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풍(年豐)이란 자는 김천(金泉)의 역노(驛奴)이다. 임진년(1592) 왜변(倭變) 때 나는 원임(原任) 이조 낭관으로서 방어종사관(防禦從事官)에 차임되어 영남(嶺南)으로 갔다. 당시는 왜적의 기세가 충천하여 수행하던 이졸(吏卒)들이 대부분 도망가 흩어졌는데, 유독 풍만 역마의 고삐를 잡고 나를 따르며 잠시도 떠나지 않았다.
하루는 들에서 노숙을 했는데 왜적이 주둔한 곳과 매우 가까웠다. 군중(軍中)이 밤에 기습을 당해 인마(人馬)가 거꾸러지고 궤멸되었는데, 풍이 급히 나를 부축해 말에 태운 덕에 유린당하지 않을 수 있었다. 또 금산(金山)의 촌사(村舍)에서 내가 일어나지 않고 누워 있었는데, 불시에 왜적이 열 걸음도 안 될 정도로 가까이 돌진해왔다. 풍이 서둘러 재촉해 말을 타고서 겨우 뒷골짜기로 숨어들자 칼을 휘두르며 추격해오는 왜적이 무수히 많이 보였으니, 이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운봉(雲峯.남원 운봉읍)에 당도해 도성(都城)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나와 동행한 장사(將士)들이 서쪽을 향하여 통곡을 하였는데, 풍도 몹시 슬프게 곡을 하였다. 삼도(三道)의 병사들과 함께 수원(水原) 경계에 진을 치고 있다가 이윽고 북쪽으로 달아났는데 왜적이 거의 등 뒤까지 다가왔건만 풍이 말을 채찍질한 덕분에 그 수렁 속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해 가을에 의주(義州)의 행재소(行在所)에 도착했다가 곧바로 어사(御史)로서 함경북도(咸鏡北道)로 달려갔다. 내가 풍에게 이르기를 “네가 고생이 심했는데 불모지(不毛地)에 까지 또 들어갈 수는 없다. 여기 머물며 내가 돌아오는 것을 기다리는 편이 낫겠다.” 하자, 풍이 “저만 혼자 뒤에 남을 수는 없습니다.”라고 하면서 함께 가겠다고 단호하게 청하였다.
이듬해인 계사년(1593) 경성에 왜적이 물러가자 풍이 비로소 하직 인사를 올리고 돌아갔는데, 집에 당도해 보니 노모는 무탈하였고 아내는 남편이 죽었다고 생각해 오래 전부터 상복을 입고 있었는데, 상봉을 하고는 귀신인 줄 알았다고 한다. 그 이듬해에 풍이 또 서울로 나를 보러 왔다가 떠나가서는 얼마 안 되어 죽었다.
저 영남(嶺南)에서 의주까지 또 의주에서 함경북도까지 몇 만 리의 험한 여정에 왜적이 우글거리는 곳을 들락거리며 위태로운 지경에 빠진 것이 수 차례였는데, 왜적이 접근하기라도 하면 풍은 하루 종일 망을 보았고 더러는 새벽까지 잠을 자지 않기도 하였으며, 늘 말에 안장을 얹어 놓고 대기하였다. 밤에 위험한 곳을 지날 때면 풍은 오른손으로는 말고삐를 붙잡고 왼손으로는 내 몸을 부축하고서 위를 쳐다봤다 아래를 내려다봤다 하면서 떨어지지 않도록 방비하였으니, 모든 주선하고 보호하는 것이 지성(至誠)에서 나와 조금도 해이한 적이 없었다.
영남에 있을 때는 그의 집이 몇 십 리밖에 안 되는 가까운 곳에 있었는데, 그 어미와 아내의 생사를 알지 못했는데도 전혀 떠날 의사가 없었다. 달아나 피할 때에 전후좌우가 모두 왜적이어서 조만간 틀림없이 죽게 되리란 것을 분명히 알면서도 시종일관 떠나지 않았고, 왕왕 식량이 떨어져 혹 하루 종일 먹지 못해 매우 기진했는데도 불평 한 마디 하지 않았다. 누군가 왜 떠나지 않느냐고 묻기라도 하면, 풍은 곧 대답하기를 “나는 떠날 수 없어서가 아니라 차마 떠나지 못하는 점이 있어서일 뿐이다.”라고 하였다.
아! 나는 풍과 평소 알던 사이도 아니고 그를 부릴 만큼 은혜나 위세가 있는 것도 아닌데 어느 날 갑자기 만나 알게 되었다. 또 풍은 미천한 하인일 뿐이어서 사군자(士君子)의 행실이 있다는 것을 아는 자도 아니고, 또 칭찬을 받으려고 가식적으로 꾸며 벼슬해서 녹을 받으려는 자도 아니다. 그런데도 이러하니 참으로 가상(嘉賞)하다. 그 당시에는 노예로서 주인을 버리고 자식으로서 어버이를 아랑곳하지 않는 자가 넘쳐나며, 관직을 맡은 신하의 경우에도 혹 구차히 목숨을 연명하려고 생쥐처럼 달아나 숨고 처자식을 연연해하여 임금을 잊고 나라를 저버리는 자도 있었다. 이들이 걸친 의관은 번듯하여 위압적이지만, 이 사람과 비교할 때 어떠한가. 연풍은 당시 나이가 스물이었는데, 사람됨이 근실하고 과묵하며 질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