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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고사(古文故事)

왜의 대비에 관한 설[備倭說] - 신흠/상촌집34권

작성자허현|작성시간14.09.05|조회수131 목록 댓글 0

 

왜인이 신라 혁거세(赫居世) 때부터 이미 우리 나라의 근심거리가 되어 왔고 신라 말엽에 점차 기세가 커지다가 고려 말에 이르러 더욱 강해졌다. 고려의 쇠퇴기를 틈타 침략해 오지 않은 해가 없어서 멀리는 해변 고을과 가까이는 경기 지역이 모두 그들의 해독을 입었는데, 우리 태조(太祖)께서 사실상 제거하였고(인월의 황산대첩을 일컫음), 왕업을 열게 되자 왜인의 근심거리가 즉시 없어지고 해마다 조공을 바치는 하나의 외부 부서(府署)가 되었다. 영묘(英廟) 계해년(1443, 세종25)에 제주에 와 침략하다가 변방 장수에게 붙잡히고 나머지 적은 대마도(對馬島)로 도망갔다. 이에 이예(李藝)를 파견하여 대마도주에게 그들을 잡아 보내라고 회유하니, 도주가 감히 숨기지 못하고 13명을 붙잡아 이예에게 넘겨주었는데, 그들의 신상에 대해 들어보니 일찍이 중국 지방을 침범한 자들이었다. 그래서 영묘께서 배신(陪臣) 신인손(辛引孫)을 보내 황제에게 바쳤으며, 중묘(中廟) 경오년(1510, 중종5)에 삼포(三浦)의 왜인이 반란을 일으켜 경상도의 제포(薺浦),웅천(熊川) 등지의 성을 함락하자 방어사 유담년(柳聃年)과 황형(黃衡)을 보내 쳐서 깨뜨렸으며 명묘(明廟) 을묘년(1555, 명종10)에 전라도를 노략하면서 달양(達梁),장흥(長興),영암(靈巖),어란포(於蘭浦),마도(馬島),강진(康津),가리포(加里浦)를 함락하고 병사 원적(元績) 등을 죽이니 서울에 계엄(戒嚴)이 걸렸다. 도순찰사 이준경(李俊慶),방어사 남치근(南致勤),김경석(金景錫) 등을 파견하여 쳐서 평정하였으며, 선묘(宣廟) 정해년(1587, 선조20)에 손죽도(損竹島)를 노략하면서 만호(萬戶) 이대원(李大源)을 죽이고 즉시 물러갔다.

무릇 2백년의 오랜 기간에 겨우 네 차례 들어와 노략하였으나 그때마다 모두 패하여 물러갔거나 제 스스로 물러갔으므로 조정이 항상 이길 수 있다고 여겼고 또 안일과 오락에 젖어 별로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러나 기축년(1589)에 이르러 귤강광(橘康光)이 통신사(通信使)의 왕래를 요구하였고 평의지(平義智),현소(玄蘇),세준(世俊)이 짐승과 말과 포로를 바쳤으니 그들의 간사한 꾀를 알만도 한데 조정에서는 깨닫지 못하였고, 통신사 황윤길(黃允吉)이 돌아왔을 때 그들의 반역심이 이미 십에 팔구 할은 드러났는데도 부사(副使) 김성일(金誠一)은 반드시 침략해 오지 않을 것이라고 하니, 조정이 이 말을 믿고 고식적으로 안일 속에서 세월만 헛되게 보내면서 한 명의 장수도 선발하지 않고 한 명의 병사도 훈련하지 않았는데 적은 이미 바다를 건넜다. 드디어는 삼경(三京)을 잃고 두 능이 도굴당하고 팔도가 폐허가 되고 오묘(五廟)에 신주가 없게 되었으며, 남녀와 재물을 모조리 남쪽으로 싣고 가니 공사간에 뿔뿔이 흩어져 어느 곳이나 텅 비어버렸으니 이런 병화(兵火)의 처참한 양상은 역사가 생긴 뒤로 듣지도 보지도 못한 것으로서 송(宋)의 원가(元嘉. 南朝 宋文帝의 연호) 시대도 이처럼 심하지는 않았다.

선묘(宣廟.선조임금)께서 영명한 자질을 타고났으므로 난리를 당하였지만 미리 정해진 계획이 있어서 도성을 떠나는 날 맨 먼저 신묘년에 죄를 입은 신하들을 부르고, 그 당시 일을 그르친 권신들을 파직하고 물리쳐 한때 사람들의 이목을 새롭게 하여 크고 작은 인재들이 너나 없이 각자의 힘을 쏟게 하였고, 또 명(明)나라에 주문(奏文)을 올려 이 상황을 아뢰니, 천자께서 크게 노하여 막대한 군사와 양식을 조발하여 7년 만에 비로소 물리쳤다. 그러나 삼천 리 온 강토가 소연(騷然)하여 마치 솥 안에 든 물고기나 굴 속의 개미와 같이 되어 잡초만 끝없이 차있고 백골이 들판에 뒤덮혀 다시는 살아갈 희망이 없게 되었다. 적이 물러간 지 거의 십여 년이 되자 비로소 간신히 회복되기 시작했다.

병오년(1606)에 왜인의 추장 원가강(源家康)이 사람을 보내, “수길(秀吉)의 정치 제도를 모두 혁신하고 그를 대신해 관백(關白)이 되었다.”고 알리면서 또 통신사의 교환을 요구하자, 조정에서, “이미 수길의 정치 제도를 모두 혁신하였다니 원가강을 원수로 여길 것은 없다.”고 하여 드디어 사신을 보내기로 허락하였다. 이에 여우길(呂祐吉)을 상사(上使)로, 경섬(慶暹)을 부사로, 정호관(丁好寬)을 보좌로 삼아 회답사(回答使)라는 명칭을 붙여 답례하였는데, 그들이 돌아올 때 잡혀간 우리나라 사람 1,240여 명을 데리고 왔다. 이로부터 왜국의 사신 행렬이 국토 안에 끊이지 않았다. 기유년(1609)에 다시 조약을 정하고 정사년에 다시 그들의 요청에 따라 오윤겸(吳允謙),박재(朴榟) 등을 파견하여 통신하는 등 무릇 12년 사이에 통신사가 두 차례 갔는데, 우호를 다지는 예가 임진년 이전에 비해 훨씬 두터워졌다.

대체로 왜인과 우리나라는 한 하늘 밑에 같이 살 수 없는 자들이다. 그들을 우리 병력으로 물리친 게 아니라 명 나라의 힘으로 물리쳤고 보면 그들을 물리친 것은 요행이지 무력의 힘이 있어서 한 것이 아니다. 그때에 마침 수길이 죽었기에 망정이지 죽지 않았더라면 그들이 물러갔을지 또한 알기 어려운 일이니 수길이 죽은 것은 다행 중 다행이라 하겠다. 그런데 우리 나라는 요행에만 젖어 여전히 군사 정책을 버려둔 채 강구하지 않아 임진년 이전보다 더 게을러졌는데 나는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다.

통제사(統制使)의 직책은 오로지 왜적을 방어하기 위해 설치한 것인데, 이순신(李舜臣)이 죽은 뒤로부터 후임자가 전임자보다 점점 못해 가고 있다. 근년에 와서는 조정에서 뇌물을 바친 사람을 장수로 기용하기 때문에 군무를 보는 날부터 병사들을 못살게 굴어 여러 모로 재물을 긁어모으고 있다. 조정의 귀한 벼슬아치들에게 주는 뇌물, 임금이 총애하는 사람에게 바치는 물품, 아내와 첩이 쓰는 재물, 친구들이 요구할 때 주는 것들이 어느 것 하나 여기에서 나오지 않는 것이 없으며, 귀중한 것으로는 금은옥백(金銀玉帛)과 큰 것으로는 수레,말,쌀,베와 작은 것으로는 옷가지,신발과 하찮은 물고기,육고기,포(脯) 등등 이목구비에 맞고 궁실과 거처에 적합한 것들이 여기에서 나오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다. 그리고 높고 큰 배는 권력이 있고 총애를 받은 사람의 손에 모두 들어가고 있으나 적을 방어할 배는 낡고 썩어도 수리하지 않으며, 수륙의 병사는 절가(折價)의 용도로 죄다 돌아가고 있으나 적을 방어하는 대오(隊伍)가 비고 없어져도 묻지 않고 있다.

아, 임진년의 병화를 겪고 교훈으로 삼지 아니했는가. 임진년의 병화를 교훈으로 삼을 만한데 삼지 않고 있으니, 만약에 다급한 상황이라도 벌어진다면 그나마 임진년처럼 해 보려고 해도 안 될 것이다. 그런데 위아래 모두가 멍하니 각성하지 못하고 있으니 내 또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다. 기강이 무너진 지 오래인지라 의리로 일을 헤아려 하지 않은데다가 법까지 지키지 않고 물건을 사사로이 팔고 사도 금지하지 않고 있다. 그래서 시정(市井)의 장사치들이 중국의 물화(物貨)를 가지고 곧바로 부산의 왜인 시장으로 가 왜인의 물화로 바꾸어 돌아오는 행렬이 잇따라 끊이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왜인이 그 물화에 맛을 붙여 사신으로 온 자는 연연해 돌아가지 않고, 장사를 목적으로 온 자는 가자마자 다시 오곤 하여 끊일 날이 없다. 그런데 이 일을 맡아 관리하는 자는 동래부사(東萊府使)이다. 그런데 들은 바로는, 과거 조정에서 부사를 가려 뽑을 때 반드시 청렴하다는 이름이 난 사람을 얻어서 보냈기 때문에 시장의 물가를 자기들 마음대로 정하지 못하고 왜상도 감히 머물러 있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지금은 그렇지 않아 장사꾼을 위하지 않는 부사가 드물기 때문에 조정이 하고 있는 일들을 왜인들이 속속들이 잘 알고 있다. 불화의 불씨가 없기에 망정이지 불화의 불씨가 머지않아 생길까 두렵기만 하다.

그러므로 이를 개혁하지 않으면 우리나라가 필시 왜인의 화를 다시 입게 될 것이다. 개혁의 방안은 다른 데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오직 뇌물을 바치는 장수를 기용하지 않으면 되고, 권력이 있는 자에게 맡기지 않으면 되고, 총애를 받는 사람에게 위임하지 않으면 된다. 총애를 받는 사람이 저지른 폐단이 없어지면 권력이 있는 자의 농간이 저절로 끊어지고, 권력이 있는 자가 저지른 폐단이 개혁되면 뇌물을 바친 사람을 장수로 기용하는 것도 자연히 단절될 것이니, 이는 서로 연관성이 있는 것이다. 총애를 받는 사람의 작폐가 없어지지 않으면 권력이 있는 자가 저지른 폐단이 개혁되지 않아 뇌물을 바치는 자가 장수로 쓰여질 것이니 이러고서도 외침의 걱정거리를 면하려 한다면,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면 미친 사람이다. 그러므로 옛날 정치에 대해 말한 자들은 외침을 물리치는 방안에 대해 거론할 때는 반드시 국내의 정치를 잘 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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