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과 땅 사이에서 가장 아까운 것은 세월이며 정신이다. 세월은 한량이 없지만 정신은 한계가 있는 것이다. 세월을 헛되이 보내고 나면 그 소모된 정신은 다시 수습할 수 없다. 대저 사람이, 더벅머리[髫] 이전은 논할 것이 없지만, 더벅머리로부터 장성하여 관(冠)을 쓰게 되고 관을 쓴 뒤에는 장가를 들게 되며 이미 장가를 들고 나면 어린 자녀들이 눈앞에 가득하여 엄연히 남의 아비가 되고, 또 어느 사이에는 머리털이 희끗희끗해지면서 손자를 안게 되는 것이므로 늙어가는 사세를 도저히 막을 수 없다. 이리하여 머리를 긁적이면서, 더벅머리로부터 관을 쓰고 관을 쓴 뒤에 장가를 들었다가 손자를 안고 또 머리가 희끗희끗해진 것을 회상해 보면 그 정신의 성쇠(盛衰)가 완전히 달라서 마치 선천(先天)과 후천(後天)처럼 여겨질 것이다. 한평생 표락(飄落)하여 아무것도 이루어 놓은것이 없음을 가만히 더듬어 보면 아무리 긴 한숨을 내쉬어도 어쩔 도리가 없을 것이다.
나는 이미 열 두서너 살 때부터 이 점을 깨닫고, 두려워하고 개탄하는 마음이 온 가슴에 꽉 찼었다. 또한 지금 장가 든 지가 10년이 가까웠는데, 턱 밑에 수염이 자못 덥수룩하다. 자신의 그림자를 돌아보고, 지금 나는 나이가 젊고 정신이 밝은데, 만일 이 시기에 글을 읽어 몸 닦는 학문을 힘쓰지 않는다면 머리 긁적이는 비탄(悲嘆)이 곧 나에게도 돌아올 것이라고 흠칫 놀라면서, 언행에 힘쓰겠다는 조그마한 뜻을 두었으나, 세상일에 골몰하여, 때로는 간단(間斷)이 있었으니 그 애석함을 어찌 다 말하겠는가? 이에 책을 다시 챙겨 놓고 부모를 섬기며 독서하는 여가에서 스스로 얻어진 것이 있으면 수시로 기록해 두었더니, 점차 편(篇)을 이루게 되었다. 이것이 빈 말[空言]에 불과할 뿐, 남에게 도움을 줄수 없다는 것은 잘 알지만 스스로의 지침을 삼는 데는 거의 어긋나지 않으리라 믿으며, 세월과 정신이 가장 아깝다는 데 대하여 가면 갈수록 더욱 유의하게 되었으니 이 글이 일단의 도움은 된것 같다. 계미년(1763) 가을철로 접어든지 16일째 되는 날 신시(申時) 직전에 사이재거사(四以齋居士)는 쓴다.
얼굴을 곱게 꾸미고 모양을 아양스럽게 굴면 비록 장부라도 부인보다 못하며, 기색을 평온하게 하고 마음을 바르게 하면 비록 미천한 하인배라도 군자가 될수 있다. 글을 읽으면서 속된 말을 하는 것은 닭과 개를 대하여도 부끄러운 일이요, 손[客]을 보내 놓고 시비를 논하는 것은 아마 귀신도 가증스럽게 여길 것이며, 말이 경솔하면 비록 재상의 지위에 있어도 노예나 다름없고 걸음걸이가 방정맞으면 비록 나이 많은 늙은이라도 아이들보다 못하다. 내가 일찍이 이 말을 동쪽 벽에 붙여 놓고 그 끝 부분에 ‘명숙(明叔.이덕무의 字)이 명숙의 서실(書室)에 이 글을 썼는데 명숙이 어찌 명숙을 속이겠는가’ 라고 덧붙였으니, 이는 깊이 경계한 말이다.
경박한 세속이 옛 성현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고 있는데, 나는 일찍이 이를 경계하여, 옛 고인(高人)이나 학사(學士)를 깍듯이 존경하여 자(字)나 호(號)를 불러왔다. 예를 들면 도잠(陶潛)을 정절(靖節), 한유(韓愈)를 퇴지(退之)라 부른 유이다. 또 세속이 후하지 못하고 남을 이기는 데만 힘써, 부집(父執)이나 장로(丈老)의 이름 부르기를 마치 어린애의 이름같이 하니 해괴한 일이다. 일국의 재상은 임금도 존경하여 이름을 부르지 않는데 사서인(士庶人)이 어찌 부를수 있겠는가?
또한 어렸을 때의 이름은 그 부모와 조부모, 그리고 백,숙부모 이외에는 부를 수 없다. 만일 그렇지 않는다면 관(冠)을 씌우고 자(字)를 주는 본의가 어디에 있겠는가? 아무리 친구간이지만 이미 관을 썼는데도 어렸을 때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진정 옳은 일인지 모르겠다.
부화(浮華)한 무리들이 경서(經書)와 기타 학문에 관한 글은 보기 싫어하여, 재미를 붙이는 것이 패설(稗說)만 못하다. 개중에는 경서를 읽는 자도 있지만 경의(經意)를 표절(剽竊)하여 사장(詞章)에 부회(附會)시키고 있으니 참답게 읽는 것이 아니며, 경서를 유의해서 읽는 이가 있으면 도리어 썩은 선비라고 비웃으니, 나는 여기에서 느낀 바가 있다.
어른을 온종일 모시고 있으면 방심(放心)을 거두어들이기가 글을 읽어서 거두어들이는 것보다 훨씬 나은 것인데 소년들이 으레 어른 모시기를 싫어하며 심지어는, 6월 볕이 하루가 어디냐는 조롱까지 하고 있으니 어찌 옳은 일이라 하겠는가? 개중에는 부형(父兄)의 곁을 싫어하고 회피하는 자도 있는데, 나는 적이 미워하는 바이다.
호자(胡子.胡宏)의 말에 “학문이란 해박해야 하고 잡되어서는 안 되며, 요약해야 하고 비루해서는 안된다.”고 하였는데, 해박과 요약 두 자는 잡됨과 비루 두 가지의 치우친 폐단을 구하게 되므로 배우는 이는 늘 이 말을 외고 있어야 한다.
예로부터 재능을 가진 자는 교만하고 뽐내는 데 마음이 쏠리기 쉽다. 마침내 몸을 망치고 명절(名節)을 욕되게 하는 것이 다 교(驕)자에서 싹트므로, 아무리 남보다 뛰어난 재주와 하늘을 관통할 학(學)을 가졌더라도 지위의 존비와 귀천을 막론하고 남을 대할때 얼굴에도 교(驕)자를 버리고 말에도 교(驕)자를 버려야만 망령된 사나이가 안 된다.
명(明)나라는 천하를 얻음이 매우 정당하여 이적(夷狄)을 다시 화하(華夏)로 환원시켰고, 천하를 잃음도 또한 정당하여, 사직(社稷)에 순절(殉節.明毅宗이 순절한 것)하였다. 다만 천하를 호(胡)에게서 얻은 것은 유쾌한 일이라 하겠으나 다시 호에게 잃은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삼봉(三峯.鄭道傳)이 국초(國初)에 죄로 죽었으나 부처에 아첨[佞佛]하는 고려 말기에 태어나서도 능히 글을 지어 불법을 배척하되 그 변론이 매우 정확하였고, 또 글을 포은(圃隱.鄭夢周)에게 보내어 중들과 친근한 것을 비난하였으니, 이런 일로 보면 유문(儒門)에 공로가 있는 사람이라 하겠다.
만일 만권(萬卷)의 책을 저장해 놓고도 빌려 주지도 않고 읽지도 않고 햇볕을 쏘이지도 않는는 사람이 있다면, 빌려 주지 않는 것은 인(仁)하지 못함이요, 읽지 않는 것은 지혜롭지 못함이요, 햇빛을 쏘이지 않는 것은 부지런하지 못함이다. 사군자가 글을 읽자면 남에게 책을 빌려서도 읽는 법인데, 책을 꽁꽁 묶어 놓기만 하는 자는 부끄러운 일이다.
옛사람의 말에 “어린 자식을 가르칠때 사람들이 으레 ‘아이가 어른의 말을 따르지 않는다’고 하는데, 이는 기습(氣習)이 많은 아이이다."고 하였다. 기습이 많은 자는 위로 치올라가서 그 행동거지를 제 마음대로 하다가 장성함에 미쳐서는 법에 걸리는 예가 많으니, 아, 부형으로서 부끄러움도 크다. 그러므로 자식에게 천금을 물려주는 것이 자식에게 한 경(經)을 가르쳐 주는것보다 못하다는 말이 있다.
옛사람의 말에 “가난하다는 말은 입 밖에 내어서도 안 되고 글로 써 놓아도 안 된다.” 하였다. 부(富)한 사람을 대하여 가난을 말한다면 그 부한 사람이 반드시 나에게 무엇을 요구하려는 속셈이라고 할 것이니, 이 어찌 기분이 상할 바가 아니겠는가? 안자(顔子)가 나물밥을 먹으면서도 언제 자공(子貢) 같은 사람에게 가난을 말하였던가?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겠는가? 다만 가난을 편하게 여길뿐이다. 가난을 편하게 여기면 자연 가난을 말하지 않게 된다.
일이 많게 되는것은 말이 많은 데서 시작되고 말이 많게 되는것은 마음[方寸]을 거두지 못하는 데서 시작된다. 그러면 입을 꼭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것인가? 그건 아니다. 말에서 그 행(行)을 돌아본다면 그 말을 헛되이 하지 않을 것이요, 행에서 그 말한 대로를 실천한다면 그 행을 헛되이 하지 않을 것이니, 어찌 청정(淸淨),적멸(寂滅)을 위주하는 노불(老佛)과 같겠는가?
소설(小說)은 가장 사람의 심술(心術)을 무너뜨리는 것이므로 자제들에게 보지 못하도록 하여야 한다. 한 번 거기에 집착하면 헤어나지 못하는 자가 많게 된다. 명나라 청원(淸源) 홍 문과(洪文科)의 말에 “우리나라 소인(騷人)과 묵객(墨客)들이 완사계(浣沙溪.詞牌의 이름),홍불기(紅拂記.劇曲 이름),절부기(竊符記.劇曲 이름),투필집(投筆集)등을 지었는데, 무릇 혈기가 있는 자들이 분발할 줄 알게 하였다. 이는 진실로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데 한 가지 도움이 되었으니 훌륭하다 이르겠다.”고 하였는데, 슬프다! 이 어찌 될 법이나 한 말인가? 내가 듣건대, 명나라 말기에 유적(流賊)들이 많이,수호전(水滸傳)에 나오는 강도들의 이름을 도용했다고 하는데, 이것도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데 한 가지 도움이 된 것이라고 말하겠는가? 내가 일찍이 수호전을 보았지만, 인정(人情)과 물태(物態)를 묘사한 데는 그 문사(文思)가 교묘하여 소설 중의 우두머리이며 녹림(綠林)중의 동호(董狐)라고 이를 만하다. 그러나 사대부들도 끝내 거기에 현혹되었고, 또 일본(一本)에는 종백경(鍾伯敬.鍾惺)이 비평(批評)했다는 말까지 있는데, 백경의 제 정신을 상실했음이 어찌 그 지경에까지야 이르렀겠는가? 이는 부화를 좋아하는 무리들이 백경의 이름을 빌어 간행(刊行)하여 그 글을 중시하도록 만든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또한 김성탄(金聖嘆)이란 자가 나타나 제멋대로 찬평(讚評)하기를 “천하의 문장이 수호전 보다 앞설 것이 없으므로,수호전만 잘 읽고 나면 사람이 여유작작하게 될것이다.”고 떠들어대었고 또 방자하게 “맹자는 전국시대 유사(遊士)의 습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훼방하였다.
내가 비록 성탄이 어떠한 위인인지는 자세히 알지 못하지만, 망령되고 비루하고 어긋난 자임은 이것으로써 짐작할 수 있으며, 그 말함이 억양이 교묘하여 사람의 마음을 잘 현혹시켰으니, 재주꾼은 재주꾼이다. 과연 시내암(施耐菴.수호전을 지은 사람)의 좌구명(左丘明)이요 법문(法門)의 송강(宋江)이라 이를 만하다. 생각하건대, 시내암이 금수(錦繡)같은 재주로 한 덩이의 분한(憤恨)이 가슴속에 축적되어 있는 관계로 그와같이 사실이 없는 말을 조작하여, 한평생 세상을 저주하던 마음을 발로시킨 것 같다. 그러나 그 마음은 비장하고 괴로웠다 하겠지만 그 죄는 머리털을 뽑아 세어도 속죄할 길이 없을 것이다.
소설에는 세 가지 의혹된 바가 있다. 헛 것을 내세우고 빈 것을 천착하며 귀신을 논하고 꿈을 말하였으니 지은 사람이 한 가지의 의혹이요, 허황된 것을 감싸고 비루한 것을 고취시켰으니 논평한 사람이 두 가지 의혹이요, 귀중한 시간을 허비하고 경전(經典)을 등한시했으니 탐독하는 사람이 세가지 의혹이다. 소설을 지은 것도 옳지 못한 일인데 무슨 심정으로 평론까지 붙여 놓았단 말인가? 평론한 것도 옳지 못한 일인데 국지(國誌.三國誌), 또는 수호전을 속집(續集)까지 만든 자가 있었으니, 그 비루함을 더욱 논할 나위가 없다. 슬프다! 내암과 성탄 같은 무리들의 재주와 총명으로써 이런 노력을 본분(本分)에 옮겨 힘썼다면 어찌 존경할 일이 아니겠는가? 더욱 심한 자는 음란하고 더러운 일을 늘어 놓고 괴벽한 설을 부연하여 보는 사람의 눈을 기쁘게 하기에 힘쓰면서 부끄러워할 줄을 알지 못한다. 내가 일찍이 보건대, 소설들 서목(書目)중에 연의(演義)를 개척한 것도 있었는데, 비록 펼쳐 보지는 않았지만 그 명목만 보아도 너무 괴상하다.
내가 어렸을 때 십여 종의 소설을 보았는데, 모두 남녀간의 풍정(風情)과 여항(閭巷)의 속담을 엮은 것으로서 눈이 솔깃해진 적도 있었지만, 진정 그런 일이 없었다는 것을 확실히 안 뒤에는 증오하는 마음이 점차 더하여 재미가 아주 없어져서 이에 그 글과 나의 눈이 서로 접하지 않게 되었다.
일찍이 듣건대, 중국의 시골 학구(學究)들이 한가히 모여 담화하다가 그 자리에서 술과 고기가 생각나면 한 사람은 입으로 그 대사(臺辭)를 부르고 한 사람은 받아 쓰고 몇 사람은 목판(木板)에 새기고 하여 손쉽게 두서너 편을 만든 다음 서사(書肆)에 내다팔아 술과 고기를 사서 논다고 하니 한심스럽다. 한때의 식욕 때문에 억지로 낭설을 조작해 내느라고 정력을 너무 소모시키고 심술도 따라서 타락하게 되며, 그 글이 워낙 많아 이루 다 금제할 길이 없고 수레와 소에도 다 실을 수 없는 실정이며, 사람마다 지어내고 집집마다 읽어대는 관계로 대추나무[棗],배나무[梨],닥나무[楮],등나무[藤]가 종이나 활판(活板)용으로 입은 화가 극심하다.
소설은 원(元)에서 시작하여 명(明)에서 한창 유행되었는데,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더욱더 유행되고 있다. 대저 소설은 난잡한 글이고 원은 어지러운 나라이다. 맨 처음 소설의 앞잡이가 된 자에게는 백성을 어지럽힌 죄를 가해야 옳을 것이다. 한(漢)의 당론(黨論)과 진(晉)의 청담(淸談)과 당(唐)의 시율(詩律)은 그래도 기절(氣節)과 풍류(風流)에 있어서는 볼 만한 데가 있었지만, 끝내 나라를 망치고 도(道)를 해쳤는데, 하물며 저 소설 따위야 어찌 이 세 가지에 비교나 되겠는가?
옛적에는 패관(稗官. 항간에 떠도는 이야기를 적는 벼슬)을 두어 야담을 수집하였는데, 그것이 비록 번쇄(煩瑣)한 점이 많지만 군자가 취한 바가 있었고, 전기(傳奇), 지괴(志怪)는 박물(博物)하는 자가 취택하였다. 그러나 소설은 위로는 당론, 청담, 시율에 미치지 못하고 가운데로는 패관, 야담에 미치지 못하고 아래로는 전기, 지괴에 미치지 못하는데, 성탄 같은 무리는 대체 무슨 심정으로 그 사이에 나서서 소매를 걷어올리고 다섯 재자[五才子.수호전과 삼국지연의를 지은 시내암과 나관중 등을 말함]를 표방하여 그 비루함을 조장시키면서, 소설가의 충신 노릇과 세속의 지기(知己) 노릇을 즐겨하였단 말인가? 만일 다행히 중국에 사람이 나서 세운(世運)을 만회하되, 하루바삐 새로운 영(令)을 온 천하에 내려 그 옛글은 소각시키고 새 글은 금제하며, 혹 이 영을 범하는 자는 그 법률을 엄격히 하여 인류(人類)로 취급하지 않는다면 이 폐습이 거의 바로잡혀질 것이다.
당(唐) 사고(四庫)의 갑부(甲部) 경류(經類)에 소학(小學)이 있다. 대개 삼대(三代) 시대에 소학류(小學類)가 있었으나 진화(秦火.진시황이 경서를 불사른 일)로 말미암아 없어져서 후세 선비들이 그를 구경할 수 없었고 다만 소학박사(小學博士)만을 두어 선비들을 가르쳤는데, 저술된 그 글이 아이들에게나 읽힐 정도였다. 그러므로 당서(唐書) 예문지(藝文志)에 기재된 소학류에 채옹(蔡邕)의 권학편(勸學篇)이 있으니 바로 이런 등의 글이었고, 주문공(朱文公 . 주희)에 이르러 제가(諸家)의 설을 일체 수집하여 비로소 일정한 글이 되었다.
마음 속에 털끝만큼의 시기도 없어야만 호남자(好男子)가 될수 있다. 나는 일찍이 여기에 힘써 왔으며,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흉금은 쾌활하여 서 말의 가시를 제거했고 / 胸海快除三斗棘
마음은 통달하여 네 거리 길과 같네 / 靈臺洞若四通逵
그러나 말로는 쉬우나 실천이 어려울까 두렵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우선 남의 조그만 선(善)이라도 좋아하는 데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나는 일찍이 예기(禮記)의 “화순이 내부에 쌓이면 영화가 외부로 발로된다.[和順積中 榮華發外]”는 말을 좋아하였고, 또 “청명이 몸에 있으면 지기가 신과 같이 된다.[淸明在躬 志氣如神]”는 말을 좋아하였고, 또 장주(莊周.莊子)의 “못같이 깊어도 천둥같이 소리치고 시동같이 앉았어도 용같이 드러난다.[淵黙雷聲 尸居龍見]”는 말을 좋아하여 벽에 써 붙이고 늘 외지 않은 적이 없었다.
도정절(陶靖節.도연명)의 시(詩)는 자연에서 나왔으니, 이것이 바로 사군자의 심사(心事)이다. 그의 시를 읽을 적에는 먼저 그 어취(語趣)의 아담하고 고결함부터 보아야 할 것이요 사가(詞家)로만 지목하지 않아야 한다. 한갓 사가로만 지목한다면 연명(淵明)이 어찌 나를 비웃지 않겠는가?
우리나라에서 천고에 뛰어날 만한 것은 유(儒)와 석(釋)의 등급을 매우 엄격하게 정해 놓은 점이다. 일찍이 듣건대, 고려 시대에는 불(佛)을 숭상하여 유와 불이 서로 혼합되어, 사대부의 집에서도 벽에 승립(僧笠) 서너 개쯤 걸려 있지 않으면 명사(名士)노릇을 할수 없었고 길에서 서로 만날 적에도 선비가 먼저 중에게 절하면 중은 꼿꼿이 서서 받았다고 하니, 아마 그 시대에는 문벌 높은집 자제들 가운데 출가(出家)한 자가 많았기 때문에 사대부가 그들을 사우(師友)로 삼으면서도 수치로 여기지 않았던것 같다. 그런데 신돈(辛旽)에 이르러서는 임금과 함께 탑(榻)에 걸터 앉았었는데, 정언(正言.李存吾)이 꾸짖어 탑에서 내려오도록 하였으니, 그때 간관(諫官)으로서의 행사는 매우 어려웠다고 하겠다.
더욱이 중이 재를 받고[僧齋], 여인을 겁탈하는[僧刦] 풍속은 너무 추악하여 차마 귀로 들을수 없었다. 그러다가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그 폐습을 엄격히 제거함으로써 문벌있는 집안에서 출가하는 것을 수치로 여겼고, 지금까지도 길에서 중이 선비를 만났을 때 안면이 있고 없음을 막론하고 중이 먼저 절하면 선비는 본체만체하게 되었으며, 또 성중(城中)에 있는 사찰을 헐어 버리고 가끔 승니(僧尼)가 성문 안에 들어올수 없는 금제를 정하여 경위(涇渭. 경은 맑고 위는 탁한 물이니 서로 걸맞지 않음을 말함)처럼 갈라 놓았으니, 정대한 처사라 하겠다.
도(道)란 사람의 일상생활 가운데 있어, 지극히 얕고 지극히 가까운 것이다. 쇄소(灑掃),응대(應對)하는 절차만큼 얕은 것이 없고 애친(愛親),경장(敬長)하는 도만큼 가까운 것이 없는데, 훌륭한 사람이 되려고 하는 자들이 거의 다 이것을 버리고 높고 큰것을 엿보아, 먼저 천도(天道)를 말하고 역리(易理)를 논하려 하니, 등급을 뛰어넘고 차례를 따르지 않는 폐단이 이러하다. 인사(人事)를 모르는데 어떻게 천사(天事)를 알겠으며 인리(人理)를 모르는데 어떻게 역리(易理)를 알겠는가?
호적계(胡籍溪.胡憲)가 부릉처사(涪陵處士) 초천수(譙天授.譙定)에게 역(易)을 배울 때, 시일이 오래도록 터득하지 못하자 천수가 “이는 당연한 일이다. 마음이 물욕에 젖어있는 까닭에 터득하지 못하는 것이니, 오직 학(學)을 닦아야만 터득하게 될 것이다.” 하였다. 선생이 그제야 한숨을 내쉬면서 “학이란 바로 물욕을 이기는[克己] 공부가 아닌가?”하고는 그때부터 한결같이 하학(下學)에 정진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그 증험이다. 학에 뜻이 있는 자는 먼저 곡례(曲禮)로써 하나하나 몸을 규제한 뒤에 점차 성현의 글을 읽어 역(易)에까지 이르러야 한다. 나도 우연히 이 말들을 기록하여 나의 부화하고 호기(好奇)하는 마음을 경계하는 바이다.
사군자(士君子)는, 말은 비록 부족하더라도 실천은 반드시 여유가 있어야 한다. 만일 말만으로 그친다면 말은 그럴 듯하지만 마음은 그렇지 못하여, 마치 모란이 꽃은 좋으나 열매가 없는 것과 같으니, 식견 있는 이가 유감으로 여긴다.
명목(名目)은 습속에 따라 달라지는 법이다. 상고시대 고양씨(高陽氏)에게 재자(才子) 여덟 사람이 있었다고 하는데, 재자라는 명목이 어찌 그리 쉬운 것인가? 수(隋),당(唐) 시대에는 시에 능한 자를 재자라 칭하였고, 장자(莊子) 도척(盜跖)편에는 “공자가 유하계(柳下季)에게 ‘선생은 금세의 재자(才子)이다’ 했다.”고 하였으니, 옛날의 재사도 세속의 장옥(場屋.과거를 보이는 곳)에나 드나드는 재사와는 다른 것이다. 진(晉)나라 왕효백(王孝伯.王恭)의 말에 “술을 실컷 마시고 이소(離騷)를 숙독하면 명사(名士)라 칭할 만하다.”는 것도 시종(侍從) 지낸 이만 명사라 칭하는 것과는 다르다. 장자(長者)라는 칭호도 그리 쉬운 것이 아닌데, 지금 시골에서 전곡(錢穀)만 많이 축적해 놓은 자를 도리어 장자라 칭하고 있다.
내가 또 아무 고을에 있는 아무를 만나서 “귀향(貴鄕)에는 어떠한 선비가 있는가?”고 물었더니 “큰 선비 두세 사람이 있다.”고 대답하였다. 내가 자신도 모르게 어깨를 으쓱하면서 “그들의 성명이 무엇이며 학업의 조예가 어떤가?”고 다급히 물었더니 “아무와 아무로서 모두 시(詩),부(賦),표(表),책(策)에 능하므로 과문(科文)을 하는데 조금도 어려움이 없다.”고 대답하였다. 나는 웃음을 터뜨리면서 “훌륭하다, 그들 선비여!” 하였다. 그가 떠난 뒤에 나는 “정(程.程顥),장(張.張載),주(朱.朱熹),여(呂.呂祖謙)같은 이가 아니고는 큰 선비라는 명칭을 감당할수 없는데, 지금 이런 명칭이 도리어 명리에나 급급하는 거자(擧子)들에게 돌아갔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세상에는 왕개보(王介甫.王安石)를 논평하는 자가 분분하지만 정확한 논평은 나오지 못하고 있다. 주자의 말에 “그의 사람됨이 기질은 비록 청개(淸介)하지만 기국(器局)이 본래 편협하고, 뜻은 비록 고원(高遠)하지만 학문은 실로 범상하며, 그 논설도 보고 들은 바를 그럴 듯하게 억측한 것뿐인데, 자신이 고족(高足)이라 내세우고 스스로 성인인 체하면서, 격물(格物),치지(致知)와 극기(克己),복례(復禮)에 종사해서 미치지 못한 바를 힘써 구하고 능하지 못한 바를 더욱 보강시킬 줄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천하의 일을 처리함에 있어 번번이 경솔하여 임의대로 하다가 이전에 실패했고, 또 고집 세어 사의(私意)에만 따르다가 이후에도 실패했다…”고 하였으니, 지금 이 논평을 보면 그의 평생이 소연히 드러난다. 노소(老蘇.蘇洵)의 변간론(辨奸論) 같은 것은 한갓 독설(毒舌)을 내포하고 사의에만 따랐을뿐 공론이 되지 못한다.
차라리 공문(孔門)의 시동(侍童)이 되어 장석(丈席) 아래에서 시중을 들지언정, 석가(釋家)의 조사(祖師)가 되어 포단(蒲團)위에 가부(跏趺)해 있는 것을 부끄러워한다. 여러 군자들에게 묻노니, 나의 견해가 어떻다고 보는가?
겸양을 과긍(誇矜)에 비하면 그 격차가 하늘과 땅 같다. 겸양하는 자는 언제나 부족함을 탄식하면서 유여한 데로 나아가고, 과긍하는 자는 유여함을 기뻐하면서 부족한 데로 물러나게 된다. 그러나 과도한 겸양이나 과도한 과긍이 다 말류(末流)의 폐단이 있는데, 겸양에 의한 폐단은 더디고 작지만 과긍에 의한 폐단은 빠르고 크다.
세속에서 벗어난 선비는 일마다 옛것을 따르려 하고, 세속에 흐른 사람은 일마다 지금을 따르려 하는데, 이는 다 과격하여 중도(中道)를 얻기 어렵다. 여기에서 옛것을 참작하고 지금을 헤아리는 좋은 방도가 얼마든지 있으니, 사군자가 중정(中正)한 학문을 하는 데에 무슨 해로움이 있겠는가? 옛날에는 엉금엉금 기어가[匐]서 조상[弔]한 사람이 있었고, 또 요즘에는 한 선비가 몸가짐이 단정하고 옛것을 무척 좋아하여, 입자(笠子)는 우리나라에서 쓸 바가 되지 못한다 하고는 버드나무 껍질을 말아 관을 만들어 쓰고 길가에 나갔다가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었다고 하니, 옛것을 따른 데의 폐단도 진실로 해괴하지만 지금만을 따르는 폐단이야 어찌 이루 다 말하겠는가?
소동파(蘇東坡.蘇軾)의 구지필기(仇池筆記)에 저승의 일들이 많이 기록되었는데 사람들이 자못 그 설에 현혹하고 있으니, 사람들의 호기심이 어찌 그리 심한지 모르겠다. 아무리 한때 붓을 놀려서 보고 들은 바를 기록한 것이라 하지만 바로 이어 의혹될 바를 변론해 놓았어야 옳은 일이다.
또한 저승에 관한 일이란, 혹 자신이 직접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면 그 허실을 분명히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전날에 내가, 다시 살아났다는 사람을 만나서 죽었을 때의 일을 물어 보았더니, 그곳에 백견(白犬)이 지키고 있고 또 총부(蔥釜)가 마련되어 있더라는 설은 너무도 허황하였다.
그러나 어리석은 백성들이 분주히 달려와서 동전(銅錢)까지 던져 주며 그 설을 듣고 있기에 내가 옆에서 웃으며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자는 천만명 가운데 하나나 있을 뿐인데 감히 제멋대로 현혹되어 제 혼자 겪었던 일을 망령되이 믿고 대중을 현혹시킨다면 어찌 옳은 일이겠는가? 불씨(佛氏)는 애(愛)와 증(憎)을 내세워 우부(愚夫)와 우부(愚婦)를 농락하고 혹은 생(生)과 사(死)를 가탁하여 세상을 현혹시킨다. 또한 방금 죽은 자에게는 아직 붙어 있는 실날 같은 기운이 풍사(風邪)에 짚여 일종의 악몽(噩夢)을 꾸는 것뿐인데, 어찌 천당이나 지옥이 있겠는가?” 하였다.
사람의 허물은 항상 스스로가 옳다고 하는 데서 더해지고 사람의 화(禍)는 항상 남을 업신여기는 데서 생긴다. 스스로가 옳다고 하면 남을 업신여기게 되고 남을 업신여기면 스스로가 옳다고 하게 된다. 이것이 서로 종(終)도 되고 시(始)도 되어 도무지 치우친 데[偏] 돌아가고 마는 것이므로, 군자는 살피고 삼가서 중도(中道)를 얻는 것을 귀히 여긴다.
사람의 사귀는 도는 매우 신중한 것인데, 처음 사귀었을 적에는 대뜸 지기(知己)라고 하다가도 사귐이 약간 성기어지면 대뜸 절교하자고 하니, 어찌 그리 경솔한지 모르겠다. 나는 여기에 항상 두려워하는 바이다.
“굴신왕복(屈伸往復)과 영허소장(盈虛消長)은 하늘의 도이니 순응할 뿐이요, 치란흥망(治亂興亡)과 선악길흉(善惡吉凶)은 사람의 도이니 닦을 뿐이다.”고 하였는데, 이 말은 내가 평소 정부(正夫.李亨祥)에게서 들었다. 옛사람의 시에,
이치의 행장에 순응하여 가고 / 順理行藏去
하늘의 분부에 따라서 온다 / 隨天分付來
고 하였으니, 이 또한 정부의 말과 은연중에 부합된다. 하늘과 땅 사이에 있는 온갖 일이 이같은 말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슬프다! 나는 세속에서 칭하는 달(達)한 자의 달한 자다운 바를 지금까지 이해하지 못하였다. 사람들은 비록 나이 70을 살았으나 숱한 세월을 잡기,음주(飮酒),여색(女色),서화(書畫), 과장(科場),세도(勢道),낮잠[晝睡],패설(稗說)에 보내었고 또 그 사이에는 질병,우환 등이 있었을 것이니, 어느 겨를에 자기 자신에 해당되는 본분의 일을 닦았겠는가? 질병과 우환은 운명이므로 어찌할수 없겠지만, 이외의 일은 누구나 다 자기 자유대로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천(伊川)의 “무위도식하는 자는 하늘과 땅 사이에 하나의 좀[蠹]이다.”는 말이 어찌 부끄럽지 않은가? 그런데 어찌 도리어 이런 사람들을 달한 자라고 하는 것인가? 달한 자들이여! 나는 그 달하였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노라.
선창야화(船窓夜話)에 “배[腹]로 시서(詩書)를 포끽(飽喫)하지 않는 것은 배고픔보다 못하며, 눈으로 선배(先輩)들을 접하지 않는 것은 소경이라 이르며, 몸이 명리(名利)를 멀리하지 않는 것은 함정에 빠진 것보다 못하고 풍도가 속기(俗氣)를 벗어나지 않는 것은 고질보다 못하다.”고 하였는데 나는 “입으로 도학을 말하지 않는 것은 벙어리보다 못하며 발로 깨끗한 천석(泉石)을 밟지 않는 것은 절름발이보다 못하며, 마음이 정직함을 좋아하지 않는 것은 악귀보다 못하며, 뜻을 조용한 산림(山林)에 두지 않는 것은 하천배보다 못하다.”고 보충하였다.
또한 양경중(楊敬仲)의 말에 “벼슬살이하는 데는 청빈한 것으로 몸의 편안함을 삼고, 글 읽는 데는 배고픈 것으로 도에 나아감을 삼고, 집에 있는 데는 일 없는 것으로 평안함을 삼고, 벗 사이에는 뜸하게 만나는 것으로 오래까지 유지함을 삼아야 한다.”고 하였는데 나는 “사람을 대하는 데는 온후(溫厚)로써 요법(要法)을 삼고, 아내를 거느리는 데는 간결하고 묵묵한 것으로 공부를 삼고, 글을 짓는 데는 상세한 것으로 의장(意匠)을 삼고, 병을 조치하는 데는 강작(强作)하는 것으로 약석(藥石)을 삼아야 한다.”고 보충하였다.
문(文)은 학문에 비하면 말(末)이며 외(外)이다. 그러므로 고금을 막론하고 문인(文人)들이란 거의가 다 부박(浮薄)하고 방자이다. 문 중에서도 시(詩)를 잘하는 사람이 더욱 심하고, 시 중에서도 과시(科詩)를 잘하는 사람이 더욱 말(末)중의 말이요 외(外)중의 외이다. 비록 형편상 어쩔수 없이 여기에 유의하게 되더라도 적당히 헤아려서 할 만한 좋은 방법이 얼마든지 있는데, 남아의 평생 사업이 전부 여기에 있다고 착각하여, 전도(顚倒)되고 도취되어 심술(心術)을 무너뜨려서는 안 된다.
아무리 좋은 말도 너무 많이 하면 듣는 사람이 싫어하여 망녕된 데로 흐르게 되는데 하물며 좋지 않은 말을 너무 많이 함이랴? 작게는 업신여김을 받게 되고 크게는 해(害)를 보게 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