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사람들은 마음을 거울에 비유하고 물에 비유하였는데, 거울에서는 그 밝음을 취하고 물에서는 그 고요함을 취한 것이니, 밝음은 거울의 본체이고 고요함은 물의 본체이다. 그러나 외물이 가리우면 거울이 그 밝음을 잃고 바람이 동요시키면 물이 그 고요함을 잃는데, 가리운 것이 제거되면 밝음이 저절로 돌아오고 동요시키는 것이 그치게 되면 고요함이 저절로 돌아오니, 거울이 되고 물이 되는 것은 오직 가리운 것과 동요시키는 것이 없어지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본체 이외에 그 어떤 조그마한 것도 가해지지 않으면 자연히 고요해지고 저절로 밝아지는 것인데, 밝음이 오래 지속되면 신령스럽게 되고 고요함이 오래 유지되면 입정(入定)의 상태가 되어 만물이 모두 자신의 진상을 드러내며 비추어지게 마련인 것이다. 그런데 어리석은 자들은 방심한 채 이를 구할 줄을 모르고, 지혜가 있다고 하는 자들은 교만한 나머지 천착하는 결과를 빚고 만다.
천명지성(天命之性. 태어날때 하늘로부터 품부받은 성품)은 선하지 않은 것이 없지만 기질지성(氣質之性)에는 선한 것이 있고 선하지 않은 것이 있다. 맹씨(孟氏.맹자)가 성선설(性善說)을 주장한 것은 천명지성에 입각한 것이요, 순씨(荀氏.순자)가 성악설(性惡說)을 말하고 양씨(楊氏.양웅)가 성선불선혼재설(性善不善混在說)을 말한 것은 기질지성에 입각한 것으로서 천명지성이 있다는 것을 모른 것일 뿐더러 천명과 기질이 얼마나 다른 것인지를 알지 못한 것이다. 천명지성은 혼후하여 보기 어려운 반면 기질지성은 드러나 쓰기가 쉬운데, 물욕(物欲)에 가리워지는 것은 모두가 기질상의 폐단에 근원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에게 기(氣)가 품부될 때에 박잡(駁雜)한 것이 많고 순일(純一)한 것은 적다. 이것이 바로 성이 본래 악하고 본래 혼재된 것이 아닐까 하고 의심하는 계기가 되는 것이라 하겠다. 본래부터 맑은 물이 맑고 깨끗한 소(沼)나 계류(溪流)에 흘러 들어가면 맑은 물과 맑은 물이 하나로 합쳐지면서 원래의 맑음을 온전히 유지하게 되는 반면, 흐린 강물이나 더러운 웅덩이 속으로 흘러 들어가면 맑은 물이 흐린 물에 오염되면서 원래의 맑음을 온전히 유지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니, 이것이 천명과 기질이 나뉘어지는 이유라 하겠다. 그런데 심(心)이 성(性)과 정(情)을 총괄하는 만큼 마음이 맑아지면 기도 맑아지고 마음이 더러워지면 기도 더러워지게 되니, 성을 회복하는 근본은 마음에 있다 할 것이다. 그러나 오직 대현(大賢)만이 제대로 성을 회복할 수 있을 뿐 그 아랫사람들은 그저 들락날락할 따름이다.
명(命)의 설에 두 가지가 있으니 인(仁),의(義),예(禮),지(智)를 하늘로부터 받은 것을 천명(天命)이라 하고 궁달(窮達),수요(壽夭) 등 사람에게 관계되는 것 역시 천명이라고 한다. 하나는 바로 성(性)이니 성은 곧 이(理)이고, 하나는 바로 기(氣)이니 기는 곧 수(數)이다. 이는 조짐이 없는 것으로서 하늘에 속하고 기는 조짐이 있는 것으로서 형(形)에 속하는데, 형이 있게 되면 바로 물(物)이 되고 물이 되면 성괴(成壞)가 있게 되며 성괴가 이루어지면서 바로 미악(美惡),장단(長短),길흉(吉凶)이 있게 된다. 그런데 이렇게 되도록 하는 것이 이(理)이니, 이 양자는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관련을 맺고 있다. 그러므로 성인은 그 성(性)의 당연함을 따르고 그 수(數)의 자연적인 것에 맡겨두는 데 반해, 후대 사람들은 그 당연함을 거역하여 따르지 않고 그 자연적인 수의 이치에 어두워 어떻게든 인위적으로 꾀해 보려 하니, 미혹되었다 하겠다.
정(情)에는 일곱 가지가 있는데 이는 성(性)에서 나오는 것으로서 사람에게 없을수 없는 것이다. 다만 절도에 맞게 되느냐 맞게 되지 않느냐에 따라 성인과 범인의 구별이 있게 되는 것이다. 성인의 정은 이(理)와 일치되는 까닭에 정이 발현되는 대로 성 그 자체가 되고, 범인의 정은 기(氣)에서 발현되는 것이 많기 때문에 성과 어긋나는 것이 많고, 소인의 정은 순전히 욕망에서 나오기 때문에 성과 정반대가 되어 악에 빠지고 마는 것이다. 군자는 정을 발현하는 것을 신중히 해야 하니, 만약 정이 발현되는 동시에 하늘에서 받은 명을 온전히 할 수 있다면 그런대로 괜찮다 하겠다.
뜻이란 온갖 일에 앞서는 것인데 뜻에는 흉한 것이 있고 길한 것이 있다. 선하고 악하게 되며 삿되고 바르게 되는 것이 모두 뜻에 말미암는 것이며, 멀리 가고 가까이 머물며 크게 되고 작게 되는 것이 모두 뜻에 기인하는 것이니, 뜻이 어디로 향하느냐에 따라 귀추가 결정되게 마련이다. 따라서 뜻이 바르지 않으면 결국 길인(吉人)이 될 희망은 없게 되는 것이다. 학문을 하는 사람도 역시 뜻을 중하게 여기니, 뜻이 세워지면 마음이 정해지고 마음이 정해지면 공이 이루어지게 된다. 일찍이 사람들을 관찰해 보건대, 어려서 몸을 제대로 단속하고 커서 의로운 일을 행하며 부지런히 앞으로 매진하는 자치고 성취하지 않는 자가 없었으며, 어려서는 지리멸렬하고 커서는 게을러빠진 채 으쓱거리기나 하며 퇴보하는 자치고 죄의 구렁텅이에 떨어지지 않는 자가 없었다. 그러나 뜻이 아무리 바르다 하더라도 꾸준히 해 나가며 쉬지 말아야 하고 한결같은 자세로 두 마음을 품어서는 안 된다. 쉬는 일이 있으면 간격이 생기고 두 마음을 품으면 뒤섞이게 되며, 간격이 생기면 나태함이 끼여들 여지가 있게 되고 뒤섞이게 되면 삿된 생각이 틈을 타고 들어올 여지가 있게 되는데, 나태함과 삿된 생각이 바로 뜻을 파먹는 좀벌레라 할 것이다.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너는 군자유(君子儒)가 되고 소인유(小人儒)가 되지 말아라.” 하였는데, 군자와 소인의 나뉨은 성(誠)과 위(僞), 실(實)과 명(名)의 차이에 불과할 뿐이다. 성(誠)이란 천리(天理)에서 발현되어 자연스럽기 그지없는 것이요 속 마음에서 우러나와 아무 꾸밈이 없는 것이다. 말은 무슨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닌데도 행동을 돌아보아야 하고 행동은 어떻게 하려는 의식이 없는데도 이목구비가 모두 바르게 되어야 한다. 성의가 넘쳐 돈후하게 되면서 거추장스러운 형식은 없어져 버리고 아름다운 위의(威儀)에 심원한 분위기를 자아내면서 웃는 모습마저 정숙하게 되는 것이다. 남이 안 보는 곳에서나 사람이 많이 모인 곳에서나 행동이 여일하고 깜깜한 밤중이나 환한 대낮이나 자세가 변함없다. 부시(婦寺)처럼 자질구레한 이야기는 전혀 입 밖에 나오질 않고 무얼 경영하며 재물을 쌓을 계책은 마음 속에 아예 움트지도 않는다. 다 해어진 솜옷을 입고도 스스로 관면(冠冕)에 옥을 찬 것처럼 여기고 나물 밥에 물을 마셔도 스스로 진수성찬 못지않게 여긴다. 그 자세가 이러하고 그 행동이 이와 같아 위로 부형(父兄)을 섬기고 임금을 섬기는 것으로부터 아래로 부부와 붕우 관계에 이르기까지 성(誠)과 실(實)로 일관하면, 외면은 어수룩하게 보여도 내면의 경지는 날로 깊어져 가는 군자의 도를 이루지 못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반면 위(僞)라고 하는 것은 그렇지가 않다. 겉모습을 치장하는 것은 가능한한 귀염을 받으려고 함이요, 말을 그럴 듯하게 하는 것은 어떻게든 사람을 동요시키려 함이다. 고금의 서적을 섭렵하여 박식하다는 명성을 얻으려 하고, 매끄럽게 처신하며 추종하여 출세의 발판을 마련하려 한다. 밖으로는 세상 물정에 어두워 세속과 맞지 않는듯 행동하고, 겉으로 담박한 체하면서 사림(士林)에 붙으려 한다. 스스로를 속이면서 겉모양을 달리 보이는 짓거리를 하고, 사람을 속여 가면서 삿된 목적을 이루는 것을 다행으로 여긴다. 그런가 하면 자신이 정직하다고 자랑하면서 대중을 미혹시키고 은근히 아첨을 떨면서 세상의 찬사를 받으려 한다. 그런데 이런 자들을 보면 모두 그 행태가 일정하지 않다. 그래서 육당(陸棠) 같은 적(賊)을 정문(程門)에서 지경인(持敬人)으로 지목하기도 했고, 진회(秦檜) 같은 간인(姦人)에 대해서도 강후(康侯)가 미혹되지 않을 수 없었다. 뒷날 사람을 볼 때 명(名)과 실(實)을 분명히 살펴볼 줄 알면 거의 가하다 할 것이다.
어려서는 좋은 의복을 입으려 하고 아름다운 음식만 찾다가 커서는 거마(車馬)나 치장하려 하고 재물을 많이 쌓아두려 하는 자는 모두 선비가 아니다. 이런 것들 가운데 하나라도 있으면 날마다 경전을 외우고 성명(性命)에 대해 이야기하더라도 가짜일 뿐이다.
인생에는 정해진 분수가 있다. 주공(周公)이 부귀하게 된 것이나 안자(顔子)가 빈천한 생활을 한 것은 모두가 그들의 운명이다.
재주와 그릇이 함께 갖추어져야만 그 재주가 그릇에 담겨져서 덕을 성취할 수가 있다. 만약 재주만 있을 뿐이라면 덕을 제대로 성취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 재주 때문에 악을 더욱 증가시키게 되는 점이 있을 것이다.
자제가 된 자로서는 근후함을 급선무로 삼아야지 경박하게 뻐기는 짓을 해서는 안 된다. 근후하게 행동하면서 악행을 범하는 자가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는데, 경박하게 뻐기는 자치고 불선(不善)에 빠져들지 않는 자는 드물었다.
여기에 어떤 이가 있다고 하자. 그와 도덕에 관해서 이야기할 경우 그대로 따르면서 어김이 없고, 그와 문장에 대해서 이야기할 경우 즐거워하면서 이해할 줄 안다고 한다면 선비가 되기에 충분하다고 하겠다. 나는 말한다. 행적을 보기보다는 그 마음을 보아야 하고, 그의 말을 듣기보다는 그의 행동을 살펴야 한다고.
욕심은 도리와 상반되고 이익은 의리와 상반된다. 속에 욕심이 꽉 차 있으면서 도리에 대해 말하면 끝내 대간(大奸)이 되기 마련이고, 이익에 눈을 뜨고서 의리에 대해 말하면 대탐(大貪)이 되기 마련이다. 쓸데없는 생각을 하게 되면 도(道)에 큰 방해가 된다.
의심하다 보면 아끼는 마음이 생기고, 아끼다 보면 사(私)가 일어나는데, 이 사가 있게 되면 그 즉시로 주체(主體)와 객체(客體)가 분리되어 허심탄회하게 받아들일 수가 없게 된다.
증자(曾子)가 일관(一貫)에 대해서 말하기를 "부자(夫子)의 도(道)는 충(忠)과 서(恕)일 뿐이다."라고 하였는데, 그야말로 가까운 곳에서 제대로 비유를 취한 것이라고 하겠다. 언제 한번이라도 고원(高遠)한 말을 한 적이 있었던가. 그런데 가령 후대의 유자(儒者)들로 하여금 일관에 대해서 논하게 한다면 필시 하늘을 이야기하고 성(性)을 이야기하면서 이것저것 모두 끌어다대며 스스로 고상한 체하려 할 것이다. 공문(孔門)에서 사람을 가르칠 때에는 가능한 한 핍근(逼近)하게 하고 아래로 내려와 마치 배고픈 사람이 음식을 찾게 마련이고 추위에 떠는 사람이 옷을 찾게 마련인 것처럼 사람의 일상생활에 절실한 내용으로 깨우쳐 주어 반드시 그 효과를 보게끔 하였는데, 말세에 들어와 하는 말들을 보면 갈수록 높고 크게만 하여 사람의 일과는 아무 상관이 없게끔 되었다. 그러나 주옥(珠玉) 같은 진귀한 보물도 배고픔을 달래기에는 모자라고 비단처럼 화려한 옷감도 추위를 막기에는 부족한 법이다. 그래서 도를 이야기하는 자는 많아도 도를 터득하는 자는 적은 것이다.
삼대(三代.즉 夏殷周)의 융성한 시기에는 선비된 자들이 먼저 소학(小學)의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대학(大學)의 강령(綱領)과 절목(節目)에 대해서 곧바로 힘들이지 않고도 알게 되고 수고하지 않아도 성취했었는데, 후세의 선비들을 보면 소학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앞질러 대학에 나아가니 어떻게 스스로 성취를 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아조(我朝)의 한훤 선생(寒暄先生.金宏弼)은 반생 동안 소학을 읽었으니, 참으로 자기 자신에게 성실했다 하겠다.
대학 책 속에서는 3강령과 8조목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는데, 정자(程子)와 주자(朱子)가 지경(持敬)에 관한 설을 주장하여 대학에 나아가 닦는 발판으로 삼았으니, 이는 실로 성문(聖門)의 오묘한 기틀이라 할 것이나, 거기에는 의절(儀節)과 도수(度數)가 없는 까닭에 외면만 힘쓰는 자들이 혹 언어의 유희만 일삼기도 한다. 그러나 곡례(曲禮. 예기의 편명)의 절문(節文)의 경우는 바로 하학(下學)의 공정(工程)으로서 허위로 꾸며댈 수 없는 것이니, 반드시 먼저 여기에 종사하게 하여 육신으로 하여금 늘 이에 좇게 하고 행실로 하여금 이를 기준으로 바로잡히게 하고 사려로 하여금 안정되는 바가 있게 한 뒤에야 막힘이 없게 될 것이다.
지금 도를 이야기하는 자들은 마치 저승의 일을 설명하는 것처럼 직접 발을 디뎌 보지도 못했으면서 곧장 언어로 형용하곤 한다.
깨진 솥 하나에 소리를 지르고 한 그릇 국에도 얼굴빛이 달라지는 법이니 조그마한 일을 봐도 앞의 결과를 알 수 있는 것이다.
남의 과실을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시기하여 해치려는 마음이 있게 마련인데 그런 마음의 소유자는 군자가 아니다. 군자는 타인의 선한 점을 아름답게 여기고 못하는 점을 긍휼히 여기는 것이다.
지금 사람들이 눈을 감고 단정히 앉아 스스로 천리(天理)를 체인(體認)한다고들 하는데, 단정히 앉아 있는 가운데 삿된 생각이나 망념이 없는 자가 몇 사람이나 될 것인가. 만약 그런 생각이 개재해 있다면 차라리 잠깐 기분을 푸는 것이 나을 것이다.
마음이 본래의 궤도를 이탈하지 않게끔 된 사람은 도를 들을 수 있다.
사대부의 집안에는 반드시 가법(家法)이 있어야 한다. 만약 가법이 없으면 아무리 계손씨(季孫氏)나 맹손씨(孟孫氏)처럼 귀하게 되고 도주(陶朱)나 의돈(猗頓)처럼 부유하게 되었다 하더라도 그 자손들은 끝내 욕망과 방종으로 법도와 예절이 없어져 세업(世業)을 기울게 하고 말 것이다.
붕우는 도(道)를 가지고 서로 구하고 의(義)를 가지고 서로 합하는 것으로서 취할 바는 오직 도와 의에 있는 것인 만큼 만약 도와 의가 없을 경우에는 같이 붕우가 되기에 부족하니, 따라서 붕우에게 불선(不善)한 점이 있으면 관계를 끊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친척의 경우는 그 관계가 천륜(天倫)에서 나온 것인 만큼 선해도 나의 친척이요 악해도 나의 친척이니 오직 천륜의 관계로만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친척에게 불선한 점이 있을 경우, 이모저모로 주선하며 그의 나쁜 점을 숨겨주고, 보호해 도와주며 그의 급한 사정을 구해주는 등 이런 정도로 그쳐야지, 만약 그의 하자를 들춰내고 그의 과오를 늘어놓아 다른 사람까지 알도록 한다면 이는 천륜을 보존하는 일이 되지 못할 것이니, 집안의 자제들은 이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고부(姑婦) 간에 서로 헐뜯고 축리(妯娌) 간에 서로 사이가 좋지 않고 제사(娣姒) 간에 서로 비방하는 일이 부귀를 누리는 대가(大家) 세족(世族)에게서 다반사로 나오는 반면 빈천한 집에서는 거꾸로 이런 걱정이 없으니, 이는 어찌된 일일까. 대체로 귀하고 풍성한 집안에서는 교만하고 방자한 습관이 몸에 배어 자기만 높일 줄 알았지 남은 높일 줄 모르며 자기만 귀한 줄 알았지 남은 귀한 줄을 모른다. 사람을 대할 때에도 반드시 먼저 그 사람의 과오를 찾아내어 꾸짖기 일쑤이고, 그 사람에게 장점이 있어도 그것은 말하지 않은 채 다만 그의 단점을 찾아내어 용납받지 못하게 하며, 또 비복(婢僕)들 간의 말을 많이 들어 그것으로 증거를 삼곤 한다. 그리하여 끝내는 은혜와 의리 모두 온전치 못하게 되는 결과에 이르게끔 하고마니, 이 점을 깊이 경계해야 할 것이다. 대저 집안의 자녀가 많으면 그 배우자들 모두가 딴 사람인 관계로 화목하게 지내기가 어려운 법인데, 오직 가장(家長)과 주부의 입장에서는 충신(忠信)으로 대하고 돈후한 자세를 견지하면서 허물은 덮어주고 잘한 일은 드러내주며 가능한 한 망신을 주지 말고 가로막힌 것을 없애줌으로써 뭇 자제들로 하여금 각각 안정을 찾게 해주어야 할 것이니, 이것이 더욱 집안에서 먼저 해야 할 일이라고 하겠다.
세상에서 비평하며 비난하는 것들을 보면 대부분 부유한 자가 가난한 자를 헐뜯고 귀한 자가 천한 자를 헐뜯는 것들인데, 이 부귀란 몸 밖의 물건으로서 하루아침에 엎어지고 나면 곧바로 재앙으로 변한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하는 짓들이다.
가난함을 부끄러워하는 자는 같이 학문을 말하기에 부족하고, 귀하게 되려고 하는 자는 함께 절조를 세우기에 부족하다. 말 재주로 사람을 막거나 언변으로 사람을 꾀는 자는 모두 군자가 아니다. 군자는 차라리 남에게 속임을 당할지언정 차마 사람을 속이지는 못하고, 차라리 남에게 저버림을 받을지언정 차마 사람을 저버리지는 못한다.
농담을 하면 달갑게 여기지 않는 사람도 있는데, 심지어는 자기 어버이의 성명을 입에 올려 농담하는데도 태연히 받아들이는 자도 있었으므로 내가 늘 괴이하게 여기곤 하였다. 서적(徐積)은 아비의 이름이 석(石)이라고 하여 평생토록 돌을 밟지도 않았는데, 더구나 어버이를 거론하며 농담하는데도 태연히 받아들인단 말인가.
관저(關雎.시경의 편명)는 정의(情意)가 지극히 도타우면서도 구별함이 있기 때문에 성인이 칭찬하였다. 집안에서 부부관계가 원만치 못한 자들이 서로 다투어 남 모르는 과오를 끄집어내어 다른 사람들의 귀에 들어가게 하는데, 이렇게 하는 자는 군자가 아니다.
책을 읽고 글 짓는 것을 옛적의 군자들은 선을 하기 위한 수단으로 삼았는데, 지금 사람들은 이로 겉모양을 꾸미려 한다.
남의 허물을 보기 좋아하는 사람은 스스로를 단속하는 데에는 부족하기 마련이다.
자신을 돌아볼 줄 아는 자는 남의 허물을 말하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집안을 일으킨 경우를 보면 반드시 검소함과 공근(恭謹)함에 말미암았고, 집안을 망친 경우를 보면 대부분 교만하고 사치하고 방일했기 때문이었다. 이는 부절(符節)이 계합되듯 꼭 들어맞는 이치로서 어느 집이고 다 그렇다.
자제의 현부(賢否)를 보면 그 집안의 성쇠(盛衰)를 충분히 점칠 수 있다.
“천명(天命)을 두려워하고 대인(大人)을 두려워하고 성인의 말씀을 두려워한다.”고 한 공자의 말이야말로 후생들이 무엇보다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 연소배들을 보면 신기한 것만 좋아하고 비근(卑近)한 것은 싫어하며 일상적인 법도를 싫어하는데, 어른이 훈계를 해 주어도 뭔가 트집거리를 만들어내어 비평하는 일조차 없지가 않다. 우리 집 자제들에게는 이런 행태가 있게 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주역(周易)에서 “악인을 만나 본다[見惡人].”고 한 것은 대현(大賢) 이상에게나 해당되는 일이니, 아무것도 내세울 것이 없는 자가 이런 일을 할 경우 빠져들지 않는 일이 드물게 될 것이다. 소인을 대할 때에는 처음부터 삼가 가까이하거나 친하게 지내서는 안 되니, 일단 친하게 되고나면 일마다 처신하기 어렵게 될 것이다. 있어도 없는 듯 꽉 찼어도 비어 있는 듯이 하는 것, 이 점을 학자들은 늘 명심하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재주가 있어도 없는 듯이 하여 그에게 재주가 있다는 것을 사람들이 눈치채지도 못하게 하다가 일을 당해서 발휘하는 자는 바로 진정 재주를 가진 사람으로서 덕이 승한 자라 할 것이다.
교우관계를 맺을 때는 반드시 평탄하고 신실한 입장을 취해야 끝까지 그 관계를 유지할 수가 있는 것이지 한 쪽으로 기울어지고 꽁한 감정을 갖게 되면 갈등을 빚지 않을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나는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외가(外家)에서 길러졌는데, 그저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 길에 나아가 수령 방백이나 되어서 가문의 명예를 떨어뜨리지 않으려고 했을 뿐이지 고관 대작이 되는 것은 본래 처음부터 기대하지도 않았었다. 그런데 중년에 이르러 생각지도 않은 은명(恩命)이 갑자기 가해져서 외람되게 재상의 반열에 끼이게 되었으니, 분수를 헤아려 볼 때 이는 정말 넘치는 일로서 쫓겨나고 유배되고 한 일 가운데 어느 것 하나도 복이 지나친 데 따른 재앙 아닌 것이 없다 하겠다. 그러나 집안에 담석(䃫石)이 없으니 교만하고 사치한 잘못은 면할 수 있을 것이고, 정해진 분수를 굳게 지켰으니 요행(徼倖)에 따른 비난은 면할 수가 있을 것이다. 자손이 된 자들은 부디 이 점을 명심하고 가훈(家訓)에 어긋나지 않도록 할 것이며 오직 근검(謹儉)하고 충신하는 자세를 견지해야 할 것이다.
횡거(橫渠.장재)가 예(禮)로 사람을 가르친 것을 주자가 아름답게 여겼는데, 대체로 약(約.잘난 체하여 자기 멋대로 하지 않는것)으로써 잃는 자는 적기 때문이다.
집안에서 제례(祭禮)를 지낼 때는 꼭 정해진 규칙이 있어야 한다. 후세 자손들로 하여금 부유해도 이를 뛰어넘지 말게 하고 가난해도 엇비슷하게 할 수 있게 해야 할 것이다.
상(喪)에는 슬픔이 주(主)가 되는 것이긴 하나 멸성(滅性.죽음)에 까지 이르게 하는 것은 너무도 불효스러운 짓이다. (끝)