합니다.” 하였다.

어린 동자 하나가 안채에서 나와 나에게 절을 하기에 보니, 모습이 상스럽지만 그다지 추하지는 않았고 말을 더듬거리기는 해도 고향의 집안 내력을 알고 있었다. 자세히 물어보니, 그는 다름 아닌 내외종 아우 송가(宋家)의 아들이었다. 어미가 죽고 배운 글이 없어 이곳에 와 중을 따라다닌다고 하였다. 책을 펴고 한번 읽어 보게 하였더니 글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구두의 앞뒤도 분간하지 못했다. 이런 상태로 글을 배운다면 비록 스승을 10년을 따라다니더라도 끝내 문자를 아는 사람이 될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우리 한훤 선생(한강은 한훤당 김굉필의 외증손)의 후예가 이렇게까지 되었단 말인가.’ 하는 생각에 한참 동안 한탄하였다.

그곳에서 조금 쉬며 기력을 찾으려고 하는데 중이 갑자기 해는 기울고 가야 할 길은 아직 멀다고 말하여 다시 정신을 차리고 말채찍을 들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본디 해는 저물고 갈 길이 요원하니 어찌 산을 오르는 이 한가지 일뿐이겠는가. 1리쯤 나아가 성불암(成佛菴)에 당도하였다. 백유(伯愉)는 먼저 그 앞에 있는 대(臺)로 올라가고 나는 곧장 암자 안으로 들어갔다. 그 암자가 자리 잡은 위치는 정각암과 비슷하였는데 그다지 오래되지는 않았고 거처하는 중은 없었다. 마루와 방 안에 먼지가 쌓여 잠시도 머물수 없었다. 엊그제 심원암(深源菴)에서도 중이 없어 들어가지 않았는데 지금 또 그 경우를 만났으니, 이 어찌 흉년이 들고 부역이 많아 산속의 중도 삶을 지탱해 내지 못하여 곳곳이 비어 있는것이 아니겠는가. 산속의 중도 이와 같으니 마을 백성들의 사정을 알 만하다. 곤궁한 마을은 집만 덩그렇고 사는 사람이 없는 경우가 과연 얼마나 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원명사(圓明寺)에 당도하니 이 절은 산봉우리가 빙 둘러싼 위치에 자리 잡고 있으면서 단청을 새로 고쳐 아름다운 경관은 또 내원사와 견줄 정도가 아니었으므로 양정의 다짐이 이곳에서도 없을 수 없었다. 워낙 좋아서 차마 자리를 뜰 수 없었다. 이 절 외에 또 중소리(中蘇利)와 총지(叢持) 등 사찰이 다 바위 모서리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어디든 거처하는 중은 없었다. 상소리(上蘇利)에 들어가 잠시 쉬었는데 이곳은 이른바 봉천대(奉天臺. 상봉인 우두봉 아래에 있음)라는 곳이었다. 그 위치가 이제까지 거쳐온 곳보다 더 높아 시야가 한층 더 시원하게 트였다. 수많은 골짝이며 산봉우리가 마치 조그마한 둔덕처럼 빙 둘러 줄지어 있고 인간들이 사는 세계가 개미집이나 누에고치처럼 옹기종기 아스라이 깔려 있는데, 곳곳의 마을을 하나하나 손으로 가리킬 수 있었다.

그 가운데 옥산(玉山.한강과 어릴적부터 가까이 지내던 이기춘)이 살고 있는 송천(松川) 마을이 허리를 굽히면 손에 잡힐것 같았다. 그는 지금 아마도 복건(幅巾) 차림으로 저 속에서 한가로이 지내며 스스로 자기의 견해를 지키고 깨달아 얻은 도를 즐기고 있을 것이다. 지금 나의 큰 시각으로 그의 내면을 헤아려 볼 때 그 기상이 과연 얼마나 높게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다만 안타까운 점은 내가 팔을 지니고서도 그를 끌어당겨 지금 이 장관을 함께하지 못하는 것이다. 지해(志海)의 경우는 내가 비록 간곡히 불렀으나 나의 심중을 이해하지 못해 오지 않았으니, 각자 나름대로 분수가 있는 것으로, 그 분수는 정말 벗의 힘으로 억지로 끌어올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공자의 “인(仁)을 하는 것은 자기가 하는 것이지 남이 간여해서 될 일이겠는가.”라는 말씀이 실감이 난다. 오늘의 제군은 각기 서로 노력하고 게을리하지 말아야 할 것이니, 후일 넓어지는 시야는 지금의 봉천대 정도가 아닐 것이다. 양정이 말하기를, “이곳의 위치는 정말 높습니다만 더 높은 봉우리가 또 있으니, 이 어찌 대학(大學)에서 말한 ‘일을 치밀하게 하고 난 뒤에 도를 얻는다(慮而后能得)’라는 경지가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그러자 서로들 여기서 멈출 수는 없다는 뜻으로 격려하였다. 그리고 주자의 운곡기(雲谷記)를 한 번 읽노라니 가슴속이 더욱 툭 트여 내 몸이 어느새 저 중국의 노봉(蘆峯)과 회암(晦庵) 사이에 놓여 있는 것만 같았다.

흰죽을 끓여 점심으로 먹고 길을 나섰다. 여기서부터는 산길이 더욱 가팔라서 걸음을 걷기가 한결 어려웠다. 벼랑을 부여잡고 험한 바위를 밟으며 일행이 물고기 꿰미처럼 한 줄로 나란히 앞으로 나아가는데 앞사람은 뒷사람의 머리 위에 있고 뒷사람은 앞사람의 발꿈치를 쳐다보며 거의 6, 7리를 가서야 비로소 이른바 제1봉(第一峯.우두봉)이라는 곳에 올라갔다. 사방을 바라보니 광활하여 끝이 없고 아스라이 먼 산봉우리 끝에 하늘과 구름이 맞닿아 있는 것만 보일뿐, 앞서 이른 원명사(圓明寺)와 봉천대(奉天臺)의 경관은 다 거론할 것이 못 되었다.

산의 안쪽과 바깥쪽은 푸르고 붉고 누렇고 흰 빛깔이 어지러이 깔려 무늬를 이루었는데, 저마다 자연의 본성에 따라 형성된 이치가 부여되어 있었다. 애당초 누가 이렇게 되도록 하였는지는 알수 없으나 현기증이 날 정도로 찬란한 빛이 한데 어울려 서로 비추어 산을 유람하는 사람의 볼거리를 이바지하고 도를 닦는 인자(仁者)에게 자기 반성을 할수 있게 하기에 충분하였다. 주자(周子.周敦頤)가 뜨락에 자라나는 풀을 보고 만물이 생성하는 이치를 탐구하고 맹자(孟子)가 우산(牛山)의 나무가 자꾸 잘리는 것으로 사람의 선한 본성이 상처를 받는 것에 비유한 한탄이 비록 크고 작은 형세가 다르고 흥성하고 쇠퇴한 자취가 다르지만, 군자가 사물을 보고 감회를 부치는 것은 애초에 같은 것이다.

중이 말하기를, “흐릿한 산 한 줄기가 저 멀리 남쪽 하늘에 빈 곳을 메우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지리산입니다.” 하였다. 거기는 정선생(鄭先生.鄭汝昌)이 젊었을 적에 살며 덕을 쌓고 조선생(曺先生.曺植)이 만년에 은둔하며 고상한 뜻을 지키던 곳이다. 우리나라 남쪽의 큰 산으로 제일가는 명산인 데다가 두 현인의 명성에 덕을 입어 장차 천지와 함께 이름이 전해지게 되었으니, 이 또한 저 산의 큰 다행이라 하지 않을수 없다. 그리고 저 멀리 무슨 사람이 서 있는 것 같은데 몸은 보이지 않고 북쪽 모서리에서 그 머리만 살짝 드러내고 있는 것은 금오산(金烏山)이다. 고려 500년 동안 삼강오륜의 명맥이 오직 저 산 하나에 남아 있을 줄을 그 누가 알았겠는가(吉再가 고려와 조선 두 왕조를 섬길수 없다 하여 고향의 금오산으로 들어와 후진양성에만 전념).저 옛날 백이(伯夷),숙제(叔齊)가 은거했던 수양산(首陽山)과 만대의 먼 장래에까지 그 높이를 함께할 것이니, 오늘 우리가 저 산을 본 것이 또한 우연이 아닐 것이다.

저 비슬산(琵瑟山) 밑에는 쌍계(雙溪.후일 한훤당을 모신 도동서원)가 있고 공산사(公山寺) 밑에는 임고서원(臨皐書院.포은 정몽주를 모심)이 있다. 선현이 향기로운 이름을 남기면 뒷사람이 존경하고 법으로 삼는 것은 애초에 어찌 일부러 그렇게 하려고 해서 그럴 것인가. 다만 타고난 천성이 높은 산을 우러러보듯 하는 충정을 제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 산에 올라와 저 곳을 바라보는 사람은 또한 이러한 의미를 한번 되새기고 탄성을 토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갈천주인(葛川主人.林薰)의 지극한 효성과 우애는 한번 그를 만나 보고 싶어도 아직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이 늘 부끄럽고, 운문선생(雲門先生)의 고결하여 어디에 매이지 않는 절개는 산해(山海.曺植)를 통해 소식을 들은 뒤로 아직까지 감히 잊지 못하고 있다.

흰구름이 저 화왕산(火王山)과 대니산(戴尼山) 위에 아련히 떠 있으니, 그곳에 어버이가 계신 백유(伯愉), 공숙(恭叔) 형제와 양정(養靜)이 거기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어버이를 잃은 나는 슬픔이 북받친 나머지 목이 메어 눈을 바로 들수가 없었다. 제군은 각자 술을 한 잔씩 주거니 받거니 하며 마셨으나 나는 방친(旁親)의 제삿날을 접하였으므로 마시지 않았다. 두루 둘러보다 보니 저마다 너무 지쳐 바위에 누워 잠시 잠을 청했다. 잠에서 깨어난 뒤에는 다시 함께 서성거리며 여기저기 바라보다가 또 주자연보를 펴놓고 주 부자의 무이산기(武夷山記)와 남악창수집 서문 및 주장(朱張) 두 선생의 시를 읽었는데, 그 가운데는 오늘 관람하는 사정과 흡사한 점이 너무도 많았다. 이를테면 ‘이 마음 원대한 도 기대함이지, 눈앞의 넓은 광경 탐함이겠나 (直以心期遠 非貪眼界寬)’와 같은 시구는 어찌 오늘 산에 오른 우리들이 법으로 삼는 정도에 그치겠는가. 산행을 하는 모든 사람이 다 이 시의 의미를 알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평소에 이와 같은 시와 문장을 읽지 않은 것은 아니나 특히 오늘 가야산 제1봉(우두봉)의 정상에서 한번 읊조리는 것이기에 뜻이 한층 더 기이하고 맛이 더 깊은 것일 뿐이다.

중들이 무릎을 꿇고 나에게 요청하기를, “오늘 선생의 행차를 모시고 이 산에 올라왔으니 이 기회에 시 한 수를 얻어 시축(詩軸)의 보배로 삼고 싶습니다.” 하기에 우리들은 서로 쳐다보고 웃으며 시를 짓지 못한다고 사양하였다. 나는 과거에 내형(內兄 외사촌의 형) 이여약 인박(李汝約仁博)및 유경범 중엄(柳景范仲淹), 김태수 담수(金台叟耼壽), 이이경 정우(李而敬廷友)와 함께 이 산에 올라온 적이 있다. 그때 우물가에 둘러앉아서 어지러이 술잔을 들이켜고 시를 읊으면서 취흥에 겨워 여러 수의 시를 순식간에 지어냈는데, 나 혼자만 시를 못 지어 온종일 한 구도 얽은 것이 없었으므로 제군들의 웃음을 샀다. 자리가 끝날 무렵에야 비로소 한 수를 지었고 끝구에 “천년전 처사 마음 말없이 느낀다네(默契千年處士心)”라는 구가 있었는데, 그에 대해 제군들이 농담으로 화답하고 서로 웃으며 헤어졌다. 그로부터 18년이 지났다. 내형과 경범은 다 이미 세상을 떠났고 그때 그 우물도 묵혀 물이 말라 버렸으니, 과거를 회상할때 서글퍼지는 감회를 어떻게 가눌 수 있겠는가.

저물 무렵에 소리암(蘇利菴)으로 내려왔는데 험난한 바위 길을 내려오느라 매우 힘겨웠으나 올라갈 때의 어려움에 비하면 십분의 일도 안 되었다. 그야말로 조선생(曺先生.남명)이 말씀한 “선을 따르는 것은 산을 오르는 것과 같고 악을 따르는 것은 산을 내려가는 것과 같다(從善如登 從惡如崩)”라는 격언이 실로 오늘의 상황에 맞는 말이라 할 수 있다. 처음 계획은 상봉(上峯.가야산 정상인 칠불봉)에서 백운대(白雲臺.현재의 백운리)를 거쳐 해인사로 돌아오려 하였으나 내가 제군에게 권하기를, “우리가 여기에 온 것은 어찌 그저 산을 유람하는 사람처럼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구경하여 경물에 끌려 다니려고 한 것이겠습니까. 오늘 산에 올라와 얻은 것은 이미 충분합니다. 그러니 한가로이 몸을 쉬어 정신과 기운을 추스른 뒤에 천천히 시도해 보는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하니, 모두 그렇게 하자고 하였다. 이날 밤에 봉천대에 올라가니 달빛이 밝지 않아 드높은 산이 희미하고 바람이 차고 거세어 오래 있을 수 없었다. 산간에 있는 집은 으레 나무판자로 외벽을 막고 안쪽은 또 토담을 다져 쌓았으니, 이렇게 하지 않으면 구름이며 안개가 스며들고 얼음과 눈발이 침범하여 사람이 견딜 수 없을 것이다. 삼경에 갑자기 종소리가 들렸다. 산중에서 깊은 밤에 이처럼 맑은 소리를 접하니, 자신도 모르게 깊은 성찰의 경지로 빠져들었다.

 

● 15일. 새벽에 일어나 편지를 써서 덕원(德遠)에게 보냈다. 그 뒤에 곧 지해(志海)의 편지를 받고 벗들이 어제 이미 산으로 들어온 것을 알았다. 답장을 써서 보냈다. 한 산의 위아래 위치에 따라 흥취와 기상이 달라서 답장의 말을 구사하는 사이에 약간의 농담을 하고 말았으니, 이 또한 내가 머물고 있는 장소를 의식한 결과였다. 그러니 윗자리에 앉아 교만을 피우지 않기란 사실 어려운 일인 모양이다.

또 봉천대에 올라갔다. 날리는 안개가 자욱하게 깔리고 햇빛은 나왔다 들어갔다 하는 가운데 푸르고 붉은 빛이 온 산에 가득하여 저마다 온갖 모습을 연출하였다. 학사대(學士臺) 앞에 사람들의 그림자가 어렴풋이 오가는 것을 바라보고 지해 등 제군이 숲속의 정자에 나와서 거닐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다시 서쪽에 있는 두 석봉(石峯)으로 올라갔다. 여기의 경관은 대체로 봉천대와 같았으나 높이 솟아 현기증이 날 것 같은 형세는 한층 더 했다. 양정(養靜)이 마삭줄을 캤는데 보따리 속에 향기가 가득하였다. 공숙(恭叔)이 안개 속에 시달린 나머지 인간에게서 술을 빌려 오자는 말을 하였다. 나와 양정이 함께 공박하자 그도 곧 말을 실수했다고 사과하였다. 그가 그렇게 말한 이유는 우리가 가져왔던 술 한 병이 이미 바닥났는데 지해가 막 마을에서 왔기 때문에 그를 인간이라고 지목한 것이다. 방 안으로 들어가니 배 동자가 홍시를 내왔는데, 이는 아림(娥林.거창의 옛이름)의 외가에서 가져온 것이다. 홍시를 먹으면서 일행은 오늘 구경한 여러가지 경관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낮이 지나 해가 중천에 모습을 드러내고 안개가 말끔히 걷히자 산봉우리들이 제 모습을 드러내어 빽빽하게 깔리었다. 눈을 들어 바라보니 한눈에 다 들어오는데, 어느 것은 사람이 서 있는 것 같고 어느 것은 짐승이 엎드린 것 같고 어느 것은 장검을 세워 놓은 것 같고 어느 것은 붓자루를 꽂아 놓은 것 같았다. 수많은 산봉우리와 골짝들의 각기 다른 모습은 진정 미처 감상할 수 없고 말로 이루 다 형용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날 저녁에는 봉천대에서 다시 둥근 보름달을 기분좋게 구경하자고 서로 약속하였는데 뜻밖에 지해가 편지를 보내 덕원과 지족암(知足菴)에서 모이기로 했다고 하며 우리들에게 내려오라고 재촉하였다. 덕원은 지금 어버이의 병환을 시중들고 있는 가운데 틈을 타 잠깐 나온 것이므로 한번 서로 만날 기회를 놓칠 수 없다는 생각에서 걸음을 재촉하여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봉천대 위의 달을 보지 못하게 되어 섭섭한 나머지 발걸음을 옮길 적마다 고개가 돌아가 무슨 물건을 놓고 온 것만 같았다.

중소리(中蘇利)에 있는 대(臺)에 올라가 보니 훤히 트인 경치는 봉천대에 버금갈 만하였다. 중이 고하기를, “해가 저물어 가니 걸음을 재촉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하기에 우리들이 말하기를, “이처럼 바쁘게 서둘러 무슨 궁색한 일을 당한 것처럼 움직이는 것은 자연스럽지 못하니 산을 유람하는 기상이 아니다. 해가 저물면 원명암(圓明菴)에 머물러 잠을 자고 내일 가서 만나는 것도 괜찮다.” 하였다. 그리하여 등에 짊어진 짐을 내려놓고 편지를 써서 지해에게 그러한 사정을 알려줬다.

내원사(內院寺)에서 처음 산으로 올라올 때는 산봉우리가 빙 둘러 에워싼 가운데 그윽하고 아름다운 경치가 올라올수록 한층 더 기이하여 신선한 기분이 끊임없이 들었는데, 봉천대에서 내려올 적에는 주위의 경관이 자꾸 더 속되고 좁아진다는 느낌에 가슴이 조여드는 듯 갑갑하여 마치 높은 나무에서 내려와 깊은 골짜기로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그리하여 아쉬움에 뒤를 돌아보며 마음이 안정되지 않았다. 이로 볼 때 내 몸을 어디에 둘 것인가에 대해 삼가지 않을 수 없으며 보는 견해를 혹시라도 그 수준을 낮게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느낄 수 있었다.

구름이 잠깐 심술을 부려 달빛이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봉천대의 달밤 경치를 보지 못해 불만스럽던 터라 차라리 지금 달이 보이지 않는 것만 못하다는 생각이 들어 달빛이 없는 것이 그다지 유감스럽게 생각되지는 않았다. 나는 또 몸 기운이 고르지 않은 탓에 밤이 깊도록 잠이 오지 않아 율무죽을 끓여 먹었다. 한밤중에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와서 뜨락을 오락가락 거니노라니 하늘 동남쪽에는 엄숙한 기상이 감돌고 안개가 서북쪽에서 피어올라 빠르게 날아가서는 하늘 끝에 이르러 흩어졌다. 구름 사이로 달빛이 살짝 보여 그 밝은 빛이 오히려 인간 세계를 비추고 있고, 고요한 산속 으슥한 밤 어디선가 바람 소리가 살짝 들려 왔다. 기분이 맑고 시원하여 졸음이 오지 않았다.

 

● 16일 맑음. 아침 일찍 일어나 세수하고 머리를 빗은 뒤에 앉아 생각하니, 어제 봉천대에서 내려올 때 몸이 처한 장소가 점점 낮아지는 것이 불만스러워 마음이 편치 못했던 것은 본심과 본성을 지키고 기르는 공부가 철저하지 않아 어떤 경우에 처하든 거기에 적응하지 못한 허물이었다. 잡념을 없애는 힘이 굳건하지 못하여 잡념에 흔들리고 말았으니 정말 부끄럽다. 그리고 요즘 산길 여행에서 본심을 잡아 지키는 공부가 혹시 소홀한 점은 없었는지 마음의 향방을 철저히 살펴야겠다는 생각이 더욱 절실하여 한층 더 힘써야겠다고 다짐하였다.

서둘러 밥을 먹고 길을 나섰다. 이날 아침에는 고운 햇살이 광채를 쏘아 산림이 찬란하여 매우 사랑스러웠다. 밤사이 끼었던 안개가 막 열렸으나 그 습기가 아직 남아 있어 돌길을 밟는 짚신이 그다지 미끄럽지 않았으니, 이 또한 산길을 가는 데에 약간의 도움이 되었다. 정각암(淨覺菴)에 들러 송 동자를 만나 볼까 했는데 그는 스승을 따라 법회(法會)에 갔다고 하였다. 매우 한탄스러웠다. 길가에는 대나무가 무더기로 자라 숲을 이루었고 단풍나무가 무성하였다. 중간 중간에 전나무가 서 있긴 하였으나 산기슭처럼 무성하지는 않았다. 바위 밑에서 가끔 시냇물이 맑은 소리를 울려 그것도 들을 만하였다. 길가에 오미자(五味子)가 열려 있어 처음에 두세 송이를 따서 손에 들고 놀다가 조금 더 따니 한 줌이 되어 배 동자에게 간직하라고 명하였다. 인간 세계에 돌아가면 산중에서 얻은 기념물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양정이 백지(白芷)를 캐어서는 그중 한 마디를 물에 씻어 애지중지 좋아하기에 내가 그것 좀 구경하자고 하니, 아까워하는 기색이 있었다. 나는 웃으며 말하기를, “그대는 어찌 가슴속에서 인색할 인(吝) 자를 쳐 없애지 못하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이것은 그저 백지일 뿐이네. 이것을 좀 아낀다고 해서 안 될 것이 뭐가 있겠는가.”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좋은 물건이든 나쁜 물건이든 그것을 편애하는 마음이 있으면 곧 잘못된 것이네.” 하니, 그가 결국 내 말에 승복하였다. 몇 리쯤 가다가 그가 또 요구하기를, “아까 승복한 것은 당초에 나의 본심이 아니네. 그것을 바꿔야겠네.”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이미 승복해 놓고 그것을 후회하려고 하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애초에 승복할 생각이 없었고 그저 화두를 약간 완곡하게 구사한 것일 뿐이었네. 그러니 그것을 바꾸지 않으면 아마도 억울한 마음이 들 것이네.” 하였다. 그는 백지를 아까워하는 정도야 사실 괜찮다고 생각한 것으로, 나의 말은 그의 귀에 끝내 들어가지 않았다. 갑자기 주고받은 대화라서 깊은 속뜻을 기록하지 못하니, 말을 문자로 기록하기가 어려운 것이 이렇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득검지(得劍池)를 지나는 길에 그곳에서 한참 동안 서성거리며 비석에 낀 이끼를 긁어내게 한 뒤에 보니, 겨우 두세 편의 시를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으며 그것도 전체 문장은 확인하지 못했고, 돌에 새겨진 글의 내용도 그것이 사실임을 입증할 만한 근거가 충분치 못하였다. 그러니 더구나 후세에 전할 만한데도 불구하고 묻혀진 그 당시 나화상(螺和尙)의 말씀과 기풍을 어찌 이루 다 헤아릴 수 있겠는가.

학사대를 지나고 해인사를 거쳐 지족암(知足菴)에 당도하니, 정덕원(鄭德遠), 이계욱(李季郁), 김지해(金志海), 김혼원(金渾源)이 모여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은 나와 헤어진 지가 멀게는 3, 4년이고 가깝게는 1년이며 이계욱만 한 달쯤 지난 편이므로, 산속에서 함께 만나고 보니 반갑기 그지없었다. 웃고 얘기하며 학문에 관해서도 토론한 뒤에 눈을 들어 주의를 둘러보니, 보이는 것이라고는 드높은 산의 단풍나무와 노송나무뿐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박숙빈(朴叔彬.朴而章)이 올라오기에 그의 어버이의 병환에 관해 물으니, 모르겠다 하며 대답을 못하였다. 이선술(李善述)이 편지를 보내 제례(祭禮)를 물어왔기에 제군과 함께 서로 알고 있는 것을 상의하여 답해 보냈다. 저녁 무렵에 문면(文勉), 주국신(周國新), 문홍도(文弘道), 조응인(曺應仁) 등 수재(秀才)들이 함께 왔는데 그들의 스승에게 인사하기 위해서였다. 혼원과 지해가 각기 가지고 온 술을 꺼내 밤늦도록 마셨다. 잠자리에 들 때는 자정이 될 무렵이었다.

 

● 17일 맑음. 아침에 주자의 행장을 함께 읽었다. 문수재(文秀才) 등은 암자의 방이 비좁아 해인사에 가서 잠을 자고 곧 먼저 집으로 돌아갔다. 제군이 백운대(白雲臺)를 구경하러 가려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벗들이 한자리에 모여 지내는 낙은 본디 쉬운 일이 아니니, 오늘은 우선 이곳에 머물러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하는 즐거움을 누립시다.” 하자, 모두 그렇게 하자고 하여 그대로 주저앉았다. 저녁에 지해가 또 술을 꺼냈는데, 덕원은 기관지 천식이 있다 하여 사양하고 백유, 계욱, 공숙, 양정은 술을 잘 못하여 겨우 한 잔 마시고 다 쓰러졌다. 나도 상당히 취하였다.

 

● 18일. 맑음. 제군은 이미 백운대를 유람하기 위해 길을 떠났으나 덕원은 천식 때문에 따라가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그와 함께 제월담(霽月潭)으로 갔다. 졸졸 흐르는 샘물을 따라 거니노라니 단풍나무와 노송나무가 줄지어 서 있고 볕과 그늘이 서로 어우러져 흥취가 한량없었다. 못가의 바위 위에 줄지어 앉아서 노는데, 뿜어대는 폭포의 어지러운 소리에 서로의 말소리가 들리지 않아 반드시 귀를 기울이고 입을 바짝 대어야 알아들을 수 있었다. 각자 술을 두세 잔씩 마셨다. 하성원(河性源.河渾)과 문군변(文君變.文景虎)이 와서 그의 스승에게 인사하였다. 덕원은 그의 문인들과 따로 한 무리를 지어 입암(立巖)을 구경할 계획을 하면서 내일 청휘정(晴暉亭)에서 함께 만나자고 약속하고 오후에 헤어졌다. 그와 헤어져 1리쯤 걸어가다가 덕원의 아우 덕현(德顯.鄭仁榮)을 만났는데, 입암의 모임에 가려 한다고 하였다.

심원사(深源寺)를 지나가는데 오래된 절이라 거의 허물어지고 중이 없는 상태였다. 과거에 내가 여러번 잠을 잤던 곳이라 감회가 새로웠다. 절간의 문 밖에 이르러 말 위에서 내려 잡초와 나무를 헤치며 얼마쯤 가다가 길을 잃고 한참 동안 방황하였다. 그러던 중에 우연히 벼를 동냥하는 중을 만나 그에게 길을 안내하게 하였다. 거의 7리쯤 걸어가니 비로소 도은사(道恩寺)가 보였는데, 돌길이 울퉁불퉁하여 걸음을 옮기기가 점점 더 어려워져 조금 가다가 쉬곤 하였다. 피곤하고 갈증도 심하였다.

깎아지른 벼랑 밑에 작은 샘물이 솟아오르기에 그 주위에 줄지어 앉아 물을 떠 막 밥을 먹으려 하는데 지해가 아이를 불러 작은 도시락을 나에게 올리게 하였다. 나는 손수 뚜껑을 열며 이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니 그는 일부러 바로 대답하지 않고 웃음을 머금어 뭔가 특별한 것이라는 기색을 표하는것 같았다. 주위 사람들이 생각할 때 반드시 그 안에 진미가 들어 있어 나의 힘겨운 기운을 소생시킬수 있을 것이라 하여 각기 주목하고 바라보았다. 다 열고 보니 찐 밤을 찧어서는 꿀에 버무려 둥글게 환을 만들었는데, 여러 날 동안 감싸고 다녀 푸른곰팡이가 떠서 그릇에 가득하고 쉰 냄새가 코를 찔러 얼굴을 가까이 댈 수가 없었다. 그가 산에 들어오는 날 가족에게 이것을 특별히 만들게 하여 산속에서의 별미가 되게 할 생각이었을 텐데, 그것을 꺼내 보니 냄새와 빛깔이 다 변했던 것이다. 순간적으로 나도 모르게 애석함을 금치 못했는데, 제군들은 모두 껄껄대며 웃음을 터뜨렸으니, 간직을 잘못하여 먹지 못하게 만들었으면서도 미리 특별한 것이라고 뽐내는 기색을 보인 것이 웃음을 자아냈던 것이다.

도은사에 미처 닿기 전에 어두워져 초경이 되었다. 밤이 깊은 뒤에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니 중천에 뜬 달빛이 흐릿한 가운데 산은 고요하고 밤은 쓸쓸하여 맑고 트인 기분이 그지없었다. 여럿이 함께 앞 행랑채에 앉았노라니 맑은 기운이 엄습하였다. 지해가 율무죽을 끓여 내왔다.

 

● 19일 맑음. 새벽에 일어나 동문(東門)으로 나가서 바위 모서리를 따라 작은 대(臺)에 올라가니 혼원(渾源)과 양정(養靜)이 벌써 와 있었다. 멀고 가까운 산봉우리가 저절로 높고 낮은 형태를 이루어 눈 밑에 깔렸는데, 냇물과 들판이 얽혀 감아 돌고 안개와 놀이 아스라이 깔려 보는 이의 가슴을 시원하게 하는 느낌이 충분히 봉천대의 다음은 될 만하였으며, 여유롭고 평온한 형세는 어쩌면 그보다 나은 것 같았다. 어느새 해가 아득히 먼 산봉우리에서 떠오르는데 상서로운 기운이 영롱하고 강렬한 빛발이 번쩍번쩍 어지럽게 쏘아 대어 눈이 부셔서 똑바로 볼 수 없었으니, 정말 기이한 광경이었다. 공숙(恭叔)이 서쪽 바위 밑으로 가면 볼 만한 곳이 있다고 말하기에 지팡이를 짚고 가 보니 으슥하고 좁아 절간의 앞마당에서 보는 경치보다 못하였다.

중에게 앞길을 안내하게 하고 백운대(白雲臺)를 찾아가는데 길이 돌이 많고 험한 바위여서 앞으로 나아가기가 매우 어려웠다. 백운대 밑에 당도하니 높은 절벽으로 이루어진 그 형태가 전일에 올라갔던 상봉(上峯)과 다름없어 한동안 애를 쓴 뒤에 가까스로 올라갔다. 사방이 훤히 트여 아스라이 먼 곳까지 시야에 다 들어오는 것은 이것도 봉천대의 다음이 될 만하였고, 평온하기는 도은사에서 둘러본 경치와 비슷하였다. 백운대의 북쪽 산과 동서쪽의 두 산등성이는 칼 같은 돌이 높이 서 있고 기묘한 바위들은 저마다 기묘한 자태를 뽐내는가 하면, 바위틈에는 여기저기 노송(老松)과 젓나무가 들쭉날쭉 기울고 구부러져 있는 모습들은 그 시원스럽고 기괴한 느낌이 소리사(蘇利寺)의 경치와 서로 우열을 다툴 만하였다. 제군과 오랫동안 서성거리며 둘러보고 간간이 농담과 웃음으로 시간을 보내다가 돌길을 타고 단풍나무 숲을 헤치며 내려왔다. 내려올 때 곳곳마다 흥밋거리가 있었고 흥이 일어나면 그 자리에 멈추곤 하느라 어느새 산중의 해가 이미 서쪽으로 기운 줄을 몰랐다. 덕원(德遠)이 보내온 소식을 접했는데 오른쪽 다리가 시고 당겨 걷기가 불편하여 입암(立巖) 구경을 하지 못했다고 하였다.

도중에 정주신(鄭舟臣)과 박경실(朴景實)을 만났는데 나를 만나기 위해 올라온 것이었다. 그들과 함께 이선술(李善術)의 계정(溪亭)을 찾아가 보니 주인은 없고 어린 종이 문을 열고 우리를 맞아들였다. 이곳은 옛날 이도은(李陶隱.李崇仁)이 살았던 곳인데 선술이 중건하여 은거하고 있었다. 집이 크고 넓으며 산골이 깊어 충분히 나름대로 경치가 좋은 곳이라 할 수 있었다. 제군과 이곳에 머물러 잠을 잤다.

 

● 20일 맑음. 닭 울음소리를 듣고 일어나니 싸늘한 달빛이 시내를 비추고 맑은 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율무죽을 먹고 즉시 짐을 챙겨 출발하였다. 공숙은 창산(昌山.창녕의 옛 이름)으로 향했는데 그의 부모가 간절히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선영(先塋) 곁을 지날 때는 말에서 내려 걸어갔다. 정주신과 박경실 두 군은 서원(書院)으로 향해 가고 배 동자도 어버이의 병환 때문에 하직하고 그의 집으로 돌아갔다. 호평(虎坪)앞 냇가에 이르러 또 말에서 내려 지나갔는데, 그곳은 내 외가의 선영이 있다. 재각(齋閣)에 가서 밥을 먹은 뒤에 연석암(軟石菴)을 거치고 주암(舟巖)을 지나 보천(步川)을 건너 입암(立巖)에 당도하니, 아직 정오가 되지 않았다.

흰 돌이 고르게 깔렸는데 매끄럽기가 잘 다듬은 옥 같았고, 푸른 물은 잔잔히 흐르는데 맑기가 밝은 거울 같았다. 바위가 우뚝 솟아 있는데 그 높이가 50길은 됨직하고, 소나무가 바위틈에서 자라느라 늙도록 크지 못하였다. 백옥 같은 널찍한 바위가 물위에 드러나 있는데 그 위에 3, 4십명은 앉을 만하였다. 그 맑고 기이하며 그윽하고 고요한 느낌은 며칠 전에 구경한 홍류동에 비할 정도가 아니었다. 지해는 처음 이 선경(仙境)에 들어서자 차마 신을 신고 밟지 못해 신을 벗어 들고 맨발로 걸어갔다. 모두 기분좋게 감상하고 있노라니 정신이 맑고 호쾌해져 한동안 그 기분이 가라앉지 않았다.

보따리 속에서 밥을 꺼내 물에 말아 간단히 요기한 뒤에 시내를 거슬러 올라가니 이른바 고반곡(叩盤谷)이라는 곳에 이르렀다. 이곳은 기묘한 산봉우리가 여기저기 솟아 있고 흰 바위가 층층이 깔려 있어 여유롭고 고요한 느낌이 나름대로 정이 갈 만하였다.

숙부(肅夫.金宇顒), 경청(景淸.朴澯), 선술(善述) 등 벗들이, 언덕 위에 초당 한 칸을 얽어 놓은 것이 있어 그곳에서 잠을 잘 만하였는데, 사람을 고용하여 지키고 있었다. 이곳은 실로 우리들이 한적한 생활을 하기에 적합한 장소였다. 바위 위에서 낮잠을 잔 뒤에 해가 저물어서는 초당으로 들어가 잤다. 여러 날 동안 험난한 산길을 다녔고 날씨까지 흐리므로 사람들이 모두 지쳐서 몸을 주체하지 못했다. 구름이 잔뜩 끼어 낮에도 어두웠고 밤이 되니 깜깜하여 구경할수 없었다.

 

● 21일 흐림. 새벽에 일어나 글을 읽었다. 아침밥을 먹은 뒤에 시냇가로 걸어나가 바위 위에 앉아 한참 동안 시간을 보냈다. 구름은 걷히지 않고 가랑비가 조금 내렸다. 자리에서 일어나 말을 타고 사인암(舍人巖)을 찾아갔다. 물이 맑고 물살이 빨랐으며 산봉우리가 가파르고 높았다. 옛날에 일찍이 사인(舍人) 벼슬을 한 어떤 사람이 이곳의 아름다운 수석을 사랑하여 이 바위 아래에 자리를 잡고 살았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하였다 하는데,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곳이 바로 몸을 놓아 버린다는 사신암(捨身巖)이다. 이곳에 온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자기의 몸과 마음을 다 잊어 인간 세상의 몸을 놓아 버리고 이곳과의 인연을 영원히 맺기를 원한다.” 하였다. 이런 설은 다 시골 마을의 속된 말로, 믿을 것이 못 된다.

시내를 따라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며 여러 군데의 경치를 다 구경하자는 말에 대해 다른 사람들도 다 좋아하여 비가 내리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리고 증산(甑山)은 산세가 구불구불하고 평원이 한적하면서도 넓다는 말을 듣고 그곳을 구경하기 위해 골짜기의 입구까지 갔다. 그러나 해가 저물 것이 걱정되고 가서 본다 하더라도 별로 특별한 볼거리는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말을 세우고 망설이다가 말머리를 돌려 방곡(防谷)으로 향해 들어갔다. 그곳에는 상류에 폭포가 있는데 경치가 좋다고 소문이 났으므로 한번 구경하지 않을 수 없어서였다.

시내를 따라 풀 길을 헤치며 말을 재촉해 달려가는데 한 가닥의 오솔길이 매우 희미하게 뻗어 있고 경지가 험난하고 골짝이 깊어 인가가 전혀 없었다. 10여 리를 가서야 비로소 해묵은 밭의 모퉁이에 이르렀는데 개암나무와 잡초가 무성하였다. 그 안으로 들어가 한 군데의 깊은 골짝을 만났다. 바위 벼랑이 벽처럼 서 있고 흰 물이 쏟아져 내려오는데 그 높이는 4, 5길쯤 되었으며, 왼쪽과 오른쪽에도 층층이 쌓인 바위가 빙 둘러 에워싸고 하얀 비단폭을 길게 드리운 것처럼 보이는 폭포가 어지럽게 떨어져 그 소리가 천둥이 울리는 것 같았으므로 다소 구경할 만하였다. 그러나 그 위치가 잡초 우거진 들밭 언저리에 있어 거름이며 가시덤불과 함께 어울려 기상이 더럽고 속된 나머지 맑은 느낌은 조금도 없었다.

계욱(季郁)은 아예 돌아보지 않고 떠나면서 말하기를, “내가 이 폭포 때문에 여기를 왔단 말이냐. 내 눈을 씻어 버려야겠다.” 하니, 백유(伯愉)가 말하기를, “경치 좋다는 이름을 헛되이 얻은 것은 아니구나. 이 정도도 어찌 쉽게 볼수 있겠는가.” 하였다. 나와 지해(志海)는 말하기를, “백유가 이름을 헛되이 얻지 않았다고 한 말은 사실 지나치다 할 수 있지만, 계욱이 돌아보지 않고 떠나며 눈을 씻어 버려야겠다는 말까지 한 것은 너무 심하지 않은가.” 하였다. 그러나 지해는 드러내 놓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이런 곳도 쉽지 않다는 생각이 약간 있는 듯하였고, 나는 불만을 표시하지는 않았으나 또한 한번 걸음을 헛수고했다는 유감이 없지 않았다.

이름과 실제의 사이에서 말로만 들은 것과 눈으로 본 것이 같지 않고 사람에 따라 좋아하고 싫어하는 느낌이 서로 반대가 되는 경우가 어찌 유독 이곳 산중의 일뿐이겠는가. 하지만 이 적막한 골짝이야 바깥에 누가 알아주기를 구한 일이 없다. 사람들 스스로 소문을 듣고 찾아오고 사람들 스스로 보고서 폄하하거나 칭찬하는 것이니, 저 폭포야 무슨 상관이 있는가. 지해와 양정(養靜)이 서로 말하기를, “자리 잡고 있는 위치를 삼가지 않을수 없는 일이다. 만일 이 폭포가 사인암(舍人巖)이나 고반곡(叩盤谷) 사이에 있다면 그 어찌 청아한 구경을 하는 데에 일조가 되지 않겠는가. 폭포수가 주옥처럼 흩어져 쏟아지고 똑바로 서 있는 물줄기의 모습이나 맑고 깨끗한 물빛은 또한 충분히 세속의 잡다한 일에 찌든 가슴을 씻을 만하니, 계욱이 감히 활개를 치지 못하고 눈도 감히 씻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이 폭포는 자리를 잡은 데가 속스러운 곳이기 때문에 품격이 추하니, 비록 이러니저러니 잡다한 인간의 비평이 있다 하더라도 이는 자초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발길을 돌려 몇 리쯤 가던 중에 동행하던 한 아이종이 도망쳐 그 즉시 어른 몇 명을 보내 뒤쫓아가 잡아왔다. 사인암에 당도하기 전에 말에서 내리고, 사인암에 당도하여 말에서 내렸으며, 사인암을 지나서 또 말에서 내렸는데, 이는 다 수석의 구경거리가 너무도 맑고 기이하여 그것을 보는 사람이 저절로 정신이 팔려 돌아갈 것을 잊어버리게 하였기 때문이었다. 산에는 가파르게 높이 솟은 봉우리와 병풍처럼 사방을 에워싼 푸른 초목이 있고, 소나무는 무성하여 빽빽하게 우거지고 우뚝 솟은 것도 있었다. 어떤 나무는 바위틈에서 말라 죽었거나 벼랑 위에 거꾸로 걸려 있기도 하고, 단풍나무도 이미 붉어졌거나 아직 붉지 않은 것, 이미 말라 버렸거나 반쯤 마른 것 등 갖가지 모습들이 다 감상할 만한 것으로, 우리의 걸음을 더디게 하는 데에 기여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고반곡의 오두막으로 돌아오니 해가 이미 저물었다. 일행들은 비를 맞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였다. 저녁밥을 먹은 뒤에 시내의 바위에 앉아 다 함께 산수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밤늦게 잠자리에 들었다.

 

● 22일. 아침부터 비가 내려 하루 종일 그치지 않았다. 조용히 앉아 청아한 이야기를 나누노라니 또 산중에서 빗속에 지내는 흥취가 생각보다 깊다는 것을 느꼈다. 지해(志海)의 집에서 술과 고기를 보내와 함께 10여 잔을 마시고 나니 나도 모르게 취하여 몸이 나른해졌다. 밤이 깊어서야 잠이 들었다가 금방 다시 깨어보니, 밝은 달이 솟아올라 소나무 가지를 비추어 엉성한 솔 그림자가 침실로 들어왔는데, 그 맑은 빛이 정갈하므로 모두가 정신이 말끔해졌다. 흰죽을 끓여 먹은 뒤에 다 함께 시냇가로 나가 바위 사이를 산보하노라니 발로 밟는 땅이 온통 달빛이었다. 비가 내린 뒤라서 냇물이 불어나 그 위에 비친 달빛이 더욱 환하였는데, 물결이 일렁이는 곳은 영롱한 금빛이 뛰고 잔잔한 곳은 둥근 옥이 잠겨 있었다. 흐르는 물과 머물고 있는 물이 그 움직이고 가만히 있는 것은 다르지만 맑고 깨끗한 현상만은 똑같이 끝이 없었다. 어정어정 돌아다니며 사방을 둘러보기도 하고 혹은 조용히 앉아 한군데를 주시하기도 하였다. 밤기운은 음침하고 산골짜기는 고요한 가운데 엷은 노을은 바위에 깃들고 엷은 구름은 하늘에 군데군데 떠 있으며 하얀 달빛은 허공에 빛을 뿌리고 폭포수는 맑은 소리를 울려왔다. 초연한 흥취가 일어나 그 잡념이 없는 정신 세계를 이루 형용할 수 없었다.

혼원(渾源)은 처음 일어났을 때 머리와 배가 아픈 몸으로 억지로 시냇가에 나왔으나 구역질이 나서 잠자던 곳으로 지레 돌아갔다. 지해가 한탄하기를, “우리 형은 산중에서 제일 좋은 흥취를 맛보지 못하니 불행 중에서도 큰 불행이다. 차가운 물과 밝은 달을 구경하는 것은 본디 각자 분수가 있는 법이니 이것을 어찌 인력으로 할수 있겠는가.” 하였다. 한참 동안 있다가 초당으로 돌아오니 산중의 닭이 새벽을 알렸다. 각자 이불을 껴안고 차가운 기운을 물리쳤다.

 

● 23일 맑음. 막 떠오르는 해가 빛을 발산하자 산골 움막에 아름다운 빛이 일어나고 물빛과 산빛이 찬란하게 반짝였다. 글을 조금 본 뒤에 서둘러 밥을 먹고 산을 나왔다. 돌 위를 걸으며 냇물에 손을 담그기도 하였는데 하얀 해가 물 위에 비치고 하늘빛이 물 속에 잠겨 맑기가 그지없었다. 물고기가 이따금 눈앞에서 헤엄치며 노니 이 또한 제 천성대로 노는 즐거움을 볼수 있었다. 푸른 산의 꼭대기를 바라보니 그 위에 하얀 해가 막 올라와 온 누리가 끝없이 너르고 아득하여 그 광경을 무어라 말로 형용할 수 없었다. 나는 계욱(季郁)의 손을 잡고 그곳을 가리켜 보게 하며 말하기를, “이렇게까지 기이하고 아름다운 광경이 어디에 또 있겠는가. 인간 세계에도 과연 이런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입암(立巖)에 이르러서 물 가운데에 있는 너럭바위에 앉아 부싯돌을 쳐 불을 피워서 술을 데워 마셨다. 나는 경청(景淸)과 숙부(肅夫)를 그리는 절구 두 수를 지었다. 저마다 술에 약간 취했는데 계욱만 혼자 많이 취하여 물가에서 졸았다. 내가 손으로 물을 떠 그의 얼굴에 뿌리자 그는 매우 좋아하며 잠을 깼다. 지해와 양정은 종에게 업혀 물을 건넌 뒤에 바위 밑으로 가 소나무 밑에서 한가로이 놀았다. 이윽고 시종하는 자가 해가 이미 저물었다고 하므로 동구를 걸어서 나와 말을 타고 떠났다.

석양에 한강정사(寒岡精舍. 성주 수륜면 수성리에 있었음)에 당도하였다. 뒤의 냇물을 다 건너왔을 때도 땅거미가 그다지 짙게 지지는 않았다. 어렴풋이 어떤 사람이 어시헌(於是軒)에 있는 것이 보였으나 그 모습은 알아볼 수 없었는데, 그의 기침소리를 듣고서야 그가 경청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서로 반갑게 만나 걸음을 재촉해 들어갔다. 의기가 서로 투합되면 이처럼 서로 호응하는 것은 인력으로 어쩔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나무 사이에서 서로 읍을 한 뒤에 오솔길에 앉아 안부를 나누고 함께 혁림재(赫臨齋)로 들어갔다. 그가 홍시와 밤을 내놓아 그것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니 이 또한 산중에 하나의 재미있는 일이었다. 매우 피곤하여 잠이 들었는데 신음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지해는 기관지 천식으로 가장 고통스러워하였다. 그와 함께 모두 소나무 사이에서 산중의 달빛을 구경하기로 약속하였으나 결국 그렇게 하지 못했다.

 

● 24일 맑음. 서로 의논한 결과 아침밥을 먹은 뒤에 다 함께 경청의 집으로 가서 헤어지자고 하여 서로 손을 잡고 줄지어 시내를 따라 걸어가다가 또 말을 타고 갔다. 송장(宋丈)을 찾아뵙고 그동안의 산중 구경을 대강 말씀드렸다. 경청의 집에 당도하니 정오가 거의 다 되었다. 마지막 인사말을 충분히 나누지 못하고 각자 남북으로 헤어졌다. 이별의 아쉬운 정이 뭉클 일어나 말 위에서 서로 바라보니 섭섭한 심정을 가눌수 없었다. 이날 나는 백유(伯愉)와 함께 계숙(溪塾)으로 돌아왔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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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허현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5.11.10 한강(정구)선생 자신이 살았던 성주에 가까운 가야산을 찿아 훌륭한 기행록을 남긴것은 의미가 크다. 그것은 한강이라는 名人과 가야산이라는 名勝이 의미하는 인걸지령(人傑地靈)의 만남이였던것이다. 한강이 별세하기전의 조짐으로 가야산의 한 봉우리가 무너졌다고 왕조실록은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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