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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고사(古文故事)

갑오년(1894) 봄의 하재일기(荷齋日記)

작성자허현|작성시간14.03.24|조회수143 목록 댓글 0

 

조선말 궁궐과 관청에 그릇,자기를 만들어 납품하고 값을 받았던 공인(貢人. 납품업자) 지규식(池圭植)의 일기이다. 지금부터 120년전 갑오년(1894) 봄 두달(음력 2-3월)의 일기를 살펴본다. 당시 상공(商工)에 종사하는 사람은 먹고 살기에는 문제가 없었던것으로 보인다. 고전번역원 역문을 편집,전재함.

 

0201. 어머님께서 문구(文龜) 혼사 때문에 양주(楊州) 가자동(加子洞) 이 선달 집에 행차하셨다.

0202. 이 생원 학산(鶴汕)이 올라왔다. 아이들이 독서를 시작하였다.

0203. 사제(舍弟)를 강원감영[東營]으로 보내어 양구(楊口) 백토가굴(白土加掘) 공사와 염오위장(廉五衛將),조수학에게 서찰을 전인하여 보냈다.

0204. 어머니가 돌아오셨다. “규수는 매우 아름다우나 아직 시원한 승낙은 듣지 못하였다. 뒤에 와서 보겠다고 하였다.”라고 하셨다. 춘헌에 가서 정육 5냥 어치를 사 주고 잠시 정담을 나누고 돌아왔다.

0205. 본읍에서 또 사람을 보내어 와서 계문서와 산통 알을 독촉하므로 할 수 없이 내주었다.

0206. 연식(演植)이 동영에서 돌아왔다. 염 오위장의 편지를 보니 “최종민(崔宗珉) 상납 조는 동영으로 관문(關文)을 보내면 마땅히 체포하여 가두고 일족에게 추징하겠다.”고 하였다. 포목전의 현판을 썼다. 진복(鎭福)이 상경하는 편에 북관(北關)의 지난 섣달 공사를 부송하였다.

0207. 한(韓)이 북관에서 돌아왔다. 색리(色吏) 얻기를 도모했다고 하면서 갖가지로 악독한 성미를 부리니 대단히 통탄스럽다.

0208. 춘헌이 농월(弄月)과 술을 가지고 찾아왔다. 내 자리 오른편에 왜철쭉 화분 하나가 있는데 바야흐로 활짝 피었다. 이 꽃을 구경하러 왔다고 하였다. 그래서 두어 잔을 기울이고 노래를 부르며 서로 권하였다. 밤이 깊어서 돌려보냈다.

0209. 산통계 문서를 도로 내주었다. 다시 침책하지 말도록 관문을 보내라고 양근에서 공사(公事)가 도착하였다. 이덕용(李德用)이 강화에서 돌아왔다. 밤에 춘헌에 가서 한 잔 마시고 서로 작별하고 돌아왔다.

0210. 경빈이 서울에서 내려왔다.

0211. 서울 모교(毛橋) 식주인(食主人)집에 있는 김주경(金周京)이 내방하였다. 광주 노곡(老谷)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방문했다고 하였다. 저녁을 장만하여 대접하였다. 필사(筆師) 황 서방이 남성에서 내려왔다. 박정인 친구의 편지를 보니 혼득(婚得)은 기한이 되면 빌리겠다고 하였다.

0213. 동민을 일제히 부역(赴役)시켜 각 역소(役所)에 쌓아 놓은 모래를 제거하게 하였다. 금석계(金石稧) 계회에서 행수(行首) 직임을 교체하였다. 새로 임명된 정현도가 술과 밥을 장만하여 소당(素堂)에 올라가서 제원(諸員)들과 함께 놀고 석양에 내려왔다.

0214. 정육 5냥 어치를 춘헌에게 얻어 주었다. 밤에 춘헌에 가서 정담을 나누고 돌아왔다.

0215. 본읍에서 교졸(校卒)이 내려왔다. 전령이 있어 보니 “공소 통계의 일로 순영 제칙(題飭)을 인하여 통수(統首)를 잡아 가두라.”고 하였다. 할수없이 김순기를 대신 본읍으로 보내게 하고, 한편으로 사유를 갖추어 공당께 급히 고하고 또한 김만원과 김 좌랑에게 편지하였다. 기영(畿營)에 보낼 관문 초고를 써서 보냈다. 밤에 춘헌에 이르니 콧병 때문에 어떤 영남(嶺南) 의원이 구전단(九轉丹)을 지어서 먹고 바르라고 했다는데, 아픔을 견디지 못하여 눕지도 못하고 앉지도 못하였다. 머리가 아프고 가래를 토하여 거의 보존하기 어려운 상태에 이르러서 보기에 매우 민망하였다. 따뜻한 물로 씻기고 먹였으나 여전히 효험이 없으니 매우 괴이하다.

0217. 조애계(助哀稧)에서 봄에 징수한 돈 3,834냥을 공방에서 5푼변으로 도로 쓰고 표를 고쳤다. 포목전에서 현판연(懸板宴)에 기악(妓樂)과 창부(唱夫)를 갖추어 온종일 놀며 즐겼다.

0218. 오늘은 재구가 전안(奠雁)하는 날이다. 비가 계속 멈추지 않아서 할수 없이 비를 무릅쓰고 길을 떠났는데, 엄현(奄峴)에 이르니 비가 조금 멈추었다. 남성으로 들어가서 곧바로 친구 박정인 집에 이르러 안부인사를 나눈 뒤에 장복(章服)을 갖추어 신부집으로 가서 전안하였다. 이때에 비낀 틈으로 햇빛이 비추니 매우 상쾌하였다. 밤에 정인과 이야기하고 파루(罷漏)가 되어 잠자리에 들었다.

0219. 아침을 먹은 뒤 영문(營門)으로 들어가 김백선(金白先) 이방(吏房)을 만나 기명값과 수토대미(水土代米)의 일을 이야기하여 21일 표(標)를 받아 가지고 왔다. 돌아서 필원(必源) 집으로 가서 장모님을 뵙고 바로 인사하고 물러 나왔다. 정인 집으로 돌아와 행장을 재촉하였으나 자연히 지체되었다. 점심을 먹고 출발하여 저녁이 되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가마삯 36냥을 선돈 주었다.

0220. 포목계 모임에 참석하였다. 도중(都中)에서 유재(遺財) 마련하는 일을 논의하여 각원(各員)이 자기 뜻대로 쓰기로 하였다. 내가 20냥을 내고 연식,영인은 각각 15냥씩 내어 모두 50냥을 추렴하여 거두었다.

0221. 장연수(張延守) 상경 편에 동네 환전(換錢) 600냥 표를 써서 보냈다. 또 통계 일로 주헌에게 편지하였다.

0222. 경빈이 빚 얻는 일로 무수동(無愁洞) 김은산(金殷山) 댁에 갔다가 점심때가 가까워서 돌아왔다. 나는 춘헌에 가서 정담을 나누고 돌아왔다.

0224. 자부가 우귀(于歸)하는 날이다. 온종일 잔치하고 밤이 깊어서 파하였다.

0225. 산성으로 안 서방과 하인들을 올려 보내고 행하전(行下錢) 55냥을 썼다. 무수동에 가서 김은산을 뵙고 도중(都中) 수표를 바치고 1만 냥을 빚 얻었다. 지석(誌石) 4편과 합(盒)을 아울러 100냥에 값을 결정해 바치고 해가 저물어서 돌아왔다. 익준 편지를 보니 북관 일은 동영으로 다시 관문을 보내고, 안협(安峽) 상납 자문[尺文]을 작성해 보내라고 하였다.

0226. 유순보(劉順甫) 상경 편에 안협 자문을 써서 보내고, 동영 관문은 영아(榮兒)에게 전인하여 보내고 노자 20냥을 주었다.

0227. 함치구(咸致九)에게 먼저 환전(換錢) 1,500냥을 잡아 썼는데, 환간(換簡)을 써서 서울 경빈에게 보냈다. 춘헌네 건넛방을 도배하므로 백지 1축을 도련(刀鍊)하여 내려보냈다.

0228. 사제를 보내어 미라동(尾羅洞)에 가서 성묘하게 하였다. 돈 2,450냥을 이창배(李昌培)가 서울에서 받아왔다.

0229. 춘헌네 건넛방을 도배, 장판하였다. 밤이 깊도록 정담을 나누고 닭이 운 뒤에 돌아왔다. 소 1마리를 390냥에 샀다.

0230. 연식(演植)이 돌아왔다. 진상 지체의 일로 본원 하례(下隷) 2명이 패자(牌子)를 가지고 와서 공임(貢任)을 수색하여 잡아갔다.

0301. 소를 사서 정치삼(鄭治三)에게 맡겨 두었는데 소가 해산하여 또 암송아지를 낳았다. 본원 사령에게 차사예채(差使例債) 30냥과 노자 24냥을 마련해 주었으나, 변주헌이 어제 내려와서 오늘 또 잡혀갔다. 진상 기명을 모두 결복하여 11바리를 포구로 내갔다. 이천 제천실(提川室)이 밤에 춘헌에 이르러서 반가워하며 손을 잡았다. 익준이 서울에서 내려왔다. 동영(東營)의 최종민 족징(族徵)에 관한 공문을 김유석을 시켜 전인하여 보내라고 염 오위장에게 편지하고 가아(家兒)에게 내일 새벽에 길을 떠나게 하였다.

0302. 차양(遮陽) 판자 일을 시작하였다. 춘헌에 가서 정담을 나누고 돌아왔다.

0303. 돈 200냥을 윤태화(尹太和)가 5푼변으로 꾸어 가고, 200냥은 김응남(金應男)이 5푼변으로 꾸어갔다. 밤에 춘헌에 가서 정담을 나누고 돌아왔다. 영아가 동영에서 돌아왔다. 염령(廉令) 편지를 보니 북관 일은 별로 새로운 소식이 없다.

0304. 정육 5냥과 국수 5냥 어치를 사서 춘헌과 함께 먹고 정담을 나누고 돌아왔다. 저녁에 춘헌에 가서 돈 120냥을 5푼변으로 빚 얻어 와 공소에 들여 썼다. 의장(衣帳)이 서울에서 내려와 춘헌에게 보냈다.

0305. 차양 4부(部) 공사를 마쳤다.

0306. 소나무 평상(平床) 2좌(坐)를 만들어 왔다. 허득용이 조(租) 9석을 공방에 맡겨 두었다. 함동기(咸東基)를 상림(桑林) 신씨(申氏) 댁으로 보내어 채전에 관하여 말하고, 나는 봄옷으로 갈아입고 밤에 이인(伊人)을 방문하여 잠시 정담을 나누고 돌아왔다.

0309. 나는 서울 여행을 떠났다. 익준과 더불어 우천으로 나가 배를 타고 광호(廣湖)에 이르러 배에서 내렸다. 걸어서 이현(梨峴) 박광혁(朴光赫) 가게에 들어가니 돈 100냥을 봉상하여 조창식에게 맡겨두고 곧바로 순화궁(順和宮)에 이르렀다. 길가에서 마침 최명극(崔明克)을 만나 두어 마디 말을 주고받았다. 모교(毛橋) 주인집으로 돌아와서 동료와 이웃 사람을 만나 서로 이야기하였다.

0310. 공당께서 민궁(閔宮) 면봉(緬奉) 때문에 쌍령리(雙嶺里)에 행차하여 있지 않으니 호소할 곳이 없다. 경빈과 익준은 그래서 바로 출발하여 내려갔다. 안협 조 3천 냥 속에서 500냥 표는 익준이 가져가고 2,500냥 표는 내가 가지고 왔다.

0311. 내가 반영식(潘永植)을 찾아가서 이야기한 후에 북읍 백토에 관한 일은 다시 간섭하지 않을 것이니, 걱정하지 말고 거행하라고 좋게 말하니 반이 매우 좋아하며 고맙다고 사례하였다. 그러므로 가굴전(加掘錢)중 1천 냥을 먼저 봉상하였다. 민상순(閔尙順)에게서 1,800냥을 4푼 선변(先邊)으로 빚을 얻고, 경빈이 먼저 쓰고 내려간 1,200냥을 합하여 3천냥 표를 작성하여 올려 보냈다. 함화경(咸化京)이 편지를 보냈다. 이르기를 “돈 750냥을 미리 공소에 들였으니 도착하는 대로 즉시 내어 주라.”고 하고 한보여(韓甫如)와 신연수(申延守)가 전인하여 왔다. 진위(眞僞)는 알 수 없으나 옷감이 시급하다고 하므로 171냥 5전어치를 선전(縇廛)에서 흥정하여 얻어 주고, 돈 100냥을 신연수가 가져갔다.

0312. 아침을 먹고 행장을 꾸려 종로 직일방(直一房)으로 나가서 고마(雇馬) 5필을 얻어 돈 5천 냥을 뚝섬[纛島]으로 내 보냈다. 주헌과 동행하고, 표 선달 문관(文官)도 동행하였는데, 뚝섬[纛島]에 이르니 올라가는 배는 없고 해는 벌써 정오가 지났다. 그래서 주헌에게 배를 얻어서 거느리고 오라고 부탁하고 표 선달 순석(順石)과 출발하여 창우(倉隅)에 이르니 해가 저물었다. 오(吳)가에게 노를 젓게 하여 우천에 이르니 밤이 조금 깊었다. 집에 이르러 저녁을 먹고 흥정한 춘헌 물건을 가지고 즉시 가서 전해 주고 잠시 정담을 나누고 돌아왔다.

0313. 익준이 쌍령리에서 돌아왔는데 서울 김주경(金周卿)도 함께 왔다.

0314. 변주헌이 뚝섬[纛島]에서 돈 실은 배[錢船]를 거느리고 황혼 무렵에 도착하였다.

0316. 동네 고청신사(高請神祀)의 예식을 미리 익히는 날이다. 각처에서 구경꾼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뒷산 언덕 연로 좌우에는 음식 장사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고 청춘 남녀들이 시끄럽게 떠들어 대니 과연 장관이라고 이를 만하다. 나는 동료와 함께 뒷산 언덕에 올라가 자리를 깔고 술과 음식을 마련하여 실컷 먹고 취하며 구경하고 석양에 내려왔다. 저녁을 먹고 춘헌에 가서 정담을 나누는데 공소에서 나에게 들어오라고 청하였다. 기생과 악사가 모두 왔는데 노래와 춤추는 것을 구경하고 밤이 깊어서 자리를 파하였다.

0317. 6장군을 모시고 양류가(楊柳街) 사정(射亭)으로 나가 팔방을 순회한 후에 제사에 참알(參謁)하고 즉시 공소로 들어와 종일 혼자 누워 있었다. 저녁을 먹은 뒤 화포(火炮)를 구경하고 돌아와 잤다.

0318. 춘헌이 병이 나서 신음하였다. 이웃집에서 나에게 20냥을 꾸어 달라고 청하여 허락해 주었다. 밤이 깊어서 제사를 행하였다.

0319. 통계(筒契) 계알[籌卵]을 새로 만들어 다시 쓰고 통도 다시 장만하였다. 최명극의 일로 염 오위장에게 편지를 썼다.

0320. 통계를 정월 30일 조와 이달 조를 아울러 하였다. 밤이 깊어서 제사를 행하였다.

0321. 진잠(珍岑) 신승지 영감이 올라와서 나에게 돈을 1천 냥 한도에서 얻어 달라고 편지로 부탁하니 대단히 답답하고 한탄스럽다.

0322. 박 판서 대감이 꽃구경하려고 공소에 들어오셨다. 술과 음식을 마련해 올리니 석양에 댁으로 돌아갔다. 밤에 춘헌에 이르러 정담을 나누고 돌아왔다.

0323. 박 판서 대감과 신 승지 영감이 공소로 들어와 술을 가지고 꽃구경하고 오후에 댁으로 돌아갔다.

0324. 서울 기전(器廛) 신 오위장에게 300냥을 조근수에게 마련해 주라고 편지를 써서 보내고, 표문관에게 200냥을 근수에게 마련해 주라고 또한 부탁하였다. 조근수에게서 일찍이 꾸어 쓴 돈이 240냥이 있으니, 지금 두 곳에서 500냥을 베어 주면 260냥을 가용(加用)한 것이다. 춘헌이 굴뚝을 고치는 데 정육 5냥 어치를 얻어 주었다.

0325. 춘헌이 굴뚝을 고쳤다. 매화화분 2개를 정권이 찾아갔다.

0326. 신 승지가 돈 100냥을 빌려 갔는데, 김수철(金守哲)에게 가져가게 하였다.

0327. 산성 재종매(再從妹)가 올라갔다. 춘헌이 도배하고 주련(柱聯)을 써서 벽에 붙이고 옥호(屋號)를 붙였다.

0329. 원동(園洞) 민응식(應植) 판서는 지금 총제영(總制營) 제거(提擧)이다. 여주 천양(天陽) 고향집에서 상경하는 길에 배를 우천 강나루에 정박하고 병정과 하인을 많이 보내어 갑자기 세소(稅所)로 들이닥쳐서 세속(稅屬) 3명을 잡아내어 마구 때리고 세청(稅廳)을 파괴하고 잡아갔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동료를 불러 급히 가서 살펴보니 이미 집을 부수고 사람을 붙잡아 내려간 뒤라 손을 쓸수 없었다. 경탄(驚歎)을 금할 수 없다. 즉시 사유를 갖추어 급히 공사당상께 보고하고 김익준에게 서울로 올라가게 하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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