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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고사(古文故事)

정관재(靜觀齋)의 언행을 기술하다 - 김창협/농암집26권

작성자허현|작성시간24.06.30|조회수109 목록 댓글 0

 

선생(정관재 이단상 李端相 1628~1669)은 인품이 고매하고 몸은 야위었으나 정신은 맑았으며 눈동자가 영롱하고 흉금이 넓었다. 그리하여 모난 행동을 하지 않아 사람들과 즐겁게 어울려 가까이할 수 있으면서도 기품이 절로 뛰어났다. 가정에서는 은혜와 의리가 돈독하였으니, 일찍 부친을 여의고 백형(伯兄)을 부친을 섬기듯 섬겼으며 종형제들을 친형제처럼 사랑하여 잘못이 있으면 반드시 일러 주되 언제나 숨김이 없이 다 일러 주었다. 그런데도 말씀이 매우 간절하여 받아들이기 쉬웠던 까닭에 상대방의 감정을 거스르지 않았다. 자애롭고 어질고 널리 사람을 사랑하였으며 사람을 대할 때에 진심으로 하여, 한 가지 선(善), 한 가지 유능함이라도 보면 반드시 기뻐하여 칭찬하며 오직 사람들이 그 사실을 모르지나 않을까 걱정하였다.

선생은 남을 위해 일을 처리할 때는 반드시 최선을 다하여 치밀하게 하였으며, 친족과 마을 사람들을 만나면 그가 아무리 소원하고 미천하다 해도 반드시 음식을 대접하였다. 그리고 만일 뭔가 청할 일이 있어 온 사람에게는 그 일이 따를 만한 것이든 따라서는 안 될 것이든 간에 반드시 각기 만족한 마음으로 떠나게 하였다. 이 때문에 어진 사람이든 불초한 사람이든 귀한 사람이든 천한 사람이든 모두 선생을 좋아하였다. 벗들과 사귀는 데에 있어서는 더욱 마음을 터놓고 본심을 내보여 털끝만치도 숨기거나 쌓아 두지 않고 하고 싶은 말을 남김없이 말하였는데, 벗들도 이 때문에 더욱 흠모하고 사랑하였다. 그러나 벗에게 큰 잘못이 있으면 매우 엄하게 절교하였다.

그리고 선생은 청렴함이 뛰어나 평소에 집안사람들에게 가산(家産)에 대해 묻지 않았고, 벼슬할 때에는 녹봉 이외의 수입이 전혀 없었다. 재물과 관계된 일이면 사람들이 의리를 해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일지라도 선생은 마치 더러운 오물이 몸에 붙어 있는 것처럼 달갑지 않게 여겨 반드시 거절하여 물리치고야 말았다. 그렇지 않으면 잠시도 마음이 편치 못하였으니, 그 때문에 집안사람들이 두려워하여 아무리 가난해도 감히 한 가지라도 의리가 아닌 일로 이익을 도모한 적이 없었다. 감히 그런 일을 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차마 선생의 뜻을 손상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선생은 타고난 자품이 본디 고매하였으므로 비록 만년에 강학을 통해 더욱 덕을 닦기도 했지만, 품행과 도의가 단정하고 깨끗한 것은 어려서부터 이미 그러하였다.

선생은 학문을 함에 있어 어느 한쪽만을 추구하지 않고 빠르고 쉬운 길을 찾지 않아, 천하의 글을 널리 보고 뭇 이치를 궁구하여 고명(高明)한 경지에 도달하기를 기필하면서도 도리어 정밀하고 간략한 곳으로 나아가려고 하였으니, 그 뜻이 원대하여 애당초 빨리 성취하기를 구차히 바라지 않았던 것이다. 선생은 육경(六經)으로부터 염(濂.주돈이), 낙(洛.정호ㆍ정이), 관(關.장재), 민(閩.주희)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제자서(諸子書)와 역사서에 이르기까지 보지 않은 글이 없었는데, 글 속에 푹 빠져들어 깊이 이해하면서 밤낮으로 싫증을 내지 않았다. 그러다가 마음에 맞는 대목이 나오면 읊조리는 소리가 마치 금석 악기에서 나오는 것처럼 맑고 커서 듣는 사람들의 기분을 생동하게 하였다. 선생은 성현의 가르침에 감동하여 분발하고 마음을 가다듬어 끊임없이 노력하였으니, 그러한 태도는 참으로 이른바, 앞으로 살아갈 햇수가 부족하다는 것도 모르고 열심이었다는 공자의 학문 태도와 같은 것이었다. 게다가 총명하고 영특하며 뛰어난 기억력이 그러한 뜻을 이루기에 충분하였으니,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은미한 말과 오묘한 의리를 선생은 한 번에 분명하게 이해하고서도 깊은 생각에 잠겨 음미하며 반복해 읽지 않는 경우가 없었다. 그래서 선생은 학문을 늦게 시작하여 힘을 쏟은 지가 오래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쌓인 지식이 깊고 넓으며 논설이 막힘이 없이 시원하였으니, 학문의 경지 또한 세상의 편협한 학자들이 미칠 수 없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선생은 병치레가 잦고 몸이 허약하여 괴로움을 견디며 꼿꼿이 앉아 지내지 못하고 평소에 혹 종일토록 누워 지내기도 하였다. 그러면서도 정신은 깨끗하여 혼몽하거나 게으른 경우가 없었고 사람들을 대할 때에 농담을 하면서도 속된 말은 입에 담지 않았으니, 고명한 경지에 마음을 두면서 평이한 것으로 지키고 담박한 것으로 길렀기 때문에 자연히 법도가 있었던 것이다.

선생은 논의가 사리에 맞게 잘 통하여 오만하거나 막힘이 없었으므로 시사를 근심하여 임금에게 진언하는 말이 격정적이고 절실하였다. 학자들과 대화를 나눌 때에는 반드시 그 근거를 널리 인용하고 비슷한 사례를 두루 비유하여 간혹 거침없는 말이 인성(人性)과 천명(天命)에까지 미치고도 그침이 없이 계속되기도 하였는데, 이로 인해 사람들은 간혹 선생이 겸손함이 없이 마구 말을 하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선생의 뜻은 그렇게 함으로써 학자들의 뜻을 감동시켜 깨우쳐 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 말을 들은 사람도 즐거운 마음으로 듣고 싫증을 내지 않았다.

선생은 세상에 입신양명할 뜻을 일찌감치 끊어 버렸다. 비록 그렇긴 하나 도학을 강명(講明)하고 후학을 이끌어 줄 것을 세상 사람들이 선생에게 기대하였고 학자들도 선생을 가까이하여 따랐다. 그런데 그 즈음 선생이 돌아가시고 말았으니, 만일 그렇게 되지 않았다면 장차 자신의 덕을 이루고 나아가 남을 이루어 주었을 선생의 공을 어찌 이루 다 말할 수 있었겠는가. 아, 안타깝다.

선생이 이루신 덕행과 학업의 전말은 실로 모두 사람들이 보고 들은 바이지만, 그중에서도 조정에서 용감히 물러난 한 가지 일은 더욱 당대에도 따를 자가 없다는 평을 받았다. 조정의 선비가 벼슬에 오를 줄만 알고 물러날 줄 모르는 것은 예로부터 비판받아 온 일로서 작록을 사양하는 것은 성인이 시퍼런 칼날을 밟는 일에 비유되기까지 하였으니, 그렇게 어려운 것이다. 게다가 선생은 당시에 으뜸이었던 명망을 바탕으로 재상 자리는 금방이라도 얻을 수 있었고, 옹용(雍容)하고 전아(典雅)한 의표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려 당대에 명예를 누리기에 충분하였다. 그런데도 선생은 벼슬과 명예를 끝내 내버린 채 취하지 않고 뒷걸음질을 하다가 하루아침에 결연히 떠나 버렸다. 이때 선생은 42세였다. 조정의 경대부(卿大夫)로부터 벗들, 동료에 이르기까지 모두들 앞 다투어 선생을 만류하려 하였으나 되지 않았으니, 옛날 대용(大勇)으로 일컬어졌던 사람이라 해도 어찌 이보다 더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선생에게는 이보다 더 위대한 점이 있었다. 도(道)에 들어가는 것을 어렵게 하는 요인으로는 문사(文詞)에 장애를 받는 것이 이록(利祿)의 유혹을 받는 것보다 더 심각하다. 세상의 고명한 문학가들은 대체로 다 스스로 그 능력을 기뻐하며 성인의 학문을 연구하려 하지 않는다. 간혹 뜻은 있다 해도 자신의 장기 때문에 바빠서 끝내 도에 깊이 들어가지는 못한다. 그런데 선생은 대대로 문장가를 배출한 집안에서 나고 자라 문예가 뛰어났으며 시를 짓는 데에 더욱 장기가 있어 아름다운 성조(聲調)가 사람들을 감동시켰는데도 만년에 시 짓기를 중단하고 말하기를, “나는 한가로운 언어를 좋아하지 않는다.” 하였다. 그리고 문(文)을 지을 때에도 붓 가는 대로 그대로 쓰고 조금도 수식하거나 옛글을 모방하려 하지 않았다. 혹자가 조금 수식을 해 보라고 고하면 선생은, “나는 지금 학문에 힘을 쏟는 중이라 그런 일을 할 겨를이 없다.” 하였다. 이는 곧 선생이 사욕을 다스리고 기질을 변화하여 한결같은 뜻으로 도를 추구했던 것으로서 그 용맹함은 또 작록을 사양하는 일보다 뛰어난 것이다. 비록 그렇긴 하나 사리를 통달한 식견으로 내외(內外), 주객(主客)의 구분을 잘 살피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겠는가. 아, 선생은 도에 대한 조예 또한 높았던 것이니, 덕을 향상시키고 학업을 닦는 노력이 나날이 깊어졌더라면 장차 선생의 뜻에 하고자 했던 것을 다 이루고야 말았을 것이다.

기억하건대, 하루는 나 창협이 선생을 모시고 앉아 있었다. 선생은 일찍이 편차(編次)하신 책들을 꺼내 보이면서 논저(論著)하고 싶은 것들을 일일이 말해 주었는데, 그러면서 “앞으로 내가 수십 년을 더 살 수만 있다면 내 뜻을 다 이룰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아, 그것이 어찌 책뿐이었겠는가. 선생은 이 말씀을 하고 나서 겨우 1, 2년 뒤에 별세하였으니, 평소에 하고 싶었던 것 중에 10분지 2, 3도 이루지 못한 것이다. 나 창협은 지금도 이를 생각하면 늘 감개한 눈물이 흐르곤 한다.

인하여 스스로 생각건대, 우매한 나는 일찍 선생의 사랑을 받아 외람되이 가숙(家塾)에 거처한 것이 모두 5년이었는데도 선생의 덕을 깊이 살피지 못하고 은미한 말씀과 깊은 논의도 유도해 내지 못하였으며 한두 가지 들은 것도 모두 나날이 잊혀져 가는 실정이다. 그 결과 오늘에 와서 비록 선생이 남긴 말씀을 되짚어 보며 배운 것을 존중하고 아는 것을 실천해 보려 하나 그럴 길이 없으니, 내심 부끄럽고 한스러우며 통렬히 후회가 된다.

평소에 보아 온 선생의 대체적인 언행을 대략 기록하여 문인 제자로서의 책임을 때울 생각이었으나 행장, 묘지문 등의 글은 이미 다 갖춰져 있어 다시 쓸 수는 없었다. 그러나 선생을 존모하는 마음에 끝내 잠자코 있을 수는 없어 감히 언행에 관한 큰 줄거리를 대략 기록하여 이와 같이 주제넘는 논의를 부치는 것이니, 행장과 묘지문 등의 글 내용 이외의 것을 밝혔다고는 생각지 않고 다만 구구한 마음을 펴고자 했을 뿐이다. 경신년(1680) 정월 일에 문인(門人) 안동 김창협이 삼가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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