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朝鮮)은 중국 구역 밖에 있는 나라인데, 그 풍속이 예절을 알고 시(詩)를 알므로 다른 나라와는 다르니 당(唐)나라 때부터 지금까지 채풍(採風. 詩歌를 채취함)한 자들이 취함이 있었다. 병술년(1766) 봄에 내가 북경(北京)에 왔을 때 마침 홍군(洪君) 담헌이 입공(入貢)하러온 사신을 따라 왔었다. 그는 대개 중국의 성인(聖人)의 교화를 사모하여 중국의 기사(奇士)를 한 벗으로 얻으려고 수천 리 걸어오는 것을 거리끼지 아니하고 와서 내 이름을 듣고는 급히 나를 찾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주객(主客)이 붓으로써 종론극담(縱論劇譚)을 하였으며, 아울러 도의(道義)로써 군자(君子)의 교분을 서로 힘써 이루었으니, 아! 이 또한 기이한 일이로다! 홍군은 글에 대해 박문강기(博聞强記)하여 어느 것이든 규찰해 보지 아니한 것이 없고 율력(律曆),전진(戰陣)의 법이라든지 염락관민(濂洛關閩. 濂은 周敦頤,洛은 程顥와 程頤, 關은 張載, 閩은 朱熹가 살던 지명 곧 도학의 연원을 말함)의 종지(宗旨)라든지 모두 마음에 구명(究明)하지 아니함이 없었으며, 또 시문(詩文)에서부터 기술(技術)에 이르기까지 능숙하지 아니한 것이 없었다. 그와 더불어 같이 있어보면 집고순덕(執古醇德)하여 정말 유자(儒者)의 풍채가 있었으니, 이런 사람은 중국에서도 쉽게 볼 수 없는 일인데, 의외로 조선(朝鮮)이라는 먼 곳에서 얻었도다. 언젠가 하루는 나에게 하는 말이,
“조선의 서울에 살던 이 사람이 마음에 자그마한 지상(志尙)을 품고 청주(淸州)의 수촌(壽村)에 퇴거(退居)하여 농사짓는 사람들과 더불어 놀고 있다. 여기에는 집이 몇 채 있는데, 각(閣)이 있고 누(樓)가 있고 늪이 있고 다리가 있으니, 늪에는 배가 있어 띄울 만하며 나무 그늘에는 말[馬]이 있어 반환(盤桓)하기에 좋다. 그리고 이 집의 방에 들어가면 옥형(玉衡)이라는 혼천의(渾天儀. 천체를 관측하는 기구)가 있고, 시간을 측정하는 후종(候鐘)이 있고 거문고가 있으며, 또 장차 어떤 일을 하려 할 때는 시초(蓍草. 점칠 때 쓰는 筮竹)가 있어 점(占)을 칠 수 있으며 밭을 갈든지 글을 읽든지 하다가 여가가 있으면 활이 있어 쏠 만하니 지극한 낙(樂)이 이 속에 있어서 다른 아무것도 원하지 아니한다. 미호(渼湖)선생이란 분이 계시는데 내 스승이시다. 이 집을 이름지어 담헌(湛軒)이라고 하여 액(額)을 하여 주시기에 나는 다시 이것을 취해 자(字)로 삼았으니, 그대는 나를 위해 기문(記文)을 지어다오.”
하였었다. 나는 이미 담헌을 높이 보았고 또 그곳 못이나 집들이 있는 승지(勝地)에 대해 말을 듣고 마음으로 한 번 가서 그 아취(雅趣)를 챙겨보려 하였는데, 멀리 만리 밖에 있기 때문에 결국 가보지 못하였다. 옛날에 어떤 외국공사(外國貢使)가 예고사(倪高士. 예씨의 高士)가 지어놓은 청비각(淸閟閣)을 듣고 찾아 갔는데, 보여주지 아니하여 먼 데서 절만 하고 탄식하면서 돌아갔다 한다. 나는 지금 그와 거의 서로 비슷하나(가서 보지 못한 것과 가지 못해서 보지 못한 것) 또한 서로 반대됨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집을 이름지은 뜻으로써 보더라도 알수 있다. 군자의 도(道)는 마음에는 잡됨이 없고 물(物)에는 탐심이 없는 것이다. 그는 몸이 청명(淸明)하고 집이 허백(虛白)하였으니 거의 담(湛)이란 글자의 말에 합당함이 있다. 그리고 홍군이 매양 나와 같이 성명(性命)의 학(學)을 강론함에 그 말이 크게 순(醇)하여 대개 담(湛)이란 글자의 뜻에 적합함을 얻음이 있다. 내가 비록 글을 할 줄을 모르나 앞으로 군자의 도에 힘써 양우(良友)에게 저버림이 없게 하고 아울러 홍군의 문행(文行)을 널리 중국의 선비들에게 보이려고 하는데, 어찌 감히 뻣뻣하고 끝이 무지러진 붓이라고 해서 굳이 사양하리오. 다만 미호 선생이 내 말을 듣고서 어떻게 생각할지 미안할 따름이다. (끝)
담헌기(湛軒記) - 반정균(潘庭筠)/홍대용문집 담헌서 외집부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