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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고사(古文故事)

성언(醒言) - 성대중(成大中)/청성잡기(靑城雜記)4권

작성자허현|작성시간14.06.26|조회수229 목록 댓글 0

 

성언(醒言)이란 사람을 깨우치는 말이란 뜻인데 성대중(成大中)의 《청성잡기(靑城雜記)》에는 인물평 및 일화,사론(史論),필기(筆記),한문단편 등 다양한 성언(醒言)들이 수록되어 있다. 아래는 《청성잡기》 3-5권중 4권의 내용이다.

 

가까이해선 안 될 사람들

영천(永川)에 사는 백성이 그 자식에게 훈계하기를, “양반과 사귀지 마라. 꼭 곤장 맞을 일이 생긴다. 관리와 사귀지 마라. 반드시 고된 노역에 끌려가게 된다. 중들과 사귀지 마라. 틀림없이 젊은 아내를 잃게 된다.” 하였으니, 영남 사람들이 명언이라 하였다. 이와 똑같은 식으로 자식들을 훈계할 수 있다. “부자와 사귀지 마라. 꼭 네 재산을 잃게 된다. 권력 있는 자와 사귀지 마라. 반드시 네 몸을 망치게 된다. 술사(術士)와 사귀지 마라. 틀림없이 네 집안을 망치게 된다.”

 

서리

초목을 시들어 죽게 하는 것은 서리이다. 그러나 시들어 죽게 하는 것은 거둬들임이니, 생물이 어찌 영원토록 왕성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서리는 초목에만 내리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도 내린다. 염병은 일반 백성에게 내리는 서리이고, 국문하여 옥사하는 일은 사대부에게 내리는 서리이며, 흉년이 드는 것은 나라의 절반에 내리는 서리이고, 전란(戰亂)은 온 나라에 내리는 서리이다. 사람에게 내리는 서리는 거둬들임 뿐만 아니라 하늘이 내리는 경고이기도 한데, 교만하고 방탕한 자는 이를 재촉한다.

 

만물과 사람의 공존

만물이 제때를 만난 것이 사람에게는 피해가 된다. 벼룩이나 전갈이 사람을 물어뜯을 때 어찌 사람의 괴로움을 알겠는가. 그저 제때를 만난 것뿐이니 맹수는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러므로 잡초가 때를 만나는 것은 곡식의 해악이고, 참새나 쥐가 때를 만나는 것은 창고의 해악이며, 소인이 때를 만나는 것은 군자의 해악이고, 오랑캐가 때를 만나는 것은 중국의 해악이다. 이런 식으로 따져 나가면 해가 되는 것들을 일일이 헤아릴 수 있겠는가.

하늘은 이들을 모두 같이 길러 주는데 성인이 적절하게 조정하여 너무 성한 것을 억제해서 그 해악을 제거한다. 뿐만 아니라 그것들이 사람에게 쓰일 수 있도록 유도하였다. 허나 이는 그 본성에는 어긋나는 것이니, 소의 코를 뚫고 말에 굴레를 씌워 옭아매며 새매에 줄을 매달아 사냥하는 것이 어찌 그들의 본성에 맞는 일이겠는가.

 

군자의 유감과 여한

군자가 평생토록 유감이 있으니 봉록이 부모 생전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군자가 종신토록 여한이 있으니 도가 이루어졌는데도 이를 전수하지 못하는 것이다.

 

명만큼 산다

고양이는 쥐를 잡아 가지고 놀지만 간혹 놓치기도 하고, 사람은 호랑이에게 물려 갔다가 살아오는 경우가 있다. 혹자는 말한다.

“영포(英布.黥布)도 장평(長平)에서 구덩이에 생매장당하였으나 시체 더미 속에 숨어 죽음을 면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몸을 숨길 만한 곳이 있는 것이다.

연안 이씨의 선조가 오랑캐의 포로가 되어 막 처형당하려는 참에 오랑캐 장수가 쪼그리고 앉아 음낭을 늘어뜨리고 있는 것을 보고는 잽싸게 잡아당겨 그를 쓰러뜨리고는 검을 빼앗아 목을 잘랐으니, 이것이 바로 호랑이한테 물려 갔다가 살아 온 경우이다. 천명이 아직 다하지 않았다면 다른 사람이 참으로 그를 죽일 수 없는 것이다. 맹자가 “운명을 아는 자는 높고 위태로운 담장 아래에 서지 않는다.”라고 한 것은 일반적인 경우를 말한 것이다.

풍릉군(豊陵君) 조문명(趙文命)이 귀해지기 전에 남별궁(南別宮)을 지나가는데 홍살문이 갑자기 무너져 내렸다. 기둥에 깔려 수레와 말이 대번에 박살났으나 풍릉군이 있는 곳은 괜찮았다. 또 한번은 금강산에 가서 구룡연(九龍淵)을 구경하다가 발을 헛디뎌 못 속으로 빠지고 말았는데, 물이 끝도 없이 깊어 종자들은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그는 조금 있다가 솟아올랐는데 마치 뭔가 밀어 주는 물건이 있는 듯이 털끝 하나 다치지 않았으니, 어찌 운명이 아니겠는가.

 

옛 유학과 지금의 유학

학문의 도는 음식 중에 제일 좋은 고기와 같으니, 무당이나 의술, 갖가지 기예들이 무엇인들 학문이 아니겠는가마는 다만 유학이 그 으뜸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고대에 배웠던 것은 예(禮), 악(樂), 사(射), 어(御), 서(書), 수(數)로 모두 실용적인 것들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예는 통례원(通禮院)의 관리에게, 악은 장악원(掌樂院)의 악공에게, 활쏘기는 훈련원(訓鍊院)의 한량에게, 말몰이는 사복시(司僕寺)의 이마(理馬)에게, 글씨는 사자관(寫字官)에게, 산수는 호조의 계사(計士)에게 맡겨 학자들은 관계하지 않는다. 그리고는 공자께서 드물게 말씀하신 성(性), 명(命), 천도(天道)를 표방하며 이를 도학(道學)이라 부르면서 세상에 제창한다. 그리하여 어린아이들도 모두 이를 잘 말하나 실용적인 것은 마치 쓸모없는 물건처럼 보니, 삼대의 풍속을 어떻게 다시 볼 수 있겠는가.

 

그러고도 군자인가

인자(仁者)는 자신이 서고자 하면 남을 세워 주고 자신이 영달하고자 하면 남을 영달하게 한다. 요즘 군자는 이와 달라서 자기가 원하는 것을 남에게는 반대로 한다. 자기가 서고자 하면 남이 서는 것을 저지하고 자기가 영달하고자 하면 남의 영달을 막아서 남을 해칠 뿐만 아니라 천도까지 어긴다. 그리하여 사람과 하늘이 모두 그를 미워하니 어찌 패망으로 끝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무릇 천도는 모든 것을 이루어 준다. 그러므로 《주역(周易)》에 이르기를, “천지의 대덕은 낳아 주는 것이다.” 하였다. 용, 뱀, 호랑이, 표범이 모두 하늘 아래 함께 살게 하였으니 하물며 사람이겠는가. 이것을 구분하여 나누는 것은 사람이다. 그러나 이는 좋은 것을 드러내고 나쁜 것을 내치며 어진 이를 숭상하고 사악한 이를 막는 것에 불과하니, 자신의 욕심을 키우고 남의 재능을 가로막는 것이 어찌 군자의 일이겠는가.

 

양반에게 소작을 주지 않는 이유

영남에서 소작을 주는 지주들은 ‘세 가지 주지 말 것〔三不給〕’으로 서로를 경계하니, 노비에게 주지 말 것, 친구에게 주지 말 것, 흑립(黑笠)에게 주지 말 것이 그것이다.

우리나라 풍속에 양반은 모두 흑립을 쓰고 일반 백성은 대체로 전립(氈笠)을 쓰므로 흑립은 양반을 지칭한다. 양반이라는 호칭은 고려 때부터 쓰이기 시작했는데 포은(圃隱.정몽주)의 서신에 나오는 ‘진짜 양반〔眞兩班〕’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양반이라고 하는 것은 동반(東班.文班)과 서반(西班.武班)의 정직(正職)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에 붙은 이름인데 지금의 양반은 관직이 있건 없건 통틀어 양반이라고 하니, 양반의 자손이라고 하는 것은 괜찮으나 양반이라고 말하는 것은 사실 참람한 일이다.

지금은 양반이 온 나라에 깔려 있으니, 음직도 조상의 공업(功業)도 다 끝나고 토지도 노예도 없으며 문(文)도 무(武)도 익히지 않아 모습과 언동이 평민만도 못한 주제에 그래도 조상의 훌륭한 유업을 들먹이며 남에게 사역당하는 것을 부끄러워한다. 한갓 남의 땅을 움켜쥐고서 이름만 소작일 뿐이지 자기는 쟁기질도 호미질도 제대로 않고 평민들을 부리려 드니, 평민들이 그 말을 듣겠는가. 이 때문에 농사일에 번번이 때를 놓쳐 땅 주인만 피해를 입게 되며, 땅 주인이 조금이라도 책망하면 마구 욕을 해대고 그나마 소출도 다 주지 않는다. 사정이 이러하니 땅 주인이 땅을 빼앗지 않을 수 없고, 빼앗을 수 없으면 팔아야 하는데 팔려고 하면 틀림없이 빼앗기게 된다. 이래서 서로 땅을 주지 말라고 경계하는 것이니, 흑립을 쓴 양반들이 어찌 더욱 빈궁해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돈을 대하는 사대부의 자세

선친께서 포천(抱川)에서 처가살이하실 적에 가난하여 관아에서 빌린 환곡(還穀)을 마련할 수가 없었다. 삼우재(三友齋) 임공 황(林公煌)은 선친과 절친한 친구였는데 그의 부친 참판공(參判公) 주국(柱國)이 마침 영해(寧海.경북 영덕)의 부사가 되었다. 그 봉급이 집에 도착하자 삼우공은 그것을 자루에 가득 채워 말안장에 매달고 왔다. 말을 울타리 밑에다 묶어 놓고 하루 종일 선친과 담소를 나누고는, 돌아갈 참에 우리 외조부에게 돈을 맡기면서 말하였다. “아무개가 지금 관아에 갚아야 할 빚이 급하니 공께서 대신 갚아 주십시오.” 그래서 선친은 이 일을 까맣게 알지 못하셨다.

당시에 사대부들은 재물을 함께하고 내 것 네 것을 따지지 않아 직접 돈을 주고받는 것을 수치로 여겼다. 임공은 선친과의 사이가 형제보다도 더 친하였는데도 돈에 있어서는 이와 같았다. 그런데 지금은 친구들끼리 선물할 때에 돈이 없으면 야박하다고 여긴다. 또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감히 돈을 손에 대지 못했으니, 어른들이 금하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귀천을 막론하고 아이들에게 돈을 채워 주기를 마치 주옥이나 장난감같이 하니, 풍속이 천박하게 변함이 마침내 이 지경까지 이르렀다.

 

백지 한 장 차이

장점이 도리어 단점이 되고 복이 도리어 화가 되고 득이 도리어 실이 되는 경우가 있다. 자기가 잘하는 것에 얽매이면 장점이 도리어 단점이 아니겠는가. 지나친 복은 재앙을 낳으니 이것이 화가 아니겠는가. 부차(夫差)가 나라를 잃고 진(秦)나라가 천하를 잃은 것은 모두 갑자기 쉽게 얻었기 때문이니, 득이 실이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단점이 도리어 장점이 되고 화가 도리어 복이 되고 실이 도리어 득이 되는 경우도 있다. 어진 이를 스승으로 삼고 유능한 사람에게 양보하는 것보다 훌륭한 장점이 어디 있겠는가. 화가 이를 때에 두려워하면 복이 반드시 돌아오며, 실패를 계기로 성공하는 자도 많으니 잃음으로부터 얻은 것이 아니겠는가.

 

매는 먼저 맞는 것이 좋다

사람이 어려서 빈천을 겪는 것은 복이다. 만물은 어느 것이든 항상 좋을수가 없고 이치는 어떤 경우에도 항상 왕성할 수는 없다. 만약 먼저 부귀를 누리다가 나중에 빈천을 겪게 된다면 어찌 견디겠는가. 하물며 빈천은 사람을 옥(玉)처럼 다듬어 완성시키는 것임에랴.

 

무엇이 중하고 무엇이 하찮은지

눈독 들이는 미인에게는 천금을 주는 것도 어려워하지 않지만 가난한 친구에게는 백금을 주는 일도 드물다. 준마(駿馬)를 사는 데는 반드시 수백 금을 들이지만 마부를 사는 데는 수십 금을 넘지 않는다. 친구가 미색보다 못하고 사람이 가축보다 못하단 말인가.

 

지극하면 넘친다

법률을 관장하는 가문치고 삼대 안에 망하지 않는 경우가 드물고 번창하다고 일컬어지는 가문치고 삼대 안에 전복되지 않는 경우가 드무니, 어째서인가? 법률이 지나치면 각박해지고 번창함이 지극하면 넘치게 되니, 교만하면 망하는 이치와 같다.

 

타고난 정기의 차이

영재(英才)가 태어날 때는 성수(星宿)의 정기를 타고나고, 귀인(貴人)이 태어날 때는 용호(龍虎)의 정기를 타고나고, 문사(文士)가 태어날 때는 주옥(珠玉)의 정기를 타고나고, 불한당이 태어날 때는 사악한 마귀의 정기를 타고나고, 보통 사람이 태어날 때는 초목의 정기를 타고나고, 오랑캐가 태어날 때는 금수(禽獸)의 정기를 타고 난다.

 

몸을 보전하는 가장 좋은 방법

아침 햇살과 해질녘 노을은 똑같은 햇볕이 변한 것이고, 무더위와 혹한은 똑같은 기운이 변한 것이다. 이것을 얻으면 반드시 저것을 잃게 되고 시작이 번성하면 반드시 끝에는 쇠퇴하게 마련이니,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지인(至人)은 세상에 살면서 높은 지위를 사양하고 낮은 자리에 머물며, 부유함을 사양하고 빈한함에 머문다. 영광이 없으면 초라함도 없고, 공이 없으면 죄도 없고, 복이 없으면 화도 없다. 몸을 보전하고 화해(禍害)를 멀리하는 방법으로 어느 것이 이보다 더 낫겠는가.

 

논할 수 없다

주색을 즐기는 자와는 명리(名利)를 논할 수 없고, 명리를 위해 몸을 바치는 자와는 공업(功業)을 논할 수 없고, 공업을 세우려는 자와는 문장을 논할 수 없고, 문장으로 유명해지려는 자와는 도덕을 논할 수 없다.

 

가난은 무더위와 같은 것

이광현(李光顯)이 말하였다. “가난에서 도피하는 것은 무더위를 피하는 것과 같으니 어딜 간들 덥지 않겠는가. 공연히 왔다 갔다 하느라 더 피곤할 뿐이다.”

 

이원익(李元翼)의 좌우명

오리(梧里 이원익) 이공(李公)의 좌우명에 “뜻과 행동은 나보다 나은 사람과 비교하고 분수와 복은 나보다 못한 사람과 비교하라.”는 말이 있는데, 장괴애(張乖崖)의 “공적은 높여 잡고 관직은 낮춰 잡아라.”라는 말보다 의미심장하다.

 

진짜 되기의 어려움

거짓 군자 되기는 쉽지만 진짜 소인되기는 어렵고, 거짓 도학자 되기는 쉽지만 참다운 사대부 되기는 어렵다.

 

부인들의 기세가 드세진 이유

우리나라는 개가(改嫁)를 금했기 때문에 부인의 기세가 더욱 드세졌다. 그들은 다른 방도가 없으므로 걸핏하면 죽으려 들었다. 남편에게 화가 날 때마다 죽으려 드니, 이는 신하가 임금에게 은총을 잃으면 떠나려 하고 종이 주인에게 벌을 받으면 도망칠 생각을 하는 것과 같다. 떠나고 도망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닌데 더군다나 죽는 문제이겠는가. 하지만 죽는 길밖엔 실로 다른 대책이 없으니 그 마음이 사나워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미 죽을 결심을 했다면 무슨 일인들 하지 못하겠는가. 빈말이라도 두렵다. 집을 잘 다스리는 방법은 부인이 죽을 생각을 하지 않도록 해야 하니 그런 뒤에야 집을 잘 보전할 수 있다.

 

남원 열녀의 죽음

남원에 사는 상번군(上番軍) 황곡수(黃曲壽)의 아내는 결혼한 지 얼마 안 되어 서울에 복무하러 간 남편이 죽었다는 기별을 받았다. 그러나 한 번 통곡하고는 시부모에게 음식을 권하는 등 그 모습이 그다지 슬퍼 보이지 않았다. 성복(成服)하고 나서는 손수 대나무 발을 엮어 끌고서 남자 복장으로 상경하여 남편의 시신을 짊어지고 돌아와 집에 빈소를 차렸다. 그런 뒤 몸을 깨끗이 씻고 밤에 빈소에서 잠을 잤는데 아침 늦도록 나오지 않아 문을 열어 보니 남편 시체를 끌어안은 채 죽어 있었다. 남편의 배가 그녀의 배에 붙어 있었는데 언 배와 따뜻한 배가 맞닿으면 따뜻한 배 쪽으로 반드시 쑥 들어간다. 마침내 둘을 떼어낼 수가 없어서 시체를 함께 묶어 장사 지냈다. 열녀로구나! 예전에 들어 보지 못한 이야기이다.

 

못 배운 소치

귀하다고 교만해지고 젊다고 방자해지며, 늙었다고 나약해지고 가난하다고 초라해지는 자는 모두 배우지 못한 사람이다.

 

생나무 같은 강자가 되라

내가 언젠가 강함을 좋아하는 이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그대는 마른 나무의 강함이 되지 말고 생나무의 강함이 되어라. 생나무의 강함은 휘어 보면 부드럽고 놓아두면 강하지만, 마른 나무의 강함은 부러질 뿐이다. 곤(鯀)의 강직함은 단지 마른 나무의 강함일 뿐이고, 고윤(高允)의 강직함이 바로 생나무의 강함이다.”

 

청춘은 한번 가면 다시 오지 않는다

천지자연의 운행은 가면 돌아오지만 사람의 일은 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러므로 달은 기울면 다시 차오르지만 사람이 늙어서 다시 젊어질 수 있겠는가. 그렇지만 차면 반드시 기울고 성하면 반드시 쇠하는 것은 같다.

 

덕을 닦고 복을 기다리라

덕을 부지런히 닦으면 하늘이 반드시 복으로써 보답하고, 노고를 아끼지 않으면 상대가 반드시 은혜로써 보답한다. 이렇게 하지 않고서 하늘과 사람의 보답을 구하기만 하는 자는 어리석지 않으면 망령된 자이다.

 

대사(大事)를 도모할 자 누구인가

중국은 상앙(商鞅)이 나와 비로소 법을 통일하였고, 시황제(始皇帝)가 나와 천하를 통일하였다. 일본은 평수길(平秀吉)이 나와 비로소 나라와 법을 통일하였다. 신라는 김유신(金庾信)이 나와 삼한(三韓)을 통일하였지만 법은 통일하지 못하였다. 상앙은 재앙이 자신에게 미쳤고 시황제와 평수길은 모두 후손이 끊겼으니, 누가 국가를 위한 대사(大事)를 하려 하겠는가.

 

뱃속이 차야 오륜도 있다

모든 물건은 속이 다 채워져 있는데 뱃속만은 비어 있어서 먹은 뒤에야 채워진다. 그런데 반드시 하루에 두 번은 먹어야 하니, 아침에 채워 넣은 것은 저녁이면 비고 저녁에 채워 넣은 것은 아침이면 비게 된다. 부드러운 것이나 딱딱한 것이 모두 뱃속으로 들어가니, 독해서 먹지 못하는 것은 약으로 만들어 병을 치료한다. 이것저것 아무거나 먹어서 세상의 재앙이 되니, 그 발단이 되는 것은 배만 한 것이 없다. 그러나 조물주가 세상을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이 실로 여기에 달려 있으니, 이것이 없다면 하늘이 어떻게 사람을 제어할 수 있으며 임금이 어떻게 백성을 부릴 수 있겠는가. 열자(列子)가 말하기를, “사람이 입고 먹지 않으면 군신 간의 도가 종식된다.” 하였으니 어찌 군신 간뿐이겠는가. 오륜의 도도 아울러 종식될 것이다. 어찌 저 금수를 보지 않는가. 떼 지어 살고 짝 지어 지낼 뿐이다.

 

가난은 부끄러움이 아니다

가난을 숨기는 것은 인지상정이지만, 영달한 뒤에도 과거의 가난했던 일을 숨기는 것은 천한 장부나 하는 짓이다. 처음에 가난했다가 나중에 부귀를 누리게 되는 것은 장부의 통쾌한 일인데 가난했던 일을 숨긴단 말인가. 만약 내가 가난했던 일을 숨기면 남이 바로 이 일을 나의 약점으로 삼아 가난했던 일이 더욱 드러나게 될 것이다. 현철한 선비는 가난할 때나 영달할 때나 한결같다. 영웅은 영달하기가 무섭게 호사를 부려 의기양양함을 드러내지만, 화액으로 생을 마치지 않는 자가 거의 없다.

 

먹고사는 세 가지 방법

만물이 먹을 것을 구해 살아가는 것은 다 마찬가지이지만 먹을 것을 구하는 데도 세 가지 부류가 있다. 봉황이나 기린이 먹이를 구하듯 하는 부류가 있으니 성현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은 성군이 길러 주지 않으면 굶어 죽을 뿐이다. 매나 범이 먹이를 구하듯 하는 부류가 있으니 영웅호걸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은 영명한 군주가 제어하지 않으면 틀림없이 역적의 우두머리가 되니, 군주에게는 화복(禍福)이 반반인 셈이다. 소나 말이 먹이를 구하듯 남에게 의탁하여 먹고살면서 일은 그 배를 해 주는 부류가 있으니 일반 백성이 바로 그들이다. 그러므로 성현에게 영웅호걸처럼 먹고살라 하면 반드시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고, 영웅호걸에게 일반 백성처럼 먹고살라 하면 결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뛰어난 인물이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느냐 못 하느냐는 오직 윗사람이 그에게 어떤 조건을 만들어 주느냐에 달려 있다.

 

약자와 강자를 다스리는 법

현명한 군주는 세상을 다스릴 때 가장 약한 자를 살펴서 붙잡아 주고 가장 강한 자를 살펴서 억누르니, 두 가지가 균형을 이루면 정치가 안정되고 나라가 편안해진다. 약한데도 붙잡아 주지 않으면 반드시 도적이 되고, 설령 도적이 되지 않더라도 그들의 억울함과 원통함은 하늘의 재앙을 불러오기에 충분하다. 강한데도 억누르지 않으면 반드시 반란을 일으키고, 설령 반란을 일으키지 않더라도 그들의 교만함과 방자함은 세상의 윤리ㆍ도덕을 망치기에 충분하다.

 

나의 좌우명

“이름은 훗날을 기다리고 이익은 다른 사람에게 미루며, 세상살이는 나그네처럼 벼슬살이는 손님처럼 하자.” 이것은 내가 교서관(校書館) 벽에 써 붙인 글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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