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고문고사(古文故事)

개성왕씨족보 서문[開城王氏族譜序] - 신경준/여암유고3권

작성자허현|작성시간24.03.05|조회수180 목록 댓글 0

 
왕(王)을 성씨로 하는 사람은 대개 임금의 후손이다. 왕씨가 천하에 아주 성하지만 우리나라에서 고려의 후예들만 번성하지 못했다. 어떤 사람은 왕조가 바뀔 때에 대부분 보존하지 못했다고 의심하는데 이는 잘못이다. 고려의 왕은 세 형제로 왕위를 계승한 경우가 세 번이고, 또 숙질(叔姪)과 종부(從父)의 형제로 서로 계승한 경우도 있었으니, 그 직계의 자손이 성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종실(宗室) 중에서 역사서의 전기나 지지(地志)에 실린 사람이 몇 명뿐인데, 왕희순(王希順)ㆍ왕식렴(王式廉)ㆍ왕충(王冲)ㆍ왕규(王珪)ㆍ왕세경(王世慶)은 모두 태조의 소생이 아니다. 만약 ‘상(商)나라 자손은 그 수가 10만뿐이 아니네[商之孫子, 其麗不億].’라는 말처럼 많았다면 어떻게 전부 없애겠는가. 당시 공신들이 배에 태우고 나가 익사시키자고 몰래 도모한 것은 18가(家)에 불과할 뿐이다.
공정왕(恭定王.태종)이 계사년(1413)에 하교하기를 “개국(開國)하던 초기에 고려 왕실의 성씨가 보전되지 못한 것은 태조의 본뜻이 아니고 한두 대신의 계책이었다.” 하고는 그들로 하여금 편의대로 거주하게 하였다. 공순왕(恭順王.단종) 원년(1452)에 왕순례(王循禮)에게 벼슬을 내려주고 고려 왕의 제사를 받들게 하여 삼각(三恪.왕이 전조의 왕을 공경하는 일)에 견주었다. 왕씨가 그 삶을 편안하게 하지 못한 것은 겨우 20년인데 지금까지 수백 년을 지내도록 왕씨가 끝내 번성하지 못했다. 오직 동양군(東陽君)의 후손들 중에서 경기와 호남에 흩어져 사는 사람이 많아 한 권의 보첩(譜牒)을 완성하였으니 훌륭하다.
동양군은 처음에 세자로 봉해졌으나 강등되어 군(君)이 되었다가 끝내 사사(賜死)되었는데, 역사서에 “여러 소인들과 서로 결탁하여 몰래 반역할 생각을 품었다.”라고 하였다. 이미 ‘몰래 품었다[潛懷].’고 했으니, 그 행적은 드러나지 않았던 것이다. 얼마 후에 두 아들을 상서 복야(尙書僕射)로 삼고 토지와 노비를 하사하였다. 동양군의 죽음에는 억울한 것이 있었을 것인데 후손이 어찌 그리도 번성하였을까? 중국에 있는 왕씨 중에서 비간(比干)의 후예가 가장 번창하여 13대 망족(望族.명망이 있는 집안)이 되었는데, 옛사람들은 비간 부부의 죽음이 지극히 애통하였기 때문이라 하였으니, 선악의 응보에는 대개 속일 수 없는 것이 있다.
이 보첩을 두루 고찰해 보건대, 본조(本朝)에 있는 배위(配位)에는 아버지의 이름만 기록하였으나 고려에 있는 모든 11대에는 그 부조(父祖) 3대와 외조부의 성명ㆍ봉작(封爵)을 모두 실어 아주 자세하니, 가까운 조상을 소홀히 하고 먼 조상을 자세히 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고려 시대에 혼인할 때는 같은 성씨를 기피하지 않았으므로 그 앙부(卬否)의 뜻(남들은 시류에 영합하여 그리로 휩쓸려가지만, 자신만은 절개를 지키면서 의리에 따라 행동한다는 말)을 밝히고자 해서이다. 왕비(王妣) 가운데 황보씨(皇甫氏)ㆍ유씨(劉氏)ㆍ김씨(金氏)ㆍ유씨(柳氏)들은 모두 외가의 성씨를 빌린 것이다. 윗사람이 이미 이러하니 아랫사람은 따질 것도 없다. 사람의 도리가 끊어지고 하늘의 이치가 사라졌으니, 그들이 어떻게 후손을 두겠는가.
동양군의 집안은 능히 함께 목욕하는 가운데서 벗어나 대대로 지켜온 것이 아주 엄격했으니, 만복의 근원이 되기에 마땅하다. 커다란 운수는 가버렸으나 남은 경사가 없어지지 않았다. 관리 명부에 오른 사람은, 내직으로는 사인(舍人)ㆍ문학(文學)ㆍ아경(亞卿), 외직으로는 조천사(朝天使)를 담당한 사람 및 병사(兵使)나 수사(水使)를 맡은 사람과 주(州)ㆍ부(府)ㆍ현(縣)을 다스린 사람이 수두룩하니, 참으로 대단하다.
왕씨의 옛 족보는 모두 없어졌다가 중세(中世)에 금오랑(金吾郞) 세만(世萬) 보(甫)의 부자가 수집하여 완성한 것인데 미처 인쇄하지 못했다. 봉성(鳳城 구례)에 사는 왕선(王璿) 군이 이에 개탄하여 빠진 부분을 보충하고 그 뒤를 이은 다음에 재물을 내어 판각하였으니, 그 조상을 높이고 친족을 도탑게 하는 의리를 다하였다. 얼마 있다가 또 나에게 서문을 써달라고 요청하였기에 평소 열람한 데에서 얻은 것을 써서 그에게 보냈다.
번역: 전남대학교 호남학연구원ㆍ조선대학교 고전연구원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